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희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의 팔에 가만히 자기 손을 올려놓았다. 그런 다희를 보며, 그녀는 왜 자신이 팔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때의 일들을 떠올리곤 하는지 어렴풋이 이해할 수 있었다. 다희와 주고받던 이야기들 속에서만 제 모습을 드러내던 마음이있었으니까. 아무리 누추한 마음이라 하더라도 서로를 마주볼 때면 더는 누추한 채로만 남지 않았으니까. 그때, 둘의 이야기들은서로를 비췄다. 다희에게도 그 시간이 조금이나마 빛이 되어주었기를 그녀는 잠잠히 바랐다.
나도 네 살 무렵에 헤어진 엄마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어. 언니가 해주는 말을 통해 엄마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우리가 엄마와어떤 시간을 보냈는지 추측할 뿐이었지. 어린 시절 언니는 엄마와다시 만날 날을 희망하고 있었어. 그 기대가 꺾이고 꺾여 더는 꺾일 게 남지 않게 되자 언니는 엄마가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던 사람이라는 듯이 말하곤 했어. 엄마에 대해서라면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다면서. 그건 내가 처음으로 알아차린 다른 사람의 거짓말이었지. 언니의 그런 거짓말을 들을 때면 마음이 아팠지만 한편으로는 엄마에 대한 기억이 남아 있는 언니가, 나보다 삼 년을 더 엄마와 보낸 언니가 솔직히 부럽기도 했던 것 같아.
언니는 언제부터 그를 만났을까. 그는 늘 우리집 골목 앞큰길에서 언니를 내려줬어. 검은색 세단이었지. 평범한 차였지만 번호판에 적힌 숫자가 단순해서 알아보는 게 어렵지 않았어. 어느 날인도를 걷는데 누군가 차에서 내리는 거야. 고개를 돌리니까 조수석 문을 열고 나오는 언니와 함께 운전석에 앉아 언니를 올려다보는 남자의 얼굴이 보였어. 내가 처음 그를 본 순간이었지. 나와 마주친 언니는 안절부절못했어. 묻지도 않았는데 하굣길에 우연히 만난 교련 선생님이 데려다준 거라고 말하더라. 집으로가는 내내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땅만 보면서 걸었어.
나는 주머니에서 핫팩 두 개를 꺼내 언니에게 건넸어. 그리고곧바로 집으로 뛰어갔지. 조금이라도 더 함께 있다가는 결국 언니에게 상처를 줄 것 같아서. 그날 이후에도 언니는 내게 그 말을 자주 했어. 너희 형부는 좋은 사람이야, 본성은 착한 사람이야, 나한테 잘해줘. 그럴 때면 나는 폭발할 것 같은 마음을 억누른 채로 고개를 끄덕였지만 차마 언니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볼 수는 없었어.
"니 동생 왜 저렇게 살쪘는데?" 나는 못 들은 척 룸을 빠져나왔어. 스무 살의 나는 사람들의 본격적인 악의에 대해 잘 몰랐지. 언니의 시어머니는 뒤에서 계속나에 대해 말을 하는 것 같았는데, 빠르게 걸어나온 덕에 다행히그 뒤의 말은 듣지 못했어.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언니가 나를따라오지 않을까 기대했던 것 같아. 마음이 상한 건 아닌지 걱정된다. 그런 말 정도는 해줄 수 있지 않을까 하고. 하지만 홀을 나와서 뒤돌아봤을 때 언니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시어머니와이야기하고 있더라. 마치 내가 보이지 않는 것처럼.
그는 대답하지 않고 자리를 떠났어. 나는 어른이었고 더는 보호자가 필요한 나이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스스로를 보호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어. 내 편이 되어줄 사람도 없었지. 그도 그 사실을알고 내게 손을 댄 거겠지. 아빠에게 말한다고 해도 아빠는 나보고 참으라고 할 게 분명했어. 언니에게 말한다면 언니는 그가 나를 때린 이유를 물을 테고, 결국은 그가 나를 때릴 수밖에 없었다고 정당화하리라는 것도 알았지. 그렇게 생각하면서 나는 더이상언니를 믿지 않는 나를 발견했어.
사람들은 그와 그녀가 전혀 다른 성격을 지녔다고 말하곤 했다. 하지만 그도 그녀도 알고 있었다. 그들은 같은 천성을 공유하고있다는 것을. 그 또한 자신의 슬픔을 너무 쉽게 알아보았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그가 언제나 자신에게 져주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어서, 자신이 아무리 잔인하게 대해도 참고 견뎌줄 사람이라고 생각해서, 그를 그토록 애틋하게 여겼으면서도 동시에 그렇게 대했다. 이제와 후회해도 소용없는 일이었다. 이제는 어떤 식으로도 지난 일을 만회할 수 없으니까.
몇 년 후 마침내 그녀가 첫 단막극으로 입봉했을 때, 그는 ‘작가이민주‘라고 쓰인 드라마 오프닝 장면을 캡처해서 한지 가게에 표구해 걸어뒀다. 좁은 빈 벽에 있던 시계를 떼고 그 자리에 액자를걸어둔 거였다. 왜 그런 걸 걸어뒀냐고, 당장 치우라고 타박하면서도 그녀는 그의 마음에 눈물이 났다. 그는 어떤 것도 자랑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자신을 드러내는 것을 싫어했고, 과시와도 거리가멀었다. 그런 그가 남들에게 그녀를 자랑하고 있었다. 내 동생이이토록 멋진 사람이라고 말하고 싶어 어쩔 줄 몰라했다. 그녀가무슨 대단한 작가라도 된 것처럼, 특별한 사람이라도 된 것처럼.
그녀가 여덟 살이었던 그때, 그는 스물셋이었다. 갓 제대해서복학했다가 어머니의 투병으로 다시 휴학했다. 그와 이모가 돌아가며 어머니를 간병했다는 걸 그녀는 나이가 들어서 그에게 들었다. 아버지가 누군가와 전화하는 소리, 가끔 집에 들어오는 그가깊은 잠을 자는 모습 ・・・・・・ 막연함은 차츰 분명함으로 변해갔다. 하루하루 집안에 쌓이는 비통함의 공기는 그녀가 숨을 들이마시고 내쉴 때마다 그녀의 몸속을 드나들며 그녀를 일깨웠다.
시원한 바람이 소리와 그녀에게 불어왔다. 연한 나뭇잎이 바람에 스치는 소리가 들렸다. 나뭇가지가 흔들릴 때마다 봄볕이 눈을 따갑게 했다. 그녀도 소리를 따라 무릎을 세우고 앉아 머리를 기대고 눈을 감았다. 없어지지 않았으면 좋겠어....… 바라지않아도 그 흔적은 사라지지 않을 거야. 그녀는 속으로 말했다. 푸른 무청이 가득한 텃밭을 그리면서 그곳으로 찾아올 햇볕과 비와바람과 작은 벌레들을 기다리면서.
이모는 어린 나를 이곳저곳에 데리고 다녔다. 그중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게 남아 있는 순간이 있다. 엄마와 이모의 사촌언니 환갑잔칫날이었다. 노래방 기계가 설치된 넓은 연회장에서 한복음입은 사회자가 노래를 부르고 손님들이 다 같이 춤을 줬다. 손님들은 술에 취해 소리지르듯이 말했다. 시끄러운 음악소리, 번스러운 분위기.… 나는 이모가 그런 상황을 가장 싫어한다는 걸알았다.
이모는 왜 그렇게 싫은 게 많아? 왜 다 못마땅하게 여기는 거야? 왜 그렇게 불평을 해? 좋은 면을 보는 게 그렇게 어려워? 이모가 감정적으로 인색한 사람이란 거 알아? 때로는 마음속으로, 때로는 이모 앞에서 소리 내어 그렇게 말했으면서도 때때로 나는내 안에서 내가 그토록 견디기 힘들어했던 이모의 모습을 본다.
어린 시절 나를 둘러싼 세계는 늘 모호했다. 어른들은 내게 뭔가를 감추고 있었고 나는 내가 알아서는 안 되는 일이 무엇인지궁금했다. 나는 어른들의 대화에서 분명히 이중적인 의미를 지닌말이나 감춰진 감정의 진동을 느끼면서도 그것의 정확한 의미를알 수가 없었다.
요즈음 나는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보며 종종 놀라곤 한다. 사십 년 동안 자주 사용한 얼굴 근육은 나를 이모와 비슷한 종류의사람으로 보이게 한다. 얼굴이 말해주는 그대로, 나는 완고한 어른이 되었다.
나는 그렇게 답하고 자리를 떴다. 나처럼 살고 싶지 않다고? 멋대로 나를 판단했다고 분노하면서도 나는 그애의 말에 마음을 다쳤다. 그 말에 동의했기 때문이다. 엄마는 내가 의젓하게 내 길을 찾아가서 기쁘다고 했다. 내가반항 한번 하지 않고 유순하게 사춘기를 넘겼다면서 다시없을 효녀라고 했다. 그런 인정을 받으면 기쁠 거라고 상상했던 적도 있었지만 정작 그 말을 들었을 때는 그저 공허하기만 했다.
이모와 만나지 않고 지냈던 그 시절에 나는 자주 이모를 떠올렸다. 처음으로 비행기를 조종한 날, 높은 고도의 비행에 성공한 날, 근무지 부대로 이사를 간 날, 깊은 잠에서 문득 깨어나는 순간들마다 나는 이모의 시선으로 나를 바라봤다. ‘이모, 이 정도면 만족해?" 세수한 뒤 수건으로 얼굴의 물기를 닦고 거울을 보면 그곳에이모와 닮은 내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모는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내가 꼭 그 자리에 존재하지않는 것처럼,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묵은 상처들이 고개를 들었다. 그런 순간의 감정을 나는 잊고 있었다. 좋은 것만 기억하려고하면서, 내가 이모와 비슷한 환경에 놓였다면 이모보다 더 나은인간이 되지 못했을 거라고 이모를 이해하려고 하면서. 그것이 이모에 대한 나의 사랑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모는 가장 기본적인 수준의 공감조차도 하지 않으려 했다. 최소한의 노력조차 하지않았다. 나는 다시 냉정한 이모 앞에 선 일곱 살짜리 아이가 된 것같았다. 분노인지 슬픔인지 알 수 없는 뜨거운 감정이 목을 타고올라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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