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ook] 마키아벨리의 피렌체사 - 자유와 분열의 이탈리아 잔혹사
니콜로 마키아벨리 지음, 하인후 옮김 / 무블출판사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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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벽돌책이고 위대한 고전이라 또 내용 파악과 읽기를 위해서 자치구 도서관에서 빌려 읽는중인데 역시 소장가치와 이 지겨운 혼란스러운 시대에 다소 위안을 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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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숭덕학교 교정의 독립선언식을 사찰했던 경찰 김정탁의 법정 증언을 들어보자.
당시 식장에 집회한 자는 약 1천 200~300명으로 운동장에 입추의 여지도 없을 정도로 모였다. 그리고 봉도식이 끝났는데, 도인권이 모인 사람들에게 행할 것이 있으니 해산하지 말라고 했다. 김선두가 축복기도를 하고, 이어 도인권은 일반에게 어떤 일이 있어도 결코 굴하지 말라 했다. 김선두는 곽권응에게 작은 국기를 꺼내어 배포하라 했고, 곽권응은 작은 국기를 학교 생도 등에게 배부했다. 정일선은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회중 일동은 만세를 불렀다. 이어 김선두는 성서를 낭독하고 계속해서 연설했다. 그 요지는 ‘인간은 자유를 얻지 못하고 천년을 사는 것보다 자유를 얻어 백년을 사는 편이 좋다. 조선 민족은 일본의 구속을 받아 자유가 속박되었으므로 독립하여 자유를 얻는 것만 못하다. 반드시 독립하지 않으면 안 된다’였다. 다음으로 강규찬이 연설했다. 강규찬이 연설할 무렵 회중이 매우 열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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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복종’의 지침이 없었다 하더라도 당당한 시위였다. 안성교는 상고 취지서에서 시위 상황을 다음과 같이 전했다. "가급적 관사에 접근하지 않고 단천 읍내 시가지에서 천도교인과 보통사람 모두 600여 명이 맨손 맨주먹으로 길거리에 똑바로 서서 ‘조선민국朝鮮民國 독립만세’를 불렀다." 이에 단천분대에서 분대장 이하 헌병이 불쑥 나와 보병총을 난사하며 해산을 명했다. 안성교와 함께 주모자로서 ‘맨손 맨주먹으로 똑바로 서서’ 독립만세를 외쳤을 최덕복에게 ‘십여 년 전’ 일이 떠오르지 않았을까? 어쩌면 그에게 ‘독립’은 자신과 동료를 죽이거나 죽이려 했던 사람들과 함께 나라를 만든다는 결심이었을지 모른다. ‘만세’는 그것이 일본의 지배하에서 노예처럼 사는 삶보다 낫다는 외침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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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벨라 버드 비숍은 1898년에 출판한 『조선과 그 이웃 나라들(Korea and Her Neighbours)』에서 러시아로 이주한 조선인 마을을 방문한 뒤 조선인에 대한 견해를 바꾼다. "조선에 있을 때 나는 조선인들을 세계에서 제일 열등한 민족이 아닌가, 의심한 적이 있다. 그들의 상황을 가망 없는 것으로 여겼다. 그러나 이곳 프리모르스크?[연해주]에서 내 견해를 수정할 상당한 이유를 발견하게 되었다. 이곳에서 조선인들은 번창하는 부농이 되었고, 근면하고 훌륭한 행실을 하고 우수한 성품을 가진 사람으로 변해갔다." "조선에 남아 있는 민중들이 정직한 정부 밑에서 그들의 생계를 보호받을 수만 있다면 천천히 진정한 의미의 ‘시민’으로 발전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을 나에게 주었다." 비숍은 이곳의 조선 남자들에게서 고국 남자들이 가진 특유의 풀 죽은 모습, 의심, 나태한 자부심, 노예근성이 아니라 주체성, 독립심을 보았다. "활발한 움직임이 우쭐대는 양반의 거만함과 농부의 낙담한 빈둥거림을 대신했다. 돈을 벌 기회가 많았고 고관이나 양반의 착취는 없었다.

최흥백의 가족사를 좀 더 살펴보기 전에 생각해보자. 그의 이야기가 삼일운동과 무슨 관계인가? 당시 경계를 넘었던 많은 최흥백 들의 발걸음이 가난과 억압에서 벗어나 존엄을 잃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자유롭고 평등한 사회를 향한 것이었다면, 삼일운동은 ‘식민지 노예로 살지 않겠다’는 거대한 함성이며 ‘자유와 평등을 담아낼 공동체’를 향해 내디딘 큰 걸음이었다. 이러한 걸음걸음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삼일운동을 최흥백에서 시작하려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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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관순의 ‘371’은 수인번호가 아니라 사진 원판 보존번호(이하 ‘보존번호’로 줄임)이다.

조선감옥령시행규칙朝鮮監獄令施行規則(1912. 3 總令34호)
제18조 입감자에게 번호를 부여하고 재감 중 그 번호표를 상의 옷깃(襟) 또는 흉부에 부착하게 한다.
제20조 전옥典獄에서 필요하다고 인정될 때는 입감자를 촬영할 수 있다. 재감자에 대해서도 같다.

이상을 정리해보면 첫째, 삼일운동 참여자 수감 사진에서 수인번호는 수인복에 부착된 번호이며, 보존번호는 사진 원판 뒷면에 쓰인 번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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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은 식별을 위해 임시로 옷에 붙인 것이다. 둘째, 보존번호는 자료군 전체로 볼 때 ‘순서대로’ 부여된 것인지는 몰라도 삼일운동 참여자 사진의 경우는 순서대로가 아니다. 그렇지만 대체로 같은 사건별로 연속하여 부여되었다. 단체사진이라면 사진 속 인물에 연속하는 보존번호가 부여되었다.

유관순의 사진은 보존번호가 연속하지만(369~371), 세 사람의 사진을 모아 보면 사진의 아귀가 잘 맞지 않는다. 더욱이 어윤희의 수감 사진에 쓰인 대로라면 4월 1일에 찍었다는 건데, 그날 유관순은 충남 갈전면 병천리 아우내 장터에서 만세시위를 하였다. 같이 찍은 사진이 아니다. 후대에 보존번호를 부여하면서 여성 참여자의 사진 일부를 모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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