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렌지모텔 현대시세계 시인선 72
배선옥 지음 / 북인 / 2018년 5월
평점 :
절판


날 추운 날.

뒹굴거리기 좋고, 손톱 끝이 노오랗게 될 때까지

귤까먹기 좋은 날에는 손에 시집 한 편 쥐고 싶을 때가 있다.

그런 날이었다. 우연히 내 손에 들어온 시집 한 편.

제목의 생경함이 도리어 매력적으로 다가오고,

시어들만의 엉킴이 내 맘 너머 생각조차 뒤섞이게 만든 시들.

그리고. 한참을. 읽고, 읽게 되었다.

문득 이토록 많은 어휘 품고 세상 바라보는 시인들의 삶이 궁금해졌다.

분명코 낯설게만 살아가지는 않으리라.

익숙한 일상 속에서, 먹고 자고 쉬고 깨겠지만,

채 글로 표현되지 않은 삶조차도 다들것 같은 느낌적인 느낌이.

이 시집은 총 4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시라는 문학의 특성상 구분이 큰 의미가 있겠냐마는

무엔가 의미 있으리라는 생각으로 시인의 판단을 유추해 보며 읽었다.

특히 제목과 시의 부조화를 만나게 되면,

한참을 머무르며 이런 제목을 걸어둔 주인장의 생각을 유추해 본 듯 싶다.

제1부 메리 크리스마스

딥블루의 느낌이 짙게 드리운 시집이지만 첫 제목이 메리 크리스마스다.

그리고 시작은 '참 좋은 날'로 시작하고 있다.

'장갑을 벗어 그대의

손을

잡았습니다

오래도록

내려주기를

바라면서요'

힘겨운 일상 살아가는 이들 이야기 담아내고 있지만,

정작 시인의 바람은 여기서 출발하고 있었나 보다

제2부 천사는 없다

가끔, 빈 의자, 포르노 비디오, 샤넬 노래방, 미쓰 킴.

시 사이사이에 찬바람이 불고,

네온사인 번쩍이지만 그 사이 살아가는 이들의 가슴에는 불이 켜지지 않았다.

'모서리마다 각을 세우고 내 그리움의 부피를 계산해보겠노라 고집을 부린다 무수히 찍힌 발자국 사이 이제 모른 척 손 놓아버려도 될 텐데 오래오래 뜨거운 아스팔트를 걸어 오느라 화끈거리는 발바닥을 들여다보며 눈물 닦는 너 끊임없이 머릿속을 달궈대던 열대야도 밀어내고 한껏 힘주고 서 있는 젊은 나무도 마다하고 오늘 밤 어느 텃밭 가을무 씨앗이나 싹 틔워보자며 눈물 매달린 눈으로 배시시 웃는'

"입추"의 전문이다. 시인은 세상 추위를 도시 찬바람을 준비하는 딱 그 시기.

입추의 맘을 갖고 살아가나 보다.

제3부 3월에서 4월 사이

가장 애매한 시기 아닌가?

'속없이 해살거리는 햇살에게 넋을 놓았다가 봉긋한 젖가슴을 드디어 풀어헤친 양지쪽 목련이나 힐끗거리면서 어수선한 한 시절을 살아내고 있었다 아직 5월은 멀었고'

그렇다. 우리에게 5월은 아직 요원하다.

당도 100% 메이커 보증이라는 ORANGE와 저렴한 남의 나라 식재료가

이미 우리의 식탁을 점령하고 있다.

제4부 오렌지모텔

나이만큼의 경륜이 있다면 노인은 반드시 지혜로울 것이다.

하지만 결코 현실은 그렇지 않다. 차이가 크다. 커도 너무 크다.

만나고 헤어지고, 공간 속에서 나눔이 있고, 그 안에서 계절은 흐른다.

'길을 잃었다 하필 세상은 푹 고아놓은 엿처럼 똬리를 만들어 우리를 붙들었다'

우리가 가게 될 방이 어디인지 모른채 결국 잠시 쉼을 얻기 위해.

우리 정말 잠시 쉬어가도 좋을 작은 파라다이스를 생각했을까 묻는 시인의 질문이

요란스레 번쩍이는 도시 한 복판 허리 펴고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묻는다

잠시 쉴 곳이 있느냐고

딱 그만큼 느끼게 된다.

시집은.

내가 갖고 있는 어휘만큼 이해하고,

내가 품고 있는 생각만큼 보이고,

내가 살아온 경험만큼 느껴진다.

멀어지는 겨울 느끼며. 일독을 권한다.

초강력긍정주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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