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는 그때부터 대처로의 출분을 꿈꿨다. 마침 오빠의 소학교졸업을 기화로 그 꿈은 구체화됐다. 엄마는 아버지의 삼년상도 받들기 전에 오빠를 데리고 서울로 떠났다. 맏며느리로서 시부모 공양하고 봉제사라는 신성한 의무를 포기하는 대신 엄마는 아무런 재산상의 권리도 주장하지 못했다. 숟가락 하나도 집안 것은 안 건드리고 오로지 당신의 단 하나의 재간인 바느질 솜씨만 믿고 어린 아들의 손목을 부여잡고 표표히 박적골을 떠났다. 그때는 내가 떠날때 같은 고부간의 사전 불화조차 없었다.
엄마는 표를 사러 가고 나는 할머니와 긴 의자에 앉았다. 농바위고개에서 볼기 맞고 나서 나하고 할머니 사이는 쭉 서먹했다. 할머니는 보따리 귀퉁이에 손을 넣으시더니 조찰떡을 꺼내서 먹으라고하셨다. 나는 헛헛해서 매점 유리창 속에 고운 종이에 싼 먹을 것을바라보며 군침을 삼켰지만 그것을 받아먹긴 싫었다. 나는 속에 팥을 넣고 큰 고구마처럼 아무렇게나 뭉친 조찰떡과 할머니의 갈퀴같이 모진 손이 함께 싫고 창피해서 세차게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기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창밖에 전송객들도 따라 움직였지만할머니는 그냥 서 계셨기 때문에 곧 보이지 않게 됐다. 나는 휴우 하고 안도의 한숨을 쉬고 나서 엉덩이를 들까불러서 의자의 신기한탄력을 시험해보기도 하고 한 손으로 등받이를 만져보고 쓸어보기도 했다.
어둑해질 무렵 경성역에 내렸다. 경성역은 아닌 게 아니라 컸다. 컸기 때문에 도리어 전모를 파악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생전 처음보는 인파에 휩쓸리면서 엄마를 놓칠까 봐 조마조마하는 게 고작이었다. 엄마는 할머니가 여다 준 짐까지 합해서 세 개나 되는 보따리를 이고 들고 구름다리를 오르내리느라 내 손을 잡아줄 수 없었다. 치마꼬리에 매달리는 것도 싫어했다.
나는 험악하게 생긴 지게꾼의 얼굴에 경멸이 스치는 걸 놓치지 않았다. 도시의 집단 속에서 엄마는 작고 초라해 보였다. 동백기름을발라 늘 곱게 빗어 쪽 찌던 머리가 힘겨운 짐을 이었다 내렸다 하는새에 헝클어지고 곤두선 것도 보기 싫었다. 나는 이유가 분명치 않은 슬픔이 복받치는 걸 느꼈지만 울음을 터뜨리진 않았다.
말끝마다 꼬박꼬박 상상꼭대기라네, 되지 못한 늙은이 같으니라구. 엄마는 포개놓은 세 개의 짐에 머리끝까지 가려서 겅정겅정 뛰다시피 하는 두 다리만 뵈는 지게꾼을 향해 조그만 소리로 그렇게중얼거렸다. 그러나 흥정이 그렇게 끝난 건 나한테는 매우 다행한일이었다. 나는 마음놓고 엄마의 손을 잡을 수가 있었다. 우리는 지게꾼을 따라 겅정겅정 뛰다시피 했지만 지게꾼은 줄창 저만큼 앞서가고 있었다.
엄마가 무서운 얼굴을 했다. 그리고 길가에다 화덕을 놓고 동그란 빵을 구워내는 곳에다 동전을 한 푼 내밀었다. 시골집에 있는 다식판 구멍보다 훨씬 큰 구멍에다 묽은 밀가루 반죽을 붓고 팥속을넣어 익힌 따끈한 빵을 두 개 받아 들었다. 팥의 감미는 혀가 녹을것 같았다. 그건 내가 알고 있는 엿이나 꿀의 감미보다 희미한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훨씬 고혹적이었다. 나는 두 개의 국화빵에 현혹되어 전차 타고 싶은 걸 까마득히 잊어버렸다. 아껴가며 먹었지만 순식간에 먹었고, 그 후에도 오랫동안 시골의 감미하곤 이질적인 새로운 감미에 대한 감질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더욱 어처구니없는 것은 그 상자갑을 쏟아놓은 것처럼 담 쌓인 집들 중의 하나나마 우리 집이 아니라는 거였다. 현저동에서도 상상꼭대기에 있는 초가집의 문간방에 엄마는 세들어 살고 있었다. 집이 없는 사람이 남의 집에 세들어 사는 생활방식에 대해서 그 전에나는 듣도 보지도 못했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하늘 같은 시부모님한테도 다소곳한 채로 또박또박 할 말을 다하던 엄마가 안집 식구라면 코흘리개까지도 두려워하고 굽신대는 것이었다.
나는 차츰 엄마 앞에서 안집 애한테 엄마가 기겁을 할 짓을 해서엄마로부터 동전을 얻어내는 방법을 알게 됐다. 서울 온 날 전차를타는 대신 얻어 먹은 국화빵의 달콤한 팥소 맛을 나는 결코 잊지 못했다. 그것은 엿이나 꿀의 단맛처럼 끈기 같은 게 가미된 강렬한 단맛이 아니라 부드럽고 순수하면서도 혀를 녹일 듯한 감미 그 자체였고 단 한 번에 나를 사로잡은 대처의 추파요, 대처의 사탕발림이었다. 1전짜리 동전은 당장에 그 달콤한 것과 바뀌었다. 국화빵이아니더라도 알사탕이나 박하사탕, 캐러멜 등 구멍가게에서 살 수있는 모든 것에도 나를 못 견디게 현혹시킨 도시의 감미가 들어 있었다.
그러나 나는 지금의 악필과도 결코 무관한 것이 아닌 속필로 제아무리 많은 글씨공부도 후딱 끝냈다. 글씨공부 중에서도 일본 가나공부는 단조롭고도 무의미했다. 오빠는 자기 공부가 바빠서인지 그부호의 음만을 가르쳐주었다. 그 부호를 연결해서 만들 수 있는 새로운 말에 대해선 한마디도 안 가르쳐주었기 때문에 재미를 붙일수가 없었다.
나는 석필보다는 단간방의 연금 상태에서 벗어난 게 신기하고 즐거웠다. 살 것 같았다. 우리가 세든 초가집은 높은 축대 위에 있었다. 대문 밖도 평탄한 골목길이 아니고 인왕산으로 통하는 오르막길에서 가지를 뻗은 좁은 막다른 길이어서 사람이 드나들 수 있는길 밖은 곧 낭떠러지였다. 그러나 전망은 좋았다. 멀리 파란상자갑같이 생긴 전차가 왕래하는 한길이 보였고, 그 너머론 높고 붉은 담장을 둘러친 어마어마하게 큰 집이 보였다. 그 큰 집엔 임금님이라도 사시는지 파수꾼이 밤이나 낮이나 지켜 서 있었고 전차의 이마빡에 뻗친 더듬이가 공중에 걸린 줄과 맞닿으면서 간간이 일어나는푸른 섬광은 어둑어둑해질 무렵이 가장 아름다웠다. 나는 그것을볼 때마다 내 속에서도 뭔가와 부딪쳐 스파크를 일으키려는 아슬아슬한 힘 같기도 하고 열기 같기도 한 걸 느끼고 전율했다. 그건 골수에 사무치는 심심함이었다.
기어코 서울에도 말뚝을 박았구나. 비록 문밖이긴 하지만..………." 비록 여섯 칸짜리 집이지만 없는 게 없었다. 안방, 마루, 건넌방, 부엌, 아랫방, 대문간 이렇게 여섯 개의 방이 공평하게 한 간씩이었다. 마당도 있었다. 마당이 네모나지 않고 삼각형인 게 흠이었다. 엄마는 이런 마당을 ‘우리 괴불마당‘ 이란 애칭으로 불렀다. 새집은셋집처럼 대문 밖이 낭떠러지가 아니고 보통 골목인 대신 직삼각형마당의 가장 변이 긴 쪽이 남의 집 뒤쪽으로 난 담인데 그 밑이 어마어마하게 높은 축대였다.
엄마가 이웃을 상종해도 괜찮을 이웃과 상것, 바닥 상것의 세 가지로 나누는 기준은 들쑥날쑥해서 일정치 않았다. 성씨나 사는 형편, 말의 직업하고 관계가 있는 것도 같고 없는 것도 같았다. 기분내키는 대로였고 또 매우 변덕스러웠다.
시골 우리 면에서도 면서기가 그걸 가지고 집집마다 돌면서 쌀을감춰뒀음 직한 데를 함부로 찌르다 어떤 볏짚더미 속에서 피와 살이 묻어나왔다는 참혹한 소문도 엄마는 가져왔다. 징용을 피해 다니던 남자가 그 속에 숨어 있다가 그런 변을 당했다는 거였다. 일본이 망해가면서 인심이 흉흉하고 내일을 모르게 불안할 무렵나는 중학생이 돼 있었다. 나는 이미 문둥이가 어린이 간을 내먹는다는 소문은 믿지 않았지만 순사의 창이 엄마의 배를 찌르는 악몽에 비하면 그게 도리어 낭만적이었다.
결국 엄마가 악착같이 최초의 말뚝을 박고 서울 살림의 기틀을 마련하던 곳을 뜨지 않으면 안 되었는데 그건 엄마의 당초의 소망대로 문안의 좋은 집을 사서 가는 이사가 아니었다. 패색 짙은 일본의마지막 성화인 소개령에 못 이겨 솔선해서 시골로 피난을 떠났다. 피난살이 반년 만에 해방이 되었는데 먼저 상경한 오빠는 북새통에 돈을 좀 벌었는지 문안의 평지에다 집을 장만해서 엄마의 소원을 풀어드렸다. 그 후 살림은 순조롭게 늘어나 좀 더 나은 집으로 이사도 여러 번 다녔다.
어머니가 아무리 그때에다 대면 지금 큰 부자됐지? 하시지만 그때하고 비교하는 마음을 버리시지 않는 한 우린 그 최초의 말뚝에매인 셈이었다. 놓여났다면 구태여 대볼리가 없었다. 어느 만큼 달라졌나 대본다는 건 한끝을 말뚝에 걸고 새끼줄을 풀다가 문득 그길이를 재보는 격이었다.
그날 오후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나는 친구들하고 영천에서 헤어져서 그 동네의 예전 길을 더듬어 올라가기 시작했다. 길이 많이 변했지만 우리가 살 때 화산학교라고 부르던 붉은 벽돌집이 예전 그대로의 모습으로 남아 있어서 눈대중 삼기에 편했다. 틀림없었다. 괴불마당 집이 있던 근처에 연립주택이 병풍처럼 들어서서 인왕산을 쳐다보지도 못하게 가리고 있었다. 나는 가슴속을 소슬바람이부는 것 같은 감상에 젖으며 그 근처를 헛되이 배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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