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 후, 드로잉 드로잉 퇴근 후 시리즈 4
백영욱 지음 / 리얼북스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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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감보다는 연필이나 볼펜, 수채화보다는 찍찍 그려버린 낙서가 더 친숙한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이 책은 나에게 친숙한 낙서를 수채화 느낌의 그림으로 업그레이드(?) 시켜주는 비법을 알려줄 것 같아 많이 혹했던 책이다. 바로 앞의 말이 아주 틀린 말은 아니지만 조금 더 구체적인 사실을 말하자면 이 책은 그런 신묘한 비법서라기보단, 친숙한 볼펜들 중에서도 '플러스펜'으로 제법 세세한 밑그림을 그리고 워터 브러시(쉽게 설명하자면 잉크 대신 물이 나오는 붓 펜)로 그 잉크를 번지고 퍼트리는 방법으로 채색해 수채화 느낌을 더해주는 일종의 일러스트 방법을 알려주고, 따라 하기 쉽도록 다양한 레벨의 견본을 보여주는 책이다. 취미로 그림을 그리고 싶은 사람은 많다. 그중에서도 특히나 평소 수채화에 많이 끌렸지만 붓과 팔레트 등등 장비 구입과 그림 작업을 할 넉넉한 장소가 없어 막막한 사람들이라면 이 책이 많이 반가울 것 같다.

책의 내용 순서는 보통의 그림 배우기 취미 책들과 많이 다르지 않았다. 이 책에서 소개하는 그림 그리기 방법의 특징과 도구 설명부터 시작해 그림의 기본이 되는 다양한 선 긋기, 채색하기 등으로 이어진다. 물감을 더해 채색하는 것이 아니라 그림으로 그려진 잉크의 색을 이용해 채색을 하기에 그 부분이 독특하고 재미있어 보였다. 기초 설명부터 실습 예제까지 그림들이 많이 있는데 왠지 한 번쯤 도전하고픈 그림들이랄까 아주 어렵게 다가오지 않아서 초심자의 용맹함으로 그라데이션과 단색으로 그릴 수 있는 그림들을 시도해봤다. 솔직히 집에 다양한 색의 플러스펜 세트가 있거나 워터 브러시가 있진 않았지만, 몇 가지 있는 색으로 선을 긋고 그림을 그려서 붓에 물을 묻혀 나름대로 채색을 흉내 내봤다. 무작정 시도한 보라색 고양이는 물의 양 조절을 실패해 그라데이션이나 털 표현은 1도 없는 단색 고양이가 되었지만ㅋㅋ 그럼에도 플러스펜으로 수채화 느낌을 낼 수 있다는 점은 확연하게 느껴서 하는 내내 정말 재미있었다. 세세하게 선으로 그은 밑그림은 조금 실수해도 채색 과정에서 덮을 수 있고, 채색을 하고 나면 펜으로 그은 선의 일부분이 흔적처럼 남거나 그라데이션 표현이 되는 점도 신기했다. 책에서 소개한 도구들이 없어도 집에 한두 개는 있을 몇 가지 색 수성 펜과 붓, 그리고 약간의 물만 있으면 취미 삼아 놀이 삼아 얼마든지 따라 해볼 수 있다는 점이 매력적인 것 같다. 무작정 따라 해보고 시도해볼 수 있기에 좋았다.





예시로 실린 그림들은 식물, 사물, 풍경, 동물, 인물 등등 다양하고 그 안에서도 난이도에 따라 실려있는 편이라(예를 들어 동물 그리기 안에서는 고양이의 정면 얼굴, 측면 얼굴, 전신 그리기 순으로 실려있다.) 책 한 권을 순차적으로 한 장 한 장 따라 그려보면 취미용 그림 수업을 듣는 것만큼의 효과를 내지 않을까 기대가 된다. 맨 뒤쪽 순서인 <실습 예제 따라 하기> 부분을 제외하면 그 앞에 실린 그림들은 전부 그리고 채색하는 과정 컷이 함께 실려있어 펜으로 그린 밑그림의 모습을 제법 세세하게 볼 수 있다. 본문이 끝나면 그 뒤엔 아무것도 그려있지 않고 꽤 도톰한 고급 미술 용지가 덧붙어있어서 그 페이지를 잘라 자신의 미니 실습장으로 사용하면 좋을 것 같다.( * 참고로 리뷰에 첨부한 그림을 그린 종이는 책에 들어있는 용지가 아니다. 책을 받은 날 바로 책을 자르기 아쉬워 캘리용으로 사둔 작은 사이즈의 용지를 사용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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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가 되자! 내 생각 만드는 사회 그림책
요헨 틸 지음, 라이문트 프라이 그림, 이상희 옮김 / 아름다운사람들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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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에 대한 고정관념들이 어떤 것이 있는지 그리고 그런 고정관념들이 실제로는 얼마나 다른지를, 짤막한 한 줄의 글과 극적이고 쾌활한 느낌의 그림들로 비교하며 보여주는 책이었다. 페이지 당 한 줄의 짧은 글과 한 장면의 그림이 있다. 글의 내용은 '여자는 이렇고 저렇다'하는 편견들을 담고 있고 그림은 정반대의 모습을 묘사한다. 예를 들어 '여자는 긴 머리를 좋아해요' 라는 글 위에는 짧게 머리를 자르며 만족스레 웃고 있는 그림이 그려있고 '얌전하게 행동하죠' 라는 글 위엔 크게 입을 벌리고 트림을 하거나 방귀를 뀌는 그림이 그려져있다. 한눈에 글로 쓰인 내용을 그림으로 반박해주는 게 보여서 가볍게 읽기엔 그저 유쾌할 수도 있는 책이다. 하지만 아이들이 왜 이런 책을 읽어야 할까를 생각해보면, 그저 그림에 웃고 글에 비뚤어진 시선을 보내는 것만으로는 아쉽고 답답한 마음이 든다.

여자는 00을 좋아한다. 라는 글에 그런 여자도 있지만 아닌 여자도 있는 게 현실이라는 걸 누구나가 알고 있다. 00을 좋아하는 건 그 사람의 자유지만 그 사람이 여자라는 이유로 무조건 00을 좋아해야 할 필요는 없다는 걸 아이들이 알아줬으면 좋겠다. 어린아이들일수록 주변의 말에 쉽게 흔들리고 영향을 받는다. '여자라면 요리/정리정돈/분홍색/긴 머리 등등을 좋아해야지' 하고 주변 어른들이 아무리 떠들어도 진짜로 내가 좋아하고 싫어하는 걸 알 수 있게 깊이 생각해보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크면서 자신이 가지고 있는 여러 성향이나 특징이 '여자라서' 혹은 '남자라서' 생긴 것들이 아니었으면 좋겠다. '여자답게' 또는 '남자답게' 라는 말에 괜히 주눅 들고 죄책감 느끼고 자신을 가두지 않길 바란다. 시리즈로 '남자가 되자'라는 책이 또 나와야 두 권의 책이 비로소 하나의 이야기를 해낼 것 같은 느낌이다.

이 책은 '내 생각 만드는 사회 그림책'이라는 시리즈의 한 권으로 출간되었는데 책 자체에는 사용 연령을 4세 이상으로 표기해두었고, 인터넷서점 사이트들을 보니 주로 초등 저학년 혹은 초등 전 학년을 대상으로 분류되어 있었다. 사회 그림책이라는 시리즈명 때문인지 실제로 독자의 연령대가 아주 낮지는 않겠다는 추측을 해보지만, 개인적으로 이 책을 초등학교 저학년에게 보여주기는 조금 망설여진다. 글밥의 양이나 젠더 혹은 성에 대한 편견을 다루는 내용 자체는 초등학교 저학년들이 접하기에 충분하다고 생각하지만 그림에서 다소 아쉬움이 있었다.

글과 반대되는 상황을 극적으로 보여주려는 의도는 알겠으나 조금 과하거나 아쉽다는 생각이 드는 그림들이 있었다. 그중 가장 크게 마음에 걸리는 건 '여자는 겁쟁이예요. 용기가 없죠.' 라는 본문 위에 그려진 그림이다. 책 소개나 다른 분들의 서평에서도 아무렇지 않게 올라오는 이 그림이 나는 자꾸 마음에 걸렸다. 가볍게 보고 지나칠 수 있는 부분이지만 아이들이 이 그림을 어떻게 받아들일까, 용기가 있고 없고를 조금 더 건전한 그림으로 표현할 수 있지 않았을까, 이런 행동을 아이들이 용기 있다고 해석하는 건 아닐까 괜한 걱정도 되고 자꾸만 이런저런 생각이 들었다. 고민하다 서평을 쓰기 전에 아이가 있는 친구에게 이 책을 소개하고 몇몇 그림에 대한 의견을 구했다. 친구는 자신이 다소 보수적일 수도 있다고 덧붙이며 그림에 대한 선정성이나 적절성에 불편함을 느꼈다고 말했다. 초등학교 저학년 딸을 둔 학부모로서 저학년 코너에 이 책이 있으면 학교에 건의할 수도 있다고 했다. 이 책에 대한 나의 최종 평을 내리자면, 주제와 책의 구성이 좋고 어린아이들이 접하기에도 충분한 책이지만 나이에 따라서는 더 깊은 내용을 끌어내거나 적절한 조언 및 해설을 해줄 어른이 꼭 함께 읽었으면 좋겠는 책이라고 말하고 싶다. 사실 어른들이 먼저 읽고 생각해야 할지도 모른다. 어른들이 변해야 아이들이 더 쉽게 변화할 수 있을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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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만 모르는 그리움 나태주 필사시집
나태주 지음, 배정애 캘리그라피, 슬로우어스 삽화 / 북로그컴퍼니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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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태주 시인 특유의 부드럽고 따뜻한 시들을 따라 쓰며 한가롭게 마음을 다스리기 좋은 책이다. 시인의 시집 혹은 시인의 이름으로 출간된 모음 시집 등을 읽어본 사람이라면 익숙한 나태주 시인의 시들을 만날 수 있는 데다가 신작을 포함한 미공개 시 역시 30여 편 수록되어 있어 새로운 시들도 함께 읽어볼 수 있다. 신작 시들은 목차에서 제목 옆에 *표시가 되어 있는데 본문 내에서는 별도의 표시가 없다. 난 지금까지 시집을 읽어왔던 방식대로 소리 내어 읽어보고, 마음에 드는 시들과 따라 써보고 싶은 시들의 제목과 페이지를 적어두고, 그중 신작이 무엇인지 확인해봤다. 개인적으로는 '4월'과 '사치'라는 시가 마음에 들었다. 물론 신작 말고도 이번 시집에서 좋았던 시들 역시 꽤 많았다. 안면이 있는 '풀꽃 3', '오늘의 약속'등은 다시 보아도 좋았고 만난 기억은 없지만 속상한 날 열 번은 소리 내어 읽어야 할 것 같은 '세상일이 하도 섭해서'와 날씨 좋은 날 두근두근하며 읽기 좋을 것 같은 '새봄'도 마음에 들었다.


쉽게 읽히는 시들은 사람보단 풍경이 주를 이루는 아기자기한 느낌의 삽화와 참 잘 어울리는데 삽화를 그린이의 닉네임이 슬로우어스였다. 느긋하고 평화로운 느낌의 그림과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몇몇 시들은 배정애 캘리그라퍼의 서체로 쓰여있는데 모나지 않고 동글동글 모여있는 글자들이 귀여웠다. 책에 실린 모든 시들이 사랑이나 자연을 예찬하고 늘 설레거나 평화롭지만은 않았지만(사랑이나 삶에 대한 피로를 이야기하거나 가을을 배경으로 조금은 쓸쓸한 느낌의 시들도 있었고 사랑만큼 이별에 대한 시도 있었다.)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던 나태주 시인의 짧은 시들에 대한 인상과 그림, 글씨체까지 이 세 가지 요소의 궁합이 잘 맞는다고 해야 할까 잘 어우러진 느낌이라 책을 여러 번 보고 또 봐도 늘 읽기 편한 책이었다.






다섯 개의 파트로 나누어진 본문은 각 제목을 시의 구절에서 따와 지었는데, 그 제목이 들어간 시들을 찾아내며 읽는 게 재밌었다. 각 파트는 내용이나 분위기상에서 커다란 구분은 딱히 없어서 그냥 읽히는 대로 술술 읽어내도 상관없었다. 다만 각 파트의 마지막 장은 시인이 직접 쓴 필사 페이지가 수록되어 있어, 시인의 팬이라면 사인만큼이나 특별한 선물을 받는 기분이 들지도 모른다. 이 책은 '필사 시집'이라 시와 그림을 빼고도 독자가 직접 책에다 필사할 공백들이 넉넉하다. 그림이 매번 책의 페이지를 가득 채우고 있는 것도 아니고, 작게 자리 잡은 그림들도 옆 페이지의 글을 충분히 옮겨 적을만큼의 공간을 남겨두고 있다. 가끔은 그림 없이 원고지가 그려있거나 줄 몇 개만 그어진 깔끔한 페이지도 있었다.


나는 필사도 시집도 캘리도 좋아하는 사람이지만, 책에다 직접 줄을 긋거나 메모하지 않고 깨끗하게 보는 걸 더 좋아하는 편이라 책에다 필사를 남기는 게 조금은 어색했다. 예쁘게 완성된 페이지에 내가 뭔가를 더해 그게 틀어지는 게 좀 싫었던 것 같다. 글씨가 깨끗한 편도 아니고, 볼펜이나 붓 펜 등으로 따라 쓸 때 한 번에 깔끔하게 완성해낼 자신도 없었다. 내가 쓴 글씨가 뒤 페이지에 크게 비쳐 보일까도 신경이 쓰이고 책의 사이즈가 크지 않아 손바닥으로 책을 눌러 고정하고 쓸 때도 약간의 불편함이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이 책을 받을 때 '필사'와 '시집' 중 필사에 더 큰 비중을 두기로 마음먹었기에 더 망설이지 않고 본문에 내 글씨를 마음껏 남기기로 했다. 결과적으로 내가 쓴 글씨들은 가끔 줄이 삐뚤어지기도 하고 틀린 글자를 까맣게 칠해버리기도 했다. 붓 펜으로 쓴 글씨는 뒤 페이지에 표가 났지만 그 페이지의 글을 읽지 못할 정도로 거슬리지는 않았고, 조금 더 편하게 글씨를 쓰고자 책을 누르고 고정했지만 책은 생각보다 유연하고 견고했다. 안에 내가 얼마나 글씨가 덧썼는가와는 별개로 책을 다시 덮으면 깔끔하고 새 책 같은 모양새를 유지했다. 그래서 책을 볼 때마다 기분이 묘하다. 붓 펜으로 캘리를 연습하며 쓰기도 하고, 가끔은 연필로, 가끔은 손에 잡히는 아무 볼펜으로 차곡차곡 책의 빈칸에 글씨를 채워 넣고 있다. 몇 개 이상의 시를 쓰고 나니 예쁘게 쓰고 싶은 욕심은 여전하지만 이제 처음 같은 망설임은 많이 없어졌다. 책에 쓰인 순서대로가 아니라 내가 마음에 드는 순서대로 책을 채우니 책을 펼 때마다 드문드문 내 글씨가 있는 게 재미있다. 이대로 이 책을 가득 채우면 이 책이 내게 어떤 의미가 될까. 필사 책을 정말 제대로 필사 책으로 이용하고 있는 요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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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디어가 고갈된 디자이너를 위한 책 : 타이포그래피 편 - 세계적 거장 50인에게 배우는 개성 있는 타이포그래피 아이디어가 고갈된 디자이너를 위한 책
스티븐 헬러.게일 앤더슨 지음, 윤영 옮김 / 더숲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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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포그래피를 주제로 한 전시회를 다녀온 기분이다. 혹은 그 전시회의 도록을 꼼꼼히 읽은 느낌이라는 게 더 적당하려나. 책을 펼치면 한 페이지 가득 작품을 보여주고 나머지 한 페이지에 글을 실은 단순한 본문 구성이 전시회의 도록과 비슷한 인상을 주기도 했다. 나는 비록 디자이너도 아니고, 타이포그래피의 기초도 수많은 기법과 종류도 제대로 알지 못하지만 그저 타이포그래피라는 것에 관심이 있어 이 책을 읽었다. 낯설지만 재미있었고 작품도 그 작품의 해설과 글쓴이가 그에 얹어준 디자이너들을 위한 조언들 역시 어렵지만은 않았다. 이론적 기초를 전혀 모르더라도 그저, 다양한 방법으로 글씨를 쓰고 그리고 변형하고 장식하여 완성되고 활용되었던 작품들을 구경하고 싶다면 겁먹지 말고 이 책을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아이디어가 고갈된 디자이너를 위한 책>이라는 표제에서 알 수 있듯이 책의 본문은 타이포그래피를 어느 정도 알고 있는 이들을 주요 독자로 삼아 그들이 디자이너로서 책 속의 작품들(혹은 작품에서 사용된 다양한 기법들)을 적극적으로 흡수하고 활용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쓰여있다고 생각한다. 각각의 작품이 어떤 종류의 타이포그래피인지, 어떤 기발한 기법들이 사용되었는지, 그 기법의 유래나 역사는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지 등 흥미로운 정보들을 알려주고 어떤 점에서 이 작품과 작가의 시도가 의미가 있는지를 짚어준다. 디자이너로서 어떤 점이 칭찬할만한지 어떤 부분이 디자이너에게 필요한 능력인지를 강조하고 조언을 덧붙이기도 한다. 처음 보는 작가들의 이름과 기법 이름들이 나열된다는 점에서 문외한인 독자들에게 아주 친절한 책은 아니라는 생각도 들지만, 우연히 들어간 전시회에서 매력적인 작품을 먼저 보고 그에 붙어있는 작품 해설 등을 읽는다 생각하면 그리 난해하거나 아주 어려운 수준의 글도 아니라 그저 흥미로웠다.


  기초적인 지식을 알려 주는 훌륭한 책들은 이미 시중에 충분히 많다. 그보다 우리는 타이포그래퍼가 타이포그래피를 만들기 위해 사용하는 재미있고 기발한, 때로는 난해하기까지 한 특별한 방법들을 소개하고자 한다.  

( 중략 )

  다시 말해 다른 타이포그래피 기초서가 식사의 ‘메인 코스’라면, 이 책 속의 아이디어들은 ‘디저트’라고 할 수 있다. 이제 타이포그래피 메뉴 중에서도 가장 달콤한 디저트들을 잔뜩 먹어볼 시간이다. 


 머리말 중 7, 8p



​책의 본문이 끝나면 그 뒤로 '용어 사전', '함께 읽으면 좋은 책', '찾아보기' 등이 부록처럼 붙어있다. 설명은 간략한 편이지만 상당히 도움이 되는데 본문의 낯선 용어들이 걱정된다면 본문을 읽기 전에 가볍게 용어 사전을 먼저 읽어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하지만 몇몇 용어들은 간단한 외국어를 그대로 쓰는 경우가 많아 어렵진 않다. 난 오히려 서체를 개발해낸 디자이너들의 이름이 붙은 서체의 이름이 더 많이 낯설었다.) '함께 읽으면 좋은 책' 속 목록은 아마도 전부 원서 같아서 국내에 번역 출간된 책이 있는지, 이 책들은 저자가 말한 메인디시 같은 기초서일지, 이 책과 결을 같이 하는 디저트 같은 책 들인지 조금 궁금했다.






책을 읽으면서 여러 작품들을 살펴보고 여러 개념들을 알게 되면서 실생활에서 타이포그래피를 꽤 일상적으로 접하고 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떠오르는 대로 적어보자면 책표지, 회사나 출판사의 로고, 매년 열리는 국제 도서전의 포스터, 캘리그래피 작품들, 거리의 간판, 음악 앨범의 표지, 모자나 옷에 프린트된 글자들... 지금 내 주변에 있는 것만 당장 사진을 찍어도 10개 이상은 발견할 수 있는 것들이다. 물론 프로 타이포그래퍼가 만들어내고 상업적이나 예술적으로 큰 가치가 있느냐는 등 개개의 차이는 있겠지만, 알면 알수록 타이포그래피는 친숙하고 흥미로운 디자인 분야인 것 같다. 우리는 자라면서 글자, 특히 모국어인 한글의 우수성과 과학성을 반복해 배우는데, 굳이 배우지는 않더라도 한글을 비롯해 모든 글자의 예술성과 미학적 특성을 발전시킨 장르가 바로 타이포그래피가 아닐까. 아이들이 처음 글자를 배울 때 자음 모음을 닮은 그림이나 같은 글자로 시작되는 단어의 그림과 매치해 만들어진 커다란 한글 포스터를 붙여두는 것처럼 타이포그래피란 용어나 개념은 낯설지 몰라도 실생활에서는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아주 친숙한 예술 장르라는 생각이 든다. 책 속의 작품들 역시 전시를 위한 예술품 뿐만 아니라 실제로 쓰인 영화 포스터나 캠페인 광고 등에 쓰인 활용적인 작품들이 많았다. 친숙하기에 더 매력적인 타이포그래피의 인정받는 작품들을 둘러볼 수 있는 책이었다. 디자이너라면 안목을 넓히고 실용적 조언도 얻을 수 있겠고, 그저 흥미가 있는 일반 독자들이라면 세계적 거장들의 아름답고 의미 있는 작품들을 감상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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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생일대의 거래
프레드릭 배크만 지음, 이은선 옮김 / 다산책방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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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프레드릭 배크만은 마치 동화 같지만 사실은 너무나 현실적인 짧은 이야기를 쓰고 책으로 낸다. 내가 접하기로 첫 번째가 <하루하루가 이별의 날>이었고, 두 번째가 이 책 <일생일대의 거래>였다. 본문 곳곳에 들어간 아기자기한 그림들도 글의 분위기에 참 잘 어울렸다. 이 책의 시작과 마무리는 아빠가 아들에게 보내는 편지 혹은 아들에게 남긴 일기 같은 메시지로 쓰여있다. "안녕, 아빠다."하고 평생 아들에게 편지 한번 보내본 적 없다는 듯 어색한 인사말로 시작하는 이야기에는 생명과 죽음, 아들에 대한 애정을 주로 담았다.​​

너희 인간들은 항상 언제든 목숨을 내어줄 각오가 되어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것도 실제로 어떤 일이 수반되는지 알아차리기 전의 얘기지.

(본문 중 89p)

성공한 사업가였지만 아빠로서 좋은 아빠가 되지는 못했던 한 남자, 사람들이 죽음을 맞이할 때 찾아오는 한 여자를 목격하는 남자, 사신과 같은 일을 하지만 사신도 유령도 아닌 존재에게 아낌 받았던 특별한 남자. 일생을 사업가로 살았던 그 남자는 생명과 죽음에 관한 말 그대로 '일생일대의 거래'에도 "인간은 생긴 대로 산다"(본문 중 92p)는 대담한 대답을 내어놓는다. 부모가 된다는 건 정말 특별하고도 어려운 일이라, 이 책에서는 그 일 앞에서 머뭇거리다 도망쳐 성공한 사업가가 되었노라 고백하는 남자를 주인공으로 내세운다.


모든 부모는 가끔 집 앞에 차를 세워놓고 5분쯤 그 안에 가만히 앉아 있을 거다. 그저 숨을 쉬고, 온갖 책임이 기다리고 있는 집 안으로 다시 들어갈 용기를 그러모으면서. 스멀스멀 고개를 드는, 좋은 부모가 되어야 한다는 숨 막히는 부담감을 달래며. 모든 부모는 가끔 열쇠를 들고 열쇠 구멍에 넣지 않은 채 계단에 10초쯤 서 있을 거다. 나는 솔직했기에 딱 한순간 머뭇거리다가 도망쳤다.

우리는 거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왜냐하면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었지. 그럴 때 우리 사이엔 늘 정적이 흐르잖니. 너는 바 카운터를 닦고 유리잔을 정리했고 나는 사랑이 담긴 네 손길에 대해서 생각했다. 너는 좋아하는 걸 만질 때면 항상 거기서 심장이 뛰고 있는 듯이 다루잖니. 너는 그 술집을 아꼈고 이 도시를 사랑했지.

(본문 중 34p , 95p)

​​

​잘 해내지 못했지만 아들에 대한 애정과 그리움은 늘 존재해왔기에 죽음 혹은 자신의 모든 것이 사라지는 순간을 앞두고 가장 눈앞에 어른거리는 것 역시 가족이었을 것이다. 누군가의 사소한 습관이나 작은 행동에 담긴 의미를 알고 있다는 건 그만큼 상대방을 지켜보고 그 시간만큼의 애정을 가졌다고 느껴지곤 하는데 아들의 손길에 담긴 의미를 생각하는 아버지의 눈길에서도 그런 애정이 드러났다. 이렇게 떠나기 직전에야 이렇게 했어야 하는데-하는 후회를 남기는 게 인간이라 참 안타까웠다. 겁이 나거나, 혹은 여자의 말대로 아쉽고 슬픈 감정으로 마지막 한 발자국을 걸어야 하는 순간 마지막 메시지를 남기는 대상은 실제로 표현하지 못했더라도 온 생을 다해 애정 했던 존재가 아니었을까. 책을 읽기 전만 해도 이 책은 삶과 죽음에 대해서만 이야기하는 줄 알았는데, 다 읽고 나니 아버지와 아들 또는 부모와 자식 간의 애틋한 관계에 대한 이야기가 더 크게 가슴에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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