레드 아이즈 8
신도 준 지음 / 학산문화사(만화) / 2004년 9월
평점 :
절판


로버트 하인라인의 [스타쉽 트루퍼스]에서 제시된 강화복 개념은 현대전에 중세의 기사를 부활시킬 수 있으면서도 거대로봇보다는 현실적이라는 점에서 캐릭터성을 중시한 현대-미래 전쟁물을 그려내고자하는 크리에이터들에게 상당히 매력적인 소재이다. 그런데도 이 강화복 개념이 전면적으로 도입된 작품은 찾기 어려운데, 현실성을 가져야 하면서도 기준삼을만한 틀이 없다는 것이 원인 아닐까 한다. 그 기준이 될만한 작품이 바로 이 [레드 아이즈]다. 강화복 헤드기어의 붉은 센서를 의미하는 [레드 아이즈]는 SAA(특수돌격보병)이라 불리는 강화복의 장구한 역사와 보병-기갑의 중간에 위치하는 전술적 유연성을 나름대로 잘 묘사한 수작으로서 '현대의 전장을 누비는 기사'라는 느낌을 잘 살려내고 있다. 각종 SAA의 특징적이면서도 합리적인 외형과 현대에 실존하는 각종 무기체계의 조합이 상당히 매력적이면서도 설득력이 있다. 물론 작중에 등장할 정도의 성능이 발휘되려면 소재, 전자, 구동, 동력, 전력 계통에 있어 혁명적인 변화가 필요하며, 그 혁명을 이루어낸다면 그걸로 SAA를 만들기보다는 기갑과 항공, 보병화기 등 기존 병기체계를 발전시키는 편이 효율적이라는 점이 약간 슬퍼지기는 하지만, 뭐 멋있으니까 상관없다(공학도란 놈이…). 등에 10억원짜리 재블린 4발을 짊어지고 왼팔에는 20mm 중기관포, 오른팔에는 대전차 레일건을 장비한 보병, '남자의 로망'이라는 한 마디로 요약될 눈물날만큼 아름다운 모습이다. 대강 정리하자면 혼자서 탱크 한 무더기랑 보병 두 무더기 정도를 쓸어버릴 수 있다는 뜻이다(광분중).
문제는 이런 장황하면서도 철저한 설정에 비해, 구성이나 내용에는 좋은 점수를 줄 수가 없다는 점이다. 작중 주요 등장인물인 쟈칼 부대원들은 일단 숫자만 정해놓고 연재분에 필요할 때마다 시간에 쫓기며 대강 만들고 있다는 느낌이 강하고, 지나치게 '뭔가 있는' 분위기를 추구하던 크레이즈와 비밀조직 디반은 이미 오컬트 종교집단처럼 되어 버렸다. 이 친구들 때문에 만화 전체가 SF와 판타지를 왔다갔다하니 말 다 했지. 후반으로 갈수록 이야기가 늘어지는 것도 심각한 문제로 1권과 2권 정도까지는 작품의 밀도가 상당히 높았지만 4권 들어서부터 '한 사건의 길이가 길어지기 시작'한 끝에 이제는 옛날 이야기로 돌아갔다. 오랜 시간동안 취미에 가깝게 생각해온 밑천이 다 떨어진 상황에서 흔히 나타나는 현상인데, 말하자면 작가도 손을 못 쓰고 있다는 증거랄까. 아무리 생각해도 디반 놈들이 문제다. 처음에 뭔가 있어보이려고 '위대한 혼돈'이니 뭐니 운을 띄워 놨다가 통제불능이 되어버린 것으로 분석된다. 여기에 더해 발간속도는 1년에 1권 나오면 기적이라는, [헬싱]을 능가하는 무지막지한 속력을 자랑한다(…).
그러나 이런 단점들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팬들이 다음 권을 기다리는 것은 저 탄탄한 설정과 기반이 믿음직스럽기 때문에. 나 역시 다음 권을 기다리는 팬의 한 사람이다.
다음 권에서는 나를 실망시키지 않기를. 실망시키지 않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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