쉴 새 없이 여행을 다니지만 실은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는 사람들. 이라고 당신은 생각한다. 한 발짝도 전진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무언가를 제대로 보려면 상반되는 대상을 접해야 한다. 이제까지 당신은 그런 식으로만 무언가를 볼 수 있었다. 어둠을 통해서만빛으로 나아가며, 무심을 통해서만 사랑에 이른다. 호화열차나 야간비행기를 타는 이 사람들을 두고도 같은 말을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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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위대한 책이든 나쁜 책이든 신문이든, 가리지 않고 모두 읽는다. 굶주린 사람에게는 그것들 모두가 양식이 되어준다. 요컨대 한쪽에는 아무것도 읽지 않는 사람들이 있고, 다른 한쪽에는 읽기가 전부인 사람들이 있는 것이다. 사람들 사이에는 수많은 경계가 있다. 돈도 그 중 하나이다. 그런데 책을 읽는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 간의 경계는 돈의 경계보다 더 폐쇄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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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을 갈망하는 이에게 끗이라는 단어를 안겨주는건 외발자전거를 탄 곡예사에게 저글링을 시키고 불붙은 훌라후프를 통과해보라는 명령일지도 모르겠다. 분명히 두려울 것이다. 고독하고 힘겨울 것이다.
그렇다고 할지라도.
‘끝!‘이라 쓰면 ‘참 잘했어요’ 도장을 찍어주는 선생님은 이제 없다. 살아 있는 한 끝은 영원히 유예된다. 끝은 죽은 자의 것. 그러니 나는 끝이 아닌 끗의자리에서, 끗과 함께, 한 끗 차이로도 완전히 뒤집히는 세계의 비밀을 예민하게 목격하는 자로 살아가고싶다. 여기 이곳, 단어들이 사방에 놓여 있는 나의 작은 놀이터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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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을 위해 저것을 포기하는 일이 삶임을 부할 수는 없다. 다만 포기에도 여러 방식이 있을 것이다. 열매라는 과욕 때문에 이파리를 부숴뜨리는 일은 없도록, 파괴, 파쇄, 폐기보다는 감내, 수용, 인정의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포기는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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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음의 있음을 기약하며 이름을 붙이는 행위, 그것이야말로 시의 임무가 아닐까. 미래의 내가 어떤모습으로 살고 있을지, 복숭아나 마 아닌 무엇이 언제 또 나의 손을 부풀게 할지 알 길 없지만, 그 시간을 통과해왔기 때문에 마를 만질 땐 꼭 장갑을 끼는사람이 될 수 있었다. 그러니 오늘의 나는 오늘 쓸수 있는 문장을 쓰면서 이곳의 나를 찾아올 밀코메다의 시간을 기쁘게 맞이하고 싶다. 와야 할 시간은기필코 오게 되어 있다. 그럴 때 나의 인사는 "왜 왔어?" 가 아니라 왜 이제야 왔어이기를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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