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차적으로는 슬픔과 한의 가죽일 수도 있는 나귀 가죽*에 관한 발자크의 소설을 조금 더 읽어보면 라파엘, 그때까지만 해도 아직 그저 "젊은이 아무개"라 불렸던 그가 층층계단을 올라 골동품 가게에 들어서는 장면을 이내 마주하게 된다. 그곳에서 그는 치명적인 부적을 손에 넣게 된다. 발자크는 열두 쪽에 걸쳐 탑처럼 층층이 쌓인 골동품 더미를 묘사하면서 현실의 광기와 어휘 광증을 거리낌 없이 그야말로 작가적 재능을 낭비하는 방식으로 선보이기는 하지만, 동시에 상상력 넘치는 꿈의 깊이를 통찰할 가능성도 열어준다.
일종의 세계의 상자로 고안된 그 환상적인 가게, 바싹 마르고 백 살도 더 먹은 난쟁이가 주인장으로 앉아 있는 그 가게에서, 라파엘은 지질학자 퀴비에의 저술을 진정으로 시적인 작품이라는 말과 함께 추천받는다. 더 읽어나가다보면 라파엘을 창고 회랑으로 이끄는 어느 조수가 이렇게 말하는 장면이 나온다. 당신은 그 가죽의 영으로 인해 공중 높이 떴다가 과거의 무한한 골짜기 속으로 미끄러져서 몽마르트의 채석장과 우랄산맥의 편암층 속으로 한층 한층 깊이 들어가저 대홍수 이전에 살았던 동물들의 화석을 발견할 겁니다.
그러면 당신의 영혼은 인간의 허약한 기억력을 망각해버린 십억 년의 세월과 수백만 명의 사람들을 보면서 경악을 금치 못하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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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까지나 그렇게 눈꺼풀을 내리깔고
흙속에 묻힌 고귀한 아버지를 찾지만 말고
너는 생자필이 인간지상사임을 알고 있으렷다.
사람은 태어나 살다가 영원으로 간다.

아들을 염려하는 마음과 아들에게 발각될까 두려운 마음이 팽팽히 맞서는 왕비는 햄릿에게 책략에 가까운 언사를쓴다. 이는 완고하게 비탄 속에 잠겨 있는 것이 불경스러운고집을 피우는 행동이라는 새 군주의 강력한 경고를 따르고있다. 바로 여기에서, 어두운 과거가 있는 정치 공동체에서그 공동체 건립에 선행한 희생자들을 추모하려는 의지는 새로운 질서의 정당성을 의심하는 것과 다름없다는 점이 드러난다. 그 질서의 존립 여부는 과거를 현실이 아닌 것으로 부정하고 승자와 동일시하느냐 아니냐에 달려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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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복할 길 없는 내 안의 무력함이 발가벗겨져 검푸른 피멍이 든 모습을 본따놓은 것처럼 느껴졌다. 다시 해변에 닿는 일보다 더욱 힘겨웠던 것은 헤엄쳐 뭍에 닿은 다음 고부랑길이며 여기저기 서로 곧장 연결되면서 8자 모양을 이룬,
사람의 발이 거의 닿지 않은 오솔길을 오르는 일이었다. 아주 천천히 일정하게 한 발 한 발 내디뎠으나 암벽에 쌓인 오후의 열기 탓에 얼마 걷기도 전에 이마에는 땀방울이 맺혔고 목구멍에서는 피가 치솟았다. 가는 길 곳곳에 앉아 있던,
움직이다 말고 공포로 몸이 얼어붙은 도마뱀처럼 저 피아나의 고지로 다시 올라가기까지 좋이 한 시간 반이 소요되었다. 그뒤로는 마치 공중부양술을 터득한 사람처럼 아무런무게를 느끼지 못하고 마을 외곽의 가옥들과 정원들 사이를거닐 수 있었다. 그때 따라 걸었던 담벼락 너머에는 지역 주민들이 망자를 묻는 한 뙈기 땅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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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 놀라운 점은 이 일에 큰 노력이 들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말없이 음식을 삼키려다 무심코 건넨 말 한마디가, 그냥 계산하고 나오려다 공연히 덧붙인 말 한마디가, 머쓱해서 관두려다 툭 입에 올린 말 한마디가 누군가를 기쁘게 한다.
처진 입꼬리가 올라가고 걸음이 가벼워진다. 대단한 필력이필요하지도 않고, 엄청난 지면이 필요하지도 않고, 심지어 돈한 푼 들지 않는 사소한 언어들이 누군가의 하루에 아름다운 파문을 남긴다. 특별할 것도 없는 나의 입술에서 어떤 이의 영혼을 물들일 고운 빛깔이 흘러나올 수 있다니. 대문호도 아닌 내가 누군가 내내 만지작거리다 머리맡에 두고 잠들 소중한문장을 빚어낼 수 있다니.
이야말로 언어의 기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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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시를 가르쳐준 선생님이 사물에 지나친 감상을 투여하는 것을 경계하라 했다. "우체통이 외롭게 서 있다‘ 같은 문장을 쓰지 말라는 것이었다. 우체통은 그저 서 있는 것이지 외로운 것은 우리 자신이라며, 또 다른 선생님은 신파를 경계하라 가르쳤다. 잘 직조된 논리와 내적 정합성으로 설득해야지 무작정 나의 감상을 독자에게 강요하지 말라고 했다. 읽는 이보다 쓴 이가 먼저 울어버리면, 그게 바로 신파라며.
나는 버린 옷장을 보며 감상과 신파를 둘 다 획득했다. 옷장은 내장이 텅 빈 채 쏟아지는 빗줄기 아래 외롭게 서 있었고 나는 내가 비워낸 모든 추억과 역사가 서러워 신파적인 눈빛이 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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