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크와 다른 사람들이 언급한 ‘아름다운 것 목록‘의 오류는 명백하다. 너무 구체적이라는 점이다. 그래서 현대 이론은 각각의 대상보다는 아름다운 대상의 조화, 다양성, 대칭, 균형, 단순함 등에 주목한다. 유행이나 음악 스타일은 계속해서 바뀌지만, 그 근본에 놓인 원칙은 바뀌지 않는다.
여기서 선천적으로 주어진 미적 감각이란 없고, 모든 것은 문화적으로 학습되었다고 결론지을 수는 없다. 선천적으로 주어진 것이란 학습이 불가능한 것이다. 우리는 타인에게 고통을 느끼는 방법을 가르칠 수 없듯이 아름다운 사람을 보았을 때 긍정적인 기분을느끼도록 가르칠 수 없다.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다. 다만 타인을 어떤 상황으로 몰아가서 특정한 것을 느끼도록 할 수는 있다. 그러려면 어쨌든 그 사람은 무언가를 느낄 능력을 미리 갖추고 있어야 한다. 우리 뇌에 있는 향유의 중추는 끊임없이 아름다운 것이 입력되기를 추구한다. 여기에는 몇 가지 기본값이 있지만, 대개는 개인적인 경험과 시간의 흐름에 따라 달라진다.
오늘날에는 누가 예술가이고 누가 ‘예술가‘인지 구분하기 어렵다. 과거에는 수작업 능력이 결정적이었다면, 오늘날에는 예술 시장에 스스로를 내놓는 재능이 결정적이다. 예술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이건 우리 애도 그리겠네"라고 말한다. 예술 종사자들은 "제일 처음이 되어야지"라고 반박한다. 둘 다 틀렸다. 우선 현대 예술의 품질을 객관화할 수 있는 표준이 없기 때문에 특별하게 독창적일 필요는 없다. 그보다 시장의 심리학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갤러리 운영자와 큐레이터의 권력 관계, 누가 누구와 파티에 가고, 누가 누구를 추천하고, 후견인회에서 쏟아진 악평 중 어떤 것이 중요하게 다루어지고 누가 결정적인 비평을 남기는지 등을 이해해야한다.
동물행태학자이자 노벨상 수상자인 니콜라스 틴버겐NikolaasTinbergen이 이미 50여 년 전에 이와 비슷한 효과를 관찰했다. 붉은부리갈매기의 새끼들은 어미가 둥지 위로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먹이를 달라고 아우성을 친다. 새끼들에게는 어미의 부리 위에 있는붉은 점이 열쇠자극Key stimulus이다. 연구진이 막대기 끝에 붉은 점을 세 개 칠해서 만든 부리 모조품을 내밀자 새끼들은 더욱 열렬하게 반응했다. 이 부리 모조품이 ‘초엄마‘가 된 셈이다.
예술은 우리의 감각과 감정을 건드린다. 그것은 문학일 수도 음악이나 그림일 수도 있다. 예술은 또한 우리의 문화적 지식이나 생각에 영향을 미친다. 예술은 우리의 모든 정신적인 능력을 자극한다. 그렇기 때문에 예술은 특별하다. 미적 향유, 경탄, 혼란 등 각각의 도발에는 신경학적 설명이 따라야 한다. 생각을 연구하기가 가장 어려운데, 생각은 무상하게 흐르며 다른 수많은 생각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계속해서 이어질 자연과 예술의놀라움을 받아들일 각오를 해야 한다.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가.
맹시의 존재는 우리의 의식에 적어도 두 가지 근본적으로 다른측면이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심리학과 신경과학 분야는 우리가정보로 가는 ‘진입로‘라고 말하는 측면, 즉 우리가 정보나 생각을 언제 이용 가능한지에 초점을 맞춘다. 맹시인 사람과 의학적으로 정상 시력인 사람은 이 진입로를 따라 특정한 정보로 다가간다. 이들은 예를 들어 어떤 표정이 친절한 것인지 화가 난 것인지 정확히 진술할 수 있다. 이런 측면과는 반대로, 철학자들은 무엇보다도 의식의 ‘경험적 ‘특성‘에 관심을 보인다. 이것은 맹시인 사람들에게 부족한 것이다. 이 경험이 정확히 어디에 있는지 묘사하기는 어려운데, 더 어려운 "아니 애초에 불가능한 것은 그것을 자연과학적으로 설명하는일이다.
지각은 경험적 의식의 전형적인 두 가지 원천 중 하나다. 우리는 색, 소리, 냄새 등을 지각한다. 여기에 가려움, 치통, 배고픔, 오르가즘 등의 신체감각이 포함된다. 또한 우리는 이 세상을 여러 색으로 볼 뿐만 아니라 3차원으로, 즉 여러 형태와 질량, 강도까지 함께본다.
‘의식적‘이라는 말은 곧 정보나 경험에 접근했다는 뜻이다. 의식의 두 가지 변종은 모두 1인칭 시점이 특징이다. 우리의 모든 경험, 생각,감정, 지각은 나 자신과 연결되며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의식의 ‘주관성‘을 언급한다. 우리의 경험은 아주 특수한 방식으로 우리에게 ‘속해’ 있다. 경험은 우리와 분리될 수 없다.
의식의 범위는 항상 변한다. 그런 측면에서 볼 때 의식을 강이나물의 흐름과 비교할 수 있다. 미국의 철학자이자 실험심리학의 창시자인 윌리엄 제임스는 ‘생각의 흐름‘ 혹은 ‘의식의 흐름‘이라는말을 사용했다. 생각, 느낌, 소원, 인지 등은 나타났다가 사라진다. 흥미롭게도 우리는 인간으로서 그 곁에서 존속하고 있다. 물론 우리도 변한다. 우리는 점점 자라서 성인이 되고, 때로는 트라우마를겪거나 기분이 상하고, 때로는 행복하거나 만족하고, 때로는 지혜로워진다. 그럼에도 우리는 우리다.
의식은 계속해서 변하는 들이다. 그 안에서는 모든 것이 흐르기때문이다. 이때 몇몇 의식 상태는 들의 가장자리에서, 몇몇은 주의의 중심에서 나타난다. 이 초점이 바로 의식의 다른 의미를 설명하는 열쇠다. 어떤 일을 고의로 하려면 우리는 그것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우리가 주의를 기울이는 것은 잘 알 수 있는 것이 되고 곧언제든 불러올 수 있는 지식이 된다. 사고하는 사람은 자신의 내면의 삶에 주의를 기울인다.
의식이 뇌에 속해 있다는 명제는 물리주의Physicalism의 근본적인가정이다. 이원론에 반대하는 물리주의는 애매모호한 영혼의 실체를 받아들이지 않고, 모든 것은 물리적이라고 말한다. 이렇게 주장하며 물리주의자들은 이원론의 모순을 피한다. 하지만 의식을 설명하기에는 아직 부족한데, 물리주의 또한 일방적인 의속만을 제시하기 때문이다.
삶과 의식은 체계의 현상이다. 우리 몸의 분자 중 단 하나도 자신을 위해 살지 않는다. 분자들이 마치 오케스트라처럼 조화를 이루어야 비로소 삶이 탄생한다. 의식도 얼핏 보기에는 이와 비슷하다. 우리 뇌에 있는 뉴런 중 의식을 가진 것은 단 하나도 없다. 약1조 개의 뉴런과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시냅스 연결을 지닌 우리만이 의식을 갖는다. 만약 우리가 모든 분자를 하나로 모아 합치면 적어도 생명체의 겉모습을 똑같이 만들어낼 수는 있을 것이다. 의식은 다르다. 우리가 뇌에 있는 모든 원자의 특성, 예를 들어 모든 원자의 응집력과 무게와 다른 원자와 에너지를 교환하는 효과 등을한데 모은다고 하더라도 의식을 손에 넣지는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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