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개발의 기억
에드문드 데스노에스 지음, 정승희 옮김 / 수르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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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고, 내용이 너무 좋아 몇 번을 읽었다는, 그러다가 문득, 쿠바여행을 다녀 온 내가 생각났다는, 여행가기 전에 읽었으면 더 더욱 그 여행이 좋았을 것이라는, 때 늦은 감이 있지만, 한번 읽어보라는, 고작 며칠 다녀 온 쿠바 여행을 여전히 기억해 주고, 추천해 준 친구 덕에 집어 든 책 쿠바작가 에드문도 데스노에스의 “저개발의 기억”이다.

 

중,단편집이라고 해야 하나? 아니면, 소설 “저개발의 기억”속에 언급되어 있던 화자의 작품들을 같은 제목인 “잭과 버스기사”, “믿거나 말거나”, “요도로”로 담겼으니, 소설속의 소설이라고 보고 장편으로 봐야하나... 싱거운 시비겠지?

 


“아바나의 여인들은 타인의 눈을 중시한다. 남의 시선을 즐기고 자신도 남을 쳐다본다”

 


보다 안락하고, 편안한 삶을 위하여 이혼을 하고 “90마일”(쿠바와 마이애미사이의 거리)밖으로 떠난 아내 라우라를 보내고, 혼자 남은 화자는 레포르마 우르바나법(쿠바혁명 후 건물등을 국가가 가져간 대신, 소유주에게는 일정한 연금을 죽을 때까지 지급하던 법)에 의존하며 건조한 일상을 보낸다. 그는 이 황량한 일상을 아내가 남겨놓은 립스틱놀이와 스타킹의 바스락거리는 소음을 즐기게 되고, 어느 날 무릎이 예쁜 미성년자 엘레나와 잠자리를 한다. 이 건조한 사랑역시 이내 시들해져 18번의 전화벨소리를 무시하고, 노크소리를 버려두다가 “거부당한다고 느끼면 독사가 되어버리는 여자들의 속성”에 의해 미성년자 강간으로 뒤집어 쓸 뻔한 나날들, 그리고 그 허탈한 타성은 다시 1년 이상 자신을 돌봐 준 가정부 노에미와의 잠자리, 13세에 친구의 도움으로 창녀를 산 경험으로 출발한 15세에 천재소리를 들었으며, 22세에 라파엘 거리의 가구점 사장이 된, 39세의 쿠바 부르조아 부류인 화자는, 그렇게 투명한 유리로 가로막힌 쇳소리에 귀가 멀수도 있는 짓누른 세월을 바라보고 있다.


 

“여자들은 항상 내인생을 양분해 온 존재들이다.

그들은 내게 큰 쾌락을 주기도 했으며,

인생을 최악의 혼란으로 빠뜨리게 하기도 했다.

책을 읽고, 그림을 보고, 영화관에 있는 나는 편안하다고 느끼지만,

그 것들은 모두 거짓말이다.

여자는 살아있는 책이고, 영화고, 그림이다. . . . . . . ”

 


아니 이게 한축이라면, 호세 마르티로 시작하여, 헤밍웨이, 동시대의 작가들에 대한 상념과 그가 시도한 몇 편의 단편소설들을 손보며, 아바나를 배회하면서, 모퉁이, 거리, 호텔 앞에 배어있는 그의 냄새들을 떠올리고, 소설가로서의 그의 일상을 고백한다. 혁명을 성공했다고 하지만, 이제 인민들은 모두 행복이란 단어로만 치장되어야 한다고 믿고 있는데, 이 저개발의 국가에서는 “코르크마개”가 없어서 콜라를 생산할 수 없고, 일상품에 대한 공급과 일거리를 구하지 못하고, 거리에서 호텔 앞에서, 미성년 매춘을 시도해야 하는 사회로 남아있다. “72시간 전투”에서 승리했다곤 하지만, 적대국 미국이 남겨준 헤밍웨이 기념관에서는 새로운 지배자 러시아 군인들의 땀냄새가 다시 풍겨 올 뿐인, 이 저개발 국가는 “우리는 힘있는 문명국들의 조악한 모방일 뿐이다”라는 자조만을 남길 뿐이다. 부르조아 출신의 화자, 이 카리브해 연안의 섬나라, 강열한 햇빛과 나른한 오후, 터질듯한 권태의 조롱앞에서 진정으로 하고 싶은 일은 “인간을 느끼게 해 주는” 소설을 써야된다는 강박감이고, 남아 있는 희망은 “이 위기의 나날들에 대해 깨끗하고 텅빈 시각을 유지하고” 싶은 것이며, 그는 다음과 같이 외칠 수 밖에 없을 뿐이다.


 

“나는 살기를 원한다”

 


투명한 공포, 눈을 뜨지 못하게 하는 햇빛속에 감쳐진 속박, 그리고 패배의식, 그리고 조정이 불가능한 권태로 일관된, 시니컬한 그의 독백과 고민을 자전적 기술로 쓰여 내려간 소설, 모처럼 “문학”이란 분류의 책을 읽으면서, 여름날 나른한 오후의 권태가 함께 밀려 왔다. 그 궤적을 함께 추적하면서, 박태원의 “소설가 구보씨의 하루”의 제목을 차용한 최인훈의 동명의 소설을 떠 올렸으며, 마르셀 프로스트와 제임스 조이스라는 작가들의 이름을 생각해 낸 것은, 동 시대 작가들의 고민과 20세기 후렵의 그 혼란스런 관념의 방황을 함께 읽었기 때문이다.

 

읽은 것이 몇 권 되지도 않지만, 중남미 문학이 소개되면서, 가브리엘 마르께스처럼 중남미의 신화와 상징으로 점철된 주제가 아니면, 카를로스 푸엔테스처럼 마초주의에 대한, 현실에 대한 애정어린 충고들, 아니면, 대표적인 중남미의 고민, 제 3세계가 안고 있는 현실에 대한 주제들이 드러나는 것들로만 인식되어진 차에 이런류의 소설을 읽게 된 것은 또 다른 경험이다. 내가 모를 뿐이겠다만.. 많은 작가들이 남겨 놓은 것들 중 이렇게 하나를 만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며칠 되지 않는 아바나 체류기간에 다녔던 그 골목길 이름들. .낯익은 지명들을 떠 올리면서, 40년의 시대의 간극속에서도 황폐한 60년대를 간간히 내포하고 있는, 그 오후의 햇살을 다시한번 떠올리게 했던, 흥미로운 책읽기였다.  



사족이다만, 이런 의식의 흐름은 혁명쿠바 속에서 남아 있을 수 없는 것일까? 1930년 아바나에서 태어나 뉴욕유학(이 시간동안 많은 국가들을 여행한 것으로 보인다만), 쿠바혁명을 기회로 쿠바로 돌아와 지내다가, 1979년 베니스비엔날레 비평가그룹 참가를 계기로 다시 망명길에 오른 작가, 에드문도 데스노에스의 이력을 살펴보면서 문득 든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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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들면 안 돼, 거기 뱀이 있어 - 일리노이 주립대 학장의 아마존 탐험 30년
다니엘 에버렛 지음, 윤영삼 옮김 / 꾸리에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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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강신주의 “상처받지 않을 권리”를 읽으면서, 다소 억지스럽게 과연 이 자본주의가 주는 상처를 피하기 위해서는? 그렇다고 해서 원시사회로 돌아갈 수는 없지 않은가? 하고.. 그렇다는 관념적 상징, 또는 기호로 대변할 수 있는 복지를 전제하거나, 보다 원시에 가까운 현대사회를 조장하는 것, 이를 테면, 인간의 본성에 가장 근접한, 상호 존중 및 배려의 사회만이 자본주의를 극복하는 해법은 아닌가? 하고 엉뚱한 발상으로 혼자 웃은 적이 있다.  

그런데, 우연처럼, 사실, 이걸, 이렇게 연결시키고자 하는 사전 음모도 없이, 거실 소파 옆, 작은 책장에 놓여 진 이 책, 다니엘 에버렛의 아마존 오지 체험기 “잠들면 안돼, 거기 뱀이 있어”를 읽게 된 것은 참으로 신기한 일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무슨 주술에 걸린 것처럼, 바로 전에 읽어 던 그 “자본주의”에 대한 해법이 그대로 제시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경제학과 인류학, 아니, 소수민족 언어학에 관련된 각각의 책 속에서 일관된 맥락을 읽었다면, 글쎄, 뭐 그게 편각으로 발생한 왜곡된 독서현상일수도 있겠으나, 결코 그 정도로 독서능역이 저하하지는 않다는 것을, 나는 나를 믿는다.  

이 책은 브라질 아마존 지역 아주 깊은 곳, 이미 브라질화(아니, 포르투칼화) 된 원주민 “카보끌루”족 사람들보다도 훨씬 더 깊숙한 곳에서 살고 있는 마시이강유역의 피다한마을을 대상으로, 그들 언어를 공부하여, 그들 언어로 된 성경책을 만들어, 자연스럽게 이 미개한 부족들을 교화하고, 하느님의 품에 넣겠다는 한 선교사(매우 불우한 성장기와 하느님을 만나 정신차린, 그리고 제 2의 삶을 예수님을 위해 살기로 맹세한 그 간증에도 불구하고, 결국, 그는 신을 버리고 언어학자로써 성공했다)의 30년간의 아마존 오지 체험기이다.

가끔, 이렇게 인류학적인 소재를 다룬 책을 읽는 것은 아마도, 이 분야의 책들이 주는, 인간 본성에 대한 드러남을 같은 인간으로써 이해하고자 하는 개인적인 취향 때문인데, 그간에 읽어 온 몇권의 책과는 달리, 이 책은, 이 초기 부족사회를 언어를 통해서 그 문화를 설명하고 있으니, 사실, 본격적으로 노먼 촘스키의 언어학 이론과 대비되는 설명, 그러니까, 중반이후, 언어학적 관점에서의 기나긴 서술은 솔직히 문화인류학쪽으로 살짝 기대하고 읽어 내려가기에는, 독서에 어려움이 많이 따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구과정을 사냥, 유희 등 공동체와 그들의 관습을 사례로 들어가면서 밝혀냄으로해서, “정확히는 소화하지 못해도 대충 뜻을 알기에는” 무리는 없었으니 그나마 다행이지 싶다. 

지구상에 6,500종류의 언어가 있다고 한다. 이게 그러니까 소위 부족, 공동체 구역이 그 면적과 상관없이 이 지구상에 6,500여개의 문화가 있다는 말이 될 것이고, 미국재단에서 400억원을 출연하여 이 “소멸언어” 연구를 지원하던지, 선교를 위한 기금에서 지원하든지, 많은 지원과 연구에도 불구하고, 점점 이 언어들이 사라져가는 것도.. 그 것 조차도. 또 자본주의니.. 이 것 참이다.

 

     “어떤 사회든 반드시 리더가 있어야 한다는 오류는 세가지다, 첫째, 우리와 다른 사회를 왜곡시키고.   작동하지 않는 사회에 대한 불인정함으로써,우리 사회의 가치관이나 메커니즘을 보존하고 정당화하려는 경향, 둘째, 선사시대부터의 주요 문명의 역사를 그대로 본 뜬, 조직구성만이 사회라는 인식에 근거한 할리우드 영화나 소설에서 인디언은 반드시 추장을 만들어 놓는경향 셋째, 실제 존재했던 인디언 추장 역시, 이들과 처음 접촉한 서양인들이 거래나 지배를 용이하게  하기 위해 앞잡이 역할을 할 추장이 필요하여 만들어 내는 경향 

         본문 중 “지배자가 없이도 행복한 조직을 지켜보는 필자의 생각들 요약-사실 이 내용은 저자가  얘기하고 있는 많은 연구결과들과는 조금 상관없는 내용이다만...” 

삶, 언어, 깨달음 이라는 3부로 나뉘어진 이 책의 한 구절을 먼저 꺼내 놓은 것은, 바로 우리가 소위 지구상 오지에서 원시사회모델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고 믿는 소수민족들에게 가지고 있는 편견과 또 지금 우리사회(소위 “문명사회”라고 불리우기를 선호하는)가 조직을 정당화 하려는 오랜 인류의 오만에 대한 저자의 지적이 매우 명쾌했기 때문이다. “틀림없이 몇 명되지 않는 사회라 평등사회로 유지될 있을 것이다”라는 비웃음이 그려지긴 하지만 말이다. 

정글, 최소한의 언어, 수많은 언어학적 분류 및 연구결과로는 절대로 풀어 나갈 수 없는 언어를 사용하고 있는 이 피다한 사람들, 온갖 해충과 위험, 창조신화도 없고, 미래도 없으며, 삶과 죽음도 그저 일상에 불과한 사람들, 밤 사이, 독사나 벌레의 위협 때문에 잠조차도 푹 잘 수 없어, 늘 쪽잠으로 건강을 유지하는 사람들. 외부세계의 편리성조차도 하루만 지나면 별로 필요가 없는 사람들에게 신이 과연 필요한 것일까? 

여하간에, 이 책의 장점은 탐험기에서 문화연구로, 점차 언어가 문화를 지배하는 사례들, 그리고 신도 진리도 없는 유쾌한 세상을 만나가는 깨달음, 점층법적인 서술을 매우 재미있는 에피소드 중심으로 풀어 나가는 것에 있다. 

미개, 행복지수, 개발 등의 단어를 그리지 말고, 이 소수민족, 이 오지마을을 경험해야 하는 것은, 그 인간의 본성을 아름답게 유지할 수 있는 조직이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것을 전해주는 메시지 때문일 터인데, 그렇다고 해서 이렇게 몸에 익숙한 문명세계를 버리고 정글로 들어가자는 것이 아니라, 이 문명사회에서 이들의 문화와 생활양식, 정신세계를 접목시켜, 탐욕에 찌들은 우리가 진정으로 인류애를 구현할 수 있는 방법을 한번 찾아 보자는 것 때문이다. 아니, 이 살아있는 “거울”에 우리를 비추어 보는 것을 통해, 비록, 끝내 실현할 수 없는 이 “이상”에 불과하다 할지라도, 한번 “반성”해 보자는 것이다. 글쎄.. 이 반성의 첫걸음은, “신”을 버리는 것으로 시작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왜냐하면, 이 신이라는 존재는 “구원을 하려면, 그들의 삶에 뭔가 부족한 것이 있다는 인식을 심어줘라”라는 요구에서부터 출발하기 때문에 신과 함께 있으면 도리어 “충만”을 느낄 수 없기 때문이며, 이 충만이 피다한사람들을 세상에서 가장 높은 “웃는 수치”를 지니고 있는 이유이기 때문이다.  

언어학책을 읽으며 너무 사회학(?)으로 간 것 같다. “콧노래말, 외침말, 노래말, 휘파람말, 일반적인 말” 피다한 사람들이 소통하는 다섯가지의 언어다. 우리는 이 중 딱 하나 일반적인 말과 행동양식으로만 소통할 뿐이다. 누가 더 다양한 문화를 가진 것일까? 언어가 문화와 쌍을 이루고 있다면 인간의 언어외에는 정말 언어가 없는 것일까? 사실, 저자는 이 질문을 독자에게 가장 하고 싶은 말일 수도 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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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받지 않을 권리 - 욕망에 흔들리는 삶을 위한 인문학적 보고서
강신주 지음 / 프로네시스(웅진)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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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은 존재한다. 인간이 만들었기 때문이다. 손에 쥘 수 없는 것이라 할지라도, 선사시대부터 인간은 인간을 뛰어넘는 존재를 기대하였고, 결국, 신을 창조하기에 이른다. 그런데 그 신은, 예수든, 석가든, 마호멧이든, 온갖 잡신이든.. 정령신앙을 제외한다면, 지배를 꿈꾸는 무리들이 창조한 듯 하다. 그 날 그 날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미처 생각하지 못한, 대중의 관심을 한 곳으로 끌어 모아 그 위에 군림하고 싶은, 그러니까 소위 현실의 집권층에 대항하는 또 다른 권력의 축으로서 말이다. 그리고는 이 두 정치와 신앙의 두 권력은 자신들의 이익에 근거하여 합종연횡 그림을 그린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이것들이 늘 전제하고 있는 것이 바로 “힘없는 가련한 인민”을 위한 것이나, 역설적으로 늘 그 “인민”을 착취에 대상으로 취급하고 있는 현실을 감안하면, 정말 가당찮은 명분인데.. 이 “소명”에 적어도 누천년동안 우리 인류는 속고 있으며, 대안마저도 찾지 못하고 있으니.. 거 참.
 

“자본주의”, 도구의 발달, 잉여물자, 교환, 시장의 생성을 통해 천천히 이뤄지고 있던 이 보다 나은 삶, 행복한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한 시스템으로부터, 산업혁명을 거쳐, 보이지 않는 손으로, 소위 본격적으로 “행복한 지구”를 꿈꾸면서, 우리는 또 다른 신. “자본주의”라는 신을 창조해 냈다. 그런데, 이 자본주의가 분명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한 최적의 시스템이라는 것에는 동의하겠는데, 이상하게 뭔가 속은 느낌, 이상하게 십일조와 감사헌금에 빠져, 점점 더 가진 것을 잃어가는 느낌, 그리고 그 대신 얻어지는 것은 갈수록 빈약해 진다는 허망함을 지울 수 없다. 그것이 자본주의가 우리에게 제대로 선물한 “상처” 아니겠는가?
 

농촌에서 도시로의 전이는 자급주의에서 교환으로, 자연순리에 대한 복종에서, 리모델링으로 표현할 수 있다. 그리고 그 도시는 인간이 가진 욕망으로 인해 끊없이 그 허영에 복종하게 한다. 그 뒤에서 음흉하고 웃고 있는 “자본주의”의 썩은 미소와 함께....
 

책 “상처받지 않을 권리”는 바로 이 자본주의가 인간에게 주는 상처들에 대해 이야기 한다. 도시화의 휘황찬란한 불빛 속에 부나비처럼 몰려드는 인간의 속성, 그리고 그 허영과 욕망을 이용하여, 끝없는 변태로 대중을 장악하고 노예화하는 자본주의의 탐욕을 보여주는 일련의 과정들을 보여주고 있다. 
 

“1부 무의식의 투라우마를 찾아서”와 “2부 화려한 이곳에서 어떻게 살아 남을까?”에서는 작가 이상과 보를레르를 통해 도시라는 쇼윈도우 안에서의 현기증을 불러일으키는 욕망과 허영, 그리고 그 속에서 잠식당하는 인간, 권태와 소외로 추락하는 문학적 행로를 짐벨과 벤야민의 사회학적 이론으로 뒷받침하고 있으며, “3부 메트릭스는 우리 내면에 있다”와 “4부 건강한 노동을 선물하기”에서는 투르니에와 유하가 가진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적 감수성을 부르디외와 보드리야르로 감싸주고 있다. 이 구성, 제시와 대비, 문학과 철학 사회학을 통한 열거는, 이 책의 덕목으로 강조할 수 밖에 없는데, 왜냐하면, 이 까다로운 화두를, 특히 나같이 “경제”, “자본”이라는 단어에만도 머리가 아파오는 나에게는 마치 손쉽게 다가가기 편한 사례들기로 “문학”이 접목되었다는 이유에서다. 사례로 들고 있는 작가들의 이름, 아니 작품들, 특히 “날개”와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을 다시 만날 수 있는 기쁨은 매우 컸는데, 당시 읽었을 때와 또 다른 시각으로 같은 책을 통해 사회를 진단함으로해서, 통계와 이론이 아닌, 감수성으로도 얼마든지 경제를 논할 수 있다는 “통섭” 효과에 대해 재차 확인한 꼴이 된 셈이다. 
 

백화점을 이용하는 허영, 상류사회와 동일시되고 싶은 하층계급의 욕망을 전제로, 그것을 이용하는 자본주의의 마켓팅, 그 곳에서 상처받는 사람들, 꼼짝달싹할 수 없게 만들어 놓은 노동의 결과, 미래의 행복이란 신기루를 꿈꾸며, 현재를 저당잡힌 노동의 수레, 결코 저항할 수 없는 “구별짓기”의 파편들, 이 왕성한 자본이 만들어 놓은 올가미 속에서 점차로 종속되어지는 층이 넓어져가고 있는 이 모순. 분명, 행복은 눈 앞에 있는데, 결국 “타자의 욕망”을 대신 충족시켜주는 이 “노동과 정신적인 궁핍”의 역사에 길들어져 가고 있는 상처들을 문학작품속에 나타난 그 정제된 묘사들을 화두로 삼아 재미있게 풀어 주었다. 
 

그런데, 저자 후기에서도 현상은 제시하였으나, 대안을 피력하지 못함을 안스러워 했듯이, 이 자본주의가 쥐어 준 다중날의 칼, 종속되어 노예처럼 살던지, 아니면, 생산-소비 협동조합의 미래를 꿈꾸든지, 아니면, 쓸모없어진 전공에 의해 버려진 노숙자로 살든지, 어떤 선택이든 우리에게 주어 진 것은 자해용 칼날뿐이니, 올바른 선택이란 무엇인가 자문해 볼 필요가 있는 것 같다.

“....로빈슨은 알아버렸습니다.
자신의 삶이 초월적 목적이 아니라 내재적 목적이 있다는 것,
삶은 놀이의 주체이지 결코 노동의 주체가 아니라는 것,
나아가 오직 현재만이 긍정의 대상이라는 것을 ...  


제 3부, 6. 허영, 내면 깊숙한 소외의 논리.. 본문 303p 중...”

그렇다. 이 칼날을 피하는 방법은, 호모루덴스, 놀이하는 인간으로써의 본분을 지켜보는 것일 수도 있다.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는 문구처럼, 어차피 자본가로 떵떵거리고 지낼 수 있는 자격은 애당초 잃어버린 지금, 적당한 타협이 필요할 뿐인데, 이 협상은 그들과 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자리매김이니, 노동을 놀이로 전환시켜 상징과 가치로 사물, 우리 현실을 아우르는 방법 밖에 없을 것이다. “내일일은 난 몰라요, 우리 주님..”으로 시작하는 찬송가처럼... 아, 물론, 이 “즐김”역시 자본가가 설치한 “보람” 이라는 덫을 피하는 것을 전제로 말이다. 그것이 양날의 칼, 날을 잡는 것이 아니라, 손잡이를 잡을 수 있는 지혜가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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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초의 왕오천축국전 2 (보급판 문고본)
혜초 지음, 정수일 역주 / 학고재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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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행기
몇 권 읽어 본 바는 없지만, 최근에 우즈베키스탄을 40여일에 걸쳐 도보 여행한 김준희의 여행기까지. 가끔 여행기를 읽는 것은, 내게는 평생의 꿈인 “여행”이라는 갈증을 잠깐이라도 “해갈”하기 위해서이다. 걸었던, 탔던, 투어든 공정여행이든, 여행기가 주는 기쁨은 참으로 크다. 그런데, 어떤 여행기도 박지원의 “열하일기”를 뛰어넘는 책은 만나지 못했다. 아니, 앞으로 어떤 책을 읽어도 이 결론은 바뀌지 않을 것이다. 나는 비록 검증받아야 할 책임을 지고 있지 않은 비교적 자유로운 개인 블러그라는 매체이긴 하지만, 이 “열하일기”의 천만분의 일만큼만이라도 흉내낼 수 있는 여행기를 포스팅 할 수 있다면 최고의 보람이겠다는 생각을 가끔 한다. 그런데, 혹시 이 존경심이 혹시 “왕오천축국전”을 읽고 나면 변심하지 않을까.. 우리나라 최초의 서역여행기, 그렇게 후손에게 남긴 최고의 책을 만나게 되면.. 책이 배달되어 오는 동안 내내 그 걱정을 했다. 
 

■ 혜초 “왕오천축국전”
...704년(성덕왕 3년) 신라출생, 719년 당 광주에서 밀교승 금강지 사사, 723년(20세) 인도를 시작으로 727년(24세) 11월 안서도호부 소재지인 구자에 도착. 733년(30세) 장안 천복사에서 밀교연구 등 명성을 떨치다 780년 4월 15일 (77세) 오대산 건원보리사에서 입적.... 책 말미에 소개된 혜초의 년표중 무의로 골라잡은 혜초의 년대기이다.
 

부끄럽게도 이 유명한 책이 한 행이 27에서 30여자로 서술된 227행에 불과한 책인줄을 진즉 알았으면, 아마 한참 전에 읽었을 것이다. 한문이야 당연히 역주를 비교해가며 읽을 터이니, 그런데, 어쩌면 만일, 그냥 본문 주해나 가벼운 역주로만 읽지 않은 것이 도리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역시 공부는 늦을수록 좋다는 것을 다시 한번 느낀 것은, 2008년에 정수일 선생이 역주로 정리한, 학고재에서 출판된 이 책이 마치 그간의 연구를 집대성한 모양새를 띄었다고 보기 때문이다. (아, 물론 다른 책을 읽지 않았으므로 선학들에 대한 불경이 될 수 있겠으나, 며칠 전 동양사학을 전공한 선배도 같은 입장을 보여 주었음으로..) 가만 보니까, 고전과 역사책은 늦게 공부할수록 유리한 모양이다.
 

중국 광주에서부터 인도를 거쳐 서역을 돌아 다시 중국땅 안서도호부까지 4년에 걸쳐 40여개 나라를 순방한 여행기치고는 참 간략하다. 주로 불교성지를 중심으로 한 인도의 기행, ·····스탄으로 명명되고 있는 서역길의 풍습들, 그리고 안서도호부에서의 마침표를 찍는 순례길은 우리 선조가 당시의 풍속을 견문見聞과 전문傳聞을 통해 기술했음에도 불구하고, 모두 3권의 책이 있을것이라는 얘기, 전문이라는 연구 등의 설이 있다지만, 지금으로서야 이 한권에 불과하니, 그 간략함 때문에, 원문만 가지고는, 요즘 시각으로 본다면 이 넓은 지역에 대한 여행기로는 매우 부족한 정보일수도 있다. 그것이 전, 후 시대의 다른 견문기나 역사책과 달리, 수행 중에 짤막한 단상을 적어놓은 것으로 이해 하겠지만 말이다. 
 

정수일선생의 역주가 없었더라면, 나 같은 문외한이 이나마 독서의 즐거움을 끝까지 유지할 수 없었을 것이다. 현장의 “대당서역기”를 비롯해서, 신당서, 위서, 수서, 한서, 등등 혜초 여행기에 앞어거나 뒷선 모든 자료를 섭력하고, 각종 연구서에서 이론異論들까지 함께 정리하여, 혜초의 순례길을 함께 정리해 준 이 역주를 통해, 당시의 풍습과 역사에 대한 기록들을 모두 들여다 볼 수 있게 해 주면서 오류와 오해까지도 함께 잡아 주고 있으니, 읽고 있는 매 순간마다 마치 눈앞에 놓여진 풍경을 담기에 급급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생이 이렇게 노고를 들인 책이, 읽어 가면서 바로 까먹어 버리는, 그리고 깊은 이해의 계기가 되기보다는, 단순히 눈으로 일갈하는 이 단순무식한 게으름과 소양이 부끄러울 뿐이다. 다만, 8세기초 삼국통일 후 이 조그만 땅 덩어리에서 부딪치고 있는 현세를 멀리하고 구도를 위해 그 먼길을 떠날 수 있었던 혜초의 정신과, 가끔 여행의 외로움을 표현한 오언시를 통해 역시 한국인의 흥과 멋이 남다르다는 기쁨을 얻었으니 됐고, 여전히 긴가민가한 서역지역에 대한 당시의 풍습을 주마관산격으로나마 한번 읽어 본 보람은 있으니 그거면 됐다 싶기도 하다. (여전히 원문을 가지고 소설의 모티브를 삼은 소설가 김연수의 능력의 못 미친 것에 대해서는 조금 약이 오르기는 하다) 
 

月夜瞻鄕路 달밝은 밤 고향길을 바라보니
浮雲颯颯歸 뜬구름은 너울너울 돌아가네
緘書忝去便 감히 그 편에 편지 한 장 보내 보지만
風急不聽廻 바람이 거세 화답이 들리지 않네
我國天岸北 내 나라는 하늘가 북쪽에 있고
他邦地角西 타국은 서쪽 끝 땅에 있네
日南無有鴈 일남에는 기러기조차 없으니
誰爲鄕林飛 누가 고향으로 날아가리 
                                              (본문, 여행중 고국 신라에 대한 그리움을 표현한 오언시 전문)

한시라는 것이 댓구법등을 이용해 서정적인 풍류를 나타내기는 매우 익숙한 양식이긴 해도, 가끔 이렇게 선조들이 남긴 기막힌 시를 읽노라면, 진정한 선조의 멋을 느끼게 된다. 전문적인 연구서이긴 하지만, 본문의 이런 감흥은 이 딱딱한 내용을 매우 재미있고, 부드럽게 읽게 만드는 요인이 아니었나 싶다. 아무튼 나는 혜초의 왕오천축국전을 이제야 읽음으로서, 한국인 후손으로서의 아주 긴 부담감 하나를 지웠으니, 수양을 쌓는다는 것도, 참으로 긴 여정이 아닌가 한다. 그래도 이 수양이 감히 혜초의 그리움에 비하겠냐마는.. 
 

君恨西蕃遠 그대는 서역 먼길이 한스럽고,
余嗟東路長 나는 동쪽 긴여정에 탄식하네
                                                                                                         (본문, 오언시 일부)
 

안서도호부에 가까이 와서, 마침 서역으로 떠나는 중국인를 바라보며 던진 혜초의 오언시, 서역으로 떠나는 여정을 바라보며, 동쪽으로 남은 길을 꼽으며 외로움이 절절하게 나와 있으나, 이 東路長을 단순히 귀로가 아닌, 앞으로 남아있는 삶, 구도 수행의 고단함, 그리고 아마 평생 다시는 돌아가지 못할 동쪽끝 땅, 조국 신라에 대한 그리움으로 확대하면 참으로 기막힌 표현이 아닌가. 이거 참, 천축과 서역에 대한 이 귀중한 자료를 읽고 나서 되새겨보는 것이 혜초의 마음 몇 줄에 불과하니, 정말, 제대로 책을 읽은 것인지 모르겠다. 기회가 되면, 이 길을 따라 한번 직접 걸어봐야 진정한 독후감이 되는 것은 아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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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를 의심하는 이들을 위한 경제학 - 우파는 부도덕하고 좌파는 무능하다??
조지프 히스 지음, 노시내 옮김 / 마티 / 2009년 6월
평점 :
품절


 


“시장”은 늘 불안정하다. 생산자와 소비자의 공급과 수요라는 가장 기본적인 원칙에 의해 자율적으로 움직인다고 믿고 있는 “시장”이 늘 불안정하고, 편파적으로 갈 수 밖에 없는 것은, 아담 스미스식 설계에는 인간이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는, 절대로 제거되지 않는 “이기심과 욕망” 그리고 타인을 “짓누름에 대한 탐욕” 이 간과되어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소소한 이익, “공정”보다는 “과욕”을 가진 사람이 훨씬 더, 아니 대개의 인간이 이 범주에 포함될 수 밖에 없는 “원죄”를 가지고 태어났으니, 자유로운 경쟁에 의한 상부상조의 인류애 실현은 폭우 속에 떠내려간 낡은 폐목일 뿐이다.

“경제”는 산업을 위한 것이 아니고, 인간을 위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입문서면 상투적으로 인용하고 있는 이 글귀가 비로소 와 닿은 것이 아마 이 책, 조지프 히스의 “우파는 부도덕하고 좌파는 무능하다?”라는 의문사로 끝난 부제와 함께, “자본주의를 의심하는 이들을 위한 경제학”을 읽고 나서 였다면, 참 오랜 세월 상투적 지식에 함몰되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 이유에서다.

3년전인가 일년동안 한달에 한번씩 부산 출장을 간 적이 있다. 그 기간만에도, 별도로 범어사를 두어번 들렸으니, 도심부터 외곽까지 부산은 내게 아주 익숙한 도시다. 게다가, 6살 때 아버지 손에 이끌러 용두산공원에서 비둘기 모이를 주는 사진을 한 장 가지고 있는 것으로 시작되어, 해운대, 광안리 등등의 젊은 시절의 유랑까지 합친다면(아, 해운대 입구의 2층 중국집이 떠오른다. 그 맛있던 짬뽕) 반 부산사람이라고 우겨도 될 듯 하다. 아무튼, 최근의 부산 방문길, 벡스포가 생기고, 국제회의장이 생기고, 기념관이 들어서고, 비엔날레, 실내 스키장이 만들어지고, 시내 중심가엔 서울보다 높아 보이는 주상복합건물이 하늘을 찌르고, 범어사 입구까지 들어찬 아파트단지를 보면서, 나는 엉뚱하게 아무리 한국의 제 2도시라고 해도, 이 공간들에서 비롯될 “공실율”을 걱정하고 있었으니 참으로 쌩뚱 맞다 하겠다. 최근에, 이런 저런 기준으로 70년만에 몰아 쳤다는, 폭우로 인해 그 부산이 물고생을 하고 있다. 티브이를 통해 몇미터씩 묻혔다는 주차장과 진입로를 복구하고 있는 주민들의 고생을 하면서, 역시 상투적이지만, 이건 비 때문이 아니라, 언덕 밑, 산 밑에 단지내만 번지르르 하게 짓고 주위를 대충 눈속임한 인간들 때문이라는 것도 알았다. 책 한권을 읽고 뜬금맞게 “폭우속의 부산”을 떠 올린 것은 “홍수 또는 수자원확보”를 위해 대대적으로 벌이겠다는 4대강은 이번 비에 괜찮은 모양이니, 정말 폭우등의 걱정이 앞선다면, 인간이 대충 파 헤쳐 놓은 주거단지, 국도의 가변, 4대강으로 흘러들어오는 지천, 그리고 역류현상을 없애기 위한 하수망들의 정비와 보완이 더 시급하지 않은가 하는 의문이 문득 들어서 이다. 경제학에 박식한 사람이든, 책을 읽은 사람은 이게 도대체 뭔 상관관계라고 흉 볼수도 있겠다만, 이런 정책이야 말로, 우파가 저지르고 있는 가장 큰 오류라고 말하고 싶어서이다. 이 생각이 도리어, 숲은 보지 못하고 나무나 들여다 본 “전형적인 오류”라고 해도 못매를 맞아도 별 대응할 능력은 없다만서도..

우파든 좌파는 오류는 많다. 자본주의라는 그나마 최선인 사회체제에서 이 양편의 오류는 어느 한쪽에는, 분명한 불평등 손해를 가져다 줄 수 밖에 없는 데, 국가란, 적어도, 많은 국민들이 선택한 정부거나, 아니, 국민의 의사와 관계없이, 역사적 사명감을 가지고 한 국가를 운영하고 있는 사회주의 국가라 할지라도, 오류시정의 목적은 바로 “국민”을 위해서이어야 한다. 다수라는 명분으로 폭주기관차의 정책보다는, “잃어 버린 양한마리에 대한 배려”를 잃지 않아야 할 것이다. 그것이 저자가 요약한 대로 “ 국가는 기업처럼 굴려서는 안된다, 기업은 서로 경쟁한다. 국가는 그렇지 않다. 이 둘을 혼동하는 것이 엄청난 혼란을 부르는 지름길이다”로 결론내어 질 수 있는 것이며, 또 젊은 철학가가 “경제학”책을 쓰게 된 가장 중요한 이유가 아닌가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파의 무수한 정책들은, 될 수 있으면 가진 자가 더 갖기 위한 노력을 뒷받침해 주는 것이 대부분이다. 공정한 상거래, 가열찬 국가경쟁력(책 안에서 이 국가경쟁력은 우파가 만들어 놓은 허상에 불과한 것임을 정확한 사례를 들어 반대하고 있다만), 고용증대를 통한 전국민을 행복지수의 상승이라는 공약에 불구하고, 그 이면에 숨어있는 가장 큰 욕망, 인센티브, 무임승차, 역선택 등을 통한 비도덕적 탐욕으로 인해 갈수록 모순에 빠지는 자본주의의 오류들에 확인시켜 주고 있다는 것이다. 정부와 기업, 국민과 정부라는 구조를 전제하면, 과연 정부의 입장이 어떠해야 하는 것임은 자명한 일임에도 불구하고 일단 선점한 이익의 배분을 아까워하는 기반세력들에 의해 “개인적 책임”으로서 자본주의의 모순을 덮어 씌우려고 하는 배타적 이기주의의 완성된 모델로서의 자본주의만이 남아 있는 것이다.

이러한 배타적 이기주의는, 경영을 잘못한 경영진들은 늘 뒤로 빠져있고, 종사자들만 구조조정을 당하는 사례, 국민들의 피해를 줄이기 위해 구제금융안에 들어가 있으면서도 단기간 실적만 좋으면 수억의 스톱옵션을 아무렇지도 않게 가져가는 경영진과 그것이 용인되는 정부의 사례 등을 보면 극명하다. 가끔 그런 사례를 접하면서, 책임이란 것에 대해 자문하게 되는데, 과연, 그 책임을 져야 할 사람이 누구인가 라는 것이다. 이 책에서도 나와 있는 “자본가가 없어지는 현상” 주주는 뒤로 물러나고 기업의 이윤이 아닌, CEO의 개인이익을 위해 기업이 존재해져가는 기이한 현상의 결과로, 잘못된 경영의 결과로 회사가 망하게 되더라도, 그 책임을 지고, 그동안 온갖 부채로 운영한 회사를 통해 가져간 경영진의 축적재산에 대해 한번도 청구하는 사례를 보지 못했다. 몇 년전 일본의 한 기업가가 파산을 하면서 개인 재산을 모두 환원한 사례가 있기는 하지만, 우리는 보통 그 자리만 물러나면 그걸로 책임을 면제받는다. 그러니까. 잔뜩 부채 올려놓으면서 늘어난 현금보유고를 빙자하고 월급을 왕창 떼어간다음, 파산하면 나 몰라라 하고, 퇴임 후 골프만 열심히 쳐도 된다는 극단적인 상상도 가능하다. 그런데 그 다음, 사회의 묵시적 행보는 시키는 데로 일만한 종업원에 대한 인건비 축소 및 구조조정이다
 

그런데, 돈을 상품으로 치부하고, 돈만을 가지고 장사하는 경우는 파멸한다라는 경고에도 불구하고, 파생상품 등, 가장 대표적으로 버려야 하는 “지푸라기를 가지고 황금으로 만들어 버린” 서브프라임모기지론에 의한 경제파동은 이런 우파의 그릇된 지혜의 오류를 가장 적절하게 만들어 버린 것이며, 그들이 말한 “도덕적 해이”를 스스로 제대로 보여주고 있는 사례가 아닌가 한다.


그럼 좌파는 어떠한가? 좌파는, 진보는 빨갱이라고 함으로써, 많은 국민은 “빨갱이”로 만든 우화가 있는 나라도 있기는 하지만, 좌파의 노력과 고민은 과연 정당한가? 라고 저자는 물었다. 공정가격의 오류, 이윤의 도덕적 지위, 그리고 포트자동차의 기계화, 평등한 임금 등 부의 분배 등을 부르짖고 있는, 한 명의 소외된 계층도 이끌고 가야 한다는 진정한 “예수님”의 말씀을 따르고 있는 좌파들의 논리에 대한 저자의 반박 역시 만만치가 않다. “과대할인율”, “동태적 선호 불안정”, “시점간 선택”이라는 전문용어들과 함께, 이 좌파들이 움켜쥐고 있는 서민과 정책에 대한 불편한 사례들을 열거함으로써, 인간에게 가지고 있는 “인간성”에 의해 드러날 수 밖에 없는, 그러니까 나 자신 역시 “자유의지에 의한 열려진 계급사회”라고 정의하고 있는 자본주의에 대한 옹호가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좌파들의 모순을 열거하는 저자가 들춘 사례들이, 너무 초보적인 것이 아닌가 하고 의심이 (그러니까, 그가 든 사례들 중 부자들이 이익을 더 보는 평등정책-공공재에 대한 가격정책- 등은 누진율로, 희소성에 의한 노동가격의 조정, 멕시코에서 시작하여 많은 나라들이 검토하고 있다는 복지차원의 “기회프로그램”등의 생각들은, 경제라는 단어의 뜻도 오늘에야 가슴에 와닿은 철부지 내가 읽기에도 너무 초보적이다) 든 것은 좌파들이 저자만큼 경제에 대한 무지가 심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항변 때문이다. (물론, 공정거래 등이 낳은, 인간이기에 예기치 못한 반전에 의한 피해사례에 대한 저자의 안목은 전격 동의한다) 어찌되었건, 이 책은 결코 우파와 좌파에 대한 같은 질량의 비판으로 읽히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철학자인 저자가 바라보고 있는 “인간사”에 대한 애정이, 결국 그가 얘기한 것이 “수정자본주의”로서의 희망을 서술하고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우파든 좌파든, 부자든 서민이든간에 과대할인율에 의한 인간의 선택들, 모순이 모순을 낳는 “도리어 인간이기에 인간적인 불평등이 존재할 수 밖에 없는” 현실에 대한 북유럽식의 수정된 자본주의를 통해 복지국가의 틀 속에서 그나마 대부분이 “인간적인 삶”을 누릴 수 있는 권리를 보장해 주고, 시행해 나가는 국가의 참모습을 결국 저자가 주장하고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부연하자면, 북아메리카 대륙, 지하자원 개발이익을 선주민에게 (나는 선주민보다는 원주민이라는 단어가 더 좋다. 선주민하면 왠지 나중에 들어 온 놈들이 앞 선 사람들과 대등한 권리를 주장하는 것 같지만, 원주민 하면, 원래 살던 사람들, 왠지 주체적인 느낌이 들어서이다) 성인이 되면 10만달러를 지급함으로써, 도리어 그들이 성장기에 공부를 멀리하고, 돈을 받으면 스포츠카나 흥청망청으로 소진해 버리고, 암울한 미래로 나아가는 경우, 또는 대한민국에서 새 삶은 찾은 새터민들이 하나원을 나오면서 받는 정착금(일부는 물론, 남쪽을 오기 위해 브러커들에게 그 돈을 주기로 약속한 경우도 있지만)을 서툰 남쪽생활에 바로 소진하고 서민의 길로 들어서야 하는 것처럼, 이 "시점간 선택"에 의한 피해와 기대하지 않은 결과로 복지와 기부가 쓰일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우파가 주장하는 개인적 책임으로 그들을 놓아 버려야 할까? 일단 돈을 지급했다고 공적책임은 모두 완수한 것일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있는 자들을 위한 제도적 장치를 만들 듯, 그들이 그 돈을, 그 기금을 제대로 이용하여, 보다 바람직한 구성원으로 발돋음할 수 있는 프로그램들도 함께 운영되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있는 자들을 위한 제도적 장치는, 대개가 새로운 재화를 창출해 낸다. 이를테면 수수료, 사례금 등의 적합한 장치로 인해 민간에서 그 수고를 충분히 수용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그런데, 이 재생프로그램을 운영할 인력는 몇몇의 자선 및 사회단체를 제외한다면 수요를 만족할 만큼의 공급이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그렇다면 그 부족한 부분을 바로 정부가 책임져야 한다는 것이다. 왜? 개인의 책임을 국가가 떠맡아야 한다고 반론을 피겠다면, 우파를 위해 책임지고 있는 사회보험을 한번 생각해 보라. 대기업의 파산이 경제에 미치는 영향을 핑계로 쏟아 붓고 있는 공적자금, 각종 구제제도의 비용과 비교하면, 모르긴 해도 이 재생프로그램, 정착프로그램에 들어가는 비용은 터무니 없이 보잘 것 없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재원은 어떻하냐고, 그 재원을 위해 우리는 세금을 걷고, 공공기금을 활용하고, 노블리스 오블리제 정신에 입각한 활동을 받아내면 될 것이다. 여기에다가, 특히 우리나라의 경우, 말이 안될 정도로 자발적인 가난한 자가 가난한 자를 돕는 인정까지 덧붙인다면, 제대로 된 운영시스템을 전제로 하면 까짓 못할 것도 없다고 본다. 
 

“죄악세”가 있다면 “허영세”도 있어야 한다. 그것이 “지위세”라는 이름으로 포장하더라도 말이다. 청교도식의 절제된 자본주의, 이웃을 내 몸같이 여기는 소중한 윤리의식을 바탕으로 둔, 국가 경영을 국가간에 경쟁(?)한다면, 절대로 이 아름다운 자본주의가 멸망하지 않으리라는, 절대적 빈곤과 상대적 빈곤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는 기회는 이미 백년전부터 던져져 있는 것이고, 어느 시점에 이걸 잡아야 하는 것인지, 이제 더 늦기 전에, 그걸 고민할 때가 아닌가 싶다. 왜 이런 고민이 필요하냐면, 바로, 이웃을 나처럼 생각하는 것이, 사회를 고민하게 되고, 국가를 이롭게 하며, 더 나아가, 결국, 인류가 하나라는 진정한 인본주의의 구현이 가능할 것으로 굳게 믿고 있기 때문이다.

만일 그 고민이 정말 필요하다면, 이 책은 어느 정도 그 해법에 대한 지침서가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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