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고 종종한 이를 드러내며 윤이가 웃었다. 화를 내려던 그는 머쓱해져 윤이 곁으로 다가갔다. 걸쭉한 콧물이 윤이의 윗입술에 흘러 있었다. 콧물만 닦아주면 하얗게 예뻐지는 아우의 얼굴을 향해 그는 손을 내밀었다. 그가 볼을 쓸어내리려 하는 찰나, 윤이의 얼굴에서 별안간 웃음이 걷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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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꽃을 본 것은 그때였다.
예닐곱 살 어린애의 몸집만 한 붉은 연등이 허공에서 흔들리고 있었다. 마치 나름의 생명을 가진 것처럼 그것은 고요히앞으로 흘러갔다. 뜀박질을 멈추며 그는 숨을 할딱거렸다. 한사미니가 그것을 들고 나아가고 있었다. 사미니가 가는 방향으로 그는 고개를 빼어보았다. 긴 연등 행렬의 끝이 보였다.
식구들을 찾는다는 생각을 일순 잊은 채, 그는 홀린 듯 윤이의 팔을 끌고 그 커다란 꽃을 향해 나아갔다. ‘석가모니불‘을합창하며 수백 명의 사람들이 느린 행진을 하고 있었다. 저마다 크고 작은 붉은 연등 안에 불을 켜든 그들의 옷은 가난했으며, 얼굴은 저마다 엄숙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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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세면장 한켠에 세워진 두 개의 우산을 보았다. 물방울무늬의 우산은 민화의 것이었고, 그 옆에 진초록색 남자용 우산이 기대어 있었다. 우산 꼭지들에서 흘러나온 빗물이 서로엉키며 세면장 바닥을 타고 수챗구멍까지 뻗어 나가 있었다.
그는 조용히 손을 뻗었다. 단호하게 방문을 열어젖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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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에는 견뎠고 봄에는 기쁘다.
누군가가 속삭여준 듯 문득 떠오른 말을 속으로 되뇌며 나는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새벽빛은 천천히 가셔갔다. 꽁지가푸른 산까치 한 마리가 마른 울음을 뱉으며 철조망 너머로 날아갔다. 바람이 일 때마다 벌거벗은 나뭇가지들이 몸 스치는소리를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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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가 빛의 속도로 나를 다시 붙잡았다. 내가 아무도 아니었던 곳, 어느 영토에도 속하지 못하고 문화가 없고 정체성도 없는 존재였던 곳으로 다시 안내하는 레드 카펫 위로,
그동안 내가 지나온 먼 거리가 달려 내려갔다. 나는 그때까지, 그러니까 카-나-다라는 단어가 온전한 의미를 띠는 그 순간에 이르기까지 내가 지나온 길들과 샛길들을 되짚어 보려애썼다. 깃발들이 사방으로 자유롭게 휘날리는 곳에서 전국민을 대표하는 시민으로, 다른 사람도 아니고 난민으로 들어와 이민자가 된 사람을 고를 수 있는 나라가 이 세상에 얼마나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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