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때로 불안이 나의 목을 조른다. 그럴 때면 벽에 붙은마야콥스키의 사진이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죽는 수도 있어, 죽는 방법도 있어"라고 말한다. 나는 로르카를 힐끗 바라본다. "죽임을 당하는 방법도 있긴 있지"라고 그는 말하지만 목소리는 들리지 않고 그의 입술도 움직이지 않는다.
이윽고 나는 파베세를 생각한다. 산다는 이 일, 산다는 이수수께끼로 물불 안 가리고 괴로워했던 그를. 그러면 불안이 한번 더 거세게 나의 목을 조른다. 이러고 누워만 있으면 안 될 것 같은 느낌, 당장 바람 부는 거리로 나가 정처 없이 쏘다녀야만 할 것 같은 느낌.

도덕은 자신의 가치체계의 정통성을 따라서 새로운 가치나 자신의 율에 어긋나는 가치에 대해서는 비정통성을 주장하고, 자신의 정당성을, 따라서 상대방의 부당성을 주장함으로써 자기 보존과 자기 수호의 속성을 굳히고, 그리하여상대적으로 도덕적이지 않은 모든 것에 강경하고 경직된 태도를 취한다. 기존의 도덕률은 마치 합법적 정통성 위에 세워진 전권을 부여받은 최고 권력구조와도 같아서, 그 권력에 위배되는 것을 반역으로 몰아붙인다.

그러나 한편으론, 도덕이란 게 물론 한 집단의 대다수가되도록 행복하게 되도록 탈없이 살아가기 위하여 하나의정신적 규범으로서 의지해야 할 바이긴 하지만 그 싹은 여전히 개인의식의 혹은 개인 양식의 계보 속에서 찾아내야하지 않을까? 결국 한 가치는 인간이 자신이 살아온 삶을정당하게 그리고 정직하게 재고 평가함으로써(평가하지 않는 한 가치는 태어날 수 없다) 생겨나는 것이며, 그것은 또한 자신이 살아온 것에 비추어 자신이 살아가야 할 바의 지표를 정하기 위하여 생겨나는 것이 아닐까? 가치는 선험적으로 혹은 만고불변으로 존재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우리의삶에 대한 평가 작업에 의해서 ‘태어나는‘ 것이다. 따라서가치는 우리의 평가 활동의 방향에 따라서 달라질 수도 있다. 그러므로 어떤 인간, 어떤 일에 기존 도덕률의 이름으로성급하게 유죄를 선고하는 것은 부당한 일이다. 결국 무엇이 도덕적인가, 무엇이 비도덕적인가 하는 물음의 ‘무엇이는 삶이 정당하게 그리고 정직하게 요구하는 바에 따라 변할 수밖에 없다.

한 인간의 행동에 서로 모순된 판단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가치관의 차이일 것이다. 그리고 사람에 따라서는, 기존도덕률에 의해 유죄 선고된 새로운 가치관을 몸소 행복하게실현함으로써 그 가치관의 옳음을 보여주거나 혹은 기존 도덕률의 응징에 따라 스스로 철저하게 파멸함으로써 그 기존도덕률이 썩어 있음을 보여줄 수도 있으리라. (1982)

이윽고 대전의 불빛이 점점 더 가까이 점점 더 밝게 다가왔고, 마침내 우리는 대전역에 내렸고, 약간의 활기와 대화를 되찾았다. 하지만 곧장 외삼촌댁으로 가지 않고 그 추운날씨 속에서 우리는 짙은 안개에 휩싸여 아주 묽은 점액질처럼 흐리게 빛나는 시가지의 불빛을 헤치며 마치 두 마리의 눈먼 물고기처럼 오래도록 유유히 그러나 암담하게 헤엄쳐 돌아다녔다.

내 머릿속에서 어머니는 한없이 걸어가신다. 내게 등을돌린 채 말없이 고개를 숙이고서, 점점 작아지면서 멀어지는 그러나 결코 내 시야에서 아주 사라지지는 않는 그 뒷모습. 그리고 이 지구 한편을 고즈넉이 울리며 걷는 그 신발 끄는 소리. 그래서 가끔은 어머니가 지구 반대편으로 그렇게 끝없이 걸어가 마침내 지구를 한 바퀴 돌아 내게 등을돌렸던 바로 그 지점까지 되돌아와서 조용히 내 문을 두드리며 "얘야, 내가 돌아왔다" 하고 말씀하실 것 같은 환상에사로잡히기도 한다. 그럴 때의 내 어머니는 내게 뒷모습만보이며 한없이 걸어가는 게 아니라 내 앞에 가만히 되돌아와 선 채 정면으로 나를 향해 밝고 환하게 웃는 모습이다.

사람은, 가령 물에 빠져 죽을 때 같은 경우엔, 자신이 살아온 한평생을 한순간의 비전 속에 다 보게 된다는 말을 어디선가 들었던가 읽었던 적이 있다. 그런데 내가 체험한 바로는 사람은 가장 가까운 사람의 죽음을 통해 자신의 지나간 삶을 아주 짧은 한순간에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지극히 선명한 영상으로 보게 되고, 그러고도 살아야 할 앞날에대한 어떤 본능적인 계획을 한순간의 청사진으로 보게 되는 것 같다. 물론 그 청사진은 오랜 혹은 짧은 시간 뒤에 또다시 변경될 수 있는 것이긴 하겠지만, 말하자면 가까운 사람의 죽음은 살아 있는 한 인간의 시각을 충격적으로 교정시켜줄 수도 있는 것이다. 나의 어머니가 돌아가신 지 두 달반이 되었고 그동안 그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해 밖에서는오히려 의식적으로 더 잘 웃고 더 잘 떠들면서도 혼자가 되기만 하면 멍청하니 슬픈 생각들의 진창에 푹 빠진 채 누워있기만 했고, 그러나 그 와중에도 모든 게 소리 없이 달라지기 시작했음을 이제 나는 느낀다.

어요그래, 또 한 해가 간다.
또한 해가 간다고 말하면서 누군가가 하품 섞어 눈물을다
또한 해가 간다고 말하면서 누군가가 숙면을 위한 한 잔의 술을 들고 잠자리에 눕는다.
그러나 누군가가 말하든 말하지 않는 또 한 해가 간다는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또 한 해가 간다. 1984년이 우리를떠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참으로 용감하다면 우리 편에서 먼저 1984년을 떠나야 할 것이다. 교수

그러나 떠난다는 것은 무엇인가?
떠난다는 것은 결국 자기 자신에게로, 자기 자신의 현실속으로 되돌아오기 위한 것이다. 끝과 시작처럼 떠난다는것과 되돌아온다는 것은 하나이다. 자기 자신으로부터 떠남으로써 자기 자신에게로 되돌아오는 것이다.
그렇게 무수히 떠나고 무수히 되돌아오면서 많은 시간을,
그것도 대부분 괴로움과 불행의 시간을 바침으로써 우리가얻게 되는 것은 어쩌면, 행복이란 별도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불행이 없는 것이 행복이라는 조금은 쓴, 그러나 넉넉한인식뿐일는지도 모른다. 아마도 인간은 상처투성이의 삶을통해 상처 없는 삶을 살아가는 법을 배워야 하는 모순의 별아래 태어났는지도 모른다. 상처 없는 삶과 상처투성이의삶 꿈과 상처. 그러나 그것이 우리의 일상을 더욱 굳건하게받쳐주는 원리, 한 몸뚱이에 두 개의 얼굴이 달린 야누스의원리이다.

그리고 가장 짧은, 그러나 가장 아름다운 30세라는 시는 이렇다. (내가 이 시를 번역하지 않고 그대로 인용하는것은 ‘find‘라는 동사 때문이다. 물건처럼, 자신의 의지나행동을 표현하지 못한 채 상대방의 눈에 문득 뜨이기만을기다리고 있음을 보여주는 듯한 이 동사를 구체적인 한 단어로 꼭 집어 옮겨놓기가 나로서는 힘들기 때문이다.)

그 배들이 그토록 아름다워 보였던 것은 ‘일상으로부터의떠남‘ ‘먼 곳으로의 여행‘을 늘 예비하고 있었기 때문인지도모른다. 그 부둣가에 서서, 가장 멀리로는 차츰 남빛을 때기 시작하는 하늘 꼭대기와 그 밑의 불그스름하게 물든 하늘 밑바닥과 바다, 그리고 수많은 배가 물살에 밀려 흔들리는 풍경을 바라보면서 이따금씩 말라르메의 바다의 미풍이라는 시를 속으로 읊조리기도 했다.

시골 마을에서 살던 어릴 적 나의 별명은 더펄개였다. 그시절 시골 아이들은 대개 위생 때문에 머리를 짧게 깎았지만나는 어깨 아래까지 머리를 기르고 다녔기 때문이다. 내가 살던 시골은 사람들의 성이 거의 같은 이른바 씨족사회로서 윗말, 아랫말, 건넛말로 이루어져 있었다. 내가 긴 머리칼을 출렁거리면서 친구를 찾아 혹은 심부름으로 윗말에서 아랫말로 아랫말에서 건넛말로 달려갈 때면 사람들은 머리칼이 더펄거리는 것을 보고 멀리서도 그게 나라는 것을알고 "저기 더펄개가 가는군" 하고 말했다.

태어나 성장하고 늙어가는 그 인생행로에서 사람은 자신의 고유한 이름 외에 새로운 호칭에 여러 번 부딪히게 된다.
자신의 고유한 이름이 아닌 새로운 호칭들은 어느 날 누군가에 의해 처음으로, 그야말로 느닷없이 날벼락처럼 가해진다. 그리고 그 순간 사람들은 자신의 위치를 다시 생각해보게 된다.

시 속에서나 현실 속에서나 나는 나 자신이 많이 받지 못했던 것에 앙심을 품고 있었던 사람이지만, 처음으로 선생님으로 불린(물론 그것은 단순한 사교적 호칭이었지만) 그순간 나는 나 자신이 그동안 나를 둘러싼 세계로부터 마땅히 받아야만 했었을 것들을 얼마만큼 받지 못했든 간에, 이제 무조건적으로 받는 시기는, 그리고 못 받았다고 앙앙 우는 시기는 끝나가고 있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눈치챘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나 자신이 나를 둘러싼 세계에 무엇인가를 줄 만큼 성숙한 인간이 못 되었다는 사실에 내가 선생님으로 불렸다는 게 몹시도 거북스러웠다.

올겨울 나의 꿈은 드디어 가장 멀리 제주도까지 날아갔다. 유난히도 춥고 유난히도 몸이 아픈 이 겨울, 영하 20도를 향해 곤두박질치는 이 서울이라는 세상에서 볼 때, 아나운서의 말에 의하면 "10여 년 만의 강추위로 영하 4도(!)까ㅣ내려갔다"고 하는 제주도란 곳은 얼마나 따뜻한 나라냐!
내가 자꾸만 서울에서 멀리 떠나 사는 꿈을 꾸는 것은 혹시, 서울에서 잘살지 못하는 나의 무능력을 ‘전원으로 돌아가자‘라는 능동적 의지로 위장하기 위한 것이 아니냐 하는,
슬며시 솟아오르는 의혹을 그러나 발뒤꿈치로 슬쩍 뭉개버린 채, 나는 여전히 눈물나게 따뜻한 나라 제주도의 꿈에 코를 처박고 있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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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찬휘가 싱글싱글 웃으면서 가사를 옮겨 적었다. 정말 보통 녀석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와중에도 나는 그애를 한번이라도 더 보려고 부단히 노력하고 있었다. 사실 이찬휘의 실물을 처음 마주한 순간부터, 그애가종이에 무언가를 적거나 태블릿PC를 들여다보고 있거나다른 조원들과 이야기하고 있을 때, 그러니까 그애의 시선이 다른 곳을 향하고 있을 때마다 나는 그애의 얼굴을허겁지겁 눈에 담았고 면밀히 훑었다. 끊임없이 바쁘게힐끔거렸다. 도저히 멈출 수가 없었다. 마치 그애를 보고있는 동안은 무언가 좋은 것이 내 주머니로 와르르 쏟아져 들어온다는 듯이. 그래서 마지막까지 하나라도 더 필사적으로 주워 담으려는 듯이.

나는 뭐라도 대답해보려 입을 벙긋, 열었으나 할 말이없어 다시 닫은 채 이찬휘가 말한 그 소절을 머릿속으로다시 불러봤다. 침착하게 복기했다. 그리고 인정해야 했다. 내가 고음을 시작하는 부분과 연음 부분에서 아주 약간, 이찬휘가 흉내 낸 그런 방식으로 부르는 경향이 있다는 것을. 하지만 그게 잘못되었다고는 생각해보지 않았다. 여태껏 그런 건 창법이나 기교의 일종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왜 이제 와서? 내가 물었다.

뒤이어 손차양을 만들어 유리문에 딱 붙이고 안을 들여다봤다. 분명 문밖에 영업 중이라는 팻말이 걸려 있었사이의 유리 너머로 보이는 홀과 주방에고, 나무 격자모두 불이 환히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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붕괴의 결과는 성장이다. 우리의 괴로움을 직시하게 돕는 심리치료 같은 방법은 삶이 통제를 벗어날 때 나타나는 불안과 우울을꽤 효과적으로 정리해주는 작은 산불의 역할을 한다. 붕괴를 통해좀 더 나은 대응의 기술을 배운다. 정신과 영혼에 새로운 활기를 불어넣을 기회가 된다. 붕괴는 치유로 나아가는 길이 될 수 있다. 우리를 갉아먹는 직장을 떠난다거나, 건강하지 않은 관계에 얼마나 큰대가를 치르고 있는지 진정으로 이해하는 시간이 될 것이다.

초대형 산불이 토양의 영양분을 앗아가듯, 엄청난 트라우마로받는 감정적 위협은 생각의 체계를 바꿔버릴 수도 있다. 트라우마를 유발하는 사건을 겪고 나면, 우리 뇌는 연구자들이 말하는 ‘두뇌하부 과활성 bottom-heary‘ 상태가 되기도 한다. 공포에 대한 반응을 형성하고, 주의와 경계를 관장하는 편도체가 예민해지는 상태다.
동시에 감정을 조절하고 정상적인 사고를 가능하게 하는 두뇌 상부의 기능이 둔해진다. 트라우마를 제대로 다루지 않으면 불안, 우울, 불면 외에도 심각한 건강 이상을 일으키는 증상을 겪을가능성이 매우 높다.

트라우마에 고통받는 사람들이 하루에 20~30분씩이라도 몸을 움직이면 비극적인 사건을 겪고 나서 각성 과민 상태가 완화된다. 동시에 신경계의 회복을 돕는 화학 물질이 분비된다. 차분한명상이나 식재료를 고르는 일처럼 마음을 보듬어주는 활동은 불탄 땅에 차분히 내리는 빗물이 되어준다.

하버드대학의 수전 박사가 시행한 연구에 따르면, 우리 중 3분의 1은 ‘부정적인 감정을 느낀다는 이유만으로 자기 자신을 나쁘게 보거나, 의도적으로 부정적인 생각을 피해버린다.
"정상적이고 본능적인 감정들마저도 좋거나 나쁜 것 중 하나로 분류해버립니다"라고 박사는 말한다. 후회 같은 감정들을 회피하며 잘못된 긍정성을 얻으려 한다면, 세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능력을 잃게 되어 결국 우리가 원하는 대로만 볼 것이다.
"불편함은 의미 있는 삶을 위한 대가다."
우리 안에는 더욱 풍부하고 힘 있는 삶의 이야기를 써 내려갈능력이 있다. 먼저 자기 자신에게 친절해야 한다. 그리고 타인과의유대를 통해 회복력을 길러야 한다. 비록 많은 이가 아니더라도,
다정한 친구들과 가족들이 있다면 모든 것이 무너진 폐허에 서 있더라도 그 위에 발을 딛고 일어설 수 있다.

나는 친구들과 이웃들, 친척들에게 위안을 받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가끔은 그 위안을 갈망하기도 했지만, 그런 관계들이내게 의미 있는 치유가 되지는 못했다. 아내의 죽음이라는 비극이내가 알던 이전의 삶에서 나를 우악스럽게 밀어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삶이 완전히 불타버린 나는 무력감에 빠져 사람들의 보살핌에 몸을 맡겼다.

나의 회복은 마치 엄청난 산불이 휩쓴 후 다시 시작하는 작은자연 생태계와 같았다. 마치 산불이 난 후 불도저에 다시 파괴된뉴잉글랜드의 작은 땅처럼, 헐벗고 버려졌지만 이내 한 겹 한 겹다시 회복을 시작했다. 결국, 삶은 내 안에도 더 많은 삶을 탄생시킬 것이다. 더욱 다양한 관계와 경험을, 감사를, 아름다움을.

"첫 번째 음은 다음 음의 한 부분인가?" 첼로 거장 요요마가언젠가 이런 질문을 던졌다. "아니면 하나의 무한한 우주로부터다음의 우주로 막 옮겨 간 것인가? 두 번째 음이란 새로운 또 하나의 발현이다.",

산불과 홍수, 지진, 허리케인 같은 재앙은 수천 년에 걸쳐 신화를 비롯한 여러 이야기 속에 등장하며 우리에게 전해주었던 사실을다시 한번 상기시켜준다. 모든 생명은 창조와 파괴의 균형 속에 춤추고, 서로 엮이고 피어나며 이전보다 더 큰 힘과 활기를 얻는다는사실에 대해서. 그리고 여기, 우리 삶의 가장 힘든 상황에도 평온함이 존재한다는 것을 잘 보여주는 옛 도교의 이야기가 있다.

개미들도 무언가를 가르친다. 풀이 우거진 프랑스의 어느 작은 땅에서, 암컷 바위개미는 둥지에서 9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귀중한 음식을 찾아낸다. 그리고 보금자리로 돌아와 맛있는 음식을 나눌 어린 개미들을 부르고, 음식이 있는 곳으로 이끈다.
그곳으로 가는 여정 내내 리더는 이따금 멈추면서, 뒤에 따라오는 개미들이 방향을 알 수 있도록 돕는다. 어린 개미들이 세로로늘어선 동료들을 이정표 삼아 따라올 수 있도록 함으로써, 나중에는 길을 기억해 혼자서도 음식이 있는 곳으로 갈 수 있게 된다. 이렇게 뒤따라오는 개미들이 모두 방향을 인지하면 뒤에 있는 개미가 리더의 자리로 가볍게 옮기게 되면서, 여정은 다시 시작된다.

자연은 경험이 적은 구성원에게 지혜로운 구성원과 자유롭게 함께할 기회를 주며 나아간다. 경험이 많은 개체로부터 살아가는 법, 안전을 유지하는 법,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이동하는 법처럼 필요한 지식을 배워가는 것이다. 심지어 분노와 슬픔을 다스리는 법까지 배운다. 이렇게 중요한 지식이 전해지며 공동체는 힘을유지할 수 있다. 모든 종의 장기적 생존에 필요한 적합성을 기르기에 아주 효과적인 방법이다.

시마드 교수는 나이 든 나무가 병이 들거나 죽어갈 때면 자신이 가진 탄소를 어린나무들에 더욱 많이 보내며, 이는 어린나무들의 방어기제를 활발하게 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덧붙였다. 나이든 나무가 보내는 탄소와 질병에 대한 저항성은 어린나무들이 앞으로의 긴 삶에서 마주할 수밖에 없는 온갖 스트레스에 대비할 수있는 큰 힘이 된다. 어른 나무의 보살핌은 매우 중요해서, 이런 보호 아래 자라는 어린나무들은 그렇지 않은 나무들보다 생존 확률이 무려 3~4배나 높다고 한다.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이전에 살았던선조들의 도움이 없다면, 우리는 필라네스버그 국립공원의 코끼리들처럼 고통스럽고, 불안감과 외로움이 가득한 삶을 살 것이다.

이 책이 담고 있는 교훈은 건강, 지혜, 감사, 만족감에 대한 것이다. 우리 인간은 지나치게 많이 소비하고, 다수만이 살아남는다는 적자생존 개념을 믿으며 타인을 공격하는 기이한 능력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자연은 무엇이 이 세상을 강하고, 아름답고, 생기넘치게 하는지 우리가 배울 수 있는 능력을 주었다. 우리에게도 자연의 지혜를 적용할 수 있는 경이로운 능력을. 이토록 소중한 가치들을 지키는 것은 세상을 지키는 것과도 같다.

나이 든 이들의 지혜 덕분에 우리는 상호 의존과 다양성이라는 근본적인 힘을 배울 수 있으며 그런 마음으로 세상을 볼 수 있다. 이들의 지혜는 매번 변화하는 상황에서도 옳은 선택으로 이끈다. 그런 방식으로 기품 있게 효율성에 대해 가르친다. 우리보다몇십 년 전 여행을 시작한 사람들의 안내를 받아, 우리는 미지의신비로운 세상을 환영하듯 받아들일 수 있다. 그리고 자연과 함께일상 속으로 걸어 들어갈 수 있다. 우리는 불길 속을 어떻게 헤쳐나갈지 배우면서 그 그을음을 통해 더욱 강해진다.

나이 듦은 인간, 코끼리, 침팬지, 늑대를 포함해 수많은 종 안에서 관계의 힘과 연대감이 녹아든 삶의 시간에서 나타난다. 특히대부분의 인간 사회에서 연대감은 단지 혈연관계에 국한된 것이아니다. 함께 먹고, 일하고, 울고, 아이를 키우며 삶을 나누는 사람들과 만드는 관계이기도 하다. 어떤 문화권에서는 한참 전에 세상을 떠난 이들과도 함께한다. 이 문화권에 사는 사람들은 자신이 이룬 성취가 무엇이든, 전에 살았던 사람들 덕분이라며 감사를 표한다.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자연과 현명하게 나이 든 이들의지혜에 의지하며 연대 의식을 넓히는 것이다. 소박하지만 강력한연대 의식은 혈연과 지연, 종을 넘어 지구 안에 사는 모든 생명을소중히 여길 줄 알게 해준다.
어느 순간 다시 우리는 새들의 울음소리와 개구리의 중얼거림에 좀 더 귀 기울이는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될지 모른다.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우리 인간은, 늑대와 사자와 매와 함께 이곳을 지킬 것이다. 각자 다른 모습으로 아침을 맞으며 태양을 마주할 것이라는 사실에 무한한 감사를 느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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ㄷ운전은 내게 거의 유일한 실패의 경험이다. 살면서 마주한 여러 관문들을 대부분 성공적으로 통과해왔다. 명문고 입시에 합격했고, 원하던 대학에 한번에 들어갔고, 장학금을 받았고, CPA도 —물론 공부하는 동안은 힘들고어렵고 외로웠지만-삼년간의 공부 끝에 합격했다. 빅펌 네군데 중 마음에 드는 두군데에 원서를 썼고 모두 최종 합격했으며, 그중 초봉이 더 높은 곳을 골라 입사했다.
스물다섯살 때의 일이었다. 무언가 해내고 싶은 마음 되고 싶은 모습이 있는데 아무리 노력해도 그 모습에 가닿을 수 없다는 게 얼마나 괴로운 일인지, 잘 몰랐다.
그러니까 운전대를 잡기 전까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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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람들은 고기를 조금 덜 먹는 것을 택하기도 하고, 누군가는 아예 먹지 않기도 한다. 누군가는 좀 더 인도적인 환경에서자랐다는 인증을 받은 고기를 구매하려 한다. 모두 좋은 선택이다.
하지만 힘을 모아 산업형 축산에도 간단하면서 비용을 감당할 수 있을 만한 변화를 도입해야 한다. 그것이 목숨을 희생해 세계 모든 사람의 식량이 되어주는 수백만 마리의 동물들을 존중하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상황이 나아진다 해도, 우리 곁에는늘 어떤 한 가지 핵심만으로 결정을 내리려는 강력한 유혹이 도사리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동물들을 향한 존중과 인간 본성 깊은 곳에 자리한 연민을 다시 발휘한다면, 지난날 모든 생명체의 고통에 눈멀게 했던 우리와다른 생명 사이의 분열을 치유할 수 있을 것이다. 매 순간 모든 생명체에게 선행을 베풀면 이러한 마음을 찾는 데 분명 도움이 된다.

동물의 존엄성을 기억하는 것은 가족과 친구, 이웃과 나라,
인간이 아닌 모든 생명체를 향한 새로운 믿음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하나의 종을 구하는 것이 우리 모두를 구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믿으며, 상호 의존이라는 자연의 교훈을 진정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우리와 다르기에 때로는 특이하게 보일 수도 있는 이들이지만, 늑대와 코끼리, 돌고래, 고래, 까마귀, 심지어 소나 돼지까지도우리가 옳은 길을 찾는 데 도움을 준다.

자연이 효율성을 중요시하는 이유는 이렇다. 지구에 쏟아지는 에너지는 풍부하지만, 생명체는 자신이 활용할 수 있을 만큼만받아 갈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떤 생명체가 한 포기의 풀처럼 직접햇볕을 받거나, 그 풀을 먹는 임팔라, 또는 그 임팔라를 잡아먹는사자처럼 간접적으로 살아갈 연료를 얻어 유용한 것으로 만들려면 엄청난 에너지가 필요하다.

북아메리카 원주민 블랙풋족의 일원이자 그래미상 후보에오른 음악가 잭 글래드스턴은 글레이셔 국립공원 외진 곳에 자리를 잡고는 이 모든 것들을 한 틀에 담는 흥미로운 생각을 한다. 그는 음악을 하면서 모든 생명을 움직이는 진정한 힘이 무엇인지 중점을 둔다고 말한다. "이 힘은 세 가지로 귀결됩니다. 조화, 균형,
리듬." 그리고 어떤 존재든 이 세 가지에 통달했다면 성공적인 삶을 살 수 있다고 한다.

마지막 리듬은 활발한 움직임과 차분한 휴식이라는 박자를번갈아 만들어내며 우리 모두를 하루의, 계절의, 삶의 순환으로 이끄는 것이다. 추위와 눈을 만나 더는 음식을 구하지 못하게 된 곰이 동굴에 웅크려 신진대사를 극한까지 낮추고, 다음해 봄이 움틀때까지 겨울잠을 자는 것처럼.

인간의 몸도 그렇다. 우리 몸의 각 세포는 우리가 먹는 음식에서 당을 태우는 훌륭한 방법을 만들어냈다. 단계별로 아주 조금씩 태우는 것이다. 이 작은 단계마다 에너지가 조금씩 방출되고,
어떤 부분은 나중을 위해 특정한 분자에 저장된다. 엄밀히 말해,
우리 몸에 들어온 당을 한꺼번에 태우면 그와 같은 양의 에너지를생산할 수 있다.

현대 신경과학은 우리의 현실을 만들어내는 데 우리 자신이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고 한다. 외부 세계에서 일어나고 있다고생각하는 것이 사실은 우리 안에 일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생각하는 습관은 바뀔 수 있다. 나이에 상관없이 언제라도. 그러니 자연이 사랑하는 효율성, 수고스러움을 최소화하려는 기본 자세를 단서로 생각해보는 것은 어떨까? 조금 덜 고민하면서도 정신적 에너지를 더 지혜롭게 사용해 생기 있는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라면.

우리 인간이 자연을 모방할 방법 중 하나는 문제를 너무 크게인식하고, 모든 해결책을 점검하면서 예측하려는 강박적인 성향을 내려놓는 것이다.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가리는 내면의 혼란스러움에 빠지지 않고 고요함으로 가득한 자연을 따라가면, 우리는조금은 편안해질 수 있다.

가장 높은 수준으로 자신을 아끼는 법이란 이미 필요한 모든 것을 가졌다고 생각하고 감사하는 마음을 깊이 새길 줄 아는 것이다. 이 모든 근본적인 관점의 씨앗은 이미 당신 안에 있으며, 그 씨앗은 자연에서 양분과 물을 얻었을 때 더 빨리 자라난다.

물고기 떼에게도 비슷한 교훈을 얻는다. 특히 물속에서 거대한 무리로 움직이며 매혹적인 광경을 보여주는 물고기 떼는 별 힘을 들이지 않고도 우두머리들이 이끄는 대로 완벽하게 합을 맞춘다. 물속에서 벌어지는 이 무도회는 예술 그 이상이다. 몸을 비틀며 앞으로 나아가는 각각의 물고기는 작은 소용돌이를 만든다. 물고기들은 물의 소용돌이 움직임에 몸을 맡기며 그대로 끌어당겨진다. 이런 자연의 한 조각에서 가르침을 얻은 캘리포니아 기술 연구소 학생들은 물고기 떼처럼 촘촘하게 모인 수직 풍력 발전 터빈을 고안해냈다. 생물학자 재닌 베니어스는 학생들이 자연을 모방해 만든 기술 덕분에 풍력 발전량이 열 배나 증가했다고 밝혔다.

1700년대, 데리의 주교가 한 설교에서 말했듯 즐거움을 주는욕망은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뿌리 뽑아야 할 정도로 심각한 위험이 아니다. 오히려 마르지 않는 자유의 원천이다. "열정과 애정은 반드시 제 역할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이성을 움직이기전까지 이들은 마치 바퀴가 떨어진 마차와 같습니다."

노자가 말했듯 인류 공동체는 풍족한 곳에서 부족한 곳을 채우는 자연의 본질적 순환을 받아들인다. 삶의 이런 순환은 다시 우리를 집으로 불러들여 쉬게 한다. 마침내 우리는 삶을 통해 조화와균형과 리듬을 영원히 노래할 수 있다.

산불같이 큰 변화가 닥쳤을 때, 무엇이 남았는지를 보면 그생태계가 어떻게 회복하고 다시 번성할지 예측할 수 있다. 새로운생명을 싹트게 할 씨앗이 보전되었는가? 예를 들어, 로지폴소나무의 솔방울은 불꽃이 닿았을 때만 터져 열리고, 불이 꺼진 후 잿더미 속에서 자라는 첫 번째 나무가 된다. 토양은 아직 고르고 비옥한가? 어린 식물들의 수정을 도울 벌과 벌레들이 근처에 있는가?
지하수는 오염되지 않았는가? 자연은 소멸로부터 가장 중요한 것들을 지켜내고, 수중에 있는 요소를 활용해 가능한 한 빨리 활기와안정감을 회복한다.

자연은 산불마저도 하나의 과정으로 만든다. 빠르거나 느리더라도 결국 영원히 지속하는 과정이다. 나무의 모양에 닿은 불꽃의 손길과 서로 간격을 벌려 자라는 습성을 보면, 산불의 영향력을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 이 땅은 재에서 창조되었고, 앞으로도 재속에서 재창조를 거듭하며 이어질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점은 이렇게 큰 재해 후에 자리잡은 생태계가 그 전보다 더 번성하고 강해진다는 자연의 기적이다. 이 생태계는 계속해서 성장한다. 숲에 살던 생명체들의 후손이모두 돌아온 후에도, 생태계는 끝없이 확장될 것이다. 더 큰 나무,
더 큰 버섯들, 더 두꺼운 이끼를 만들어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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