칸트는 ‘실천이성비판』을 통해 근대적인 삶에 부합하는 새로운 윤리학을 제시한다. 칸트의 ‘자유‘ 개념은한없이 작고 유한한 인간일지라도 광대한 우주에 맞설수 있는 용기를 가져다주었다. 이것이 바로 칸트가 우리에게 주는 희망의 근거이자 품격의 원천이다.
취소선과 글자선도 마찬가지다. 취소선과 글자선의 교차가보여주는 것은 상상력이 천상과 지구를 돌아다니며 야외 세계의 흙,바람, 새소리와 어우러지는 동안 몸은 서재라는 실내 세계에 갇혀있는 작가의 상태다. 그 손은 지면에 바짝 매여 있다. 취소선에서 이 두세계는 불현듯 충돌하고, 충돌은 흔적을 남긴다.
사물은 순수한 형태로 정제하고 이성의 범주에따라 정리한 박물관의 전시품처럼 조용해졌다. 우리는 지구온난화로서식지, 생물종, 심지어 빙하까지 사라질까 봐 걱정한다. 그러나 이러한것들이 아직 세계에서 사라지지는 않았더라도 자연을 사실로, 앎을해석으로 바꾸며 삶에서의 대화가 단절되었기 때문에, 이미 우리를떠나갔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하지만 이는 쉽지 않다. 자유로워지려면, 삶을 구속하고자유를 법과 이성의 규율에 복종시키는 물리적·사회적·제도적 구조의덫을 피하려면 어마어마한 의지가 필요하다. 작업을 수행하는 동안시간을 낭비하는 것이 고된 일이었다던 시에의 말이 바로 그 뜻이다.
각인은 끊임없는 흐름 속에 있다. 예술가 파울 클레에게드로잉 작업이 ‘선을 데리고 나간 산책‘의 산물이었듯 거주자의 길은다른 목적이 없는 산책 그 자체로 만들어진다. 종이에 자유롭게 선을그려보라. 연필을 쥔 손은 연필심이 종이에 닿기 전부터 이미 움직이기시작해서 연필심이 떨어진 후에도 계속 움직인다는 사실을 알게 될것이다. 종이에 남는 것은 그 움직임의 흔적이다. 흔적은 연필심이종이에 닿아 있는 동안만 이어지지만, 움직임 자체에는 시작도 끝도없다. 거주자의 자취는 이런 식으로 새겨진다. 삶과 시간이 그러하듯자취는 계속되는 와중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