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복은 우리가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부여되는것이다. 개인적인 것의 변덕스러움에 맞서는 보편적인 것의확실성이다. 예전에는 그렇게도 자명했던 가치들이 의문시되고 고개를 숙인 채 멀어져 가자 그 가치들(충실함, 가정, 조국, 규율, 사랑)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자는 마치 제복이야말로이제 더 이상 존중할 것이 없는 싸늘한 미래로부터 자신을 보호해 줄 수 있는 초월의 마지막 잔해이기라도 한 것처럼, 보편성이라는 제복의 마지막 단추까지 채워 스스로를 구속한다.
브로흐의 정신에 있어 근대란 비합리적인 믿음이 지배하는세계와 믿음 없는 비합리성이 지배하는 세계 사이에 걸쳐진다리다. 이 다리 끝에 윤곽을 드러내는 사람이 후게나우다. 죄의식 없는 행복한 암살자. 근대의 종말의 행복한 버전.
지나간 시간이 문득 하나의 전체로 드러나고 눈부시도록명확하게 완성된 형태를 이루는 것은 마지막 순간(사랑의 마지막, 인생의 마지막, 시대의 마지막)에 이르러서다. 브로흐에게마지막 순간은 후게나우고, 토마스 만에게는 히틀러다. 푸엔테스에게 그것은 두 천 년 왕국 사이의 전설적인 국경이다. 이같은 상상의 관측소에서 볼 때 역사라고 하는 이 유럽식 비정상(anomalie), 시간의 순수함 위에 묻은 얼룩은 이미 끝나 버린것, 포기된 것, 내팽개져친 것으로 보이고, 내일이면 잊힐 개인의 사소한 역사와 다를 바 없는 보잘 것 없고 감동적인 것으로 보인다.
사랑한다는 말 대신에 밤 이야기만 했던 사내는 그것이 사별한 부인에 대한 애정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싶어 한다. 안나의 행위에서 우리가 찾아볼 수 있는 이유들에 대해서도 거의비슷한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람들이 그녀에게 경멸적인 태도를 보였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녀 또한 그들을경멸해 버릴 수는 없었을까? 사람들은 그녀가 아들을 보러 가지 못하게 방해했다. 그러나 그것이 하소연할 데도 없고 빠져나갈 수도 없는 상황이었던가? 브론스키는 이미 약간 냉담해져 있었다. 그래도 그는 여전히 그녀를 사랑하지 않았던가?
비합리적인 체계는 정치적 생활까지도 지배한다. 공산주의 러시아는 지난 세계 대전에서도 상징의 전쟁에서도 승리했다. 가치를 열망하면서도 그것들을 분별할 수 없는 에슈 같은 인물들로 구성된 거대한 군대는 최소한 반세기 동안만큼은 선과 악의 상징을 퍼뜨리는 데 성공했다. 그래서 유럽인들의 의식 속에서 집단 수용소는 결코 나치즘과 같은 절대적 악의 상징으로 여겨지지 않는다. 월남전에 대해서는 집단적이고 자발적으로 항의했던 사람들이 아프가니스탄 전쟁에 대해서는 그렇게 하지 않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베트남, 식민주의, 인종차별주의, 제국주의, 파시즘, 나치즘 같은 단어들은 마치 보들레르의 시에서 색채와 소리가 서로 화답하듯 같은 울림을 갖는다. 반면에 아프가니스탄에서의 전쟁은, 말하자면 상징적 벙어리인 셈이고 절대적 악의 마술적 테두리 바깥, 상징의 간헐천(間歌川) 바깥에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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