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복할 길 없는 내 안의 무력함이 발가벗겨져 검푸른 피멍이 든 모습을 본따놓은 것처럼 느껴졌다. 다시 해변에 닿는 일보다 더욱 힘겨웠던 것은 헤엄쳐 뭍에 닿은 다음 고부랑길이며 여기저기 서로 곧장 연결되면서 8자 모양을 이룬,
사람의 발이 거의 닿지 않은 오솔길을 오르는 일이었다. 아주 천천히 일정하게 한 발 한 발 내디뎠으나 암벽에 쌓인 오후의 열기 탓에 얼마 걷기도 전에 이마에는 땀방울이 맺혔고 목구멍에서는 피가 치솟았다. 가는 길 곳곳에 앉아 있던,
움직이다 말고 공포로 몸이 얼어붙은 도마뱀처럼 저 피아나의 고지로 다시 올라가기까지 좋이 한 시간 반이 소요되었다. 그뒤로는 마치 공중부양술을 터득한 사람처럼 아무런무게를 느끼지 못하고 마을 외곽의 가옥들과 정원들 사이를거닐 수 있었다. 그때 따라 걸었던 담벼락 너머에는 지역 주민들이 망자를 묻는 한 뙈기 땅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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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 놀라운 점은 이 일에 큰 노력이 들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말없이 음식을 삼키려다 무심코 건넨 말 한마디가, 그냥 계산하고 나오려다 공연히 덧붙인 말 한마디가, 머쓱해서 관두려다 툭 입에 올린 말 한마디가 누군가를 기쁘게 한다.
처진 입꼬리가 올라가고 걸음이 가벼워진다. 대단한 필력이필요하지도 않고, 엄청난 지면이 필요하지도 않고, 심지어 돈한 푼 들지 않는 사소한 언어들이 누군가의 하루에 아름다운 파문을 남긴다. 특별할 것도 없는 나의 입술에서 어떤 이의 영혼을 물들일 고운 빛깔이 흘러나올 수 있다니. 대문호도 아닌 내가 누군가 내내 만지작거리다 머리맡에 두고 잠들 소중한문장을 빚어낼 수 있다니.
이야말로 언어의 기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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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시를 가르쳐준 선생님이 사물에 지나친 감상을 투여하는 것을 경계하라 했다. "우체통이 외롭게 서 있다‘ 같은 문장을 쓰지 말라는 것이었다. 우체통은 그저 서 있는 것이지 외로운 것은 우리 자신이라며, 또 다른 선생님은 신파를 경계하라 가르쳤다. 잘 직조된 논리와 내적 정합성으로 설득해야지 무작정 나의 감상을 독자에게 강요하지 말라고 했다. 읽는 이보다 쓴 이가 먼저 울어버리면, 그게 바로 신파라며.
나는 버린 옷장을 보며 감상과 신파를 둘 다 획득했다. 옷장은 내장이 텅 빈 채 쏟아지는 빗줄기 아래 외롭게 서 있었고 나는 내가 비워낸 모든 추억과 역사가 서러워 신파적인 눈빛이 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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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역량을 파악하고 당당하게 결과물을 내놓기까지 많은 경력이 필요했다. 그런데 가장 쉬울 줄 알았던 내 감정에 대한 자신감을 쌓기가 이렇게 어렵다니.
하지만 앞의 두 자신감도 결국 거머쥐었듯 감정 자신감도 차곡차곡 획득하고 싶다. 화를 내도 된다는 타인의 승인 없이도 내 감정에 당당해지고 싶다. 부당한 대우에 좀처럼 화내지 못하고 생각만 빼곡해지는 당신이라면, 이미 숱한 배려를 했을 자신을 믿고 우리 함께 이렇게 외쳐보자.
"나에게 나쁘게 굴면 나쁜 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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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의 파장은 여전히 나의 대기에 은은하게 감돌다 공습경보처럼 몰아친다. 나는 잘 걷다가도 돌연 귀를 막고 비틀거린다. 아마 평생을 그럴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어지러울 적마다 내 귀를 막아주던 따듯한 손을 떠올린다. 엄마에게는 엄마의 가치관이 있었다. 그 범위 안의 행복이 있었다. 딸이 갔으면 하는 길은 당신이 일평생 쥐고 왔던 지도 안에 있어야 했다. 하지만 긴박한 순간에 탈주하는 딸에게 엄마는 기왕의 관습과 세계관을 넘어 한 인간으로서 공감과 응원을 건넸다. 그인간을 그렇게 빚어낸 인간으로서.
찰나의 마음일지라도, 나는 그것을 믿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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