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현실 자체를 접할 수 있을까? 불교에서는 그렇다고 말한다. 당신이 꽃 한송이를 있는 그대로 직접 본다면 그 꽃은 진여의 현행일 수 있다. 인식 차원에 따라 우리는 꽃의 진여를 접하기도 하고, 우리마음이 조작한 이미지만 보기도 한다. 하지만 우리가 본체, 성경을 보는 차원에 이르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사물을 인식할 때 우리가 보는모습은 주로 대질경이나 독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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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속의 공성을 간파할 때 당신은 자신이 곧 아버지라는것을깨달을 수 있다. 그래서 이제는 이렇게 말하지 못한다. "아버지와 관련된 것은 단 하나도 갖고 싶지 않아. 정말 화가 나거든." 그렇지만 사실 당신은 상속된 당신 아버지다. 당신이 할 수 있는 일은 당신 자신과 아버지를 화해시키는 것뿐이다. 아버지는 저 밖에, 당신과 별개로 존재하지않는다. 그는 당신 속에 존재한다. 이것을 알고 화해할 때, 그제서야 평화로울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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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반은 평안, 자유, 윤회의 종식을 뜻한다. 깨달음은 밖에서오지 않는다. 누가 주는 것도 아니다. 심지어 붓다도 주지 못한다. 깨달음 종자는 우리의 아뢰야식 속에 이미 존재한다. 그것이 바로 불성(佛性, 본래부터 갖춘깨달을 수 있는 성품)이다. 우리는 그 씨앗을 잘 키우기만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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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장의 가장자리 및 바로 이웃한 골목에서는 예술과 ‘디자인‘ 그리고 기발한 제품들이 거의 균등하게 영역을 나눠 갖는다. 저기, 파비오 리에티가 그린 가짜 건물 창문-보부르 공공주차장의 통풍관을 감추고 있는 우아한 트롱프뢰유-에 서있는 여인의 영원불멸한 시선 아래에, 퐁피두 센터와의 근접성에 이끌린 화상(畵商)들이 오스만 대로나 라 보에티 거리에있는 이미 너무 오래된 본점들보다 더 활기찬 미술 화랑을 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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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랭 거리와 쥘리앙라크루아 거리의 교차로에는 바지 전문점인 ‘셀립테’만이 버티고 서 있다. 나머지 세 모퉁이 중 두 곳은 공터가 되었고, 한 곳은 전체를 벽으로 봉쇄한 건물이 차지하고 있다.
18번지와 22번지에는 호텔 겸 카페가 여전히 서 있고, 20번지와 24번지도 아직 건재하다.
홀수 번지 중, 21번지는 철거 중이고(불도저, 굴삭기, 조명등이 보인다) 23번지와 25번지는 완전히 허물어져 있다. 25번지이후로는, 더 이상 아무것도 없다.
26번지 자리에는 간이 숙소로 개조한 작은 트레일러가 들어서 있다. 자동차 잔해들.
수거되지 않은 쓰레기 더미(쥘리앙라크루아 거리에서는 소집된 군인들이 파업 중인 도로 청소부들을 대신해 일하고 있다).
도로 한가운데 죽어 있는 참새 한 마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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