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치고는 때 이르게 한파주의보가 내렸던 날이 기억난다. 북쪽에서부터 찬 공기가 빠르게 내려와, 구름을 높은 곳으로 밀어 올렸다. 추분을 지나며 태양의 남중고도가 한결 낮아진 만큼, 높은 구름에 비친 저녁 햇살은 더 큰 각도로 구름 하부에서 반사되며 멋진 저녁놀을 선사했다. 아직 푸른빛이 남아 비취색으로은은하게 빛나는 하늘과 핑크색으로 단장한 높은 구름은 그렇게깊어가는 가을밤을 화려하게 열고 있었다. 다음 날 찬 공기가 불러온 대륙고기압이 세력을 뻗치면서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게 개었고 먼지마저 사라졌다. 대기는 빨강과 노랑으로 조금씩물들어가는 벚나무 이파리 사이로 더욱 파랗게 빛나고 있었다. 시인의 탄성이 들려왔다. "오매 단풍들것네."
한 그루의 나무 안에서도 가지마다 나뭇잎이 물드는 속도가달라서 여기저기 다른 색의 꽃이 피어나는 것 같다. 어떤 벚나무는 한쪽은 붉은색이고 다른 쪽은 아직 초록색이 많은 콤비로아입는다. 그러다가 시간이 지나면 한쪽은 잎이 떨어진 앙상한가지만 남기고, 다른 쪽은 온통 붉은빛으로 물든다. 생을 다할 때까지 정열을 남김없이 불태우는 모습이 마치 타다 남은 촛불이한데 모여 바람에 흔들리는 것 같다.
가을에 더욱 건조해진 공기 안에는 미량의 향기들이 들어 있다. 이 향기들은 각자의 존재를 알리면서 예민해진 후각을 자극한다. 낙엽이 서로 부딪칠 때마다 다크 초콜릿의 달콤한 향기에다 장작불을 지필 때 맡았던 갖가지 향이 섞여 나온다. 풍파를 만나야 덕이 드러나듯이 낙엽도 으스러질 때마다 지나온 세월의 향기를 내어놓는다. 메타세쿼이아나 소나무 길로 들어서면 갑자기눈이 내린 듯 고요해진다. 가느다란 이파리들이 마치 눈이 내리듯 쌓이면서 소음을 빨아들이는 것 같다. 그러면서 곱게 깔린 양탄자 위를 지나가는 것처럼 푹신한 느낌이 든다.
바람도 모나지 않았다면 이파리가 줄기에 단단히 붙어 안정된 환경에서 지내올 수 있었을 것이다. 가을이 되어 맑은 날이 계속되면 낮에는 햇빛을 많이 받아 설탕이 많이 생산되고, 밤에는 적외선이 쑥쑥 하늘로 방출되어 기온이 뚝뚝 떨어진다. 떨켜층이 두텁게 자라는 동안 이파리에 남은 영양분은 안토시아닌으로 변해 빨간 단풍잎이 제대로 모양을내게 된다. 이렇게 축복받은 날씨의 혜택을 입은 이파리라면 축적한 영양분이 풍부해서 가을에 감사의 축제라도 벌이듯 곱게 물들 준비가 되어 있는 셈이다.
게다가 가을이 되어도 구름이 많이 끼면 낮에는 광합성이 잘되지 않아, 설탕이 덜 만들어지고 색소의 생산도 더뎌진다. 야간에는 구름이 대지를 감싼 비닐하우스 역할을 하게 되어 기온이덜 떨어지고 나무의 생체 시계도 느려진다. 날씨가 끄물끄물하고비가 구질구질하게 자주 오면서 단풍이 활짝 모습을 드러내기보다는 색이 선명하지 않은 단풍이 느리게 찾아올 것이다. 그러면사람들은 단풍 색이 왜 이리 탁하냐면서 괜스레 대기오염을 탓할지도 모른다. 물론 나무도 사람처럼 공해와 먼지로 인해 생육에지장을 받을 것이다. 하지만 그보다는 날씨가 주는 스트레스가단풍의 빛깔에 고스란히 나타난 것이다. 화난 사람이 표정을 일그러뜨리듯이 말이다.
‘지구온난화가 진행되면서 여름이 길어지고 가을은 점차 짧아지는 추세다. 단풍이 드는 시기도 점차 늦어지는 경향이 있다. 밤이 길어지는 신호는 일정하지만 기온이 낮아지는 신호는 온난화로 계속 늦추어진다. 두 신호가 서로 엇박자를 내면서 나무의생체 시계는 교란되고 단풍의 색도 둔탁해진다. 온난화는 특히낮보다는 밤 기온을 높이는 쪽으로 작용한다. 여름철에는 열대야가 더욱 기승을 부리고 가을에는 야간의 기온이 덜 떨어지면서단풍도 곱게 물들기 어려워진다. 온난화는 식생의 분포에도 영향을 미친다. 나무들은 더위를 피해 점점 북쪽으로 옮겨간다. 지에서도 점점 높은 곳으로 옮겨가는 추세다. 단풍은 식생의 분포에 따라 색의 배치가 달라진다. 기후변화가 심해질수록 자연은지금과는 사뭇 다른 가을 풍경을 보여주게 될 것이다. 지금은 당연하게 즐기는 단풍의 향연도 후대 사람들에게는 먼 옛날의 아름다운 추억으로만 남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빛이 밝음의 힘이라면 인력은 어둠의 힘이다. 태양이 빛나는 광선으로 만물에 생기를 불어넣는 동안 우리는 이 어둠의 힘을 잊고 산다. 하지만 생명을 다한 별이 남겨두었다는 블랙홀을보라. 빛이 없는 어둠 속에서 주변의 모든 것을 빨아들이고 심지어는 빛마저도 끌어들인다지 않는가. 달은 햇빛을 반사하여 밤에빛난다. 달은 스스로 빛을 내지는 못하지만 인력만큼은 자기 몫을 낸다. 달이 바닷물을 끌어당기는 힘은 태양의 두 배나 된다. 무게는 태양보다 훨씬 덜 나가지만 지구 가까이 있다 보니 물을 끄는 힘은 더 세기 때문이다.
반면 어두운 면을 보면 보름달의 인력에 이끌린 무언가가 무덤에서 일어난다느니 하는 기이한 서양 미신이 떠오른다. 아르헨티나의 어느 시골에는 일곱 번째로 태어난 아이가 사랑에 빠지면보름달이 뜰 때 늑대로 변한다는 전설이 전해 온다. 영화 <나자리노>에서 늑대 인간은 금발 소녀 크리셀다와 사랑에 빠지고 두 연인은 결국 마을 사람들의 총에 맞아 하늘나라에서 다시 만난다. 주제가 〈아이가 태어나면(When a Child Is Born)〉은 나자리노의 슬픈 운명을 암시하는 것 같다. "아이가 자라게 되면 눈물이 웃음으로, 증오가 사랑으로, 전쟁이 평화로 바뀌어 모두가 이웃이 되고, 비애와 고통은 영원히 잊히게 될 겁니다. 지금은 이 모든 것이 꿈이고 환상이지만."
가을밤이 깊어가면서 여기저기 안개가 피어오른다. 구름방울이 첩첩이 쌓인 침침한 수분의 장막을 헤쳐가다 보면 시야가좁아지고 고립된 느낌에 기분이 가라앉는다. 하지만 어디선가 빛이 비치면 사정이 달라진다. 가로등이나 주변 건물에서 새어나온불빛이 구름방울에 산란하여 광원 주변으로 은은하게 퍼진다. 구름방울이 저마다 작은 광원이 되어 텅 빈 공간을 빛의 선으로 연결하면 나와 주변 세계의 관계망이 복원되는 듯한 느낌이 든다.
〈모나리자〉를 그릴 무렵에도 종종 대륙고기압이 유럽을 감싸면서 기류가 정체하여 꼬물거리는 날씨가 이어졌을 것이다. 대기가 안정한 가운데 먼지가 달라붙은 수증기가 차곡차곡 내려앉아 시야는 흐려지고, 대기 중에서 산란한 햇빛이 전경에 끼어들어 산야에는 어스름한 푸른빛이 감돌았을 것이다. 거장은 인물뒤쪽의 계곡과 폭포와 들판을 연무가 낀 듯 희미하게 처리했다. 배경이 더욱 멀리 있는 것처럼 그려냄으로써 중앙의 인물이 더욱도드라져 보이게 했다.
미래학자 폴 사포(Paul Saffo)는 불확실한 상황에서 벗어나려하기보다는 껴안으라고 조언한다. 예측대로 굴러가는 시장은 투자할 매력이 없다는 것이다. 불확실성은 위기인 동시에 기회임을상기하면서도 나에게만큼은 안개가 걷히기를 바라는 건 풀리지않는 딜레마다.
우리는 날씨의 혜택을 많이 받는 나라에 살고 있다. 연중 비나 눈이 적당히 내려주고, 그 사이사이마다 무난한 날씨가 고루섞여 있다. 장마철만 잘 보내면 비나 눈이 기껏 하루 정도 내리다가 날이 회복된다. 궂은 날씨를 잠시 견디고 나면 한동안 평온한날씨가 이어지는 자연의 리듬을 즐길 수 있다. 하늘의 표정이 덤덤하고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조용히 지나가는 날씨는 당연히주어진 것, 으레 있는 평범한 것으로 치부하고 만다.
제철에 맞는 옷을 입고 있다면 여름이나 겨울에도 좋은 날씨가 제법 있다. 겨울에는 찬 공기가 자주 내려와 대기가 안정하므로 먼지 농도가 관건이다. 하지만 온대저기압이 막 통과한 후에는 북서풍이 강하게 밀고 내려와 일시적으로 먼지를 내보낸다. 이때 추위만 견딜 수 있다면 습도, 먼지 농도, 하늘 상태 모두 양호한 쾌적한 날씨를 즐길 수 있다. 게다가 북동풍이 불어오는 날이면 동해의 깨끗한 공기가 한동안 들어와 더없이 맑은 하늘을즐길 수 있을 것이다.
날씨가 좋은 날은 모든 것이 평탄하게 흘러가서 일기예보도쉬워 보이지만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평탄하게 살아가는 사람도 얘기를 들어보면 곡절이 있고 남모를 애환이 있듯이 평탄한날씨에도 예민하게 반응하는 사람들이 있어, 이들을 위한 예보는 여전히 도전적이고 어렵다. 이동성고기압이 한반도에 자리 잡으면서 대체로 무난한 날씨가 예상될 때에도 어떤 이들은 안개나산불이나 불볕더위로 힘든 시간을 보낸다. 사실 무난한 날씨라는표현은 일상적으로 무난한 하루를 보내는 이들에게나 해당하는것일 뿐이다.
수증기건 먼지건 간에 통상 맑은 날에 몰려와서 문제다. 흐린 날에는 비나 눈이 내려서 기분을 가라앉게 하고, 맑은 날에는수시로 먼지가 불청객처럼 찾아온다. 늦가을이나 겨울철에 고압권이 세력을 뻗치며 무난한 날씨가 보장되는 때에는 하늘이 뿌옇고 탁하다. 주변에서 배출된 미세먼지가 위로 확산하지 못하고계속 쌓이면서 먼지 농도가 높아진 탓이다. 그게 아니라면 북서풍을 타고 이웃나라에서 오염 먼지가 유입된다. 지자체마다 주변산업 시설의 먼지 배출량을 통제하고 주민에게는 가급적 외출을자제하라는 문자메시지를 계속 날리느라 바쁘다.
이런 일을 겪고 나면 좋거나 나쁜 날씨가 없고, 특별히 무난하거나 평이한 날씨도 없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된다. 상황에 따라 날씨의 표정이 달라지고 날씨로 인한 나의 기분도 달라지기때문이다. 내가 평이한 날씨의 혜택을 누리는 동안 누군가는 바로 그 날씨로 힘든 시간을 보낼지도 모른다. 그래서 날씨는 자연적인 동시에 사회적인 현상이라고 말한다면 지나친 비약일까?
구름에 따라 하루의 표정이 달라진다. 맑은 날 하면 파란 하늘을 떠올리지만 막상 하늘에 구름 한 점 없다면 얼마나 단조로울까, 흐린 날에는 으레 구름이 꽉 들어찬 잿빛 하늘을 쳐다보고싶지도 않지만 조금 벌어진 구름 틈새로 햇살이 내려올 때는 또얼마나 가슴이 벅차올랐던가. 우리도 모르는 새 하늘은 순간순간모습이 달라진다. 파란 하늘도 태양의 궤적에 따라 색의 농염이달라진다. 뭐니 뭐니 해도 하늘의 인상을 좌우하는 건 파란 배경사이로 흐르는 구름이다.
5D 구름 중에서 가을 하늘 높이 뜬 새털구름은 반달 모양의 원호를 그리며 파란 하늘에서 하얗게 반짝인다. 마치 새들이 경쾌하게 가지에서 가지로 뛰어다니는 것 같기도 하고, 학이 가볍게이리저리 날갯짓하는 것 같기도 하다. 덩달아 기분이 좋아진다. 어린 콩나물처럼 매달린 가는 구름 띠에는 얼음 결정이 들어 있다. 이것이 햇살에 반짝이며 더욱 정결한 느낌을 준다.
대기의 상태와 움직임에 따라 구름의 형태와 모양이 달라지듯이 거꾸로 구름만 잘 관찰해도 일기를 대강 파악할 수 있다. 그래서 예보관들은 일기도에서 맨 먼저 구름 기호부터 읽는다. 일기도에는 다양한 구름 기호가 쓰여 있다. 이것들은 마치 이집트상형문자같이 생겼다. 뒤집힌 U자는 구름이 솟아나는 모양으로, 뭉게구름을 나타낸다. 옆으로 긴 줄은 구름이 옆으로 퍼지는 모양으로, 비단구름같이 평평한 구름을 나타낸다. 한자를 쓰듯이 펜으로 그린 두세 획이면 27종의 구름을 구분해낼 수 있다.
구름을 분류하는 방식은 학자마다 다를 수 있었지만, 당시유럽 사회는 그림을 통한 과학의 소통 방식에 큰 호응을 보인 것같다. 목동의 뒷모습을 배경으로 멀리 지평선까지 드리운 양떼구름에는 한가로움이 담겨 있다. 아이를 안고 웅크린 여인의 뒤로번개의 섬광과 함께 높이 솟은 먹구름에는 격정과 근심이 가득하다. 순간 포착에 뛰어난 사진기가 발명된 후에도 구름 책자에 풍경화와 사진을 나란히 배치하는 관행은 19세기 내내 이어졌다. 괴테가 구름 에세이를 칭송하는 시를 쓰면서 하워드는 유명세를탔고 그가 제안했던 구름 분류 뼈대는 지금까지 살아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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