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았던 어느 여름의 기억처럼 <눈부신 햇빛>은 빛의 유희를 통해 표현한분위기와 감성에 관한 것이다. 햇볕이 내리쬐는 하얀 나무집은 인기척이느껴지지만, 그 환영을 깨뜨릴 사람은 작품 속 어디에도 없다. 밝은 해안가는 깊고 탁한 전경 사이로 투과되고 햇살은 오솔길 위로 반복하며 액체처럼 흐른다. 극도로 패턴화된 침엽수의 윤곽선도 마찬가지로 물기를 먹은듯하다. 세선세공(금, 은 등의 연성을 이용해 가는 실 모양으로 만드는 귀금속 공예기술)으로 만든 칸막이처럼 반짝이는 경치를 가로지르는 나무들은 아마추어 사진가가 포착하기엔 어려울 수 있는 뚜렷하게 다른 두 개의 장면을 구분한다. 대신에 우리는 완벽하게 균형 잡힌 깊이를 보게 된다.
하랄 솔베르그의 서정적인 그림은 노르웨이 내에서는 높이 평가되지만 이외 지역에서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전능한 자연이 관찰자와 모든 인류를 압축된 원근법 안에 담는 작품 <산속의 겨울밤Winter Night inthe Mountains〉(1914)은 우주적 사유를 보여주는데 노르웨이 사람들이 매우사랑하는 그림으로 뽑힌다.
현재 오슬로에 있는 솔베르그의 집 근처, 오슬로피오르의 거대한 만을 보여주는 그림 〈눈부신 햇빛>은 신비로운 민간 설화와 신낭만주의의연출 방식을 바탕으로 한다. 이 화가는 짧은 여름과 긴 겨울을 가진 노르웨이를 묘사하며 거의 대부분 짙은 색의 나무로 표현되는 극단적인 명암법을 보여준다.

마로니에 나무는 영국의 가을을 대표하지만 그림 속의 나무는 꽃으로 불밝힌 5월의 마로니에다. 5월은 나뭇잎이 아직 신선하고 튼튼하기 때문에폭풍우가 맥을 못 추는 시기다. 과감하게 아래를 잘라낸 높은 시선은 멀리 비구름이 내려치는 장면을 강조하지만 우리의 시선을 사로잡는 것은기다란 번개를 맞아 바스락거리는 나무들이다. 칠엽수는 거대한 크기로자라는 나무인데 본래 공원이나 전원 지역의 사유지 길가에 심겼다.
데이비드 인쇼가 묘사하는 잉글랜드는 주로 윌트셔고 특히 좁은 반경의 데비제 지역 주변이다. 신비한 기원을 지닌 실버리힐에서 내려다보이는 에이브버리 고대 기념물들이 이 지역에 포함된다. 인쇼의 낭만적인 풍경은 보편적이고 오래된 것 위에 던져진 개인의 갈망과 연상의 그물망을묘사한다. <배드민턴 게임The Badminton Game〉(1972~1973)에는 거만하고 남성적인 나무들이 깔끔하게 고정된 집에 너무나 가까이 서 있다. 또 다른정원에는 술래잡기를 하는 이들 옆에 잘 손질된 칠엽수가 서 있는데 직설적으로 표현하자면 남근 형태의 꽃이 만발했다. 오랜 세월에 걸쳐 무르익은 인쇼의 나무들은 자연으로 하여금 스스로 이야기하게 한다.

알렉스 카츠의 유난히 긴 활동기에, 반짝이는 그의 모델들만큼이나 나무라는 주제는 이 뉴욕에 사는 예술가를 매혹했다. 그의 작품의 거대한 크기《아메리카 꽃단풍〉은 높이가 3.6미터에 이른다)에도 불구하고 초기 아이디어부터 실현에 이르기까지 연속성이 존재하는 이유는 카츠가 실물을 그리기때문이다. 빛과 그 빛이 계속 변화하는 효과에 매료된 그는 하나의 소재에반복적으로 다가가 충분한 재료를 얻게 될 때까지 유화 물감으로 스케치한다. 이 그림의 경우 매일 오후 4시 30분에 그린 것이다. 그런 다음 그는캔버스로 옮기기 위한 가장 효과적인 표현 방식을 선택한다.
풍경은 카츠에게 여가활동인 적이 없었다. 풍경은 일평생 그의 작품활동에 자극이 되었다. 그는 70여 년 전 미술 장학금을 받아 메인주를 방문했는데 그때 야외에서 그림을 그리는 즐거움을 처음 알게 되었다. 그때부터 그는 뉴욕과 메인주에서 구상화가이자 풍경화가로 활동하며 현대미술가로서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아메리카 꽃단풍>의 빛과 에너지는 확실히 미국적이며, 일본식 구도에서 영향을 받았다. 미국 북동부 전역에서 볼 수 있는 번식력 강한 이단풍나무는 여름의 색을 띠고 있어 탁트인 하늘을 배경으로 뚜렷한 윤곽을 드러내며, 모든 잎의 해부학적 구조를 상세히 묘사하는 빠른 붓놀림은 단순화된 배경의 정적을 깨뜨린다.

여기서 홍수는 재난의 징후가 아니라 오랫동안 얼어붙었던 겨울이 지나고 눈이 녹아 생긴 결과다. 가느다랗고 긴 자작나무들이 비는 가운데가문비나무와 참나무의 무리 어디에도 주목할 만한 것은 없다. 비록 자작나무는 주변 환경에 편승하지만, 한편으로 러시아의 부적이기도 하다. 자작나무의 알록달록하며 지붕처럼 펼쳐진 상단은 낙관적인 삶을 증명하고, 자작나무의 살균 기능은 생명을 보존하기 때문이다. 물에 잠겨 윤이나는 이 하얀 나무들은 이사크레비탄의 고요하고 서정적인 풍경만큼이나 러시아의 정체성을 이루고 있다.
극작가 안톤 체호프는 레비탄과 동시대인이자 가까운 친구였다. 그는 형제들과 함께 시골에서 보낸 어느 여름에 "자연에는 너무 많은 공기와 에너지가 있어서 그것을 묘사할 힘이 없다"고 썼다. "모든 작은 나뭇가지들이 소리를 지르며 레비탄의 그림에 등장하고 싶어한다." 체호프는 풍경과 사람을 묘사하기 위해 ‘레비탄 풍(Levitanesque)‘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잘생기고 무기력하고 우울한 성향의 레비탄은 심한 우울증을 앓았고,
1894년에 총으로 자살을 시도했다. 자신의 연극은 모두 코미디라고 주장했던 체호프는 1년 후 희곡 <갈매기The Seagull>에 레비탄을 등장시켰다.
제1막에서 무대 밖의 총소리가 난 후, ‘레비탄풍‘의 콘스탄틴은 제2막에서 머리를 붕대로 감고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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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라오는 전쟁에서도 승리했다. 또한 그는 반란 세력을 진압했다.
"신전에 손실을 입히고 파라오와 그 아버지의 방식을 내버린 자들이었다. 그런 뒤에 훌륭하게도 "그들에게 말뚝에 꽂아 죽이는 형벌을 내렸다."
줄줄이 칭찬 세례였다. 번역자들은 걱정이 많아졌다. 그들이 바랐던 것은 ‘여기에 각기 다른 문자들과 각기 다른 언어들로 된 놀라운포고문이 있다!‘ 같은 대담한 주장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과장과 허풍만을 발견했다. 한 구절 한 구절 의미가 드러나고 있었지만 성과는없었다. 이 모든 자랑과 과시는 돌의 다른 새김글과 어떤 관계가 있을까?

이집트에서 이 성공한 호사가는 계속해서 위험을 무릅쓰고 서방사람들이 보기에 새로운 광경을 기록했다. 고참 병사들조차도 그가말을 타고 스케치하는 용감한 모습에 혀를 내둘렀다. 그의 화판은 안장 위에서 균형을 이루었고, 사방에서 쏟아지는 총알을 아랑곳하지않았다. (그는 프랑스로 돌아온 직후인 1802년 그림으로 가득 찬 두꺼운 책을출판하게 된다. 엄청난 인기를 모은 그의 <상·하 이집트 여행 Voyage dans la Basseet la Haunce Egypte》은 유럽인들에게 처음으로 이집트의 경이를 엿볼 수 있게 했다.)드농은 도처에서 나폴레옹을 격찬하곤 했지만, 전쟁의 공포를 낭만화하진 않았다.

그는 언젠가 이 비문들이 의미를 드러낼 것이라고 믿으며 꼼꼼하게 모사해나갔다. 자신이 그 수수께끼를 풀어낼 사람이라는 생각은전혀 하지 않았다. "나는 열정적인 믿음과 맹목적인 열의를 가졌지만 그건 사실 자신이 이해하지 못하는 외국의 언어에 대해 기도하고믿고 경모하던 옛날의 신녀에나 비길 만한 것이다."

로제타석 발견으로 다소 지체되었지만 연구자들은 자신들의 강제유배라는 상황을 최대한 활용해 하던 일을 계속했다. 거의 즉각 그들은 감질나는 발견물 두 가지를 얻었다. 11799년 가을 나일강 삼각주 미누프라는 마을에서 두 젊은 기술자가 로제타석과 마찬가지로 여러 문자로 비문이 적힌 또 다른 돌을 발견했다. 높이 30센티미터, 길이 90센티미터의 검은 화강암 석판이었다. 이것은 평범한 민가 앞에 놓여 있었고, 집 주인은 그것을 벤치로이용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너무 심하게 마멸되어 있었고, 연구자들은 자기네가 알아볼 수 있는 몇 마디 (그리스어로 "젊은 왕의 ・・・ 언제나")만을 베낀 뒤 이동했다.

역설적이게도 그릇된 출발과 깨진 희망의 시기와 맞물려 이집트의모든 것에 대한 열광의 물결이 넘실거리고 있었다. 좌절에 빠진 학자들의 샐쭉함은 그 물결을 저지할 수 없었다. 건축, 패션, 심지어 머리모양까지도 새로운 열풍에 따라 변모했다. 한 영국 작가는 1807년이렇게 불평했다.

그는 허드슨 거니라는 친구에게 이렇게 썼다. 두 사람은 소년 시절부터 가까운 사이였고, 영은 다른 누구보다도 거니와 더 격의 없이친밀한 사이였다. 분명히 거니가 이 문제를 과장했겠지?
나는 반대로 그것이 이미 해결되지 않았다는 게 놀랍네..
영은 이집트 문자들을 조사하는 것으로 일을 시작했다. 패턴을 찾기 위해서였다. 선행 연구자들처럼 그도 성체자가 아니라 속체자 문서를 우선 집어 들었다. 선행 연구자들과 마찬가지로 그도 처음부터실패가 예정된 선택을 한 것이다.

이것은 불확실한 작업이었다. 이집트 문법이 어떤 모습인지 알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한 문장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들이 맨 앞이나끝에 올 수도 있고, 어순이 보다 비밀스런 어떤 규칙을 따를 수도 있었다. 이 모든 것은 성체자 문서의 상당 부분이 떨어져 나갔기 때문이 더욱 좋지 않았다. 실험은 끝없이 할 수 있었지만, 보장되는 것은아무것도 없었다.

영은 희미한 글자를 아주 천천히, 그리고 조심스럽게 손으로 모사하는 것이 어떻든 자신의 기억을 자극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이렇게 썼다.
쓰인 글의 훼손된 구절을 바로잡는 습관이 들지 않은 사람들은, 손이그것을 따라가는 동안 모든 글자의 복잡한 이동으로 인해 부지불식간이 얻어지는 막대한 이점을 획득할 수 없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으로 영은 개념상의 약진을 했다. 로제타석의
‘‘프톨레마이오스‘를 해독하면서 그는 성체자가 때로 소리를 나타낸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그 간단한 진술은 엄청난 함의를 지니고 있었다. 성체자가 소리를 나타낸다면 그것은 생각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1500년 동안 모든 권위자들은 문제를 잘못 생각하고 있었다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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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이 이집트를 침공한 배경에는 보다 간단한 동기가 있었다. 알렉산드로스 3세와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이집트를 정복했으니자신도 같은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는 학자와 예술가 무리를함께 데리고 갔다. 그들의 임무는 이집트를 연구하고 거기에 프랑스문명의 축복을 내리는 것이었다. 그들이 본 경이로운 것들에 대한 숨가쁜 기록은 이집트광狂 Egyptomania 으로 불리게 되는 열광을 자극하게된다.
유럽인들에게 이집트는 클레오파트라의 아름다움과 피라미드의 장엄함과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를 뒤섞어놓은 어떤 것이었다. 여기에 덜덜 떨리는 공포의 기미가 가미되어 흥분을 고조시킨다. 바로 미라다.

그러나 성체자를 경멸적으로 바라본 사람은 거의 없었다. 신전 벽과 오벨리스크에 새겨진 그것들은 깊숙한 곳에 있는 자연의 핵심을슬쩍 비춰주는 것으로 환호를 받았다. 현대 사회에서 이에 해당하는것은 상하이와 시카고의 물리학자들이 같은 방식으로 쓴 그리고 이해한) e=mc 같은 진실들일 것이다. 거의 2천 년 동안 유럽의 학자들은 고대 이집트 성직자들을, 오늘날 우리가 과학자를 생각하듯이 생각했다. ‘이 현인들은 암호를 만들었다. 그것을 아는 사람들에게는결정적인 통찰을 제공하고, 그 비밀을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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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진짜 문제는 계속 마음에 걸리는 구식 문제, 즉 믿음의 문제다. 나는 고만고만한 여러 신들이 내게 말을 걸거나 나 대신 끼어드는 모습을 도저히 상상할 수 없다. 이 많은 신들의 존재를 (내 왼손새끼손가락이나 노트북컴퓨터의 존재를 믿듯이) 내가 믿지 않는다는 것이차가운 현실이다. 그래서 믿을 수 없는 마음을 잠시 접어두고 이 신들을 마음으로 불러내는 행동을 할 수 없다. 어쩌면 이건 내가 제이미를 비롯한 여러 마녀들보다 정신적으로 건강한 사람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바로 이 때문에 내 우울증이 더 깊어지는 건지도 모른다.

우리는 샤먼들에게 자연스럽게 ‘미쳤다는 꼬리표를 붙인다.
과연 이것이 올바른 판단인가? 정신이 멀쩡한 스위스의 정신분석학자였던 카를 융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오로지 물리적 존재만 가능하다고 가정하는 것은 거의 웃음이 나올 만큼 우스꽝스러운 편견이다.
사실 우리가 가장 가깝게 알고 있는 유일한 존재 양식은 정신적인 것이다."

샤먼은 자연을 사랑한다. 성 프란체스코의 전통을 따르는 셈이다.
그들은 자연계를 자신과 동등한 존재, 가족으로 본다. 샤먼은 동물들을 가엾게 여기지 않고, 그들의 우월한 지혜를 끌어다 쓰는 것을목표로 삼는다. 샤먼의 또 다른 특징은 작업 속도가 빠르다는 것이다. 샤머니즘은 사람들(나도?)이 "침묵의 명상으로는 몇 년이나 걸릴수도 있는 경험을 몇 시간 만에 할 수 있게" 해주는, 일종의 영적인 지름길을 약속해준다. 인류학자였다가 샤먼으로 변신한 마이클 하너의 말이다. 내게는 이 말이 한없이 매력적이다. 솔직히 지름길을 싫어하는 사람이 어디 있는가?

샤먼들은 예전에 모든 인간이 갖고 있던 능력, 즉 동물의 영과 소통하는 능력에 자신이 다시 접촉하고 있다고 믿는다. 인간으로 변신할 수 있는 동물이나 원래 자신의 영역이 아닌 곳에서 돌아다닐 수있는 동물, 예를 들어 하늘을 나는 늑대 같은 동물은 특별히 강력한존재로 여겨진다. 여기서 중요한 것 하나. 샤먼은 늑대를 흉내 내거나 늑대에게 빙의된 것이 아니라 늑대 그 자체다.

조지프 캠벨은 말한다. 소용없다고 우리는 자신이 타고난 신화에서 결코 완전히 도망치지 못하며,
도망쳐서도 안 된다고 어렸을 때 머릿속에 자리 잡은 신화에 매달리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것은 우리가 원하든 원하지 않는 어차피 그 자리에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 신화를 유창한 웅변으로 해석해내야 한다....….
그 신화의 노래를 듣는 법을 배워야 한다."

곧유대교의 수많은 아이러니 중 하나는 휴식일 직전의 몇 시간 동안 사람들이 정신없이 바쁘게 돌아간다는 것이다. 날이 잠잠해지기전의 폭풍 같다고나 할까. 트즈파트 시내도 활동적인 에너지로 터질듯하다. 눈보라가 몰려오기 전의 워싱턴 같다. 모두들 정해진 시간이 급속히 다가오고 있다는 점 때문에 압박을 느끼며 물건을 사 모은다. 트즈파트는 움직이고 있지만, 그 움직임은 임의적인 것이 아니다. 모두들 같은 곳으로 향한다. 아니, 같은 시간이라고 하는 편이 옳을 것이다. 안식일은 공간이 아니라 시간 속에 존재하니까. 나도 움직인다. 나는 가게들이 문을 닫기 직전에 팔라펠 하나와 야르덴 포도주 한 병을 산다. 가게 주인들, 낯선 사람들이 샤바트 샬롬, 즉즐거운 안식일이라는 인사말을 건네는 것이 좋다. 이 딱딱한 땅에서 맛보는 부드러움이다.

이제 나는 책을 사랑하는 내 마음을 존중해주는 길을 마침내 찾아냈다. 그런데도 여전히 길을 잃고 헤매는 기분이다. 그 기분이 그어느 때보다 더 심하다. 불교나 도교에서 실패를 맛보는 것과, 나자신의 신앙에서 실패를 맛보는 것은 완전히 차원이 다르다. 특히 내가 지금 정직하게 노력하고 있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이 지긋지긋한 암호 때문이다! 아람어를 히브리어로 번역하고, 그것을 다시 영어로 번역한 글. 게다가 이 글은 처음부터 일부러 속기 쉽게 만들어져 있다. 마치 전화로 배배 꼬인 장난을 치는 것 같다. 내게 장난 전화를 걸어온 상대방을 미친놈으로 무시해버릴 수만 있다면야 아무상관이 없겠지만, 지금은 그럴 수 없다. 모두 흥미로운 이야기인 건사실이다. 핵융합에 관한 이야기가 흥미로운 것처럼.

한편 나의 도쿄 경험에는 아직 속편이 없다. 나는 이미 속편에 대한 기대를 버렸다. 기대야말로 경험의 커다란 적이니까. 그래도 나는 계속 기다린다. 가끔 이쪽저쪽으로 조금씩 방향을 바꿔가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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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개 우리는 종교를 믿는 사람들이 그렇지 않은 사람들보다더 신경 쓰는 일이 많을 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꼭 그런 건 아니다. 종교를 진심으로 믿는 사람들은 남들보다 더 적은 일에 깊이 신경을 쓴다. 그리고 나머지 것들에 대해서는 아예 상관도 안 한다.
윌리엄 제임스의 말처럼. "현명해지는 기술은 곧 무심히 넘겨야 할 것을 알아내는 기술이다."

"에너지는 기쁨." 블레이크는 이렇게 썼다. 중국 시인이라면 절대그런 말을 쓰지 않을 것이다. 자명한 말이니까. 중국인들에게는 에너지가 곧 생명이다. 우리를 감싸고 살아 움직이게 하는 활기, 즐거운 에너지를 중국어로는 기라고 한다. 기가 없으면 우리는 아무것도아니다.
그런데 내게는 기의 문제가 있는 것 같다. 기가 부족한 것은 아니다. 머리가 정신없이 빙빙 돌아가고 심장이 벌렁거리는 것을 보면그건 확실하다. 문제는 기의 흐름이다. 어쩌면 나의 기가 막혀 있는건지도 모른다. 내가 평범한 사람들보다 훨씬 더 많은 에너지를 쏟아야만 간신히 하루를 살아낼 수 있는 것도 그 때문일 수 있다. 내가느끼는 피로는, 힘든 하루 일을 마친 뒤 또는 10킬로미터를 달린 뒤에 느끼는 만족스러운 피로가 아니다. 아주 오랫동안 제자리 뛰기만하는 사람이 느끼는, 아무것도 성취하지 못했을 때의 피로에 가깝다. 막힌 나의 기를 뚫어줄 사람이 필요하다. 이를테면, 중국식 배관공이라고나 할까.

LU우한의 어둠이 물러나고 곧 탁 트인 고속도로가 나온다. 모두들지쳐서 의자에 늘어져 있다. 하지만 솔랄라가 내게 가만가만 다가와서 이상한 소리를 한다. 산에 도착하면 우리가 ‘척추 비틀기’를 할 것이라고 왠지 마음에 안 드는 소리다. 솔랄라는 또한 우리가 침을 많이 삼킬 것(도교에서는 침을 ‘하늘의 음료‘라고 부른다)이라는 말도 한다.
이건 정말로 마음에 안 든다. 하지만 솔랄라가 우리가 삼키는 것은 우리 자신의 침이라며 나를 안심시킨다. 그는 ‘앉아서 잊어버리기’라는 도교 명상수련법에 대해서도 말해준다. 이 말은 마음에 든다. 사실 나는 대학 2학년 때 이런 수련을 한 적이 있는 것 같다. 비록 그때는 여기에 종교적 의미가 있다는 사실을 몰랐지만, 솔랄라는 이번수련은 그때와 다르다고 말한다. 좌망(坐忘)이라고 불리는 이 명상수련법은 세상에서 벗어나 "내면의 고요하고 빈 공간"을 찾는 것이다.

‘난 해답을 찾아다니는 게 아니에요. 그냥 경험을 바랄 뿐이에요."
나는 미끄러운 두부와 씨름하면서 이 말을 곰곰이 생각해본다. 동양 종교와 유대교-그리스도교를 구분 짓는 특징이 바로 이것이다.
믿음보다 경험을 강조하는 것. 도교, 불교, 힌두교, 자이나교 등은
‘무엇을 믿습니까?"라는 질문을 던지지 않는다. 이것은 서구의, 특히 그리스도교의 버릇이다. 동양의 특징은 행동, 경험, 결과다.
결국 우리의 화제가 기에 이른다. 불가피한 결과다. 아직 야광 정자는 전혀 보이지 않고, 나는 도대체 기가 뭔지 감을 잡을 수가 없다.
"기는 에너지예요. 전기와 거의 비슷하지만, 아주 똑같지는 않아
"아침에 마시는 맛 좋은 커피 한 잔 같은 건가요?"
"아뇨, 그런 게 아니에요."

도를 찾아 나선 이후 샌디는 자신의 삶에서 불필요한 것들을 쳐냈다. 〈보그〉지 구독도 취소했다. 샌디 자신의 말처럼, 이제 어느 정도나이를 먹었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이제는허영을 부추기는 그런 것들에 더 이상 마음이 가지 않는다. 샌디가전과는 달리 마음을 쏟지 않게 된 일들은 그밖에도 많다. 집을 깔끔하게 유지하는 것, 직장일 등등. 적어도 예전처럼 일에 집착하지는않는다. 전에는 근무평가를 잘 받는 것에 마치 목숨이라도 달린 것처럼 굴었다.
대개 우리는 종교를 믿는 사람들이 그렇지 않은 사람들보다 더 신경 쓰는 일이 많을 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꼭 그런 건 아니다. 종교를 진심으로 믿는 사람들은 남들보다 더 적은 일에 깊이 신경을 쓴다. 그리고 나머지 것들에 대해서는 아예 상관도 안 한다. 윌리엄 제임스의 말처럼, "현명해지는 기술은 곧 무심히 넘겨야 할 것을 알아내는 기술이다." 샌디는 요즘 많은 것들을 무심히 넘겨버린다. 그 편이 결정을 내리는 데 더 편하다고 한다.

나는 《도덕경》을 휙 꺼내서 샌디가 좋아하는 61장을 읽는다. "여성은 양보하고 낮은 자리에 섬으로써 항상 남성을 정복할 수 있다."
노자의 말이 대부분 그렇듯이, 이 구절도 전통적인 지혜를 거꾸로뒤집어놓는다. 대개 우리는 양보를 부정적인 것, 약하다는 표시로생각한다. 적에게 한 치도 양보하지 말고 용감하게 싸워라. 네가 원하는 것, 네가 마땅히 누려야 하는 것을 쟁취해라. 나는 이런 마음가짐에 대해 노자가 뭐라고 할 것 같으냐고 샌디에게 묻는다.
"원하는 것을 이루는 방법은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지않는 것이라고 하겠죠. 무위라고."
"그 방법이 효과가 있던가요?"
"네. 하지만 밀어붙여야 할 시점이 언제인지 알아야 해요. 철저히수동적인 자세만 취하라는 게 아니니까요. 그런데 언제 힘을 써야할지 그냥 알 수 있어요. 지금처럼요. 내가 일행과 떨어져 산에 올라가서 뭔가에 마음을 열고 나를 이끌어주는 말에 귀를 기울이고 싶다고 했잖아요. 나는 여기에 뭔가 유용한 게 있다는 걸 알고 있었어요.
그게 얼마나 훌륭한 건지는 몰랐지만."
이것이 신호이기라도 한 것처럼 음식이 또 나온다. 물고기가 접시에 산더미처럼 쌓여 있다. 우리는 접시에 달려들어 아무 말 없이 음식을 마구 먹어치운다. 이렇게 맛있는 생선은 먹어본 적이 없다는말을 할 때만 잠시 멈췄을 뿐이다.

비행기에서 나는 샌디를 생각한다. 샌디는 자신의 신을 찾은 것같다. 비록 이름 없는 신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샌디 자신은 그런 식으로 생각하지 않을 것 같다. 그녀는 자신의 삶을 뒤집어엎지도 않았고, 은자처럼 살지도 않고, 내가 아는 한 몸에 경전의 글귀를 문신으로 새기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도교가 샌디에게 자양분을 제공해주고 있다. 나로서는 완전히 이해할 수 없는 심오한 방식으로, 샌디가 보고 싶을 것이다. 하지만 샌디가 인심 좋게 넘겨준, 겉에 사탕물을 바른 마카다미아가 담긴 커다란 통이 이별의 아픔을 달래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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