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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헌의 명문가 - 한국의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위하여
조용헌 지음, 백종하 사진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9년 2월
평점 :
품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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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전통을 지닌 명문가들이 가치있는 이유.
작년 10월. 그러니까 가을 하늘이 높다랗게 치솟아 있고 들에는 누런 벼들이 바람에 넘실거릴 무렵에 문화 유적 답사 카페를 통해서 2박 3일 '구석 구석 백제 문화 특별 답사' 를 갔었다. 대학교 1학년때 처음 가입해서 답사를 참여한 이래로 꽤 몇해가 지났는데도, 역사와 답사에 대한 나의 사랑이 그윽하고, 오랜만에 생긴 연휴에 가보고 싶었던 백제 유적지를 답사한다기에 냉큼 신청을 했다. 주변 사람들을 꼬셔봤지만 유적 답사란 말에 다들 고개를 절래 절래 흔들었다. 정말로 막상 혼자 거기 참석을 해보니 내가 가장 막내였다. 이제는 어디가서 막내를 잘 하지 않는데 여기는 언제가도 막내였다. 그분들이 하시는 말씀이 "젊은 사람이 벌써 부터 우리같은 사람과 절 쫓다니고 그럼 어째 , 한 10년뒤에 다녀!" 라고 하셨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난 10살때부터 이런걸 좋아해버렸는데.
백제 유적 답사지를 쭉 돌다가 논산에 다다랐다. 저 멀리서 어느 기풍있고 넓직하면서도 장독대가 엄청나게 많은 한 기와집이 눈에 띄었다. 우리 코스에는 들어있지 않았지만 논산 현지 문화 해설자분이 꼭 가봐야 한다고 우리를 그 집으로 안내했다. 그곳은 다름 아닌 '논산의 명재 윤증 고택'이였다. 20여차레나 벼슬 자리를 끝까지 마다했던 옳곧음의 상징 같은 분의 살아있는 집이 바로 그곳이였다. 그 기억과 가슴에 남은 흔적이 사라지기도 전에 이 책 <조용헌의 명문가>를 만났다. 그것도 가장 첫 머리에 곳곳을 구석구석 둘러봤던 곳이 너무나도 자세하게 있었다. 어찌나 반가운지 나도 모르게 "나 여기 가봤어!"를 연일 외쳐 대었다. 보면 볼수록 반가운 책이다.
조용헌. 그는 누구인가. 불교학을 전공하여 어릴때 부터 세계의 사찰과 고택 답사를 하면서 서구적 가치관으로 몰락해가는 한국의 전통과 미를 복원하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하시는 분이다. 이미 그의 이름을 딴 '사찰기행' 이나 '사주 명리학' 같은 책들을 발행하여 이쪽분야 관심있는 사람들에겐 전문적이고 객관적인 지식을 선물해주고 있다. 이번에 만나게 되는 <조용헌의 명문가>는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 즉 높은 사회적 신분에 걸맞는 도덕적인 의무를 다하는 전통 있고 존경받는 집안을 우리에게 알려주기 위해서 소개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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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에서도 설명한 윤증 고택의 전망 감상을 배려한 유난히 높은 마루, 천문과 지리의 이치를 빌렸던 경주 양동마을 경주손씨 대종택이 물(勿)자 형국에서 가장 핵심적인 자리인것,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살아있는 전설인 우당 이회영과 형제 일가들의 독립투쟁, 간송 전형필이 전재산을 모두 빼앗긴 문화재 유적 되찾기에 사용했던 것 등. 셀 수 없는 사건들과 셀 수 없는 흔적들 그리고 아름다움이 온 책을 뒤덮고 있다. 저자가 얼마나 한국, 이 나라를 사랑하는 가가 여실히 잘 나타나는 책이 아닐 수 없다. 치욕의 역사 근세 100년 때문에 그동안 전통을 지켜오던 명문가들이 많이 사라질 수 밖에 없었던 것을 안타까워 하고, 아시아 국가가 서구에 밀리는 것이 바로 이 '노블레스 오블리주' 때문인 것 같다라고 비판도 아끼지 않는다. 그런면에 있어서 무조건 칭찬하지도 무조건 비판하지 않는 글들이 오히려 더 맘에 든다.
특히나 전혀 알지 못했던 역사의 흔적들을 아주 많이 찾아주었다. 자주 놀러다니더 명동길의 '명동 우당길'이 바로 우당 6형제들을 기리기 위함이였고, 양동마을이 조선의 베버리 힐즈같은 곳이였다는 것도 그렇다. 마치 계속 눈에 이물질이 많아 안보이는 상태로 삐뚫어진 길을 올바른 길처럼 걸어가다가 누군가가 눈에 끼인 먼지들을 말끔이 씻어준 기분이다. 상류층, 양반들이라고 해서 모두가 다 횡포를 부리고, 백성을 나몰라라 한 것은 아니였구나 하는 안도감마저도 생긴다. 이런 집안들이 있었기에 우리는 현 시대를 맞이하고 있는 것인지 모른다. 특히나 간송 선생님이 일본에게 넘어갈 뻔 했던 국보급 보물들을 지켜내었던 것을 생각하면 눈물이 난다. 아무리 엄청난 부자 집안이라고 해도 나라를 위해 그렇게 하기는 거의 힘들 것이다. 아니, 현재도 그런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책의 내용 답게, 꼼꼼하고 섬세하며 전통있는 글들로 가득 메워저 있어서 독자들이 우리나라를 자랑스럽게 여길 수 있는 기분을 만들어준다. 나 뿐만 아니라 많은 독자들이 우리에게도 이런 멋진 문화들과 전통이 있다는 것을 알았으면 한다. 오늘 뉴스에서 국회의원들은 악법이니 어쩌니 여전히 멱살잡고 떠들어 대고 있어서인지 어려운 일에 가장 먼저 발벗고 나서고, 용기와 신뢰를 먼저 보여주었던 '노블레스 오블리주 ' 명문가들이 무척이나 그리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