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이 오른 북천 버드나무들이 바짝 거꾸로 서서물웅덩이 속에 떠 있는 달에다 뿌리를 뻗치고 있는 것을모른 척하고 돌아섰다.

악견산을 넘어가다유방산에 닿았네04슬슬 몸속 뼈가 스멀거리기 시작했네피라미떼가 제 미색에 빠져개울 물살을 즐기듯이격정도 뭉게구름이 되어 불어나는 한낮섬섬옥수로 산정에서 스윽즉,
한평생 살다가햇살 넘치는 계곡 사이로소낙비 되어 쏟아졌네마른 옥수숫대 서걱이는비탈밭에 내리꽂혔네!

천상의 악기를두드리는 먼 시간의자궁 안격렬한 한낮의 소나기가골목을 밟고 지나갔다해협으로 배가 배를 밀고 들어간다철교들이 몸을 들어올린 다리 사이로달이 엉덩이를 두드리며 빠져나가는구름 기둥을 바라본다

섬과 섬 사이를
그 눈빛과
눈빛 사이에서
무지개가 뜨고
사라지듯

왜 열일곱에 시집왔어요?
아부지가 소녀 공출 안 보낼라구 보내부렀어함평 산암마을 할머니들고생한 거 착으로 쓰면 몇권으로도 모자!

이제 남은 인생 저 노을처럼 살아가자 우리,
피난민 한금순이육십년 만에 만난 두 동생을 안고삼팔선 같은 수평선을 바라보고 있다

구룡포 시외버스 터미널을 돌아 돌아 빠져나오자맨 뒷자리에서,
원장님 좀 바꿔주이소원장이가,
우리 신랑이 가을 타는지 힘이 없다바다에 나가먼자꾸 힘이 빠진다 칸다 아이가

드디어 온 몸속이 검게 타올라드디어 죄 없는 무기수들이오래된 감옥에서 줄지어 나오기 시작한다.
붉은머리학들도 해의 알을 품고 날아오른다

김수복의 시에는 운명 앞에 선 자의, 자신에게 주어진 삶의 의무에 대해 응답하려는 의지가 강하게 엿보인다. 역설적이게도 그 의지는 죽음을 이해하고 사라지는 것들을 노래하는, 소멸에 대한 인식으로부터 출발한다. 그러므로 김수복의 운명은 일상에 대한 시적 인식이라고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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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에선 피의 냄새가 난다고 했었던가
그 자유에는 피의 혁명도
새벽하늘도
없다
해가 다시 떠오르는 먼동에는
참회의 눈이 있다고
새벽하늘을 수정(修正)하며 새들이 날아오른다

모든 나무들이 서로 마주 서서흐르는 강물로 마음을 주고받듯이천년 동안 흘러온 강물이 서로 마주 보며웃는 얼굴로 저녁을 맞듯이모든 나무들의 일생에도바람의 얼굴이 있음을 본다살아간다는 것 또한저 마음의 나이테와 같이살아왔다는 것 또한서로에게 물결이 되어주었다는 것그 나무의 마음의 책에서로의 강물을 적어 넣어두었다는 것

저렇게 핏줄은 말라갔을 것이다흘릴 눈물도 없는 눈물을만리 밖 바람의 간절한 소리를제 귀에도 들리지 않는 목소리로그 긴 강물의 탯줄을속에서 밀어올렸을 것이다툭툭, 땅속 폐경이 된 자궁을 들어올려아득히 능선 위로 자지러지는태양을 몸 안으로 조이고 조여서씨를 받아내었을 것이다노을에 퍼져재가 될지라도천년 광원(光源)을지는 태양 속으로 고이 간직해 내보이면서한잎 두잎, 입을 벌리며 태어나듯이죽은 몸으로 다시 살아날 것이다

받아 맞이하는 검은 몸이
비로소 환해오는 새벽,
그 태양의 눈빛을 바라본다

막다른 골목에서배가 고프거나,
오래 길 끝에 박혀 나가지 못했을 때,
사랑도 식어서 해가 질 때,
그 꼬리를 잘라버리고 싶었던 때가 있었다산문(山門)의 산그늘 외진 꼬리도,
오지 않는 새벽을 기다리는 가로등의 꼬리도,
아, 그림자가 길어지는골목 안에서 꼬리를 자르고쫓아오던 반민주(反民主)의몸통도 잘라버리고 싶었다

귓불을 깨물어주고 싶던 때가 있었다하늘에 대고 욕을 퍼부었던지나가는 바람에게도 시비를 걸었던,
발아래 연꽃이 나를 쳐다보고 있는 것을 눈치 챘을 때그 연잎의 귓불을 깨물어주었다활짝,
죽었다가도 살아나는 덕진공원늦은 여름의 저녁 무렵이었다한없이, 한없이 깨물어주어서새벽 연밥이 익는 줄도 몰랐다

곧 저녁이 다가올 것이다등불을 밝히고높고 비천한어둠과별에게,
목숨을 바쳐몸속에 집을 짓는하늘에서곧 종이 울릴 것이다새들이 죽어서 날아갈 것이다

죽은 숲들도 깨어나 저녁 식탁의 등불을 내건다
먼 데서 천둥소리가 다시 지나갔다

석양이 밀려오면황금빛으로 물들어갑니다마법에 걸린 몸이 되어하늘처럼 사랑했던 사람도껴안고 돌 수 없습니다소리의 무지개가 되어현(弦)을 켜며허공에 감겨 있습니다

검게 타들어가는 살아 있는
화석이 되어
저 깊고 두꺼운 겨울 눈발 속으로
몸을 던진다

산짐승이 밤새 먹다 버린 새벽달을 보았다
아직 식지 않은 눈빛을 보았다
선혈이 낭자한
부릅뜬 눈을 뜨고 있는 눈동자를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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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틸스와 동료들은 로봇이 장난감을 가리키며 불특정한 소리를낸 다음, 놀이 친구들끼리 서로를 흉내 내며 독자적인 ‘언어‘를 개발하도록 프로그래밍했다. 과제는 당연히 로봇이 의식이 있는 사람처럼 생각하고 말하는지, 아니면 의식과 생각이 있는 것처럼 흉내 낼뿐인지를 알아보는 것이었다. 스틸스는 한 가지 답에 매달리고자하지 않았다. 다만 로봇에게 그 어떤 정신적인 능력도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일지라도 로봇이 의식을 얻기에 무엇이 부족한지 생각해보아야 한다. 칩이 더 빨라지면 의식을 얻기에 충분할까? 저장용량이 더 커진다면? 소프트웨어가 더 원숙해진다면? 언젠가는 이 작은인형이 감각을 느끼고, 자신의 인생을 깊이 고찰하고, 심지어는 연구소를 부수고 탈출하려고 시도하게 될까?

다트머스의 연구진은 컴퓨터와 뇌의 명백한 유사점에 주목했다.
뇌 또한 입력과 출력이 있는데, 이는 각각 인식과 행동이다. 또 모든인간이 문제를 해결한다. 뇌의 신경세포는 신호를 전달하거나 전달하지 않는데, 이것도 컴퓨터에 전기가 흐르거나 흐르지 않는 것과유사하다. 이에 따른 강력한 명제는 다음과 같다. 인간 또한 컴퓨터다. 다만 인간은 규소 칩 대신 효율이 매우 뛰어난 생물학적 하드웨어로 구성되어 있다. 우리의 정신은 생물학적 하드웨어를 움직이는8
소프트웨어, 즉 웨트웨어Wetware다. 이 주장이 옳다면 인간은 다른방식으로도 컴퓨터를 만들 수 있어야 한다. 예를 들어 똑같은 소프트웨어로 움직이는 다른 하드웨어를 만들 수 있어야 한다.

설은 의식의 진정한 근본이 우리의 뇌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말에서 무엇이 우리 뇌를 그토록 특별하게 만드는지는 알 수 없다.
결국 우리는 다시 출발점으로 돌아간다. 의식은 여전히 수수께끼다.
누구도 풀 수 없는 문제이기 때문에 우주가 얼마나 경이롭고 우리의 정신이 얼마나 놀라운 것인지 감탄스러울 따름이다.

체현이라는 접근법을 주장하는 사람 중 몇몇은 덜 전투적이며 남들과는 조금 다른 측면을 강조한다. 이들에 따르면 신체감각은 사람들이 전통적으로 신체와는 전혀 상관없다고 생각했던 정신적인능력에도 중대한 영향을 미친다. 즉 우리의 신체는 손가락으로 숫자를 세고 손으로 수어를 표현해 대화를 나누고 발이나 팔로 길이를 재는 용도 이상의 것이다. 생각 또한 일종의 신체 움직임으로 볼수 있는데, 우리가 생각을 ‘한 걸음씩‘ 단계적으로 진행한다고 표현하거나 문제를 파악‘한다는 표현을 사용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게다가 감정은 신체적으로 경험하는 경고 체계다. 두려움으로 인한몸의 떨림이나 심장박동은 우리에게 위험한 상황을 경고한다. 시각적 인식 또한 직접적인 감각이나 마찬가지다. 벽난로 앞에 털 양탄자가 놓여 있는 모습을 본다면 그와 동시에 손가락으로 털을 만지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이것은 단순히 재미있기만 한 실험이 아니라 우리 정신의 기능을폭로하는 실험이다. 우리는 환각에서 두 가지를 이끌어낼 수 있다.
첫째, 신체에 대한 인식이나 생각으로 우리가 느끼는 신체의 한계에 직접 영향을 미칠 수는 없다. 둘째, 여러 가지 감각이 신체의 한계를 느끼는 데 관여하는데, 그중 시각이 촉각을 능가한다. 그래서
‘다감각 환각‘이 언급되기도 한다. 만약 촉각이 지배적이라면, 실험참가자는 오른손으로 왼손을 잡아야 할 때 언제나 허벅지 위에 놓인 진짜 왼손을 잡았을 것이다.

도구의 예시로 돌아가보자. 여기서도 마찬가지로 시각적인 인상으로서 우리가 느낀 ‘수중에 있음(도구성)‘이 주어진다. 망치를 붙잡으면 그것이 우리 몸에 속한 것처럼 느껴진다. 망치를 손에 쥐고 못을 박으려는 순간, 우리는 망치의 머리를 ‘느낄‘ 수 있다. 고무손 실험에서 알 수 있듯이 우리는 자동으로 도구가 우리의 감각하는 몸과 함께 자라난다‘고 생각한다. 내가 직접 경험한 예시를 소개한다.
1990년대 초반, 나는 여느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롤러블레이드 유행에 편승했다. 어떨 때는 하루 종일 롤러블레이드를 신고 있었다. 그런데 밤에 롤러블레이드를 벗어도, 마치 계속해서 롤러블레이드를신고 있는 것 같은 감각을 느꼈다. 스키를 즐기는 사람들 또한 자신의 발에 스키가 붙어버린 것 같은 기분이 든다고 말한다. 하이데거의 알아들을 수 없는 전문용어를 더 자세히 특정하고 싶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롤러블레이드와 스키가 그것을 신고 있는 사람의
‘족중에 들어간 것이다. 주차할 때도 비슷한 일을 경험한다. 주차하다가 뒤에 있는 차를 박으면, 우리는 마치 스스로가 차에 치인 것처럼 움찔한다.

우리는 마치 우리 자신이 몸에서 독립해 있는 것처럼 말하지만영국의 철학자 피터 스트로슨이 말했듯이 이런 이원론은 표면적인것이다. 우리는 ‘나‘라고 말할 때 전체적인 인간으로서의 ‘나’를 가
‘리키지 ‘실제 나‘와 ‘나의 신체‘를 구분하지 않는다. 인간으로서 우리는 물질적이며 동시에 정신적인 특성을 갖추고 있다.

실험을 하나 더 해보자. 여러분은 코가 두 개였던 적이 있는가?
아주 간단한 실험이다. 집게손가락과 가운뎃손가락을 교차한 다음양손가락의 손톱으로 동시에 코끝을 문지른다.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다시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똑같은 속도로 문지르다보면 어느순간 코가 두 개인 것처럼 느껴진다. 이런 환각은 모든 사지에서 경험할 수 있다. 예를 들어 혀가 갈라진 것 같은 기분을 느낄 수도 있다. 책상 모서리나 휴대전화로도 환각 실험을 할 수 있다. 이 오래되고 널리 알려진 환각은 ‘아리스토텔레스 착각 현상‘이라고 한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시각적으로는 하나로 보이는 것이 손가락의 촉각으로는 둘로 느껴질 수 있다. 촉각 정보가 마치 손가락이 교차되지 않은 것처럼 느끼도록 하는 것이다. 양 손가락의 바깥쪽 피부가 대상과 닿을 때는 보통 두 가지 상태가 동시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때 신체감각을 발생시키는 메커니즘이 작동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런 요소들에 어떤 공통된 작용이 있는지는 아직 과학적으로 완전히 밝혀지지 않았지만, 잘못된 신체상의 모든 변종에서 이런 요소들이 발견된다. 식욕부진 환자들은 자신이 날씬하다고 인식하지못한다. 마치 머릿속에 깨진 거울이 들어 있는 것처럼 거울에 비친자신의 모습이 계속 뚱뚱해 보이는 것이다. 이들은 잘못된 신체상을 스스로 바로잡을 수 없다. 그래서 병원을 찾은 식욕부진 환자들은 우선 신체 치수를 재지 않은 상태에서 바닥에 자신의 몸의 윤곽을 그려봐야 한다. 그 윤곽 위에 직접 누워보고 나면 환자들은 깜짝놀란다. 실제 몸이 윤곽의 겨우 절반 정도이기 때문이다. 이 치료는자기 인식으로 가는 첫 발걸음이다.

느낌과 앎의 충돌 때문에 발생하는 의학적 증상은 이외에도 수없이 많다. 편두통 또한 일그러진 신체감각으로 이어질 수 있다. 일부편두통 환자들은 두통을 느낄 때마다 스스로의 몸이 수축되거나 천장을 손으로 만질 수 있을 정도로 높이 발사되는 기분을 느낀다.
런 현상은 ‘앨리스 증후군Alice in Wonderland syndrome‘"이라고 불린다.

즉 인간은 갖고 있지 않은 신체 부위를 느낄 수 있고, 반대로 갖고 있는 신체 부위를 느끼지 못하거나 낯설게 여길 수 있다. 더 극단적으로는, 스스로가 느낀 신체 전부가 사라지거나 갑자기 다른장소에 나타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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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찰자의 모든 경험은 부정부터 긍정까지, ‘향유 수치‘의 눈금을구성한다. 어떤 경험에서 얻은 기분이 눈금에서 정확히 어느 위치에 있는지 묘사하기 어려울 때도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는 명확하다. 어떤 것이 우리 내면에서 향유를 만들어내면, 우리는 그것을 아름다운 경험이라고 생각한다.

몇몇 철학자들은 향유가 언제나 경험과 동시에 나타나야 한다고생각한다. 하지만 이것은 틀린 말이다. 어떤 콘서트를 관람하고 난뒤 이미 음악은 몇 시간 전에 사라졌지만 계속해서 음악에 도취된기분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즉 들은 것의 상相과 향유의 상은 일치할 필요가 없다.

칸트는 미에 보편타당한 것이 있다고 보았다. 이를 위해서는 감각적인 생각과 이해가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칸트는 ‘아무런 개념 없이도 보편적으로 마음에 드는 것‘이 아름다운 것이라고 주장했다.
여기서 ‘아무런 개념이 없다‘고 말한 이유는 우리가 아름다운 것을파악하거나 계속해서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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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크와 다른 사람들이 언급한 ‘아름다운 것 목록‘의 오류는 명백하다. 너무 구체적이라는 점이다. 그래서 현대 이론은 각각의 대상보다는 아름다운 대상의 조화, 다양성, 대칭, 균형, 단순함 등에 주목한다. 유행이나 음악 스타일은 계속해서 바뀌지만, 그 근본에 놓인 원칙은 바뀌지 않는다.

여기서 선천적으로 주어진 미적 감각이란 없고, 모든 것은 문화적으로 학습되었다고 결론지을 수는 없다. 선천적으로 주어진 것이란 학습이 불가능한 것이다. 우리는 타인에게 고통을 느끼는 방법을 가르칠 수 없듯이 아름다운 사람을 보았을 때 긍정적인 기분을느끼도록 가르칠 수 없다.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다. 다만 타인을 어떤 상황으로 몰아가서 특정한 것을 느끼도록 할 수는 있다. 그러려면 어쨌든 그 사람은 무언가를 느낄 능력을 미리 갖추고 있어야 한다. 우리 뇌에 있는 향유의 중추는 끊임없이 아름다운 것이 입력되기를 추구한다. 여기에는 몇 가지 기본값이 있지만, 대개는 개인적인 경험과 시간의 흐름에 따라 달라진다.

오늘날에는 누가 예술가이고 누가 ‘예술가‘인지 구분하기 어렵다. 과거에는 수작업 능력이 결정적이었다면, 오늘날에는 예술 시장에 스스로를 내놓는 재능이 결정적이다. 예술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이건 우리 애도 그리겠네"라고 말한다. 예술 종사자들은 "제일 처음이 되어야지"라고 반박한다. 둘 다 틀렸다. 우선 현대 예술의 품질을 객관화할 수 있는 표준이 없기 때문에 특별하게 독창적일 필요는 없다. 그보다 시장의 심리학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갤러리 운영자와 큐레이터의 권력 관계, 누가 누구와 파티에 가고,
누가 누구를 추천하고, 후견인회에서 쏟아진 악평 중 어떤 것이 중요하게 다루어지고 누가 결정적인 비평을 남기는지 등을 이해해야한다.

동물행태학자이자 노벨상 수상자인 니콜라스 틴버겐NikolaasTinbergen이 이미 50여 년 전에 이와 비슷한 효과를 관찰했다. 붉은부리갈매기의 새끼들은 어미가 둥지 위로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먹이를 달라고 아우성을 친다. 새끼들에게는 어미의 부리 위에 있는붉은 점이 열쇠자극Key stimulus이다. 연구진이 막대기 끝에 붉은 점을 세 개 칠해서 만든 부리 모조품을 내밀자 새끼들은 더욱 열렬하게 반응했다. 이 부리 모조품이 ‘초엄마‘가 된 셈이다.

예술은 우리의 감각과 감정을 건드린다. 그것은 문학일 수도 음악이나 그림일 수도 있다. 예술은 또한 우리의 문화적 지식이나 생각에 영향을 미친다. 예술은 우리의 모든 정신적인 능력을 자극한다. 그렇기 때문에 예술은 특별하다. 미적 향유, 경탄, 혼란 등 각각의 도발에는 신경학적 설명이 따라야 한다. 생각을 연구하기가 가장 어려운데, 생각은 무상하게 흐르며 다른 수많은 생각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계속해서 이어질 자연과 예술의놀라움을 받아들일 각오를 해야 한다.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가.

맹시의 존재는 우리의 의식에 적어도 두 가지 근본적으로 다른측면이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심리학과 신경과학 분야는 우리가정보로 가는 ‘진입로‘라고 말하는 측면, 즉 우리가 정보나 생각을 언제 이용 가능한지에 초점을 맞춘다. 맹시인 사람과 의학적으로 정상 시력인 사람은 이 진입로를 따라 특정한 정보로 다가간다. 이들은 예를 들어 어떤 표정이 친절한 것인지 화가 난 것인지 정확히 진술할 수 있다.
이런 측면과는 반대로, 철학자들은 무엇보다도 의식의 ‘경험적
‘특성‘에 관심을 보인다. 이것은 맹시인 사람들에게 부족한 것이다.
이 경험이 정확히 어디에 있는지 묘사하기는 어려운데, 더 어려운
"아니 애초에 불가능한 것은 그것을 자연과학적으로 설명하는일이다.

지각은 경험적 의식의 전형적인 두 가지 원천 중 하나다. 우리는 색, 소리, 냄새 등을 지각한다. 여기에 가려움, 치통, 배고픔, 오르가즘 등의 신체감각이 포함된다. 또한 우리는 이 세상을 여러 색으로 볼 뿐만 아니라 3차원으로, 즉 여러 형태와 질량, 강도까지 함께본다.

‘의식적‘이라는 말은 곧 정보나 경험에 접근했다는 뜻이다. 의식의 두 가지 변종은 모두 1인칭 시점이 특징이다. 우리의 모든 경험,
생각,감정, 지각은 나 자신과 연결되며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의식의 ‘주관성‘을 언급한다. 우리의 경험은 아주 특수한 방식으로 우리에게 ‘속해’ 있다. 경험은 우리와 분리될 수 없다.

의식의 범위는 항상 변한다. 그런 측면에서 볼 때 의식을 강이나물의 흐름과 비교할 수 있다. 미국의 철학자이자 실험심리학의 창시자인 윌리엄 제임스는 ‘생각의 흐름‘ 혹은 ‘의식의 흐름‘이라는말을 사용했다. 생각, 느낌, 소원, 인지 등은 나타났다가 사라진다.
흥미롭게도 우리는 인간으로서 그 곁에서 존속하고 있다. 물론 우리도 변한다. 우리는 점점 자라서 성인이 되고, 때로는 트라우마를겪거나 기분이 상하고, 때로는 행복하거나 만족하고, 때로는 지혜로워진다. 그럼에도 우리는 우리다.

의식은 계속해서 변하는 들이다. 그 안에서는 모든 것이 흐르기때문이다. 이때 몇몇 의식 상태는 들의 가장자리에서, 몇몇은 주의의 중심에서 나타난다. 이 초점이 바로 의식의 다른 의미를 설명하는 열쇠다. 어떤 일을 고의로 하려면 우리는 그것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우리가 주의를 기울이는 것은 잘 알 수 있는 것이 되고 곧언제든 불러올 수 있는 지식이 된다. 사고하는 사람은 자신의 내면의 삶에 주의를 기울인다.

의식이 뇌에 속해 있다는 명제는 물리주의Physicalism의 근본적인가정이다. 이원론에 반대하는 물리주의는 애매모호한 영혼의 실체를 받아들이지 않고, 모든 것은 물리적이라고 말한다. 이렇게 주장하며 물리주의자들은 이원론의 모순을 피한다. 하지만 의식을 설명하기에는 아직 부족한데, 물리주의 또한 일방적인 의속만을 제시하기 때문이다.

삶과 의식은 체계의 현상이다. 우리 몸의 분자 중 단 하나도 자신을 위해 살지 않는다. 분자들이 마치 오케스트라처럼 조화를 이루어야 비로소 삶이 탄생한다. 의식도 얼핏 보기에는 이와 비슷하다. 우리 뇌에 있는 뉴런 중 의식을 가진 것은 단 하나도 없다. 약1조 개의 뉴런과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시냅스 연결을 지닌 우리만이 의식을 갖는다. 만약 우리가 모든 분자를 하나로 모아 합치면 적어도 생명체의 겉모습을 똑같이 만들어낼 수는 있을 것이다. 의식은 다르다. 우리가 뇌에 있는 모든 원자의 특성, 예를 들어 모든 원자의 응집력과 무게와 다른 원자와 에너지를 교환하는 효과 등을한데 모은다고 하더라도 의식을 손에 넣지는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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