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인은 종이를 들어 조심히 펼친다. 종이에 쓰인 몇마디 글자가 눈을 어지럽힌다. 많지 않은 글자들, 주인은 그 글씨체를 알고 있다. 언제나처럼 간격이 좁은 손님의 글씨체다. 주인의 얼굴이 바뀐다. 알 수 없을 정도, 눈치챌수 없을 정도, 들키지 않을 정도로 아주 살짝, 그의 어깨가 떨린다.
그러나 영원토록은 아니다.
한참을 자리에 서 있던 주인이 흩어진 몸을 다잡고 다시 청소를 시작한다.
주인은 창을 닦고 책들을 가지런히 매만진다. 그러다 바쁘던 손길이 느슨해진다. 서가 사이의 빈 공간을 보았기 때문이다. 손님의 손길이 스치고 간 자리에 남은, 딱 책한권만큼의 공간. 한동안 망설이던 주인은 그 공간을 여백으로 남기기로 한다. 그리고, 정리가 끝났다,라고 결론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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꿀벌과 나비가 상상의 정원에서 지치지 않고 날아다니게 해야 한다. 자기만의 방이 있든 없든 기술이 그 공간을 장악하도록 내버려 두어선 안 된다. 그 성난 목소리들이 당신의 베개를 차지하도록 방치해선 안 된다. 자신의 공간을 되찾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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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로운 일이 있을 때 그중 일부만 내보여도 용기를 얻을 수 있다. 독자에게 얼마나 내보일지는 나중에 글을 고치면서 결정해도 되므로 일단 자신을 깊이 파고든다.
이 단계에서 얻을 수 있는 뜻밖의 이점은, 우리가 끔찍하게 여기고 우리 안에 꽁꽁 감춰둔 것이 밖으로 나와 빛을 받으면 생각만큼 나쁘지 않다는 것이다. 그것은 달콤하고 밝은 기억을 가두고 있다. 당신이 가장 어둡고 수치스러운 비밀과 함께 무엇을 끄집어내는지 보면 깜짝 놀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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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츰 알게 된 사실이지만 현준은 ‘이것은 ~가 아니다‘
라는 말을 즐겨 썼는데, 그 배경에는 보라가 잘 이해할 수없는 서양 철학자의 생각과 이상한 그림들이 존재했다.
현준의 간단명료하고 직설적인 평가는 보라를 당황하게 했지만 어떤 의미에서 그 말은 보라가 가장 듣고 싶었던 말이기도 했다. 그뒤로 보라는 현준에게 자신이 고민하고 괴로워하는 것, 자신이 쓰는 글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씩 털어놓기 시작했다. 삶과 글쓰기에 관한 고민을 최대한 촌스럽지 않게 표현하기 위해 보라는 신중을 기했고 그래서 현준에게 보내는 이메일을 작성하는 데에는 늘 오랜 시간이 소요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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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냉담한 표정 같은 건 그에게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그가 무언가를 더 얘기하려 할 때 전화벨이 울렸다. 남자는 예예, 하며 허공을 보고 몇차례 허리를 숙이더니 돌연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머리를 긁적였다. 가격 네고가 얼마나 가능하냐는 연락이었다. 이어서 다른 부동산 두군데에서도 연락이 왔고 남자의 목소리는 다시 활기를 띠었다. 보아하니 세 팀 간에 비딩이 붙은 모양이었다. 남자는 인사도 없이 집을 나섰다. 그가 마지막으로 전화기 너머로 던진 말은 당장 계좌번호를 주긴 곤란하며 처음 제시한 가격보다 금액을 높여야겠다는 거였다. 그들 사이에 일어나는 보이지 않는 경쟁, 말하자면 집의 새로운 주인이 되는 일 따위는 우리와 하등 상관이 없는 세계의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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