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힘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 새로운 진화의 방향임을 인정하지 못한 채 오감에 의한 진화를 논하는 것은 이제 낡은 방식이다. 진정한 힘을 부여받는 것이 진화의 목표이자 존재의 목적이라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진화를 배우기 위해 오감만으로 현실을 탐구하던 방식은 이제 버려야 한다. 한정된 오감으로 현실을 인식하고 진화를 이해하던 방법은 미래의 우리 모습에는 더 이상 맞지 않는다.

다양한 감각의 인간은 넓어진 이해력을 통해 인격(personality)과영혼(soul)이 어떤 의미의 차이점이 있는지 알고 있다. 인격은 태어날 때 이미 가지고 태어난 것이며 생을 살다가 죽을 때까지 인간은그것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인간이 된다는 것과 인격을 가진다는 것은 동일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사람의 인격은 육체처럼 진화하는 데 필요한 수단이 되는 것이다.

만일 한 인격이 다양한 감각을 갖추게 되면 직관력(육감과 미묘한감정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다양한 감각의 인격은 자신뿐만 아니라다른 사람들까지도, 심지어는 오감만으로는 정의할 수 없는 뭔가설명할 수 없던 상황에 대해서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즉 어떤 행동이나 말보다는 그 안에 있는 의지를 먼저 알아보게 되고 거기에 더반응하게 된다.

인격과 육체는 영혼이 형상화된 모습이다. 영혼의 환생이 막바지에 이르고 인격과 육체가 수명을 다했을 때, 영혼은 비로소 인격과육체를 떠난다. 인격과 육체는 끝이 있지만 영혼은 끝이 없다. 인간의 육신을 떠난 뒤 영혼은 다시 영원불멸인 영겁의 상태로 돌아간다. 다시 자비와 완전한 순수함 그리고 끝없는사랑으로 돌아간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진정한 진화가 일어난다. 영혼 에너지의 끊임없는 구현과 환생이 물리적인 환경, 즉 우리가 살고 있는 이승이라는 학습의 장으로 돌아오면서 진화가 진행된다.

영혼의 일부분은 위대한 사랑을 경험할 수도 있고, 두려움이나정신분열을 경험할 수도 있으며, 중용적일 수도 있고, 대단히 자비로울 수도 있다. 이것은 영혼이 강한 존재이기 때문에 가능하다. 하지만 어느 일부분이 완전하지 않다면 그 영혼이 형성하고 있는 인격은 조화롭지 못하게 된다. 조화로운 인격이란 치유를 위해 인간의 모습으로 태어난 영혼의 일부분과 완전한 영혼이 어려움 없이교감하고 있는 상태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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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카프카적인 것이란 차라리 인간과 세계의 원초적인 가능성, 역사적으로 결정된 것은 아니지만 인간을 영원히따라다닐 수 있는 가능성의 표현처럼 느껴진다.

이른바 민주주의적인 사회 역시 비인격화와 관료주의화의과정을 겪고 있다. 지구 전체가 이 과정의 무대가 되어 버렸다. 카프카의 소설은 이러한 세계에 대한 몽환적이고 상상적인 과장이다. 전체주의 국가는 그것의 산문적이고 물질적인 과장이다

신비화와 전설에 현혹되지만 않는다면 프란츠 카프카의 정치적 관심 어디에도 의미 있는 흔적이라고는 보이지 않는다.
이런 의미에서 그는 막스 브로트, 프란츠 베르펠, 에곤 에르빈키슈 같은 그의 프라하 친구들이나, 역사의 의미를 알려고 한다면서 미래 모습을 그려 내기만을 즐겼던 다른 전위주의자들과 구별된다

내가 카프카의 유산에 이토록 열렬히 집착하는 것이나 그것을 내 개인적 유산으로 옹호하는 것은, 모방할 수 없는 것을모방하는 것(그리고 카프카적인 것을 한 번 더 찾아내는 것)이 유용하다고 생각해서가 아니라 그의 소설들이 바로 소설(소설이라는 시)의 근본적인 자율성의 모범을 보여 주기 때문이다. 바로이것에 의지하여 프란츠 카프카는 다른 어떠한 사회학적, 정치학적 성찰도 우리에게 말해 줄 수 없었던 우리 세기에 입증된그대로의) 인간 조건을 우리에게 말해 줄 수 있었다.

가벼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라는 것을 나는 『농담』에서 이미 발견했다. "나는 먼지 이는 도로를 따라 걸으며,
내 삶을 짓누르는 공허, 그 공허의 무거운 가벼움을 느꼈다."
『삶은 다른 곳에』. "야로밀은 때로 끔찍한 꿈을 꿨다. 지극히 가벼운 물체, 찻잔이나 숟가락, 깃털 같은 것을 들어 올려야 하는데 도저히 안 되고 물체가 가벼울수록 자신이 약해지는 꿈, 물체의 가벼움 아래 짓눌려 버리는 꿈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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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위대한 작품들에는 (바로 위대한 작품이기 때문에) 이루어지지 못한 부분이 있기 마련이다. 브로흐는 그가 훌륭하게이룩해 낸 모든 것들을 통해서뿐만 아니라 그가 의도했음에도 이루지 못한 모든 것들을 통해서도 우리를 고무한다. 그의작품에서 이루어지지 못한 것들은 다음과 같은 필요성들을일깨워 준다.
첫째, (건축적 명확성을 잃지 않으면서도 현대 세계에서의 인간실존의 복잡성을 포괄할 수 있게 해 주는) 발본적인 검사라는 새로운 기법의 필요성. 둘째, (한 음악에 철학과 이야기와 꿈을 한데용해할 수 있는) 소설적 대위법이라는 새로운 기법의 필요성. 셋째, (명확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가설적, 유희적, 역설적인 것으로 그치는) 전적으로 소설적인 에세이라는 새로운 기법의 필요성.

완고한 모더니즘의 이면에는 단순한 종말론적 믿음의 잔재가 있다. 하나의 역사가 끝나면 전혀 새로운 바탕 위에 수립된새 (더 나은) 역사가 시작된다는 것이다. 브로흐는 예술, 특히소설의 진화에 철저하게 적대적인 상황으로 완성되어 가는역사에 대한 우울한 의식을 지녔다.

쿤데라 제가 보기에 현대 세계에서 인간 실존의 복잡성을포착해 내기 위해서는 생략과 압축의 기법이 요구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끝없는 장황함의 함정에 빠지고 말지요. 『특성없는 남자』는 제가 가장 좋아하는 소설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렇지만 완성되지 않은 그 소설의 엄청난 규모까지 좋아하는 건 아니에요. 너무나 커서 한눈에 전체의 윤곽을 볼 수 없는 성(城)을 한번 상상해 보세요. 넘을 수 없는 인간적인 한계라는 게 있는 겁니다. 가령 기억력의 한계 같은 것이겠지요.
소설을 다 읽은 후에도 소설의 처음을 기억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소설은 형식을 잃게 되고 소설의 ‘구성적명확성‘도 흐려지게 되지요.

쿤데라 우선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이 있어요. 즉 소설의 몸으로 들어오면 성찰의 본질이 바뀌게 된다는 겁니다. 소설 바깥에서 사람들은 확인의 영역에 있죠. 사람들은 모두 자기가 하는 말에 대해 확신합니다. 경찰이건 철학자건 수위건 다 마찬가지예요. 그러나 소설의 영역에서는 확인하지 않습니다. 놀이와 가설의 영역이거든요. 그러니까 소설적 성찰이란 본질적으로 의문적이고 가설적인 겁니다.

카프카적인 것의 세계에서 코믹한 것은 마치 셰익스피어에게서처럼 비극적인 것의 부주제(희비극)를 표현하는 것이 아니다. 가벼운 어조를 통해 비극적인 것을 조금이라도 견딜 만하게 만들어 주는 것이 아니다. ‘비극적인 것‘에 수반되는 것이 아니다. 아직까지는 찾을 수 있는 위안, 즉 (진짜건 꾸며진것이건) 위대한 비극에서 찾을 수 있는 위안을 희생자들에게서 빼앗아 버림으로써 비극적인 것을 알의 상태에서 깨뜨려 버리는 것이다. 엔지니어는 조국을 잃었는데 그 이야기를 듣는 사람은 모두 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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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복은 우리가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부여되는것이다. 개인적인 것의 변덕스러움에 맞서는 보편적인 것의확실성이다. 예전에는 그렇게도 자명했던 가치들이 의문시되고 고개를 숙인 채 멀어져 가자 그 가치들(충실함, 가정, 조국,
규율, 사랑)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자는 마치 제복이야말로이제 더 이상 존중할 것이 없는 싸늘한 미래로부터 자신을 보호해 줄 수 있는 초월의 마지막 잔해이기라도 한 것처럼, 보편성이라는 제복의 마지막 단추까지 채워 스스로를 구속한다.

브로흐의 정신에 있어 근대란 비합리적인 믿음이 지배하는세계와 믿음 없는 비합리성이 지배하는 세계 사이에 걸쳐진다리다. 이 다리 끝에 윤곽을 드러내는 사람이 후게나우다. 죄의식 없는 행복한 암살자. 근대의 종말의 행복한 버전.

지나간 시간이 문득 하나의 전체로 드러나고 눈부시도록명확하게 완성된 형태를 이루는 것은 마지막 순간(사랑의 마지막, 인생의 마지막, 시대의 마지막)에 이르러서다. 브로흐에게마지막 순간은 후게나우고, 토마스 만에게는 히틀러다. 푸엔테스에게 그것은 두 천 년 왕국 사이의 전설적인 국경이다. 이같은 상상의 관측소에서 볼 때 역사라고 하는 이 유럽식 비정상(anomalie), 시간의 순수함 위에 묻은 얼룩은 이미 끝나 버린것, 포기된 것, 내팽개져친 것으로 보이고, 내일이면 잊힐 개인의 사소한 역사와 다를 바 없는 보잘 것 없고 감동적인 것으로 보인다.

사랑한다는 말 대신에 밤 이야기만 했던 사내는 그것이 사별한 부인에 대한 애정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싶어 한다. 안나의 행위에서 우리가 찾아볼 수 있는 이유들에 대해서도 거의비슷한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람들이 그녀에게 경멸적인 태도를 보였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녀 또한 그들을경멸해 버릴 수는 없었을까? 사람들은 그녀가 아들을 보러 가지 못하게 방해했다. 그러나 그것이 하소연할 데도 없고 빠져나갈 수도 없는 상황이었던가? 브론스키는 이미 약간 냉담해져 있었다. 그래도 그는 여전히 그녀를 사랑하지 않았던가?

비합리적인 체계는 정치적 생활까지도 지배한다. 공산주의 러시아는 지난 세계 대전에서도 상징의 전쟁에서도 승리했다. 가치를 열망하면서도 그것들을 분별할 수 없는 에슈 같은 인물들로 구성된 거대한 군대는 최소한 반세기 동안만큼은 선과 악의 상징을 퍼뜨리는 데 성공했다. 그래서 유럽인들의 의식 속에서 집단 수용소는 결코 나치즘과 같은 절대적 악의 상징으로 여겨지지 않는다. 월남전에 대해서는 집단적이고 자발적으로 항의했던 사람들이 아프가니스탄 전쟁에 대해서는 그렇게 하지 않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베트남, 식민주의, 인종차별주의, 제국주의, 파시즘, 나치즘 같은 단어들은 마치 보들레르의 시에서 색채와 소리가 서로 화답하듯 같은 울림을 갖는다. 반면에 아프가니스탄에서의 전쟁은, 말하자면 상징적 벙어리인 셈이고 절대적 악의 마술적 테두리 바깥,
상징의 간헐천(間歌川) 바깥에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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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사의 시대들은 대단히 길고(그것은 양식의 변덕스러운변화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다.) 소설이 우선적으로 검토하는 존재의 이러저러한 양상에 의해 특징지어진다‘고 볼 때 플로베르가 발견한 일상성 속에 담겨 있던 가능성이 활짝 펼쳐진 것은 칠십 년이 지난 뒤인, 제임스 조이스의 웅대한 작품을 통해서다. 오십 년 전 일군의 중부 유럽 출신 작가들에 의해 열린시대(종말적 역설의 시대)가 끝나기는 아직 멀어 보인다.

공산주의 러시아 제국에서 소설의 역사가 멈춘 것은 약 반세기 전이다. 고골리에서 비엘리에 이르는 방대한 러시아 소설에 비추어볼 때 이것은 엄청난 사건이다. 그러니까 소설의죽음이란 허황된 생각이 아니다. 이미 발생한 것이다. 그리고이제 우리는 소설이 어떻게 죽게 되는가를 안다. 그것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소설의 역사 바깥으로 떨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그 죽음은 조용히, 눈치채지 못하게 이루어지며 어느 누구도 화나게 하지 않는다.

소설의 정신은 연속의 정신이다. 모든 소설은 그에 앞선 작품들에 대한 대답이며, 소설에 앞선 모든 체험을 담고 있다.
그러나 우리 시대의 정신은 현재에만 고정되었다. 이 현재는너무 넓고 방대해서 우리의 지평에서 과거를 몰아내고 시간을 현재의 순간만으로 축소해 버린다. 이 같은 체계에 휩쓸린소설은 더 이상 작품(영속하게 하는 것, 과거를 미래에 결합하는것)이 아니라 다른 사건들과 다를 바 없는 시사적인 사건이며,
내일 없는 몸짓일 뿐이다.

예전에는 나 또한 미래를 우리의 작품과 행위에 대한, 유일하게 자격 있는 심판자로 생각했다. 한참 후에야 나는 미래를갖고 노는 것이 보수주의의 가장 나쁜 짓이며, 강한 자에 대한 비열한 아첨임을 깨닫게 되었다. 미래는 언제나 현재보다강하니 말이다. 물론 그것은 우리를 심판할 것이다. 분명 아무자격도 없으면서.
그러나 미래가 나에게 아무런 가치도 표상해 주지 않는다면 나는 무엇에 집착하는 것인가? 신? 조국 민족? 개인?
내 대답은 우스꽝스럽지만 그만큼 진지하기도 하다. 나는세르반테스의 절하된 유산 말고는 그 어떤 것에도 집착하지 않는다.

쿤데라 작가가 어떤 역사적 상황을, 표출되지는 않았으나인간 세계를 알 수 있게 해 주는 가능성으로 간주한다면 그는그것을 있는 그대로 그리고자 할 것입니다. 역사적 현실에 충실하다는 것은 소설의 가치와 관련해서 볼 때는 어쨌든 이차적이죠. 소설가란 역사가도 아니고 예언자도 아닙니다. 실존의 탐구자일 뿐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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