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많이 보고 더 많은 것을 듣고 더 먼 곳까지 갈 수 있어.
갈 수 있다. 나는 웃고,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생명체를 주시하면서 기억하면서 길을 간다. 나는 길을 간다. 예정된 상실을 조금씩 미루면서, 나는 길을 간다. 나의 사랑스럽고 지긋지긋한 개들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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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의 의중 모를 말들은 나를 당혹게 만들었으나 그것이 불화로까지 번지지는 않았는데, 이번은 좀 예외다.
시작은 사과였다.
올해도 어김없이 문덕 이모가 햇사과를 보내왔다. 대구에서 과수원을 하는 이모는 매년 가을이면 첫 수확한 사과를 서울로 부쳤다. 엄마와 아버지 둘이 먹기에는 양이 많아 늘 반을 갈라 내게도 나누어주었다. 해서 가을엔 연례행사처럼 본가에 들러 사과도 받아가고 무른 과실로 만든 잼도 맛보았다. 올해는 또 언제 사과를 가지러 가야 하나 되는 날짜를 꼽는데 엄마가 불쑥 본인이 가져다주겠다며 이사한 집의 주소를 부르라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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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만 움직여도 삐걱거리는 매트리스에 가만 누워 있으면 할머니 방에서 나는 소리가 미약하게 들려왔다. 쌕 쌕, 하고 가쁘게 숨을 뱉는 소리였다. 숨소리는 주로 새벽에 들렸고, 그때마다 나는 잠에서 깨어 한참을 뒤척여야 했다. 옆방으로 가 할머니의 상태를 살펴야 하나 고민하다가도 그녀가 내게 엄포했던 사항들을 떠올리면 쉽게 발을 뗄 수 없었다. 천명은 시간이 갈수록 커졌다. 그럴 때 나는 캐리어 깊숙이 숨겨놓은 담배를 꺼내 조용히 집을 나와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날 때까지 연립 앞 놀이터에서 천천히 담배를 태웠다. 서로의 생활에 발 담그지 않고, 집주인과 세입자라는 관계하에 한시적으로 동거하는 것. 그렇게 호의도 관심도 가지지 않은 채 할머니와 나는 한집에서 살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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깔끔하고 깐깐한 노인이라 호흡 장애 외에는 신경쓸 만한 게 없을 거라고 직원은 덧붙였다.
이복례 할머니의 집은 무악산 아래 있었다. 한 손에는 타투 머신과 니들, 잉크를 넣은 가방을 들고 다른 손으로는 옷가지를 넣은 캐리어를 끌며 가파른 오르막길을 올라갔다. 노상의 과일 트럭에서 자두를 팔고 있었다. 빈손으로 가기 뭣해 자두 한 봉지를 샀다. 봉지 입구에 코를 대자 달고 향긋한 냄새가 훅 풍겼다. 벌써 여름이네. 폴로셔츠를 입은 사람들이 근린공원에서 배드민턴을 치고 있었다. 셔틀콕이 라켓에 부딪히는 소리를 들으며 나는 할머니의 집을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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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과 헌진의 겨울이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아서. 회사에서 잘린 뒤 나는 오픈 런 아르바이트를 뛰었다. 명품 매장 앞에 줄을 서 시계나 가방을 구매 대행하는 일이었는데, 비나 눈이 오면 웃돈을 더 얹어주어 급전이 필요할 때는 짐짓 눈 예보를 기다리기도 했다. 이번 겨울은 지독히도 춥더라, 생전 안 신던 어그부츠까지 꺼내신었다. 같은 말을 주고받다 헌진에게 문득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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