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은 하나가 아니라 여덟이다. 안식에서 아뢰야식까지의 여덟 개의마음이 각각 별도로 있으며, 따라서 여덟 마음이 동시에 작용할 수도있다. 모든 마음, 즉 8식은 조건이 갖추어졌을 때 생겨나서 작용했다가조건이 다하면 소멸하는 연기적 존재요, 찰나적 존재다. 반짝 빛났다가소멸하는 빛과 같다.
빛이 소멸하면 밝게 비추는 작용도 동시에 소멸한다. 빛은 소멸했는데 밝게 비추는 작용만 남아있는 경우는 없다. 마찬가지로 밝게 비추는 작용은 소멸했는데 빛만 남아있는 경우도 없다. 소멸한 빛은 조건이 갖추어지면 다시 생겨나 밝게 비춘다. 마음은 이러한 빛과 같다. 그
‘러므로 어떤 마음의 작용이, 예를 들어 의식의 작용이 멈추었다는 것은의식 자체가 소멸했다는 것을 뜻한다. 작용만 멈추었을 뿐 의식 자체는그대로 있다는 것이 결코 아니다. 의식 자체는 언제나 그대로 있다고한다면 의식은 불교가 부정하는 아뜨만이나 자성이 되어버린다.

부처가 되었을 때 8시 각각은 지혜로 바뀐다고 했다. 이를테면 의식은 묘관찰지라는 지혜로 바뀐다. 이것은 번뇌에 물든 의식의 흐름이 차원이 완전히 바뀌어 번뇌가 전혀 없는 ‘지혜의 의식(=묘관찰지)‘의 흐름으로 전환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나머지 식도 이에 준하여 이해하면된다.

깊은 잠에 들거나 식물인간일 때는 안식부터 의식까지 전육식은 소멸한다. 우리는 몸에 들어온 병원균을 알아채기는 하나, 그것은 자각적감지가 아니다. 자각적 감지는 육식에 의해 일어난다. 그렇다면 병원균에 대한 알아챔은 육식에 의해 일어나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그러나 깊은 잠, 식물인간, 병원균의 침입 등 어느 경우든 생명을 유지시키는 작용은 지속된다. 이것은 생명이 전육식에 의해 유지되는 것은 아니라는 증거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아뜨만과 같은 ‘영원불변의 나‘를 부정한다. 착각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를 표방한 말이 ‘무아無我‘, 곧 ‘영원불변의나는 없다‘이다. 무아인데 무엇이 윤회한다는 말인가? 불교에서는 이문제를 해결하여 무아와 윤회를 조화롭게 연결시키려는 여러 사상이나왔다. 유식에서는 아뢰야식을 윤회의 주체로 본다. 자신이 행한 행위가 남긴 종자를 하나도 유실하지 않고 보존하고 있는 아뢰야식이 윤회의 주체라고 본 것이다. 아뢰야식이 아뜨만과 같은 영혼이 아니라는 것은 앞에서 다룬 심상속의 내용을 통해 충분히 납득했을 것이다.

나의 외부에 고정된 소리 자체가 있다는 것도 하나의 믿음에 불과하다. 혹자는 소리의 세기를 측정하는 기계에 찍힌 수치가 그 소리 자체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냐고 반문할지 모른다. 하지만 동일 소리라도대기 중이나 수중이냐, 산속이냐 도심이냐 등 주위 환경에 따라 그 수치는 다르다. 또한 측정 기계가 발달할수록 그 수치도 미세하게 다르게측정될 것이다.
질량과 무게는 다르다고 한다. 지구에서 몸무게가 60kg 중인 사람이 달에 가서 몸무게를 재면 10kg 중으로 나온다. 하지만 그 사람의 질량은 지구에서나 달에서는 언제나 60kg이다. 이와 같이 장소나 상태에따라 달라지지 않는 물질의 고유한 양을 질량이라 한다. 같은 장소에서무게는 이 질량에 비례한다.

이 이식과 의식의 종자들이 아뢰야식에서 이어져 오다가 유사한 상황을 만나 그 이식과 의식으로 생했기 때문에 할머니는 목탁 소리라고 인지한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인지한 순간 그 이식과 의식은 동일한 성질의 종자를 아뢰야식에 새로이 또 심는다. 결과적으로 목탁소리라고 식별할 수 있는 이식과 의식의 종자는 증가한다. 따라서 같은 행위가 반복될수록 ‘이것은 목탁소리다‘라는 인식은 강해지며 이에 대한집착도 강해진다.

더 심각한 것은 다음과 같은 중생의 현실이다. 중생에게 미움의 종자에서 미운 생각이 일어날 때 상대는 영락없이 미운 놈으로 보인다.
그렇게 보려는 본인의 의지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연스럽게 그렇게 보인다. 밉게 보면 안 된다는 생각을 일으키지만 마음 한구석에서는 여전히 밉게 보인다. 목탁소리로 들으려고 해서 그렇게 들리는 것이 아니라, 그냥 목탁 소리로 들리고 그 결과 그것은 틀림없는 목탁소리라고믿게 되어 버린다. 그런 만큼 그 집착에서 벗어나는 것은 어렵고 힘들수밖에 없다.

이 한계에서 어떻게 자유롭게 될 것인가? 수행하다 죽어도 좋다는각오로 화두를 드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마조 선사가 제자인 백장 선사와 함께 길을 걷고 있었다. 그때 오리 한 마리가 날아갔다. 마조가 백장에게 물었다. "저게 뭔가?" 당신이라면 어떻게 답하겠는가? 머리 굴리거나 읽고 들은 것으로 흉내 내서 답한다면 영원한 중생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ㄹ문학대로서 여러 일을 해왔지만, 역시 이시무레 문학을잇는 게 가장 중요하지 않을까란 생각에 이르렀다. 그래서수년 전부터 작가와 연구자로부터 이시무레 씨의 작품에 대해 듣는 ‘이시무레 대학‘이란 행사를 열고 있다. 다시 말해,
여러분 이시무레 씨의 책을 읽어보지 않겠습니까, 라는 모임이다. 요즘이야말로 이시무레 씨의 말이 필요하지 않을까란 생각에 문학대 사람들과 하고 있다.

어린 시절에는 지는 꽃부리를 손바닥에 주워 모아 꽃향기에 파묻혀 있었다. 몇 번이고 지나가니까 할 수 있었던일. 눈 깜짝할 사이에 지는 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어릴 때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지금은, 꽃이 시나브로 진다. 오렌지색이 사라지고 짙은 녹색만 남았을 때 꽃이 졌다는 것을 깨닫는다. 금목서가 지는 걸 지켜볼수 없다니, 어른은 시시하다.

나무에게 좋은 일인지 어떤지 모르겠지만, 금목서가 두번 꽃을 피운다니 조금 득을 본 기분이다. 서점에서 시내로가는 길에 있는 교차점 옆에 금목서가 있어서 장을 볼 때나우체국에 다녀올 때 꽃을 만끽한다. 이때만큼은 신호를 기다리는 게 지루하지 않다. 오히려 아직 바뀔 때가 아니라고생각해버리니 인간은 제멋대로인 존재다.
정원에 금목서가 있으면 꽃이 지는 때를 알 수 있을까?
그녀는 오렌지색 작은 꽃부리를 골라내 말끄러미 바라보거나 주워 모아서 향기를 맡을까? 다음에 꽃이 피면 물어보겠노라 생각한다.

낌이실은 그 의자에 나 때문에 생긴 그을린 자국이 있다. 처음 문을 열었던 해의 연말, 서점에서 일을 하고 있을 때 저녁거리를 사온 사람이 있었다. 같이 먹자고 한 것까지는 좋았는데, 급기야 와인도 따서 마신 게 잘못이었다. 저녁을 다먹은 후, 그대로 일을 하다가 오토만에 기대 잠들고 말았다.
오토만이 히터에 가까웠는지 일어나 보니 천의 색깔이 살짝갈색으로 변했다. 몹시 후회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 염치가 없어서 의자를 선물한 손님에게 바로 말하지 못했다. 한참 지나 자백하니 알고 있었다고 했다. 알고 있었는데도 아무 말 없이 가만히 있었던 것이다.
그 의자에는 여러 사람이 앉았다. 작가와 시인과 사진가와 노래하는 사람에 그림 그리는 사람. 취해서 몸을 가누지 못하는 사람에 작은 아이. 사람뿐 아니라 고양이도 앉는다. 모두, 책장을 떠올릴 때 그 의자 역시 함께 떠올릴 게 틀림없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안식은 안근에 의지해서 작용하고 이식은 이근에 의지해서 작용한다.
이와 같이 안식에서 신식까지의 전오식 자신만의 특정한 한은
근에 의지해야만 작용한다. 마찬가지로 의식은 의근에 의지해서 작용한다. 무엇을 의근이라 할까? 눈을 안근이라 하고 귀를 이근이라고 하니까 많은 사람들은 뇌를 의근이라고 생각한다. 결론부터 말하면 이것은 오해다.
안근에서 신근까지의 5근이 육체적인 것인 반면, 의근은 마음에 속하는 어떤 것이다. 부파불교(소승불교)를 대표하는 설일체유부는 의근을 직전 찰나에 작용하고 소멸한 6식이라고 했다. 어떤 소리를 듣고 모차르트의 교향곡이라고 생각했다고 하자. 소리를 들은 것은 이식이고,
그다음 순간 모차르트의 교향곡이라는 생각을 일으킨 것은 의식이다.
이때의 이식이 의근에 해당한다.

법이라는 용어는 불교에서 매우 중요하다. 법에 해당하는 산스끄리뜨 원어는 달마dharma 이며 빨리어로는 담마dhamma 인데, 이것이 중국에서 ‘법‘으로 의역되었다. 불교에서 사용되는 법의 의미 가운데 중요한 것은 다음의 세 가지다. 첫째는 진리, 둘째는 (부처님의) 가르침, 셋째는 존재 · 현상 · 사물이다.
‘법을 깨닫다‘ 할 때의 법은 진리를 뜻한다. ‘불법(佛法‘은 부처님의가르침이라는 뜻으로 이때의 법은 가르침을 의미한다.

열반에 이르는 데 관건을 쥔 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 이 세상이다. 이 세상은 18계 속에 다 들어가며, 18계를 구성하는 하나하나는 죄다 무상하고 무아다. 이처럼 세상의 모든 것은 무상하고 무아라서 자신의 탐욕과 어리석음으로 붙잡으려고 해도 언젠가는 다 떠나간다. 그러니 놓을 줄도 알고, 과거에 오염된 눈이 아니라 순간순간 새 눈으로 ‘있는 그대로‘를 보면서 사는 것이 열반에 이르는 길이다. 이것을 보이고자 불교는 모든 존재를 5온이나 12처 또는 18계의 체계로 분류하는 것이다. 무상하고 무아가 아닌 모든 것은 이름일 뿐이니 이름에 속지 말아야 한다.

참고로 『반야심경』에 나오는 ‘무색 무수상행식‘은 5온이 자성으로서는 없다는 뜻으로, 5온은 곧 공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지금까지의 설명을 통해, 5온이 곧 공이라는 것은 일체가 곧 공임을 나타낸다는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무안이비설신의 무색성향미촉법‘과 ‘무無안계 내지 무의식계‘는 각각 12처의 공과 18계의 공, 곧일체의 공을 뜻한다.

유식에서는 우리의 번뇌에 선천적인 것과 후천적인 것, 이 두 가지가 있다고 한다. 전자를 생기후자를 분별기번뇌,
번뇌라고 한다. 태어날 때부터 본능적으로 갖고 있는 번뇌가구생기 번뇌라면, 잘못된 가르침에 영향을 받거나 본인의 분별망상에 의한 번뇌가 분별기 번다. 말나식이 일으키는 번뇌는 모두 구생기 번뇌다.

자신의 마음이면서도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고, 나와 내 것에 대한 집착은 바위처럼 견고하다. 문득 정신을 차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길을 찾아 횃불을 들었지만 그것도 잠시, 거센 바람에 횃불은 곧 꺼지고다시 찾아온 암흑 속에서 망연자실 서있다. 본유무루종자가 있다고 하나 엄동설한 굳은 땅에 묻힌 전단향의 종자처럼 싹은커녕 향기조차도뿜지 못하고 있다.
위의 상황이 우리가 직면한 상황이 아닐까. 그러나 부처님과 역대전등 조사들이 걸으신 그 길을 향한 염원을 저버리지 않고, 넘어질 때마다 발원하여 일어서서 그 길을 한걸음 한걸음 걷다 보면 때가 온다.
하늘은 비를 내린다. 이 비에 대지가 촉촉이 젖으면 땅속의 전단향종자도 마침내 향기로운 싹을 낸다. 여기서 하늘은 부처님이고, 비는부처님의 가르침이다. 촉촉이 젖은 대지는 가르침에 따라 실천 수행한우리들 마음이고, 전단향 종자는 본유무루종자이며, 돋아난 향기로운싹은 무분별지다.

거짓말 한 번, 물건 하나 슬쩍하는 행동이 별것 아닌 것처럼 생각될지 몰라도 그 종자는 어김없이 심어진다. 그 종자가 늘어날수록 그 행동에 대해서는 무감각하게 되고, 급기야 뜨거운 물속의 개구리와 같은지경을 당하게 된다. 때가 늦기 전에 스스로 되돌아볼 일이다.

‘밉다‘라는 상 그 자체가 나이고, ‘밉다‘라는 상과 별개인 나는 없다.
이 사실을 뼛속 깊이 자각했다면 ‘밉다‘에 대한 긍정과 부정, 정당화와비난 등 그것에 대한 더 이상의 상을 형성하는 작용은 멈춘다. ‘밉다‘에대해 긍정과 부정 등 새로이 덧붙여지는 대립되는 상들이 있다면 그것들 사이에 갈등이 일어난다. 예를 들어 미워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갈등이 생긴다. ‘밉다‘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더 이상의 상을 형성하는 작용이 멈추었으므로 대립되는 상들도 없고 그것들 사이의 갈등도 없다.
이때 ‘밉다‘라는 상에 있는 그대로‘ 직면한다. ‘일체의 상을 여읜 부처‘,
곧 참된 지혜의 길은 위의 제반사항에 대한 혼신의 참구에서부터 열리기 시작한다.

소금 한 움큼을 컵 속의 물에 타면 매우 짜다. 하지만 우물 속에 넣으면 물맛은 거의 변화가 없다. 소금의 양은 일정하지만 소금이 들어가는 물의 양에 따라 물맛은 달라진다. 과거에 심은 번뇌 종자가 있다 하더라도 지혜와 자비의 종자를 많이 심어나간다면, 우물 속의 소금 한움큼처럼 그 힘이 미약해서, 번뇌 종자에서 악행이나 괴로운 과보가 생겨날 확률도 그만큼 떨어지기 마련이다.
오늘부터 당장 지혜와 자비의 종자를 차근차근심어간다면 죽고 사는 것을 초월하는 해탈을 향해 첫발을 내디딘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카페를 하겠다고 마음먹었을 때, 아무것도 아는 게 없었다. 무계획에,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고 일을 진행하고 있었기 때문에 막상 손님을 맞이할 날이 가까워지자 역시 불안해졌다. 카페의 메뉴를 만들어보며 마실 만한 것인가 자문자답하거나 친구에게 물어보곤 했다.
그때 무라모토 씨가 해준 말을, 무라모토 씨는 기억하지 못하는 것 같지만, 지금도 가끔 떠올린다.
하면서 프로가 되는 거니까 괜찮아.
카페를 시작했을 때, 이 말은 부적이었다.

그 사람은 시인이에요. 늘 라이브를 보러 오는 손님이돈치 씨를 두고 이렇게 말했다. 대학에서 문학을 가르치고있는 분이니, 말과 글 해석하는 걸 생업으로 삼고 있다. 그런 사람이 여기서 듣는 노래 중 제일 좋다고 말한다. 노래를만들면 시인이라는 뜻은 아니다. 글을 잘 다루는 것만으로는 물론 시인이 되지 못한다. 자, 그럼 어때야 시인인가 하고 물어보면 설명하기 어렵지만 나 역시 돈치 씨는 시인이라고 생각한다.

한번은 출근하다가 돈치 씨를 본 적이 있다. 비즈니스호텔에서 나오는 중이었다. 거기 있는 게 당연한 것처럼 강가를 걷고 있었다. 아아, 오늘도 역시 돈치 씨가 있네. 그렇게 생각했다. 분명, 낯선 거리에서 봐도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어디에 있어도 그곳은 돈치 씨의 거리가 된다. 오늘도,
아마 어딘가의 거리에서 노래하고 있을 것이다. 그 거리의누군가가 웃거나 서글퍼 하고 있을 것이다. 어쩌면 눈물을흘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돈치 씨에게는 돌아갈 곳이 많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순간순간의 행위와 그 종자들을 일종의 에너지로 보면 이해는 쉬워진다. 일상생활 순간순간 우리는 몸과 말과 생각으로 온갖 종류의 에너지를 쌓고 있다. 본인이 하루 종일 쌓고 있는 에너지가 어떤 성질의 것인지 살펴본 적이 있는가. 선하고 맑은 에너지인가? 아니면 분노와 증오 짜증과 탐욕 등의 탁한 에너지인가? 번뇌의 에너지가 쌓이면 쌓일수록번뇌 장치들은 견고해지고 급기야 주체할 수 없는 번뇌의 충동으로 불 속으로 질주하는 불나방이 되고 만다.

일반적인 자원봉사나 기도도 완전하고도 이상적인 봉사와 기도로전환될 수 있다. 그렇게 될 때 열반과 해탈은 성취된다. 이 모든 것은 반바라밀다를 얻을 때 가능해진다. 반야바라밀다에 의해 자신이 행한유루선에 대한 집착 등 모든 번뇌는 소멸되고, 순수한무루만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유식은 우리가 반야바라밀다를 얻지 못하는 원인을어디서 찾고 있으며, 또 어떤 과정을 통해 반야바라밀다에 이른다고 통찰하고 있을까?
가야금 소리가 잘 나도록 하기 위해서는 줄을 너무 세게 죄거나 너무 느슨하게 죄면 안 된다. 가야금마다 알맞은 줄의 세기는 각각 다르다. 마찬가지로 사람마다 반야바라밀다에 매진할 수 있는 능력과 환경도다다르다. 기복불교를 부정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禪에 ‘회광반조廻光返照‘라는 말이 있다. 바깥으로 향하는 마음을되돌려 자신의 참된 모습을 비추어본다는 뜻으로, 진리는 먼 곳에 있는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석가모니의 자등명의설법과 맥을 같이 하는 경구다.
여느 때처럼 스마트폰에 중독의 눈이 갈 때 그 순간의 자신의 생각과 감정들을 ‘이것이 무엇이지?‘라는 의문을 갖고 있는 그대로 보면 어떨까?

어두운 방에 등불이 타고 있다. 등불이 빛남으로써 저절로 자신의모습도 밝게 드러나 있다. 등불 자신의 모습이 밝게 드러난 것은 등불이 빛나고 있다는 이 하나의 사실 때문이지, 등불이 자신을 비춘다는별도의 작용이 있어서가 아니다. 하지만 이것을 두고 우리들은 ‘등불이자기 자신을 비추고 있다‘는 식으로 표현한다. 말에 의한 표현일 뿐이지 사실이 그런 것은 아니다.
마음은 이 등불과 같다. 실제로 있는 것은 나무의 형상을 띤 마음이밝게 나타나 있다는 이 사실 하나뿐이다. 등불이 빛나고 있는 것만으로등불 자신의 모습이 드러나듯이, 나무의 형상을 띤 마음이 나타나 있는것만으로 나무라는 인식이 저절로 일어난다. 마음이 자신을 인식한다는 별도의 작용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편의상 ‘나무의 형상을 띤마음이 자기를 인식한 결과 나무라는 인식이 있다‘라고 표현하고 있을뿐이다.

값비싼 보약보다도 마음 편한 것이 건강에는 더 중요하다. 대학생시절 어머니에게 안부인사 드리러 고향에 간다는 나의 말을 들은 한의사 한 분이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그것보다 어머니에게 더 좋은 보약은 없습니다. 기쁨을 주는 자식이 부모님에게는 최고의 보약입니다."
온화한 얼굴과 부드러운 말 한마디, 이것으로 가족과 직장 동료와 이웃에게 최고의 보약을 선사할 수 있다.

예불문에 나오는 "지심귀명례至心歸命禮"에서 ‘지심은 지극한마음이고, ‘귀명歸命‘은 목숨을 다해 그 하나만을 향한다는 뜻이다. 그그러므로 ‘지심귀명‘은 온 몸과 마음을 다해 그것 하나만 하는, 혼을 다한정성이며 절절함이다. 참으로 우주를 움직일 정도의 정성이다. 지심귀명례란 이런 지극한 마음으로 예를 올리는 것이다.
예불문의 마지막은 "오직 바라오니, 다함없는 불법·승 삼보시여,
대자대비로 저의 이 지극한 예를 받으시고 그윽한 가피를 내리시어, 모든 중생이 함께 불도를 이루게 하소서"로 끝을 맺는다. 이렇게 지심귀명으로 예불한 에너지가 내 몸을 만들고 내 주위를 만들고 이 세상을만드는 데 눈에 보이지 않는 큰 몫을 한다.

불교에서는 눈앞에 대상이 있을 때 그것의 모습을 보는 마음을 안이라 하고, 그 소리를 듣는 마음을 이식이라 한다. 새 한 마리가나무 위에서 청명하게 지저귀고 있다. 이때 새의 모습을 보는 마음이 안식이고, 새가 내는 소리를 듣는 마음이 이식이다. "보는 작용과 듣는 작용이 같은 시점에서 동시에 일어날 수 있을까?" 하는 질문을 불교식으로 표현한다면, "안식과 이식이 동시에 작용할 수 있을까?" 하는질문이 된다.

무상정은 외도나 범부가 닦는 선정으로, 이 선정을 닦으면 무상천이 태어난다고 한다. 멸진정은 성자가 닦는 선정이다. 무상정에서는 의식만 작용하지 않지만, 멸진정에서는 의식뿐 아니라 말나식도 작용하지않는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