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처럼 유령의 존재는 과학이나 심리학 같은 법칙으로 다 설명할 수 없는 초자연적 현상의 실재다. 즉 유령은 정신작용이나 알레고리가 아니라, 유령 그 자체다. 소설은 마침내 초자연적 현상, 유령19 19이 실제로 나타나는 세계를 인정한다. 이는 토도로프식으로 설명하면, 환상 장르의 두 인접 장르 중 기이 장르 the genre : of uncanny에서경이 장르 the genre of marvelous로의 이동이다. 이 실재하는 유령은 기억 주체가 트라우마적 사건을 중심으로 기억하는 방식을 흐트러뜨린다. 트라우마를 기억하려는 힘과 기억하지 않으려는 힘의 긴장은기억의 위계를 바꿔놓는다. 이마치에게 있어 엄마의 폭력과 언니의죽음, 아들의 실종과 딸에게 행한 폭력, 남편 그리고 매니저 ‘K‘와의어그러진 관계 등 죄스럽고 아픈 기억은 이제 K, 즉 기석과 애틋하게사랑을 나눈 기억, 딸 준영과 손녀 ‘아인‘을 돌보았던 기억과 한데 뒤섞여 중심 없는 삶의 곡절이 된다. 이렇듯 정한아의 소설은 정신분석학적 맥락에서 주체가 유령을 상상하는 이유를 답습하지 않고, 유령을 상상하는 픽션이 구상하는 애도의 방식을 찾기 위해 이야기를잇는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는 그의 실종을 한편으로는 타의적인 밀려남으로 볼 수밖에없는 이유다. 다리 위를 걷는 일을 스스로 선택하긴 했으나 그는 "한줄의 다리에 불과했던 공간이 어느새 수많은 굴곡과 회로의 겹을 지닌 미궁이 되어" 자신을 "가두었"(p. 53) 음을 절감하며 난감함을 감추지 않는다. 자신이 기꺼이 기거했던 문학이란 세계를 이 세계가 더이상 용인하지 않음으로써 그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점점 현실에서배제된 것이다. 그렇게 볼 때, S 선생의 사라짐은 단지 개인의 실종이 아닌, 자본주의 체제 내 소설가와 소설 자체의 실종으로 읽히며구병모의 소설은 그러한 소설의 자리에 대한 깊은 응시의 결과물이라 할 수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박선우의 소설처럼 김채원 역시 ‘나‘(대체로 여성)를 서사적 존재로 설명하고 정립하는 데 있어 엄마와의 연속과 분리가 문제가 됨을 보여준다. 그러나 상실의 사건 이후, 엄마와 엉켜 있는 ‘나‘의 상태를 바라보고 언어화하는 그의 방식은 박선우와 매우 다르다. 후자가 서사를 인식 가능성의 조건으로 탐색하는 산문의 방식이라면 전자는 서사를 부수적인 것으로 무력화하는 시적 혹은 유희적인 공간을 구축하며 우리에게 그곳에 ‘없지만 있는 것처럼‘ 남아 있는 엄마이야기의 가능성을 전한다. 이토록 다른 ‘나‘들을 ‘이해 불가한 삶에서 ‘있어 마땅한 삶으로 옮기는 한 가지 언어로서, 일종의 규칙(혹은반칙)으로서 어머니가 있는 거라면, 어머니라는 타자는 더 이야기되어도 괜찮은 건지도 모르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강물을 노려보고 있다고 표현한 사람도 있고 강물 속으로 들어가려고 하는 것처럼 느꼈다고 말한 사람도 있지만, 그의 시선이 강물보다 먼 곳을 향하고 있다고 느낀 사람은 없었다. 그들은 모두 그사람을 풍경의 한 부분으로 보았으므로, 즉 몸에 밴 타성과 무신경으로 인해 그 흐릿한 사람을 하나의 인격으로 인식하는 데 주저했으므로 그의 내부에서 일어나고 있을지도 모르는 어떤 혼란에 대해서는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하나의 조건으로 고착된. 어쩌면 이미 조건 지어진.
이미 조건 지어진 자리를 받아들이는 불러들이는. 어느 결에굳건해진 너의 두 손에 대해. 지붕 없는 들판을 자신의 집으로 삼는.
스스로를 마주 보는 자리를 오래오래 들여다보는. 자기 자신을 껴안을 수밖에 없는 두 개의 손을 가진 하나의 마음에 대해.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