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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고라는 적 - 인생의 전환점에서 버려야 할 한 가지
라이언 홀리데이 지음, 이경식 옮김 / 흐름출판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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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기본적으로 야망을 추구하지 않는다. 하지만 친구는 항상 새로운 것에 호기심이 많고, 이왕에 할 거면 그럴듯하게 보이기를 바랐고, 자기의 역할이 남에게 영향력 있는 것이기를 원했다. 친구를 계속 그 메커니즘에 묶어 두는 것의 정체가 뭔지 분명하게 알면 그녀를 더 이해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던 그때 "에고라는 적"을 만났다. 그 친구와의 관계가 악화되는 것을 막고 싶은 기대감이 있었던 것 같다.

저자인 라이언 홀리데이는 남보다 이른 나이에 연예 기획사의 이사가 되고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며 미디어 전략가로서 성공의 대열에 입성했다. 자신이 선망하던 사람들과 어깨를 견주는 위치에 올랐다고 생각한 지 몇 년 지나지 않아 그는 연이은 실패의 고배를 마신다. 그동안 이루었던 많은 성공들이 신기루처럼 사라지고서야 자신을 절벽 아래로 밀어 뜨린 것의 정체를 알아차린다. 그는 말한다. 인생은 끊임없이 열망하고 성공하고 실패하는 것의 반복인데  "당신이 가장 중요하고 대단한 존재라고 믿는 잘못된 믿음이 있으니 그것이 바로 너의 에고이며, 이것이 당신의 최악의 적이다."라고. 

에고는 다른 사람과의 협력, 소중한 것들을 유지하는 일, 성공의 지속을 방해한다는 점에서 가장 치명적인 암 덩어리다. 에고는 진정 인생에서 중요한 것들의 가치를 지워버리고 중요하지 않은 것들을 그 자리에 앉히게 만드는 악마의 속삭임이다. 아직 배워야 할 것이 남아있는 순간에도 이제 배울 것이 없다는 자만을 부추긴다. 열정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하여 타고 있는 장작에 기름을 끼얹으므로써 오붓한 캠핑을 아예 망쳐버리는 과욕을 저지르기도 한다. 또한 자기를 낮추고 다른 사람을 빛나게 지원하는 일 따위를 받아들일 수 없는 치욕으로 느끼게 한다.  하고 싶은 일, 주목받을 만한 중요한 일을 하지 못하면 도무지 살맛이 안 난다. 그래서 곧잘 상상 속에서 만든 자기 모습에 현실인양 도취하는데, 이렇게 만드는 것도 에고의 속성이다.

한마디로 에고는 현실을 제대로 보지 못하게 막는 눈에 붙은 금딱지다. 책에서 저자는 인생이라는 여정에서 누구나 만나게 되는 열망, 성공, 실패라는 세 가지 항목을 설정하고 여러 유명인사들의 일화를 소개하면서 매 단계에서 에고가 어떤 이름의 얼굴로 드러나는지를 보여준다. 에고를 억누르는 방법, 에고의 물꼬를 돌리는 방법 그리고 필요에 따라 에고를 포섭하는 방법까지 알고 있다면 비로소 자신 안에 잠재된 모든 것들을 적절하게 잘 쓸 수 있고, 위기에 봉착해서도 균형을 잃지 않고 인생을 항해할 수 있다고 말한다. 에고의 지배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그가 제시하는 해답은 냉철함을 유지하고, 탐욕과 집착을 삼가며, 언제나 겸손하고 늘 목적의식을 가지고 자기 주변의 더 큰 세상과 연결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들은 스토아 철학과 고대 그리스 로마 사상가들에게서 영감을 받았음도 밝혀두었다.

잘 풀리고 잘 나갈 때는 그 사람이 잘해서 잘 된 줄로 안다. 세상은 그 사람의 업적으로 평가하기 때문이다. 그랬던 그가 일이 꼬이고 보잘 것 없이 되면 새삼 그 사람은 원래 별것 없었던 것 아니냐고 다시 평가한다. 그것이 일반적이고 또한 그것은 맞다. 오랫동안 성실히 노력하고 준비했지만 끝내 빛을 보지 못하는 사람도 있고, 어쩌다 보니 잘 하는 일이 양호한 조건을 만나 크게 주목받기도 한다. 노력과 성공은 비례하는 관계가 아님을 안다면 사는 게 훨씬 편안하다. 하물며 노력과 성공이 그러한데 노력과 행복의 관계는 오죽하겠는가? 문제는 성공하기 위한 노력이어야 하고 행복하기 위한 노력이어야지 목적을 지켜내지 못할 노력이라면 한낱 수고로움일 뿐이다. 
실패를 통해서 자신만의 질문을 만들어냈다는 점에서 "이 책을 읽는 독자가 에고에 매몰되지 않고 자유로운 마음으로 나아가기를 바란다."라는 그의 바람이 진실한 것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화려한 허세의 모래사장 위에 집을 지을 것인가, 에고를 다스리는 마음을 배워 인생의 진정한 주인공이 될 것인가는 자신의 선택에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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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는 내가 죽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마틴 피스토리우스.메건 로이드 데이비스 지음, 이유진 옮김 / 푸른숲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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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이 슬프다. 절대로 그럴 수 없는, 절대 그래서는 안되는 사람인 엄마가 자식이 죽기를 바랐다는 것은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이 발생한 것을 암시한다.  얼마나 피치 못할 사정이 있었으면 차라리 죽음을 바랄 수밖에 없는 지경에 내몰렸을까를 생각하니 책을 만나기 전부터 살짝 긴장하게 됐다.

12살이 던 어느 날 갑자기 쓰러져 의식불명이 되고 4년 후 깨어났지만 이후 9년 동안 마틴 피스토리우스는 손을 흔들어 보일 수도 목소리를 낼 수도 없어 자신이 깨어있음을 표현할 길 없는 유령으로 살아간다. 인간 사회에서 소통하지 못한 인간은 살아있어도 살아있는 취급을 받지 못한다. 소리 없는 목격자다. 아무것도 해주지 않는 쓸모없는 몸 안에 갇혀 절망에서 환각까지 두로 탐험하고 다니는 그의 정신이 그래도 자기가 살아있음을 누군가 알아줄지 모른다는 희망을 버리지 않는 장면은 측은하고 가슴 뭉클했다.

햇빛과 그림자가 떨어지는 모양만으로 시간을 파악하고 그렇게 시간이 무한함을 이해한다. 자신을 둘러싼 시간과 공간에 대한 감각을 일초 단위로 셀 수 있고, 자신의 신체에 내리는 고통을 산산이 부셔 조각조각 느낄 수 있었다니 마치 모든 욕망을 초월하여 고요함의 경지에서 평정심을 체득한 도인의 경지를 보는 듯하다. 숫자를 세면서 자신을 데리러 올 아빠를 기다리는 어린 남자에게 기다림은 얼마나 간절한 희망이고 또한 가혹한 형벌이었을까? 아빠와 동생의 말에 농담을 건넬 수 없지만 그래도 마음은 늘 그들과 함께 TV를 보면서 함께 웃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말한다. 자신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고정관념이라는 상자에 갇혀 살고 있는 것은 아니냐고. 식별되기는 '까다로운 아이' '가식적인 연인' '무던한 배우자'라는 이름으로 불리지만 실제로는 아무도 그 상자 속의 내용물을 알아주지 않으니 갇혀있는 상태와 다를 바가 없다고. 우리는 심지어 자신조차도 자기의 내용물을 제대로 모른 체 살고 있지는 않은지 물을 일이다.  

처음 그가 컴퓨터 스피커폰으로 동생에게 "안녕, 킴. 행복한 크리스마스 보내."라고 말했을 때, 나의 눈이 벌겋게 달아오르고 목은 뜨거워졌다. 기분 좋은 감동으로 가슴이 벅차올랐다. 갇혀있던 몸에서 풀려나 그의 영혼이 자신의 삶을 되찾는 순간이 내게도 기쁨이었다. 그에게 새로운 기회가 열릴 때마다 절망의 늪에서 기어올라온 그의 용기와 행운을 축하해주었다. 마치 세상에 태어나 주변 세계와의 의사소통을 연습하는 영아의 모습을 연상시킨다. 우리 모두에게도 있었지만 기억에서 지워진 영아기의 체험을 의식 있는 어른의 구술로 대신 듣고 있는 것 같다. 처음으로 색깔 이름을 배우고 욕구를 예, 아니오로 표현하게 되고 희망과 기대와 좌절과 절망이라는 감정을 느끼게 된 때의 경험을 엿보는 듯 새롭다.

그를 돌보는 가족들의 사랑과 가족을 사랑하는 그의 간절함이 나를 감동시킨다. 아마도 그런 절실함이 그를 다시 깨어나게 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또 사랑하는 여인을 만나서 더 멋진 남자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 하는 그의 노력이 가상하다. 그가 원했지만 감히 꿈꿀 수조차 없었던 완벽한 여자를 만났다. 사랑을 알고 사랑을 만들어가는 모습이 어떤 것인지를 알고 싶다면 그들의 모습을 보는 것에서 중요한 것을 찾을 수 있으리라.  아름다운 사랑의 힘을. 

그는 잃어버린 시간의 강을 건너서 이제 막 감각이 깨어나는 기쁨을 누렸고 자신의 능력을 계발해가는 성취감을 맛보았으며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더 강해지는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생각해보면 우리의 삶이란 이 단순한 공식 말고 더 특별한 무엇이 있겠는가? 행여 반복되는 일상이 권태로우신 분, 매번 신나고 판타스틱 한 일을 하고 있지만 돌아서면 채워지지 않는 허전함이 있으신 분, 지금 자기가 쓸 수 있는 시간의 의미가 얼마나 특별한 것인지 감각적으로 다가오지 않는 분이 계시다면 어쩌면 이 책이 도움이 될지 모르겠다. 자신을 사랑할 용기를 주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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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피엔스 (무선본) - 유인원에서 사이보그까지, 인간 역사의 대담하고 위대한 질문 인류 3부작 시리즈
유발 하라리 지음, 조현욱 옮김, 이태수 감수 / 김영사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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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부터 어마어마한 스케일을 드러내놓고 선포하는 책을 펼쳐드는 감회가 흥분되고 긴장된다.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멋진 책, 최고의 책"이다. 자신이 어떤 조상으로부터 나왔는지 그 뿌리를 알게 하려면  숱한 임명으로 채워진 족보를 주는 것보다 사피엔스 한 권을 주는 게 낫다. 또 지금 내가 어떤 역사적 흐름 속에 서있는지 현주소를 알기 위해서도 내 집 주소를 외우고 있는 것보다 이 책 한 권이 더 정확한 좌표를 알려준다. 그만큼 내용이 방대하며 객관적이고 직관적이었다. 친구는 이 책에 감동해서 내리 세 번을 읽었다고 했다. 가히 사피엔스의 역사 책이라고 추천할 만하다.
135억 년, 45억 년, 6백만 년, 20만 년 어지간하면 이제 그런 중요한 숫자는 외울 만도 하건만 매 번 읽을 때뿐이고 돌아서면 잊어버린다. 아마도 무언가를 외우는 건 20대 이후로 끝난 것 같다. 해가 갈수록 올해가 몇 년이니 익숙해지는데 여러 달이 걸리는 증세를 보인다. 그럼에도 이번엔 기필코 외워보리라 다짐하며 큰맘 먹고 덤빈 책임을 밝히는 바이다. 
 

현재 호모 사피엔스가 호모 속의 유일한 후계자로 남기까지 지구에는 최소 여섯 종의 사촌들이 살고 있었다. 사피엔스는 수렵채집인의 생활을 끝내고 밀, 감자, 쌀을 작물화하고 야생 동물을 가축화하였는데 , 저자는 채취에서 재배로 바꾼 농업혁명을 인류의 진보에 이바지한 긍정적 사건이었다고 서술하는 대부분 역사가들과 다른 견해를 제시한다. 인간이 더 나은 미래를 위해 야생의 생활을 접고 밀, 쌀, 감자를 재배한 것이 아니라 밀 등이 자기의 번식을 위해 인간을 이용하고 길들였다는 관점이다. 밀은 번식이라는 성과를 거두었지만 풍요로운 식탁 앞에 앉은 인간에게는 밀밭을 지킨 대가로 무엇이 남았는지를 묻는다. 유발 하라리가 주목하는 것은 우리의 행복이다. 인지 혁명, 농업혁명, 과학혁명을 거치면서 수백만 명에 불과했던 사피엔스가 현재 70억이라는 수적 성장을 했지만 과연 종족 수의 번창이 곧 진화적 성공인지 또 이 성공이 개별 개체에게는 어떤 대가를 주고 있는지에 대해 그는 의문을 제기한다.


그가 주장하는 사피엔스의 가장 핵심적인 특징은 '상상 속의 질서'에 대한 인간의 동의다. 다른 유인원들도 목소리를 이용해 자신이 가진 정보를 서로 교환하는 의사소통을 하지만 이들은 보이고 들리는 것 이상의 정보를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와 달리 사피엔스는 시간적으로 오지 않은 미래를 상상하고 물질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허구는 상상하여 그것에 의미를 부여하는 인지능력을 갖고 있다. 언어의 힘으로 공동의 것을 집단적으로 상상하는 기능을 통해서 많은 수의 낯선 사람들과 교역을 하고 협력하며 문화라는 이름의 것을 창조한다. 상상 속의 질서에 의한 결집이 돈, 제국주의, 종교, 인권, 문화 등을 가능하게 했다.


그에 관점에 의하면 종교도 이념도 인간이 만든 '상상 속의 질서'의 산물이다. 소위 개인의 자유, 권리는 누구에게 침해받을 수 없고 침해받아서는 안 되는 신성한 것이라는 생각 또한 인간을 신의 피조물로 설정하여 다른 모든 동물이나 다른 모든 현상의 성질과 근본적으로 다른 무엇이라는 믿음에서 나온 것이다.

종교에 대한 그의 정의에 의지하면 내가 어떤 신을 믿느냐 안 믿느냐, 어떤 진리가 옳고 더 강력한 가치가 있는가에 대한 물음에 대해 '우리'와 '그들'의 대결로 보는 접근법에서 벗어날 수 있다. 즉 종교는 신들 간의 경쟁이 아니라 물질적 토대가 없음에도 인간이 상상으로 만든 무엇 그리고 그것의 지배력으로 협력과 통합을 이끌어낸 인간의 창조물이라는 입장을 가질 수 있게 한다. 유신론자에게는 안타까운 얘기지만 신 마저도 개인 또는 공동체의 생존과 번식이라는 이익에 부합될 목적으로 탄생되었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있다.  21세기 생명과학은 인간이 신에 의해 창조된 고유하고 독립된 존재가 아니며 자유의지보다는 호르몬, 유전자, 시냅스에 의해 결정되는 존재라는 증거를 계속해서 밝혀내고 있다. 나는 개인적으로 종교가 가진 가장 중요한  기능을 '위로'라고 본다. 대부분의 종교인에게 교리는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고  관심 없고 중요하지 않다.  안녕에 대한 염원과 불안감을 잠재워줄 소속감을 필요로 하는 개체에게 종교는 가정과 공동체가 채워주지 못한 부분을 대신해준다. 

 

과학 혁명으로 인류는 자신들의 무지를 인정했고 그 때문에 더 성장할 수 있었다. 이제 상당 부분에서 절대 진리에 대한 믿음을 기술과 과학이 대체했다. 과학은 곧 권력이다. 이것을 이용하는 세력에 의해 획득된 자원은 다시 과학에 재투자됨으로써 되먹임 고리를 형성하고 있다. 과학과 결합된 자본주의는 '문화'라는 이름으로 사피엔스의 상상을 지배한다. 이 제국의 힘은 가족과 공동체를 대신하고 나아가 국가의 영역까지 위협하며 지배적 힘을 뻗는다.

우리는 과거 어느 때보다 평화가 지속되는 시대를 살고 있다. 사피엔스는 지금도 성장하고 있는 중이다. 그럼에도 우리에게 남는 질문은 거듭되는 경제 성장 속에서 각 개인의 행복은 어떤 가치로 취급되고 있는가이다. 마지막 구절에서 유발 하라리는 "우리는 무엇을 원하고 싶은가?"를 생각해보면 섬뜩함마저 느낀다고 했다. 왜 일까? 사람들은 자신이 욕망을 일으키는 주체라고 생각하지만 자신의 욕망 조차도 시대가 만들어낸 상상 속의 질서에 의해 결정되고 지배받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몇이나 될런지 모르겠다.


방대한 내용은 어느 것 하나 중요치 않은 내용이 없었다. 특히 불교에 대한 그의 안목은 분명하고 유용했다. 넓고 깊은 그의 식견에 놀라고 또한 공정함과 참신함에 한 번 더 놀라며 사피엔스에게 행복은 진정 무엇인가를 고민한 그의 노고와 업적에 찬사를 보내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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랩 걸 - 나무, 과학 그리고 사랑 사이언스 걸스
호프 자렌 지음, 김희정 옮김 / 알마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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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릇 한 분야의 전문가라고 하면 그 일에 미쳐야한다. 모두는 아니지만 대부분은 일반적이지 않다는 이유만으로 그에게서 비정상적이라는 인상을 받는다. 호프 자런 이라는 여자 과학자가 그렇다. 세상을 나무의 관점에서 보도록 노력해보라니 말이나 되는 얘기인가? 그런데 그녀는 그렇게 했고 그래서 지인들로부터 제정신이 아닌 것 같다는 말을 들으면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자신이 제대로 된 길을 걷고 있다는 증거였으니까.

 

젠장, 마침 해야 할 일을 미루고 짬을 낸 때 걸린 너무 두꺼운 책이라 대충 읽어버릴까 꾀를 내려던 순간 딱딱하게 풀어가던 이야기 속에서 뭔가 묵직하면서 진지하게 꿈틀거리는 것이 들려오기 시작하자 나는 건방진 태도를 버리고 그녀의 이야기에 압도되기로 했다. 이 책은 느긋할 자신이 없으면 아예 시작을 하지 않는 게 좋다. 하지만 여유를 갖고 녹색 표지의 책을 펼칠 의향이 있는 때라면 마치 숲으로 안내를 받은 듯 들어가서 나무들에 관한 나무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하지만 평소 자연환경에 관심이 없거나 과학에 대한 예비지식이 전혀 없는 사람에게는 무료하기 짝이 없는 책이 될 수도 있겠다.

 

그녀의 문체는 담백하다. 그러면서도 섬세하고 다정하고 낄낄거리게 재미있다. 꽉 채운 맥주잔에서 흘러넘치는 거품처럼 과장된 허영이 없고, 달콤하지만 녹아내려서 찐득하게 달라붙는 설탕 사탕의 부담도 없다. 입에 맞기만 하다면 먹어도 먹어도 질리지 않는 담백한 바게트빵의 마력을 느낄 수 있다. 식물 이야기와 그녀의 삶 이야기가 적당히 버무려 진행되는 구성도 지루하지 않아서 좋았다. 식물에 관한 전문적인 과학 지식을 훌륭한 문학적 비유로 알기 쉽게 설명해주는 능력이 탁월하다. 마치 과학을 빙자한 소설책을 보는 듯했다.

 

특히 나무의 입장에서 나무의 행위를 이해하고 설명하는 그녀의 관점이 나는 가장 마음에 든다. 나무는 인간이 지구의 역사에 등장하기 전부터 있었고 설령 인간이 있게 된 다음에 생겨난 종이라 해도 나무는 나무로 살아가는 것이지 인간의 소유물로서의 나무는 아니니까.

1부 뿌리와 이파리 얘기를 하면서 식물에 대한 호기심을 자극하더니 2부 나무와 옹이에서 그것들이 어떻게 살아내고 있는지를 치열한 자신의 삶과 견주어 항변하고 드디어 3부 꽃과 열매라는 목차에 도착하고야 내가 한숨을 돌리게 된다. 과학자로서 그녀가 걸어온 길이 너무 찌질하고 비참해서 소위 돈 안 되는 순수과학을 하는 사람들을 이 정도의 대접밖에 받지 못하는 열악한 환경에 두었다는데 대해 동시대인으로서 분노를 느끼며 그에 대한 일말의 책임마저 느끼게 되는 상황이 불편했기 때문이다. 그녀의 인생에도 어서 꽃이 피고 열매가 맺어 더불어 나를 안전하고 풍요로운 땅으로 인도하길 바랐다.

 

일반인들은 딱히 어떤 분야의 과학이 일상에 필요하거나 관심이 있어서 흥미를 갖게 되는 건 아니다. 마치 유명 가수가 부르면 그 노래가 신곡인데도 왠지 더 친숙하게 느껴지는 호감도가 있듯이 칼 세이건 이나 스티븐 제이 굴드가 과학자임에도 자기 분야를 일반인에게 소개해서 흥미를 유발하기에 충분한 문장력이 있었기 때문에 그 학문이 우리에게 친근하게 다가온 것뿐이다. 그런 측면에서 아마도 호프 자런 이라는 과학자 때문에 식물학에 대한 일반인의 관심이 생겨나지 않을까 기대가 된다.

나는 많은 부분에 밑줄을 그었지만 굳이 한 부분을 인용하라면 이곳을 소개하겠다.

그곳, 세상의 끝에서 그는 끝이 없는 대낮에 춤을 췄고, 나는 그가 되고 싶어 하는 사람이 아닌 지금의 그를 온전히 받아들였다. 그를 받아들이며 느껴진 그 힘은 나로 하여금 잠시나마, 그 힘을 내 안으로 돌려 나 자신도 스스로 받아들이는 것이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하도록 했다. 알 수가 없었다. 그리고 나는 속으로 그 부분은 언젠가 다시 한 번 생각해봐야겠다고 스스로 약속했다.” (p.287)

 

이후 그녀는 클린트라는 멋진 남자를 만나 결혼을 했고 아이의 엄마가 된다. 치열한 독기로 내달리느라 지쳐있던 인생에 따뜻한 입김이 불어 넣어지고 꽃과 열매가 맺힌다. 그녀는 마땅히 그런 평화를 누릴 자격이 있다. 나는 괜스레 흐뭇해지며 호프 자런 그녀가 자랑스러웠다. 감동적이다. 나는 이런 순결한 열정 앞에 서면 경건함에 심장이 멎는 것 같다. 그녀는 단지 자신의 삶을 살았을 뿐인데 누군가의 삶이 내게 위로와 격려가 되는 건 왜 일까? 아마 유유상종의 자기애일지 모른다. 이렇게 진지한 자세로 자신의 삶을 대하고 친절하게 이야기 해주는 사람의 책은 무조건 많이 팔려야 한다. 그럴듯한 소재로 잠시 얄팍한 재미를 선사하는 책 10권을 읽는 것과는 다른 진한 풍미를 오래 느낄 수 있다. 이제까지 내가 이런저런 책에서 보았던 불과 몇 줄이거나 몇 페이지에 걸쳐 소개되었던 과학 이론들이 아이의 잠자리를 살펴주지 못하고 밀린 세금고지서와 건강검진을 등한시한 체 얻어낸 피로와 헌신의 결과물이었다는 사실에 새삼 경의를 표하는 바 이다.

빌 이라는 파트너를 얻은 것은 그녀에게 행운이었다. 빌은 그녀에게 가족이었고 그녀의 연구가 가능하게 했던 전제조건이었다. 그리고 이 책은 그와 함께 한 20년에 대한 헌사다. 마지막으로 쉽지 않은 내용임에도 불구하고 번역이 무척 유연하게 잘 되어서 독자로 하여금 편안하게 읽게 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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곁에 없어도 함께할 거야 - 삶의 끝에서 엄마가 딸에게 남긴 인생의 말들
헤더 맥매너미 지음, 백지선 옮김 / 흐름출판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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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그런 생각을 해봤다. '어떤 책이 세상에 나왔는데 그 책을 쓴 사람은 이미 세상에 없다. 그럼 나는 묻고 싶어도 물을 수 없고 들여다보고 싶어도 더는 소식을 들을 수 없다는 얘기가 되는데?' 그 단절감이 죽음의 의미를 더럭 실감 나게 한다. 그런데 이 책이 그런 책이다. 탈고를 마치고 다시 정리할 시간도 없이 저자의 손을 떠났고 이제sms 남겨진 사람들의 책이 돼버렸다. 무한할 수 없는 그래서 야박하고 절실한 생生의 오만함 앞에서 나는 나약함을 느낀다.

"곁에 없어도 함께 할 거야."가 이 책의 제목이다. 얼마 전에 종영한 '도깨비'라는 드라마가 항간에 대단한 열풍을 일으켰다. 사람들이 도깨비를 그리워하며 자주 읊조리던 말이 '눈에 보이지 않아도 네 곁에 내가 있다는 걸 믿어라'는 메시지였던 것 같다. 우리는 모두 유한한 생명인 것을 알면서도 그 유한성에 굴복하지 않고 내가 사랑했던 사람들 곁에 영원히 머물고 싶은 마음이 있나 보다. 아마도 영원할 수 없는 존재이기에 영원을 약속하고픈 마음으로 지금을 살고 있는 건 아닐까?

헤더 맥매너미는 사랑하는 남편과 5살짜리 딸을 둔 35살의 여자다. 어느 날 갑자기 유방암이 발견되어 2년이라는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는다. 그녀는 딸과 남편을 조금 더 오래 만나기 위해 끔찍하다는 말보다 100배나 더 고통스러운 항암치료를 의연하게 견디며  딸과 함께 보낸 시간들을 사진으로 기록하고 딸에게 들려줄 자신의 목소리를 녹음한다. 그리고 삶의 여정에서 딸이 맞이할 두렵고 힘들고 슬프고 기쁜 순간들에 함께 있어줘야 할 엄마가 곁에 없다는 사실에 대비하여 성장하는 딸을 지켜주고 싶은 엄마의 마음을 카드에 남기기로 한다.  

엄밀히 말하자면 딸에게 남기는 스무 장의 카드라는 포맷을 빌려 자기 인생을 빛내준 사람들과의 추억을 정리하고 있다. 그녀는 자기 인생을 사랑했다. 제프의 아내로써, 브리아나의 엄마로서의 삶도 사랑했다. 그 열정으로 우울하고 절망적일 수 있는 순간에도  죽음을 가까이에 둔 사람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긍정적이었고 희망과 웃음을 잃지 않았다. 그리고 자신에게 닥친 현실을 껴안고 끝까지 맞서는 용기를 잃지 않았다. 마지막까지 자신이 남기는 카드들이 딸 브리아나에게 어떤 의미가 될 것인가를 고민하는 모습에서 진정으로 딸의 행복을 염려하는 엄마의 진심이 느껴져 가슴 뭉클하다. 엄마 헤더는 천국이 아닌 딸과 남편이 있는 이곳에 함께 있고 싶어 했다. 

나는 그녀의 이 말이 좋았다. "결국에는 다 잘 될 거야." 이 말 한 마디면 녹녹치 않은 세상을 잘 살아낼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강렬한 감정이 무수히 깔린 넓은 들판에 내 삶 전체가 펼쳐져"있는데 "나쁜 감정을 마음속 깊은 곳에 억지로 밀어 넣으면서" 살았던 그녀가 암에 결려 죽음을 앞두고서야 "울고 나면 더는 슬프지 않다"라는 사실을 받아들였다는 것이 개인적으로 안타까웠다. 그녀의 말처럼 자기 안의 감정이 수면 위로 떠오를 때 그것이 자신을 거쳐가도록 허용함으로써 '지금 이 순간'을 사는 것이고 그렇게 더 강한 사람으로, 행복한 사람으로 거듭나는 길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우리를 성숙하게 만드는 중요하고 소중한 것들일랑 좀 더 일찍 좀 더 쉽게 깨닫는다면 얼마나 좋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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