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위대한 작품들에는 (바로 위대한 작품이기 때문에) 이루어지지 못한 부분이 있기 마련이다. 브로흐는 그가 훌륭하게이룩해 낸 모든 것들을 통해서뿐만 아니라 그가 의도했음에도 이루지 못한 모든 것들을 통해서도 우리를 고무한다. 그의작품에서 이루어지지 못한 것들은 다음과 같은 필요성들을일깨워 준다.
첫째, (건축적 명확성을 잃지 않으면서도 현대 세계에서의 인간실존의 복잡성을 포괄할 수 있게 해 주는) 발본적인 검사라는 새로운 기법의 필요성. 둘째, (한 음악에 철학과 이야기와 꿈을 한데용해할 수 있는) 소설적 대위법이라는 새로운 기법의 필요성. 셋째, (명확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가설적, 유희적, 역설적인 것으로 그치는) 전적으로 소설적인 에세이라는 새로운 기법의 필요성.

완고한 모더니즘의 이면에는 단순한 종말론적 믿음의 잔재가 있다. 하나의 역사가 끝나면 전혀 새로운 바탕 위에 수립된새 (더 나은) 역사가 시작된다는 것이다. 브로흐는 예술, 특히소설의 진화에 철저하게 적대적인 상황으로 완성되어 가는역사에 대한 우울한 의식을 지녔다.

쿤데라 제가 보기에 현대 세계에서 인간 실존의 복잡성을포착해 내기 위해서는 생략과 압축의 기법이 요구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끝없는 장황함의 함정에 빠지고 말지요. 『특성없는 남자』는 제가 가장 좋아하는 소설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렇지만 완성되지 않은 그 소설의 엄청난 규모까지 좋아하는 건 아니에요. 너무나 커서 한눈에 전체의 윤곽을 볼 수 없는 성(城)을 한번 상상해 보세요. 넘을 수 없는 인간적인 한계라는 게 있는 겁니다. 가령 기억력의 한계 같은 것이겠지요.
소설을 다 읽은 후에도 소설의 처음을 기억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소설은 형식을 잃게 되고 소설의 ‘구성적명확성‘도 흐려지게 되지요.

쿤데라 우선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이 있어요. 즉 소설의 몸으로 들어오면 성찰의 본질이 바뀌게 된다는 겁니다. 소설 바깥에서 사람들은 확인의 영역에 있죠. 사람들은 모두 자기가 하는 말에 대해 확신합니다. 경찰이건 철학자건 수위건 다 마찬가지예요. 그러나 소설의 영역에서는 확인하지 않습니다. 놀이와 가설의 영역이거든요. 그러니까 소설적 성찰이란 본질적으로 의문적이고 가설적인 겁니다.

카프카적인 것의 세계에서 코믹한 것은 마치 셰익스피어에게서처럼 비극적인 것의 부주제(희비극)를 표현하는 것이 아니다. 가벼운 어조를 통해 비극적인 것을 조금이라도 견딜 만하게 만들어 주는 것이 아니다. ‘비극적인 것‘에 수반되는 것이 아니다. 아직까지는 찾을 수 있는 위안, 즉 (진짜건 꾸며진것이건) 위대한 비극에서 찾을 수 있는 위안을 희생자들에게서 빼앗아 버림으로써 비극적인 것을 알의 상태에서 깨뜨려 버리는 것이다. 엔지니어는 조국을 잃었는데 그 이야기를 듣는 사람은 모두 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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