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식은 안근에 의지해서 작용하고 이식은 이근에 의지해서 작용한다. 이와 같이 안식에서 신식까지의 전오식 자신만의 특정한 한은 근에 의지해야만 작용한다. 마찬가지로 의식은 의근에 의지해서 작용한다. 무엇을 의근이라 할까? 눈을 안근이라 하고 귀를 이근이라고 하니까 많은 사람들은 뇌를 의근이라고 생각한다. 결론부터 말하면 이것은 오해다. 안근에서 신근까지의 5근이 육체적인 것인 반면, 의근은 마음에 속하는 어떤 것이다. 부파불교(소승불교)를 대표하는 설일체유부는 의근을 직전 찰나에 작용하고 소멸한 6식이라고 했다. 어떤 소리를 듣고 모차르트의 교향곡이라고 생각했다고 하자. 소리를 들은 것은 이식이고, 그다음 순간 모차르트의 교향곡이라는 생각을 일으킨 것은 의식이다. 이때의 이식이 의근에 해당한다.
법이라는 용어는 불교에서 매우 중요하다. 법에 해당하는 산스끄리뜨 원어는 달마dharma 이며 빨리어로는 담마dhamma 인데, 이것이 중국에서 ‘법‘으로 의역되었다. 불교에서 사용되는 법의 의미 가운데 중요한 것은 다음의 세 가지다. 첫째는 진리, 둘째는 (부처님의) 가르침, 셋째는 존재 · 현상 · 사물이다. ‘법을 깨닫다‘ 할 때의 법은 진리를 뜻한다. ‘불법(佛法‘은 부처님의가르침이라는 뜻으로 이때의 법은 가르침을 의미한다.
열반에 이르는 데 관건을 쥔 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 이 세상이다. 이 세상은 18계 속에 다 들어가며, 18계를 구성하는 하나하나는 죄다 무상하고 무아다. 이처럼 세상의 모든 것은 무상하고 무아라서 자신의 탐욕과 어리석음으로 붙잡으려고 해도 언젠가는 다 떠나간다. 그러니 놓을 줄도 알고, 과거에 오염된 눈이 아니라 순간순간 새 눈으로 ‘있는 그대로‘를 보면서 사는 것이 열반에 이르는 길이다. 이것을 보이고자 불교는 모든 존재를 5온이나 12처 또는 18계의 체계로 분류하는 것이다. 무상하고 무아가 아닌 모든 것은 이름일 뿐이니 이름에 속지 말아야 한다.
참고로 『반야심경』에 나오는 ‘무색 무수상행식‘은 5온이 자성으로서는 없다는 뜻으로, 5온은 곧 공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지금까지의 설명을 통해, 5온이 곧 공이라는 것은 일체가 곧 공임을 나타낸다는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무안이비설신의 무색성향미촉법‘과 ‘무無안계 내지 무의식계‘는 각각 12처의 공과 18계의 공, 곧일체의 공을 뜻한다.
유식에서는 우리의 번뇌에 선천적인 것과 후천적인 것, 이 두 가지가 있다고 한다. 전자를 생기후자를 분별기번뇌, 번뇌라고 한다. 태어날 때부터 본능적으로 갖고 있는 번뇌가구생기 번뇌라면, 잘못된 가르침에 영향을 받거나 본인의 분별망상에 의한 번뇌가 분별기 번다. 말나식이 일으키는 번뇌는 모두 구생기 번뇌다.
자신의 마음이면서도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고, 나와 내 것에 대한 집착은 바위처럼 견고하다. 문득 정신을 차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길을 찾아 횃불을 들었지만 그것도 잠시, 거센 바람에 횃불은 곧 꺼지고다시 찾아온 암흑 속에서 망연자실 서있다. 본유무루종자가 있다고 하나 엄동설한 굳은 땅에 묻힌 전단향의 종자처럼 싹은커녕 향기조차도뿜지 못하고 있다. 위의 상황이 우리가 직면한 상황이 아닐까. 그러나 부처님과 역대전등 조사들이 걸으신 그 길을 향한 염원을 저버리지 않고, 넘어질 때마다 발원하여 일어서서 그 길을 한걸음 한걸음 걷다 보면 때가 온다. 하늘은 비를 내린다. 이 비에 대지가 촉촉이 젖으면 땅속의 전단향종자도 마침내 향기로운 싹을 낸다. 여기서 하늘은 부처님이고, 비는부처님의 가르침이다. 촉촉이 젖은 대지는 가르침에 따라 실천 수행한우리들 마음이고, 전단향 종자는 본유무루종자이며, 돋아난 향기로운싹은 무분별지다.
거짓말 한 번, 물건 하나 슬쩍하는 행동이 별것 아닌 것처럼 생각될지 몰라도 그 종자는 어김없이 심어진다. 그 종자가 늘어날수록 그 행동에 대해서는 무감각하게 되고, 급기야 뜨거운 물속의 개구리와 같은지경을 당하게 된다. 때가 늦기 전에 스스로 되돌아볼 일이다.
‘밉다‘라는 상 그 자체가 나이고, ‘밉다‘라는 상과 별개인 나는 없다. 이 사실을 뼛속 깊이 자각했다면 ‘밉다‘에 대한 긍정과 부정, 정당화와비난 등 그것에 대한 더 이상의 상을 형성하는 작용은 멈춘다. ‘밉다‘에대해 긍정과 부정 등 새로이 덧붙여지는 대립되는 상들이 있다면 그것들 사이에 갈등이 일어난다. 예를 들어 미워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갈등이 생긴다. ‘밉다‘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더 이상의 상을 형성하는 작용이 멈추었으므로 대립되는 상들도 없고 그것들 사이의 갈등도 없다. 이때 ‘밉다‘라는 상에 있는 그대로‘ 직면한다. ‘일체의 상을 여읜 부처‘, 곧 참된 지혜의 길은 위의 제반사항에 대한 혼신의 참구에서부터 열리기 시작한다.
소금 한 움큼을 컵 속의 물에 타면 매우 짜다. 하지만 우물 속에 넣으면 물맛은 거의 변화가 없다. 소금의 양은 일정하지만 소금이 들어가는 물의 양에 따라 물맛은 달라진다. 과거에 심은 번뇌 종자가 있다 하더라도 지혜와 자비의 종자를 많이 심어나간다면, 우물 속의 소금 한움큼처럼 그 힘이 미약해서, 번뇌 종자에서 악행이나 괴로운 과보가 생겨날 확률도 그만큼 떨어지기 마련이다. 오늘부터 당장 지혜와 자비의 종자를 차근차근심어간다면 죽고 사는 것을 초월하는 해탈을 향해 첫발을 내디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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