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사의 시대들은 대단히 길고(그것은 양식의 변덕스러운변화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다.) 소설이 우선적으로 검토하는 존재의 이러저러한 양상에 의해 특징지어진다‘고 볼 때 플로베르가 발견한 일상성 속에 담겨 있던 가능성이 활짝 펼쳐진 것은 칠십 년이 지난 뒤인, 제임스 조이스의 웅대한 작품을 통해서다. 오십 년 전 일군의 중부 유럽 출신 작가들에 의해 열린시대(종말적 역설의 시대)가 끝나기는 아직 멀어 보인다.
공산주의 러시아 제국에서 소설의 역사가 멈춘 것은 약 반세기 전이다. 고골리에서 비엘리에 이르는 방대한 러시아 소설에 비추어볼 때 이것은 엄청난 사건이다. 그러니까 소설의죽음이란 허황된 생각이 아니다. 이미 발생한 것이다. 그리고이제 우리는 소설이 어떻게 죽게 되는가를 안다. 그것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소설의 역사 바깥으로 떨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그 죽음은 조용히, 눈치채지 못하게 이루어지며 어느 누구도 화나게 하지 않는다.
소설의 정신은 연속의 정신이다. 모든 소설은 그에 앞선 작품들에 대한 대답이며, 소설에 앞선 모든 체험을 담고 있다. 그러나 우리 시대의 정신은 현재에만 고정되었다. 이 현재는너무 넓고 방대해서 우리의 지평에서 과거를 몰아내고 시간을 현재의 순간만으로 축소해 버린다. 이 같은 체계에 휩쓸린소설은 더 이상 작품(영속하게 하는 것, 과거를 미래에 결합하는것)이 아니라 다른 사건들과 다를 바 없는 시사적인 사건이며, 내일 없는 몸짓일 뿐이다.
예전에는 나 또한 미래를 우리의 작품과 행위에 대한, 유일하게 자격 있는 심판자로 생각했다. 한참 후에야 나는 미래를갖고 노는 것이 보수주의의 가장 나쁜 짓이며, 강한 자에 대한 비열한 아첨임을 깨닫게 되었다. 미래는 언제나 현재보다강하니 말이다. 물론 그것은 우리를 심판할 것이다. 분명 아무자격도 없으면서. 그러나 미래가 나에게 아무런 가치도 표상해 주지 않는다면 나는 무엇에 집착하는 것인가? 신? 조국 민족? 개인? 내 대답은 우스꽝스럽지만 그만큼 진지하기도 하다. 나는세르반테스의 절하된 유산 말고는 그 어떤 것에도 집착하지 않는다.
쿤데라 작가가 어떤 역사적 상황을, 표출되지는 않았으나인간 세계를 알 수 있게 해 주는 가능성으로 간주한다면 그는그것을 있는 그대로 그리고자 할 것입니다. 역사적 현실에 충실하다는 것은 소설의 가치와 관련해서 볼 때는 어쨌든 이차적이죠. 소설가란 역사가도 아니고 예언자도 아닙니다. 실존의 탐구자일 뿐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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