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는 용기와 복종으로써 공공의 안녕에 힘쓴 국민방위군과 진압군의행동을 승인한다.
국회는 부이에 장군의 행동을 승인하며, 이 가슴 아픈 상황에서 숨진 국민방위군의 명단을 연금위원회에 보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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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란이 일어나기 전에 주둔하던 병사 가운데 8월 31일의 무질서상태에서 가까스로 벗어난 병사들은 군복이나 먹을 것도 없이 숲속을 헤매면서 농촌사회를 위협하는 존재가 되었다. 게다가 낭시 주위의 모든 마을은 낭시에대해 분노와 복수의 감정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는데, 특히 부이예 장군이 병력을 동원한 메스가 가장 반감을 보여주었다. 9월 1일, 메스에서 낭시로 되돌아간 건축가 리제는 낭시 시정부에 들러서 메스 주민들이 낭시의 모든 주민을 범죄자로 생각하는 한 낭시로 여행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메스의어떤 주민들은 낭시에서 가져간 소총 탄환을 납작하게 만들어 "낭시의 역적에게 복수를"이라고 새겨 단춧구멍에 달고 다녔다. 이러한 반감은 아마도 용감하고 충성스러운 메스인들이 낭시 문 앞에서 목숨을 잃었기 때문에 생겼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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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사들이 무리지어 시정부에 나타났다. 시정부는 그들을 도 지도부로 보냈다. 그러나 도 지도부가 그들을 받아들이지 않자 그들은 더욱 흥분해서 시정부로 되돌아갔다. 도대체 그들은 무엇을 요구했던 것일까? 그들은 널리 북을 쳐서 모든 시민이 무장하고 낭시를 지키는 데 동참하도록 만들려고 했다.
그들은 같은 목적으로 총기병들도 낭시 주둔군 편에 서주기를 바랐다. 실제로 북소리를 들은 시민들이 재산을 지키려고 무장한다는 소문이 돌았고, 도내 모든 관리와 늙은이들은 재산권을 지킬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서 총기를요구하고 국민방위군에 스스로 들어가기도 했다. 이렇게 해서 국민방위군중대장들은 평소에 보지도 못했던 낯선 사람들을 자기 중대 틈에서 볼 수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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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의 합동위원회는 법치주의를 강조하는 브루이의 안을 바탕으로결투를 금지하는 법안을 만들 예정이었다. 그러나 국회의원이나 방청객이회의장 안에 무기를 소지하고 들어가는 행위를 근절하기는 어려웠다. 훗날1793년에 국민공회 안에서 총소리를 들을 날이 올 줄을 예측할 사람이 과연있었을까? 혁명에서 폭력은 좌우를 떠나 거의 일상적 차원의 일이었음을 부인하기 어려운 만큼 급격한 변화란 안정된 체제에 대한 폭력 그 자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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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말하는 6월 12일의 국회 명령은 "모든 도시와 부르의 능동시민이그 자격을 유지하려면 각자 자기 주거지나 중심지 행정기관에서 작성한 국민방위군 등록부에 이름을 올려야 한다"는 것이다.
몽토방에서 일어난 사건은 혁명이라는 급격한 변화에 제대로 적응하지못한 사람들이 일으킨 사건이었다. 만일 시정부가 신중하고 슬기롭게 대처했다면 끔찍한 일을 어느 정도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 사건은 몽토방 시정부와 국민방위군이 서로 갈등을 빚고 몽토방 주민들 가운데 다수의 가톨릭교도가 소수이면서 중요한 지위를 차지한 개신교도를 질투하고 의심하는가운데 일어났다. 그 사건으로 목숨을 잃은 개신교도는 소수였지만 그들은마치 혁명의 순교자 같았다. 6월 13일부터 15일 사이에 님에서 일어난 가톨릭교도 살해 사건을 보면 이 말을 쉽게 수긍할 수 있을 것이다. 몽토방에서는개신교도 다섯 명이 목숨을 잃었지만 님에서는 가톨릭교도 500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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