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문제에서도 미·소는 대체로 현상 유지에 합의했을 뿐 아니라 닉슨은‘지체 없이‘ 유럽안보회의를 열자는 소련 측의 제안을 수락하였다. 그리하여 1973년 9월부터 제네바에서 실질적인 토의가 시작되어 1975년 7월 말헬싱키에서 열린 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 서독 등 35개국의 정상회담에서결실을 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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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년 4월 독일은 다시 작전을 개시하여 순식간에 덴마크, 베네룩스Benelux 3국을 제압하고 프랑스에 침공하여 6월 14일 파리를 무혈 점령하였다. 이보다 4일 전 독일이 유럽 전체를 제압할 것을 우려한 이탈리아는 영국과 프랑스에 선전포고 하였다.
대프랑스작전을 종결한 독일은 이어서 영국 본토에 대해 대대적인 폭격을 감행하여 영국에 ‘고독한 싸움‘을 강요하였다. 한편 유럽에서 독일의 승리를 선망의 눈초리로 바라보던 일본은 9월 독일에 패배한 프랑스의 식민지인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에 진주했고, 독일, 이탈리아와 더불어 3국동맹을 체결하여 이른바 로마-베를린-동경의 추축을 형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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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새로운 산업이 제조하는 상품들은 소비되지 않으면 경제적 번영을 기약할 수 없었다. 그러므로 ‘소비는 미덕‘이라는 구호 아래 광고와 판매업이 크게 발전하였다. 기업은 신문과 라디오를 통해 상품을 선전하는 데아낌없이 돈을 썼고 국민의 소비욕망을 자극하기 위해 새로운 유행까지도창조해냈다. 한편 고객을 직접 상대하면서 판매를 촉진하는 ‘세일즈맨‘이화려한 직업으로 등장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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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적으로 북부에 예속된 남부는 정치적으로도 북부에 예속되어 전쟁전 남부가 연방정치에서 차지하였던 지위를 전후에는 찾아볼 수 없었다. 초대 대통령 워싱턴부터 제16대 대통령 링컨에 이르는 72년 동안 8명의 대통령이 남부 출신이었으며 통치 연수는 50년에 이르렀고, 대법원장의 지위는60년 동안 남부 출신이 차지하였다. 또 남북전쟁 전까지 남부 출신은 대법관, 주요국가에 파견된 외교사절, 대통령의 각료, 하원의장 등 여러 공직의거의 반수를 차지하였다. 그러나 전후 50년이 지난 1912년 버지니아주 출신의 우드로 윌슨Woodrow Wilson이 대통령에 당선될 때까지 남부 출신 대통령은 링컨을 계승한 앤드루 존슨 한 사람뿐이었으며, 이 동안 임명된 133명의 각료 중 13명, 31명의 대법관 중 7명, 12명의 하원의장 중 2명, 외교사절의 10퍼센트 정도만이 남부 출신이었다. 이러한 숫자는 바로 전후 연방정치에서 남부의 쇠퇴를 설명해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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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도 건설은 공업의 전반적인 발전과 더불어 제철공업의 발전을 크게 자극하였다. 즉 1850년대에 생산된 철 648만톤 중 약 6분의 1에 해당되는 107만톤이 철로 생산에 사용되었다.
제철공업의 중심지는 철광석, 무연탄, 석탄 생산지를 부근에 갖고 있던펜실베이니아주의 피츠버그로, 1840년대 후반부터 본격적인 발전에 돌입하여 1860년경에는 미국의 철 총생산량의 반 이상을 차지하였다. 제철공업에서 생산되는 선철, 봉철, 압연철판은 뉴욕, 펜실베이니아, 매사추세츠의동부 3개 주와 서부의 오하이오로 수송되어 농기구, 섬유기계, 증기기관, 기관차 등 철의 가공 부문에 사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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