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 나크바‘와 함께 6월 5일이면 팔레스타인 주민들이 추모와 시위를 벌이는, ‘알 나크샤‘, 즉 나크사(좌절)의 날도 있다. 나크바의 날이 1948년 이스라엘의 건국에 따른 재앙의 날이라면 나크사의 날은1967년 제3차 중동전쟁 (6일 전쟁)으로 동예루살렘을 포함한 서안지구와 가자지구가 이스라엘의 점령하에 들어가면서 그곳에서 쫓겨난 팔레스타인 주민들의 좌절을 상징하고 추모하는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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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르주아 국가가 출발한 시기는 동시에 그다음의 혁명인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향한 이론형성과 모색이 시작된 시기였다. 마르크스는 독일에서 부르주아 혁명을 성공시키려면 어떻게 하면 좋을지에 대해골똘히 생각했다. 그는 그 열쇠를 부르주아지가 아니라 프롤레타리아트 속에서 찾아냈다. 프롤레타리아, 즉 ‘제4계급‘이 지도하는 부르주아 혁명이라는 것이 후진국들 혁명의 목표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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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사평온한 시기에 법치주의 체제만 갖추면 되는 국가라면 이런 헌법이 어떤 기능을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런 조건은당시에는 아직 존재하지 않았다. 따라서 현실의 정치는 규칙대로 절차를 밟아서 작동될 수 없었다. 고심해서 만든 정치제도는 오히려 비합법 수단인 쿠데타를 필연적인 것으로 만들었다. 쿠데타만이 현실에정치적 보장을 제공하는 유일한 수단이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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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20일 정오가 가까운 시각, 프러시아군 보병이 켈레르만군이 포진한 발미 Valmy 언덕 앞에 산개했다. 포격이 시작됐다. 프러시아왕은, 군주가 중심을 잡고 있지 않은 군대는 대포소리만 들어도 잠시도 버티지 못하고 패주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러나 상퀼로트의 군대는 패주하기는커녕 오히려 투지를 더욱 불태웠다. 켈레르만은 칼 끝에 모자를 걸고 흔들면서 ‘프랑스 국민 만세!"를 외쳤다.
외침이 대대에서 대대로 퍼져나갔다. 프러시아 보병은 전진하기를주저했고, 브룬슈빅은 공격이 실패로 끝났다고 판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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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은 모두 봉건제와 절대왕정의 문제가 기본적으로 해결되지 않은 상태에서 자본주의의 도입 · 발전이 시도될 경우 체제모순이밀려와 생산자 대중의 어깨를 짓누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봉건제와 자본주의라는 이중의 압박이 농민과 도시 하층민들로하여금 들고 일어설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다. 역설적이게도 급격한혁명을 피하기 위해 절대왕정을 점진적으로 개혁하려던 계몽가적인운동 자체가 민중의 혁명적 에너지를 불러내 혁명의 예행연습 같은것을 몇 번이고 할 수 있게 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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