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랩 걸 - 나무, 과학 그리고 사랑 ㅣ 사이언스 걸스
호프 자렌 지음, 김희정 옮김 / 알마 / 2017년 2월
평점 :
무릇 한 분야의 전문가라고 하면 그 일에 미쳐야한다. 모두는 아니지만 대부분은 일반적이지 않다는 이유만으로 그에게서 비정상적이라는 인상을 받는다. 호프 자런 이라는 여자 과학자가 그렇다. 세상을 나무의 관점에서 보도록 노력해보라니 말이나 되는 얘기인가? 그런데 그녀는 그렇게 했고 그래서 지인들로부터 제정신이 아닌 것 같다는 말을 들으면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자신이 제대로 된 길을 걷고 있다는 증거였으니까.
젠장, 마침 해야 할 일을 미루고 짬을 낸 때 걸린 너무 두꺼운 책이라 대충 읽어버릴까 꾀를 내려던 순간 딱딱하게 풀어가던 이야기 속에서 뭔가 묵직하면서 진지하게 꿈틀거리는 것이 들려오기 시작하자 나는 건방진 태도를 버리고 그녀의 이야기에 압도되기로 했다. 이 책은 느긋할 자신이 없으면 아예 시작을 하지 않는 게 좋다. 하지만 여유를 갖고 녹색 표지의 책을 펼칠 의향이 있는 때라면 마치 숲으로 안내를 받은 듯 들어가서 나무들에 관한 나무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하지만 평소 자연환경에 관심이 없거나 과학에 대한 예비지식이 전혀 없는 사람에게는 무료하기 짝이 없는 책이 될 수도 있겠다.
그녀의 문체는 담백하다. 그러면서도 섬세하고 다정하고 낄낄거리게 재미있다. 꽉 채운 맥주잔에서 흘러넘치는 거품처럼 과장된 허영이 없고, 달콤하지만 녹아내려서 찐득하게 달라붙는 설탕 사탕의 부담도 없다. 입에 맞기만 하다면 먹어도 먹어도 질리지 않는 담백한 바게트빵의 마력을 느낄 수 있다. 식물 이야기와 그녀의 삶 이야기가 적당히 버무려 진행되는 구성도 지루하지 않아서 좋았다. 식물에 관한 전문적인 과학 지식을 훌륭한 문학적 비유로 알기 쉽게 설명해주는 능력이 탁월하다. 마치 과학을 빙자한 소설책을 보는 듯했다.
특히 나무의 입장에서 나무의 행위를 이해하고 설명하는 그녀의 관점이 나는 가장 마음에 든다. 나무는 인간이 지구의 역사에 등장하기 전부터 있었고 설령 인간이 있게 된 다음에 생겨난 종이라 해도 나무는 나무로 살아가는 것이지 인간의 소유물로서의 나무는 아니니까.
제 1부 뿌리와 이파리 얘기를 하면서 식물에 대한 호기심을 자극하더니 2부 나무와 옹이에서 그것들이 어떻게 살아내고 있는지를 치열한 자신의 삶과 견주어 항변하고 드디어 3부 꽃과 열매라는 목차에 도착하고야 내가 한숨을 돌리게 된다. 과학자로서 그녀가 걸어온 길이 너무 찌질하고 비참해서 소위 돈 안 되는 순수과학을 하는 사람들을 이 정도의 대접밖에 받지 못하는 열악한 환경에 두었다는데 대해 동시대인으로서 분노를 느끼며 그에 대한 일말의 책임마저 느끼게 되는 상황이 불편했기 때문이다. 그녀의 인생에도 어서 꽃이 피고 열매가 맺어 더불어 나를 안전하고 풍요로운 땅으로 인도하길 바랐다.
일반인들은 딱히 어떤 분야의 과학이 일상에 필요하거나 관심이 있어서 흥미를 갖게 되는 건 아니다. 마치 유명 가수가 부르면 그 노래가 신곡인데도 왠지 더 친숙하게 느껴지는 호감도가 있듯이 칼 세이건 이나 스티븐 제이 굴드가 과학자임에도 자기 분야를 일반인에게 소개해서 흥미를 유발하기에 충분한 문장력이 있었기 때문에 그 학문이 우리에게 친근하게 다가온 것뿐이다. 그런 측면에서 아마도 호프 자런 이라는 과학자 때문에 식물학에 대한 일반인의 관심이 생겨나지 않을까 기대가 된다.
나는 많은 부분에 밑줄을 그었지만 굳이 한 부분을 인용하라면 이곳을 소개하겠다.
“그곳, 세상의 끝에서 그는 끝이 없는 대낮에 춤을 췄고, 나는 그가 되고 싶어 하는 사람이 아닌 지금의 그를 온전히 받아들였다. 그를 받아들이며 느껴진 그 힘은 나로 하여금 잠시나마, 그 힘을 내 안으로 돌려 나 자신도 스스로 받아들이는 것이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하도록 했다. 알 수가 없었다. 그리고 나는 속으로 그 부분은 언젠가 다시 한 번 생각해봐야겠다고 스스로 약속했다.” (p.287)
이후 그녀는 클린트라는 멋진 남자를 만나 결혼을 했고 아이의 엄마가 된다. 치열한 독기로 내달리느라 지쳐있던 인생에 따뜻한 입김이 불어 넣어지고 꽃과 열매가 맺힌다. 그녀는 마땅히 그런 평화를 누릴 자격이 있다. 나는 괜스레 흐뭇해지며 호프 자런 그녀가 자랑스러웠다. 감동적이다. 나는 이런 순결한 열정 앞에 서면 경건함에 심장이 멎는 것 같다. 그녀는 단지 자신의 삶을 살았을 뿐인데 누군가의 삶이 내게 위로와 격려가 되는 건 왜 일까? 아마 유유상종의 자기애일지 모른다. 이렇게 진지한 자세로 자신의 삶을 대하고 친절하게 이야기 해주는 사람의 책은 무조건 많이 팔려야 한다. 그럴듯한 소재로 잠시 얄팍한 재미를 선사하는 책 10권을 읽는 것과는 다른 진한 풍미를 오래 느낄 수 있다. 이제까지 내가 이런저런 책에서 보았던 불과 몇 줄이거나 몇 페이지에 걸쳐 소개되었던 과학 이론들이 아이의 잠자리를 살펴주지 못하고 밀린 세금고지서와 건강검진을 등한시한 체 얻어낸 피로와 헌신의 결과물이었다는 사실에 새삼 경의를 표하는 바 이다.
빌 이라는 파트너를 얻은 것은 그녀에게 행운이었다. 빌은 그녀에게 가족이었고 그녀의 연구가 가능하게 했던 전제조건이었다. 그리고 이 책은 그와 함께 한 20년에 대한 헌사다. 마지막으로 쉽지 않은 내용임에도 불구하고 번역이 무척 유연하게 잘 되어서 독자로 하여금 편안하게 읽게 한다는 느낌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