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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의 기원
정유정 지음 / 은행나무 / 2016년 5월
평점 :

정유정 작가의 책이 그러하리라는 건 어느정도 예측하고 펼쳤음에도 내내 써늘하게 조여오는 핏빛 긴장감, 지워졌던 유진의 기억과 함께 조금씩 드러나는 살인의 실체가 책에서 눈을 뗄 수가 없게 만들었다.
안개 자욱한 길을 손을 휘휘 내저으며 앞을 더듬거리고 걷는 것처럼 핏자국과 피비린내 가득한 자신의 방에서 깨어난 유진, 섬광처럼 스쳐지나가듯 떠오르는 어머니의 "유진아~"자신을 부르던 소리, 혼돈 그 자체에서 발견한 어머니의 주검, 마치 퍼즐을 맞추어나가듯 자신의 지워진 기억을 어머니가 남긴 메모와 함께 복원해나가는 유진의 생각이 독자인 내게 여과없이 바로 투영된다. 그 날것의 심리를 고스란히 들여다보는 과정이 탐정추리소설을 읽듯 편안하지 않음은 두말 할 필요가 없을 듯. 마음의 불편함을 동반하면서도 끝내 유진의 기억이 잘못되었음을 우리가 흔히 연상하듯 엄마의 학대나 어쩔 수 없는 외부적 요인으로 인해 일말의 동정심을 가질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 내내 있었다. 하지만 작가는 매몰차게 악의 본능 그 중에서도 최고의 수위를 있는 그대로 표출해낸다.

p.202 '불길 같은 흥분이 신경절을 타고 온몸으로 내달렸다. 숨이 차올랐다. 할 수 있는 일을 하지 않는 것이 도저히 불가능해서 현기증이 났다. 내가 칼을 쥔 게 아니라 칼이 내 손을 거머쥐고 여자 안으로 끌어당기는 느낌이었다. 저항이 용납되지 않는 무지막지한 장력이었다.'
유진은 약을 끊으면 광기같은 발작이 찾아오는 걸 알면서도 그 위험한 광기의 순간, 살인을 저지르고 심지어 그 과정을 복기하면서 짜릿함을 느끼는 포식자의 잔인함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그때, 죽었어야 했어, 너도 죽고, 나도 죽고." 핏줄의 저주를 원망하면서도 끝내 유진을 버릴 수 없었던 어머니의 절망도, 그런 어머니의 절망조차 차갑고 냉정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유진을 보며 어떻게 공포심을 느끼지 않을 수 있을까? 유진에게서 우리가 그동안 봐왔던 연쇄살인범의 차가운 잔혹함이 연상되기도 했다. 인간은 악하게 태어난 것도, 선하게 태어난 것도 아니며 단지 생존을 위한 가장 효율적인 방법으로 진화해 왔다면 이들의 잔인한 악의 본능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p.67 "행복한 이야기는 대부분 진실이 아니에요."
"희망을 가진다고 절망이 줄어드는 것도 아니고요. 세상은 사칙연산처럼
분명하진 않아요. 인간은 연산보다 더 복잡하니까요."
가장 근원적인 공포는 실체가 없는 대상에 대한 두려움일 것이다. 정유정 작가는 우리 내면에 잠재되어 있을 지도 모르는 악의 본성을 있는 힘껏 끌어올려 우리에게 이야기해주는 것 같다.
묻지마 살인이라는 공포스런 죽임이 매일같이 뉴스에 나오는 요즘, 소설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는 현실이기에 더 절박한 공포심을 느끼게 되는 지도....더불어 사람이 어떻게 저런 짓을 할 수 있어 분노를 내비치지만 어쩌면 그 극한의 악의 본성이 특별한 누군가가 아니라 나를 포함한 누구나 있을 수 있다고 말하는 작가의 말은 나 자신을 의심하게 하는 더 큰 두려움을 갖게 한다.
그러면서 우리 안에 내재된 악의 실체를 제대로 볼 수 있어야만 악에 제대로 대처할 수 있다고 강하게 말하고 있다. 불편하고 인정하기 싫지만 내 안에 내재된 악의 본능, 가장 근원적 공포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는 소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