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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죽 답답했으면 일 년에 몇 번 마을에 나타나는 각설이떼를 할아버지는 전에 없이 반기셨다. 전에는 각설이타령 듣기싫다고 얼른 찬밥이건 쌀이건 주어서 보내라고 호령을 치시던할아버지가 실컷 놀고 난 후에 주라고 바가지를 들고 나가는식구들을 만류하고 그들의 신바람을 끝까지 즐기셨다. 중이동냥을 올 때도 마찬가지였다. 자세히 들어보면 다 덕담이니중툭을 자르지 말고 끝까지 들어주라고 이르는 할아버지의 음성은, 그 까탈스러운 쇳소리는 온데간데없고 바람 든 무처럼퍼석했다.

마흔 살이란 늦은 나이답게 수줍게 문단을 두드린 게 처녀작 『나목』이었다. 사적인 경험을 우려낸 작품이니 유니크하지만 등단작으로 끝나는 일회적인 작가가 될지도 모른다는 한심사위원의 조심스러운 전망이 기억에 남는다. 그분의 우려가격려가 되어 그후 나는 열심히 글을 썼고 문단과 독자들의 반응도 나쁘지 않아 종종 인기작가 소리도 듣게 되었다. 초기에쏟아낸 6·25를 소재로 한 작품들에 대해선 비극적인 가족사를 반복적으로 우려먹는다는 평도 들었지만 나는 반전소설로읽히길 바라고 있다. 유연하게 성공적으로 가정주부에서 작가로 변신할 수 있었고, 그후의 작가생활도 결혼생활처럼 풍파없이 순탄했다.

세 여자를 만나 나의 시골집까지 오는 동안은 간략하게 내이야기를 들려주기에 알맞은 거리이다. 멀리 울산바위가 보이는 우리 마을은 앞벌만 빼고는 삼면이 짙은 숲에 둘러싸여 있다. 녹색도 극에 달하니까 지쳐 보인다. 힘겹게 저장하고 있는과중한 수분을 언제 토해낼지 모르게 둔중한 빛을 하고 있다.
친구의 어머니 유해야 찻건 말건 내일은 나도 떠나리라. 망설이던 마음을 별안간 굳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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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두고두고 채정이 졸업식날을 악몽처럼 기억하는 건 남편의 무신경한 옷차림 때문인데 채정이는 하마터면 아빠를 못찾을 뻔했던 게 더 기억에 남는 모양이었다. 동생 채훈이의 졸업식을 앞두고도 또 아빠 못 만나면 어떡하냐고 그 걱정부터 하더니, 제가 미리 학교 앞을 답사하고 와서 제일 찾기 쉽고 노인네들도 눈치 보지 않고 들어갈 수 있을 것 같다며 정해준 곳이 파바로티였다. 딸이 시키는 대로 따르기는 하면서도 후기 졸업식에는 그닥 사람들이 많을 것 같지 않아 괜한 일이다 싶었다.

"여기가 페스타롯치 다소?"
종업원들은 물론 손님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에게로 쏠렸다.
손님의 대부분은 고등학생 티가 가시지 않은 젊은이들이었다.
원 페스타롯치? 하면서 여기저기서 킬킬대는 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여기라고 외치는 대신 황급히 그에게로 다가가 소매를 끌었다. 마누라를 보자 안심한 듯 그의 목소리가 한결 누그러졌다.
"내가 그래도 옳게 찾아왔구먼. 많이 기다렸는가?"

그녀는 인사성으로 그렇게 말해놓고는 말끝을 흐렸다. 말끝을흐릴 수밖에 없는 처지에 화도 났다. 안사돈끼리의 이런 미묘한심리전을 아는지 모르는지 옆에 앉은 남편은 고개를 길게 빼고무대 위에서 진행되는 졸업식을 열심히 지켜보고 있었다.

그녀는 계속해서 당하고 있을 수만은 없어 정색을 하고 따졌다. 결혼식을 마침 바캉스 시즌에 치렀을 뿐 아니라, 유학 갈 날을 한 달 남짓 남겨놓은 시점이라 채훈이는 채훈이대로 수정이는 수정이대로 각각 일이 많았다. 비자도 새로 내야 하고, 짐도배로 미리 부쳐야 하고, 운전면허 갱신해야 하고, 이런저런 해결 안 된 일 때문에 마음들이 한갓지지 않아 신혼여행은 미국 가는 길에 하와이에 들러서 며칠 쉬다 가는 걸로 대신하겠다고 저희끼리 합의하고 양쪽 부모는 통고만 받았는데 지금 와서 웬트집인가 싶었다.

아들은 그들하고 단체로 또는 삼삼오오 끼리끼리 사진도 찍고인사치레도 하느라 아직도 정신이 없고, 이쪽의 짝사를 자처하고 나선 채정이까지도 그 사진 찍기 좋아하는 족속한테는 손을들었는지 중심에서 밀려나 관망을 하고 있었다.

둘 사이는 그들보다 어린 우리 또래들 사이에도 선망의 대상이었다. 우리들은 그들 사이를 연애를 건다고 말하면서 야릇하게 마음 설레곤 했다. 사십년대의 보수적인 시골마을에서도 젊은 남녀가 부모 몰래 사랑을 나누는 일이 아주 없었던 건 아니었나보다. 누가 누구하고 바람이 났다든가, 눈이 맞았다든가, 심지어는 배가 맞았다는 소문까지 날 적이 있었다. 그건 부모가 얼굴을 못 들고 다닐 만한 스캔들이었고, 그 뒤끝도 거의 다 너절하거나 께적지근한 것이었다.

우리 마을에서 만득이가 제일 먼저 읍내 중학교로 진학하자곱단이는 아버지를 졸라 십 리 밖에 새로 생긴 소학교 분교에 입학했다. 방구리사건이 있고 나서였다. 분교를 간이학교라고 불렀고 입학하는 데는 연령제한 같은 것도 없었다. 남학생 중에는아이 아범도 있을 정도였다. 중학교도 마찬가지였나보다. 만득이도 소학교만 나오고 나서 몇 년 집에서 농사를 거들다가 서울로 시집간 큰누나가 신식교육의 필요성을 역설해서 상급학교에가게 됐으니 늦공부인 셈이었다

육이오 동란 후 삼팔선 대신 그어진 휴전선은 행촌리를 휴전선 이북 땅으로 만들어놓았다. 그 동안 서로 만나지는 못했어도귀향길에 만득이가 순애하고 곧잘 산다는 소식 정도는 들을 수있었는데 그나마 못 듣게 되었다. 6·25 때 죽지 않았으면 같은서울 하늘 밑 어디에 살아 있겠거니, 문득문득 생각이 나던 것도잠시 만득이는 내 기억 속에서 아주 사라져버렸다. 서울살이라는 게 촌수 닿는 친척도 결혼 청첩장이나 부고나 받아야 마지못해 챙길 정도로, 이해관계가 닿지 않는 인간관계는 지딱지딱 잊게 돼 있었다.

조카가 먼저 격앙된 목소리로 어머니를 만류했고, 질부는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리고 그 방을 뛰쳐나갔다. 딴 식구들도 우르르 질부를 따라 나가 뭐라고 위로의 말을 하는 것 같았다. 나는그 일이 왜 조카며느리가 울고불고 위로받아야 할 일로 둔갑을했는지 미처 깨달을 새도 없이 언니가 꺼내놓은 것들을 가방에도로 쑤셔넣기에 바빴다. 졸지에 분란을 일으킨 것들을 우선 안보이게 하는 게 수라고 생각했다.

조카딸 얘기를 듣고 보니 언니의 수의에 그닥 큰 음모가 숨겨져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질부가 그렇게까지 심하게 넘겨짚은건수의가 주는 이미지의, 경사와는 너무도 안 어울리는 그 생급스러움, 사위스러움의 충격 때문이 아니었을까. 그러나 밍크코트하고 수의하고 비교가 가능한 조카딸한테 사위스럽다는 우리마음속의 해묵은 그늘을 어떻게 이해시킬 것인가. 나는 암만해도 느이 엄마 여기 오래 계실 것 같지 않다는 소리만 하고 조카딸하고의 통화를 끝냈다.

큰조카가 장례를 치르고 돌아왔지 싶어 아무 일도 손에 안 잡힐 무렵 먼저 조카한테서 전화가 걸려왔다. 질부를 거치지 않고조카가 직접 전화하기는 드문 일이었다. 회산데, 장례 치르고 와서 첫 출근이라 자연히 이모님 생각이 난다면서 차 보낼 테니 나오시면 점심 대접하고 싶다고 했다. 점심이 급한 게 아니라 할얘기가 급한 것 같은 눈치에 사양하지 않았다. 여자 형제끼리는늙을수록 닮아가는 법이고, 그게 그 자식들한테는 곧잘 상실감을 달랠 수 있는 구실이 된다는 걸 나도 경험해봐서 알고 있기때문이었다.

겁이 많은 나는 그 직장을 그만두었다. 함부로 굽실대며 미안해할 것이 아니라는 것 하나는 착실하게 배운 성싶었다. 또하나, 같이 일하던 멕시칸들로부터 일본 사람이 운영하는 믿을 만한 직업소개소가 어디 있다는 걸 알아놓은 것도 냉동회사에서 얻은 소득이라면 소득이었다. 일본말엔자신이 있었고, 통하는 말로 통사정을 할 수 있으면 반드시 살길이 열릴 것 같았다.

버스 종점에서 아란은 집을 지나쳐 조각공원 쪽으로 갔다. 옥죄는 가슴을 펴고 마음을 진정시키기에는 집은 너무 좁아터졌다. 마을 사람들이 조각공원이라 부르는 곳은 그냥 넓은 초원이었다. 왕년의 어떤 조각가가 인근의 농가를 개조해 찻집을 차리고 주변의 공터에다 조각물을 설치하고 공원처럼 꾸몄다고 한다. 찻집 자리가 어디쯤인지 지금은 그 흔적도 없지만, 공터에조각물은 여기저기 남아 있었다. 조각가는 죽었다고도 하고 이민을 갔다고도 하는데 남아 있는 조각들은 거의가 온전치 못하거나 흉물스러워 아란은 거기 갈 때마다 조각가가 공원을 임대를 했었을까 무단점거를 했었을까 궁금해하곤 했다.

공원엔 벤치 같은 것도 없었다. 여기저기 남아 있는 조형물의잔해가 벤치 구실을 했다. 간혹 작가의 이름과 작(作意)같은게 새겨진 팻말도 눈에 띄었다. 그러나 작품과 팻말이 제대로 짝이 맞는 것은 극히 드물었다. 작품은 없이 팻말만 남아 있는 것은 빈 무덤가에 서 있는 비석처럼 처량하고 우스꽝스러워 보였다. 팻말의 설명문치고 겸손한 건 하나도 없었다.

정확하게 일 주일째 되는 날 아침에 이변호사한테 연락이 왔다. 전번의 아파트가 아니라 정기 회사 사장실로 나오라는 전갈이 왔고 이변호사도 동석한 자리에서 천만원짜리 수표 서른다섯장을 건네받은 것이다. 새삼스럽게 정기가 칠순잔칫날의 부친을연상시켰다. 거의 그만큼 늙어 보이기도 했지만 첫 대면 때와는다른 낯익음 때문인 듯도 했다. 아란은 저절로 우러나오는 친근감이 수치스러워서 삼억오천만원어치 수표에 대해서는 짐짓 덤덤하게 굴었다. 그런 아란이 가소로웠던지 정기씨는 한쪽 입가로만 웃는 이상한 미소를 띠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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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박범벅을 만들면서 어머니가 신바람을 내셨으면 좋으련만.
영주는 좀 망연해진다. 어머니는 아직도 호박범벅을 만드실 수가 있을까. 이까짓 호박 따위로 어머니를 시험하려 들지 말아야한다. 이해해야 한다. 푸성귀를 다듬어 반찬을 만들고, 생선 비늘을 긁어 절이거나 조리고, 국이나 찌개 간을 보는 일을 반백년이 넘게 허구한 날 되풀이하면서 그때마다 새로운 신바람이나서 한다면 그게 오히려 이상한 거지.

그 재미없음의 핑계를 학생들의 질이나 자신의 실력 부족으로 돌릴 수도 있으련만 그녀는 지식이라는 것을 통틀어서 비하하느라 허탈해지기도 하고 울적해지기도 했다. 한마디로 아니꼽기 짝이 없는 정서불안증이었다.

너무 오래 기다렸다. 아직도 새벽일까. 부유스름한 미명은 걷힐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해돋이를 기다렸을까. 하영이 호텔에들 때 동해의 일출 같은 건 염두에 둔 바 없었다. 키를 받을 때동해의 일출을 볼 수 있는 방이라고 프런트의 아가씨가 생색내듯이 말하는 걸 듣고도 고맙다든가 잘됐다든가 하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동해의 일출이란 딱딱한 말은 하영에게 아무런 연상작용도 일으키지 못했다. 그러나 눈뜨자마자 모로 누워 줄창 창밖을 보고 있었던 것은 그 말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녀는 늙은이처럼 뭉그적대며 일어나 창가로 갔다. 완만한해안선과 넓은 모래사장이 내려다보였다. 여름날 툭하면 텔레비전 화면이 비춰주던 이름난 해수욕장이었다. 아직도 한낮의 늦더위는 복중 못지않건만 바닷가는 씻은 듯 정결하고 고요했다.
인적 없는 쓸쓸함에 이끌려 그녀는 부랴부랴 옷을 주워입고 방을 나섰다.

그 자리를 등지고 걷는 동안 줄창 스산한 바람이 불었다. 모래사장에서 차의 지문을 지우기에 알맞은 바람이라고 하영은 생각했다. 어느 만큼 걸었는지 횟집 거리와는 분위기가 다른 거리가나타났다. 집집마다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많은 간판이붙은 동네였다. 거의가 초당두부 간판이었다. 원조, 옛날, 진짜,
무공해, 완전자연, 할머니 솜씨 등 각기 다른 말로 자기 집 두부야말로 진짜배기 초당두부라는 걸 강조하고 있었다.

아마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하영에게 자신의 의지나 의식과는상관없는, 남을 해코지하는 어떤 힘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명확해진 것은

어머니가 얼마나 완벽하고 당당하고 한결같이 인고의 세월을견디어냈는지는 친척간에도 동네에서도 유명했다. 그로 말미암아어머니에게 늘 따라다니는 품위에다가 위엄 같은 게 어릴 적엔 자랑스럽기도 했다. 그러나 사춘기를 거치고 인생에 대해 뭘좀아는 척을 하고 싶어지면서부터는 그런 어머니가 싫었다. 자존심 없는 사람을 가장 경멸스러워할 때였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일직선으로 자존심이 관통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어머니가 자존심은커녕 배알도 빼놓은 여자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자존심이란 적어도 익으면 돌돌 말리게 돼 있는 오징어 따위를 반듯하게 익히려고 일직선으로 꿰는 쇠꼬챙이하고는 달라야 할 것 같았다.

넌 연애결혼이니까 그런 일은 없겠지만서두 만약의 경우에 대비해 일러두는 건데, 혹시 첫날밤 네 신랑이 제 부모 잘 모셔야한다는 소리를 제일 먼저 하거나 계집은 또 얻을 수 있어도 부모는 또 얻을 수 없다는 식의 수작을 하거든. 그 자리에서 그 혼인파투 치고 나와도 나는 너를 내치지 않으마. 야단도 안 치마. 그쪽만 귀하게 기른 자식인 줄 알지 말거라. 너도 똑같이 귀하게 길렀어.

어머니 옷갈피에는 어디서 난 건지 흔히 향(香) 비누라고 일컫는 냄새 좋은 세숫비누가 구메구메 들어 있었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엔 옷장 버선 갈피마다에서 지폐가 쏟아져나왔다고 하더어머니는 향비누였다. 화장품을 살 때 선물로 얹어주는 작은향수병도 몇 개 마개가 헐겁게 닫힌 채 들어 있었다. 행여 늙은이 냄새가 날세라 그렇게 철저히 대비를 했던 것이다. 몸으로도마음으로도 추레해지는 걸 극도로 두려워했던 어머니다운 자기관리였다.

후기 졸업식은 처음이었다. 후기 졸업식을 코스모스 졸업식이라고도 한다는 소리를 어디선지 들은 것 같지만 그 가냘픈 꽃들이 피어나게 할 산들바람이 스며들 여지가 있을 것 같지 않게 늦더위는 견고하고도 끈끈했다.

온몸 도처에서 개칠한 냉기를뚫고 열꽃처럼 피어나는 열망에 그녀는 으스스 전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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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대답 대신 아직도 손님 사이를 누비며 인사치레하기에바쁜 장조카며느리를 눈으로 찾았다. 그러나 나보다 훨씬 잽싸게 큰동서를 찾아낸 둘째는 큰일난 것처럼 호들갑을 떨며, 올라갈 걱정도 안 하고 바보처럼 느릿느릿 답답한 동작으로 비프스테이크를 썰고 있는 내 걱정을 했다.
"아직은 늦지 않았을 거야. 지금부터라도 서두르면・・・・・

역까지 저희들끼리 이렇게 찧고 까부느라 더는 나한테 끼어들새를 주지 않았다. 대구역에서 주차장이 만원이라고 휙휙 호루라기를 불며 진입을 막는 것을 기화로 그들은 나를 짐짝처럼 내려놓기만 하고 가버렸다. 부창부수해서 얼씨구 하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표를 살 수 있을까 없을까 하는 걱정보다는 우선 그 눈꼴사나운 수작에서 놓여난 것만 해도시원해서 살 것 같았다. 형국이 형석이 내외는 내 앞에서 저러지는 않는다고, 내 자식들 두둔하고 싶은 기분도 나쁘지 않았다.

버스 안에서도 밖의 그를 계속해서 지켜보았다. 멋쟁이일 뿐아니라 체중관리도 잘한 것 같았다. 배도 안 나오고 다리도 길고걸음걸이는 여유 있고도 늠름했다. 나는 선반 위에 얌전히 개켜진 채로 있는 그의 트렌치코트를 쳐다보았다. 같은 상표는 아니지만 나도 꽤 괜찮은 바바리코트를 가지고 있었다. 그놈의 폐백만 아니었으면 나도 그걸 입고 왔을지도 모른다. 그랬으면 지금보다 적어도 십 년은 젊어 보였을 것이다.

그가 식구처럼 아낀다는 진돗개얘기를 하자 나는 마치 개 소리만 들어도 알레르기를 일으키는사람처럼 요란스럽게 질색을 했다. 그 모든 짓거리들이 그렇게재미있을 수가 없었다. 여북해야 자정이 넘었는데도 벌써 서울인가 싶었을까.

그의 명함을 들여다보았다. 아무런 직함 없이 이름 석자하고 집과 사무실 전화번호만 들어 있는 간결한 명함이었다. 내가 그에 대해 뭘 안다고 나는 그게 그답다고 여겨져 더욱 호감이간다. 뭐 하는 사무실인지는 그닥 궁금하지 않다.

거울이 크지 않았다. 거기에 하반신만이 적나라하게 비쳤다. 나는 세 번 임신했고 삼남매를 두었지만 실은 네 아이를 낳아 셋을 기른 거였다. 세번째임신이 쌍둥이였다. 그중 아우를 돌 안에 잃었다. 쌍둥이까지 밴 적이 있는배꼽 아래는 참담했다. 볼록 나온 아랫배가 치골을 향해 급경사를 이루면서 비틀어짜 말린 명주빨래 같은 주름살이 늘쩍지근하게 처져 있었다. 어제오늘 사이에 그렇게 된 게 아니련만 그 추악함이 충격적이었던 것은 욕실 안의 김 서린 거울에다 상반신만 비춰보면 내 몸도 꽤 괜찮았기 때문이다. 또한 욕조에 잠겨서나 나와서나 내 몸 중에서 보고 싶은 곳만 보고 즐기려는 마음도없지 않았을 것이다. 그때 나는 급히 바닥에 깔고 있던 타월로추한 부분을 가리면서 죽는 날까지 그곳만은, 거울 너에게도 보이나 봐라, 하고 다짐했다.

해가 바뀌니 환갑해였다. 낳은 해의 육감이 한 바퀴를 돌아온다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육갑을 한다‘는 게 결코 칭찬이 아닐 텐데 너도 나도 내 앞에서 육갑을 하려 들었다. 설날 아침 큰아들도 전화로 세배를 대신한다며 그 얘기부터 했다. 나더러 회갑잔치 대신 미국 구경을 오라는 거였다. 나만 좋다면 잔치는 칠순으로 미루고 그렇게 하기로 저희들 삼남매끼리는 벌써 합의를본 모양이었다.

"요는 네 에밀 시집을 보내겠다는 게냐, 시방."
"사랑하시잖아요? 살기가 어렵거나 모시겠다는 자식이 없어서가 아니라 사랑해서 하는 재혼, 얼마나 근사해 누가 뭐래도난 엄마를 변호하고 자랑스러워할 거야."
나는 이렇게 열심히 사랑 타령을 하는 딸을 물끄러미 바라만보았다. 속으로는 제까짓 게 사랑에 대해 뭘 안다구, 사랑이 별거라던? 인생 그 자체일 뿐인 것을, 이렇게 가볍게 만들려고 할수록 짓눌리는 듯한 기분이 들긴 했다.

정열이라 지금 조박사를 좋아하는 마음에는 그게 없었다. 연애감정은젊었을 때와 조금도 다르지 않은데 정욕이 비어 있었다. 정서로충족되는 연애는 겉멋에 불과했다. 나는 그와 그럴듯한 겉멋을부려본 데 지나지 않았나보다. 정욕이 눈을 가리지 않으니까 너무도 빠안히 모든 것이 보였다. 아무리 멋쟁이라고 해도 어쩔 수없이 닥칠 늙음의 속성들이 그렇게 투명하게 보일 수가 없었다.
내복을 갈아입을 때마다 드러날 기름기 없이 처진 속살과 거기서 우수수 떨굴 비듬, 태산준령을 넘는 것처럼 버겁고 자지러지는 코곪, 아무 데나 함부로 터는 담뱃재, 카악기를 쓰듯이 목을빼고 끌어올린 진한 가래, 일부러 엉덩이를 들고 뀌는 줄방귀제아무리 거드름을 피워봤자 위액 냄새만 나는 트림, 제 입밖에 모르는 게걸스러운 식욕, 의처증과 건망증이 범벅이 된 끝없는 잔소리, 백 살도 넘어 살 것 같은 인색함, 그런 것들이 너무도빤히 보였다. 그런 것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견딘다는 것은 사랑만 있다고 되는 것은 아니다. 적어도 같이 아이를 만들고, 낳고,
기르는 그 짐승스러운 시간을 같이한 사이가 아니면 안 되리라.
겉멋에 비해 정욕이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지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재고할 여지는 조금도 없었다.

그를 마지막으로 만난 날, 곧 미국 갈 수속중인데 될 수 있으면 오래 머물 거란 얘기를 하고 나서 그의 반지 낀 손 위에다 내 손을 정성스럽게 포개면서, 한 번 과부 된 것도 억울한데 두 번씩 과부 될지도 모르는 일은 저지르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완곡하게 말한다는 게 심하게 들리지나 않았을까. 눈치를 살폈지만 아무것도읽어낼 수 없었다.

그 동네를 원주민 동네라고 불렀다. 그렇다고 초가집이나조선 기와집이 남아 있는 건 아니었다. 60년대에 유행한 슬래브집들이 수리를 안 해 퇴락한데다가 좁고 더러운 골목길 때문에실제의 나이보다 훨씬 더 낡고 흉흉해 보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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