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장과 전장 ㅣ 나남창작선 40
박경리 / 나남출판 / 1999년 4월
평점 :
품절


박경리선생님이 우리 곁을 훌쩍 떠나신지도 벌써 2년에 접어든다.
어쩌면 앞으로는 더이상 대하소설을 만날 수 없을 것 같은 불안함에 토지를 완성해 놓고 가신
작가선생님께 다시금 감사하고 싶다.
'박경리 선생님=토지' 마치 공식처럼 떠오르지만 아이들을 위한 동화나
시집, 수필까지 다양한 작품들이 많았기에 올해는 다른 책으로 박경리 선생님을
기억하고 싶어 이 책을 펼쳤다.

책을 읽으며 지금은 쓰지 않는 친근한 단어들이 슬몃 웃음이 나오게 한다.
반즈봉, 추럭, 뻐스, 점방(가게), 국민학교까지.....
마치 시간을 되돌려 그 시대로 돌아간 듯한 느낌에 선생님의 필체의 힘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처음에는 격세지감.....지영의 남편에 대한 실망감이나 이가화라는 여성에 대한 시각이
지금의 여성상과는, 그리고 요즘 책 속의 여인들과는 너무나 달라 어색하기도 했지만
숨가쁘고 불안한 혼란과 절망이 뒤섞인 전장의 시계를 거꾸로 60년을 돌려본다면
있는 그대로의 이야기이기에 조석으로 바뀌는 숨가쁜 현실에 내가 얼마나 젖어있었나 문득 돌아보게 된다.
혼란의 사회 속에서 회의적인 남자 공산주의자 기훈과 기훈에 대한 지극한 사랑으로 아파하며
이념과 전혀 상관없이 빨치산으로 들어간 무모하기까지한 여자 가화, 해방과 6.25의 전운이 감도는 절박한 상황에서의
가족에 대한, 아니 자신에 대한 지독한 회의와 불안을 안고 있는 지영
모두가 혼돈에 빠진, 피난보따리를 싸놓고도 어디로 가야할지 몰랐던, 그 시대에 그럴 수 밖에 없는 인간군상들이 보여진다.
피난을 가고 배가 마치 생명의 동아줄인양 올라타고....무작정 남으로 남으로 가는 그 혼란속에서도
가족들이 있는 서울로 서울로 향해가는 지영과 그녀가 무사하기만을 바라는 모친
"사람의 마음이란 조석변동인지 너 하나 살아오믄 그만이라 했더니....
아이구 내 강아지들아 우리는 다 살았지만 너그들이 불쌍해서 어쩔꼬" 의 넋두리같은 욕심은
우리네 엄마들의 모습과 다르지 않으리라.
국군낙오병에게 옷을 갈아입혀주며 "세상 살려고 나와가지고 이게 무슨 꼴이요. 누구 죈지 모르겠소만
명 보존하고 사는 날까지 살아보시오" 했던 노인은 바로 우리네 아버지들의 모습이고,
이쪽저쪽으로 자식을 잃은 시골노인의 한탄은 바로 우리 국민들의 애끓는 목소리가 아닐까!
"살이 살을 무니 뭣이 될거여. 우리 농사꾼이 밥 달라 했나 옷 달라 했나 땅 파먹고 이 좋은 땅에
선영 모시고 자식 기르며 살아왔는데 대국 놈들이나 쳐들어왔다면 몰라도 이 좋은 땅에
한 물줄기를 타고 태어난 우리 백성들이 서로 잡아 죽이고 뜯어죽여야 쓰겠소?
대관절 누구 땜에 이러는 거요" 는 바로 국민들의 마음이리라.
전장의 한 가운데에서 전쟁으로 온갖 고초를 겪는 사람사람사람이 보인다.
남편에게 보내는 장문의 편지에서 6월 24일의 편지에 '내일은 25일 월급 타는 날이지만 일요일이어서
못 탑니다. 월급 타면 아이들에게 선물 사 보내겠어요.' 라고 썼지만 결코 돌아오지 않았던 25일
모든 것을 잃고, 슬픔까지도 잃었는데, 다만 잃지 않았던 것은 슬기로운 목숨과 삶을 향한 의지라고 말하는 지영
지영은 잃은 것과 잃은 세월에의 작별보다 닥쳐오는 어둠, 사람, 도시, 전쟁이 전혀 새로운 일처럼
그의 가슴을 친다고 하며 시장의 풍경 속으로 걸어간다.
글의 시작에서 시장은 축제같이 찬란한 빛이 출렁이고 시끄러운 소리가 기쁜 음악이 되어
가슴을 설레게 하는 곳이라며 지영은 부임한 곳의 시골장을 둘러보았는데 마지막 피난지가 또한 부산의 시장이었다.
어디 있어도 살 사람은 산다고했던 친정엄마 윤 씨의 말처럼 아이들과 지영은 꿋꿋하게
우리의 엄마가, 우리의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그러하셨듯 묵묵히 살아주었으리라 믿어진다.

1950년 6월 25일, 올해로 61년째가 되는 6.25의 의미는 너무도 옅어져서
어릴 때 반공포스터를 밥먹듯이 그렸던 나조차도 신문에 난 6.25의 이야기들이
색바랜 느낌으로 다가오는데 요즘 아이들이야 더말할 나위도 없다.
하지만 일제강점기와 6.25를 온 몸으로 직접 겪은 선생님의 작품에는 힘들게
살아간 우리 민족의 이야기가 오롯이 들어있다. 이 책을 읽고 있으니
같은 민족끼리의 전쟁을 겪은 우리 할머니, 또 부모님, 우리 민족의 아픔과 고통이 생생하게 펼쳐진다.
그 아픈 이야기들을 글로 살려내는 선생님의 아픔이 서문에 그대로 담겨있어
고맙고 죄송했다. 작가는 '예술가는 언어의 진실을 캐려다 지쳐서 가는 사람'이라고 했다.
하지만 남겨둔 글의 진실은 오래도록 우리 독자들의 마음을 흔들어 놓는다.
선생님이 남겨주신 글들로 희미해져가던 역사를 다시금 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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