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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를 의심하는 이들을 위한 경제학 - 우파는 부도덕하고 좌파는 무능하다??
조지프 히스 지음, 노시내 옮김 / 마티 / 2009년 6월
평점 :
품절
“시장”은 늘 불안정하다. 생산자와 소비자의 공급과 수요라는 가장 기본적인 원칙에 의해 자율적으로 움직인다고 믿고 있는 “시장”이 늘 불안정하고, 편파적으로 갈 수 밖에 없는 것은, 아담 스미스식 설계에는 인간이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는, 절대로 제거되지 않는 “이기심과 욕망” 그리고 타인을 “짓누름에 대한 탐욕” 이 간과되어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소소한 이익, “공정”보다는 “과욕”을 가진 사람이 훨씬 더, 아니 대개의 인간이 이 범주에 포함될 수 밖에 없는 “원죄”를 가지고 태어났으니, 자유로운 경쟁에 의한 상부상조의 인류애 실현은 폭우 속에 떠내려간 낡은 폐목일 뿐이다.
“경제”는 산업을 위한 것이 아니고, 인간을 위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입문서면 상투적으로 인용하고 있는 이 글귀가 비로소 와 닿은 것이 아마 이 책, 조지프 히스의 “우파는 부도덕하고 좌파는 무능하다?”라는 의문사로 끝난 부제와 함께, “자본주의를 의심하는 이들을 위한 경제학”을 읽고 나서 였다면, 참 오랜 세월 상투적 지식에 함몰되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 이유에서다.
3년전인가 일년동안 한달에 한번씩 부산 출장을 간 적이 있다. 그 기간만에도, 별도로 범어사를 두어번 들렸으니, 도심부터 외곽까지 부산은 내게 아주 익숙한 도시다. 게다가, 6살 때 아버지 손에 이끌러 용두산공원에서 비둘기 모이를 주는 사진을 한 장 가지고 있는 것으로 시작되어, 해운대, 광안리 등등의 젊은 시절의 유랑까지 합친다면(아, 해운대 입구의 2층 중국집이 떠오른다. 그 맛있던 짬뽕) 반 부산사람이라고 우겨도 될 듯 하다. 아무튼, 최근의 부산 방문길, 벡스포가 생기고, 국제회의장이 생기고, 기념관이 들어서고, 비엔날레, 실내 스키장이 만들어지고, 시내 중심가엔 서울보다 높아 보이는 주상복합건물이 하늘을 찌르고, 범어사 입구까지 들어찬 아파트단지를 보면서, 나는 엉뚱하게 아무리 한국의 제 2도시라고 해도, 이 공간들에서 비롯될 “공실율”을 걱정하고 있었으니 참으로 쌩뚱 맞다 하겠다. 최근에, 이런 저런 기준으로 70년만에 몰아 쳤다는, 폭우로 인해 그 부산이 물고생을 하고 있다. 티브이를 통해 몇미터씩 묻혔다는 주차장과 진입로를 복구하고 있는 주민들의 고생을 하면서, 역시 상투적이지만, 이건 비 때문이 아니라, 언덕 밑, 산 밑에 단지내만 번지르르 하게 짓고 주위를 대충 눈속임한 인간들 때문이라는 것도 알았다. 책 한권을 읽고 뜬금맞게 “폭우속의 부산”을 떠 올린 것은 “홍수 또는 수자원확보”를 위해 대대적으로 벌이겠다는 4대강은 이번 비에 괜찮은 모양이니, 정말 폭우등의 걱정이 앞선다면, 인간이 대충 파 헤쳐 놓은 주거단지, 국도의 가변, 4대강으로 흘러들어오는 지천, 그리고 역류현상을 없애기 위한 하수망들의 정비와 보완이 더 시급하지 않은가 하는 의문이 문득 들어서 이다. 경제학에 박식한 사람이든, 책을 읽은 사람은 이게 도대체 뭔 상관관계라고 흉 볼수도 있겠다만, 이런 정책이야 말로, 우파가 저지르고 있는 가장 큰 오류라고 말하고 싶어서이다. 이 생각이 도리어, 숲은 보지 못하고 나무나 들여다 본 “전형적인 오류”라고 해도 못매를 맞아도 별 대응할 능력은 없다만서도..
우파든 좌파는 오류는 많다. 자본주의라는 그나마 최선인 사회체제에서 이 양편의 오류는 어느 한쪽에는, 분명한 불평등 손해를 가져다 줄 수 밖에 없는 데, 국가란, 적어도, 많은 국민들이 선택한 정부거나, 아니, 국민의 의사와 관계없이, 역사적 사명감을 가지고 한 국가를 운영하고 있는 사회주의 국가라 할지라도, 오류시정의 목적은 바로 “국민”을 위해서이어야 한다. 다수라는 명분으로 폭주기관차의 정책보다는, “잃어 버린 양한마리에 대한 배려”를 잃지 않아야 할 것이다. 그것이 저자가 요약한 대로 “ 국가는 기업처럼 굴려서는 안된다, 기업은 서로 경쟁한다. 국가는 그렇지 않다. 이 둘을 혼동하는 것이 엄청난 혼란을 부르는 지름길이다”로 결론내어 질 수 있는 것이며, 또 젊은 철학가가 “경제학”책을 쓰게 된 가장 중요한 이유가 아닌가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파의 무수한 정책들은, 될 수 있으면 가진 자가 더 갖기 위한 노력을 뒷받침해 주는 것이 대부분이다. 공정한 상거래, 가열찬 국가경쟁력(책 안에서 이 국가경쟁력은 우파가 만들어 놓은 허상에 불과한 것임을 정확한 사례를 들어 반대하고 있다만), 고용증대를 통한 전국민을 행복지수의 상승이라는 공약에 불구하고, 그 이면에 숨어있는 가장 큰 욕망, 인센티브, 무임승차, 역선택 등을 통한 비도덕적 탐욕으로 인해 갈수록 모순에 빠지는 자본주의의 오류들에 확인시켜 주고 있다는 것이다. 정부와 기업, 국민과 정부라는 구조를 전제하면, 과연 정부의 입장이 어떠해야 하는 것임은 자명한 일임에도 불구하고 일단 선점한 이익의 배분을 아까워하는 기반세력들에 의해 “개인적 책임”으로서 자본주의의 모순을 덮어 씌우려고 하는 배타적 이기주의의 완성된 모델로서의 자본주의만이 남아 있는 것이다.
이러한 배타적 이기주의는, 경영을 잘못한 경영진들은 늘 뒤로 빠져있고, 종사자들만 구조조정을 당하는 사례, 국민들의 피해를 줄이기 위해 구제금융안에 들어가 있으면서도 단기간 실적만 좋으면 수억의 스톱옵션을 아무렇지도 않게 가져가는 경영진과 그것이 용인되는 정부의 사례 등을 보면 극명하다. 가끔 그런 사례를 접하면서, 책임이란 것에 대해 자문하게 되는데, 과연, 그 책임을 져야 할 사람이 누구인가 라는 것이다. 이 책에서도 나와 있는 “자본가가 없어지는 현상” 주주는 뒤로 물러나고 기업의 이윤이 아닌, CEO의 개인이익을 위해 기업이 존재해져가는 기이한 현상의 결과로, 잘못된 경영의 결과로 회사가 망하게 되더라도, 그 책임을 지고, 그동안 온갖 부채로 운영한 회사를 통해 가져간 경영진의 축적재산에 대해 한번도 청구하는 사례를 보지 못했다. 몇 년전 일본의 한 기업가가 파산을 하면서 개인 재산을 모두 환원한 사례가 있기는 하지만, 우리는 보통 그 자리만 물러나면 그걸로 책임을 면제받는다. 그러니까. 잔뜩 부채 올려놓으면서 늘어난 현금보유고를 빙자하고 월급을 왕창 떼어간다음, 파산하면 나 몰라라 하고, 퇴임 후 골프만 열심히 쳐도 된다는 극단적인 상상도 가능하다. 그런데 그 다음, 사회의 묵시적 행보는 시키는 데로 일만한 종업원에 대한 인건비 축소 및 구조조정이다
그런데, 돈을 상품으로 치부하고, 돈만을 가지고 장사하는 경우는 파멸한다라는 경고에도 불구하고, 파생상품 등, 가장 대표적으로 버려야 하는 “지푸라기를 가지고 황금으로 만들어 버린” 서브프라임모기지론에 의한 경제파동은 이런 우파의 그릇된 지혜의 오류를 가장 적절하게 만들어 버린 것이며, 그들이 말한 “도덕적 해이”를 스스로 제대로 보여주고 있는 사례가 아닌가 한다.
그럼 좌파는 어떠한가? 좌파는, 진보는 빨갱이라고 함으로써, 많은 국민은 “빨갱이”로 만든 우화가 있는 나라도 있기는 하지만, 좌파의 노력과 고민은 과연 정당한가? 라고 저자는 물었다. 공정가격의 오류, 이윤의 도덕적 지위, 그리고 포트자동차의 기계화, 평등한 임금 등 부의 분배 등을 부르짖고 있는, 한 명의 소외된 계층도 이끌고 가야 한다는 진정한 “예수님”의 말씀을 따르고 있는 좌파들의 논리에 대한 저자의 반박 역시 만만치가 않다. “과대할인율”, “동태적 선호 불안정”, “시점간 선택”이라는 전문용어들과 함께, 이 좌파들이 움켜쥐고 있는 서민과 정책에 대한 불편한 사례들을 열거함으로써, 인간에게 가지고 있는 “인간성”에 의해 드러날 수 밖에 없는, 그러니까 나 자신 역시 “자유의지에 의한 열려진 계급사회”라고 정의하고 있는 자본주의에 대한 옹호가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좌파들의 모순을 열거하는 저자가 들춘 사례들이, 너무 초보적인 것이 아닌가 하고 의심이 (그러니까, 그가 든 사례들 중 부자들이 이익을 더 보는 평등정책-공공재에 대한 가격정책- 등은 누진율로, 희소성에 의한 노동가격의 조정, 멕시코에서 시작하여 많은 나라들이 검토하고 있다는 복지차원의 “기회프로그램”등의 생각들은, 경제라는 단어의 뜻도 오늘에야 가슴에 와닿은 철부지 내가 읽기에도 너무 초보적이다) 든 것은 좌파들이 저자만큼 경제에 대한 무지가 심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항변 때문이다. (물론, 공정거래 등이 낳은, 인간이기에 예기치 못한 반전에 의한 피해사례에 대한 저자의 안목은 전격 동의한다) 어찌되었건, 이 책은 결코 우파와 좌파에 대한 같은 질량의 비판으로 읽히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철학자인 저자가 바라보고 있는 “인간사”에 대한 애정이, 결국 그가 얘기한 것이 “수정자본주의”로서의 희망을 서술하고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우파든 좌파든, 부자든 서민이든간에 과대할인율에 의한 인간의 선택들, 모순이 모순을 낳는 “도리어 인간이기에 인간적인 불평등이 존재할 수 밖에 없는” 현실에 대한 북유럽식의 수정된 자본주의를 통해 복지국가의 틀 속에서 그나마 대부분이 “인간적인 삶”을 누릴 수 있는 권리를 보장해 주고, 시행해 나가는 국가의 참모습을 결국 저자가 주장하고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부연하자면, 북아메리카 대륙, 지하자원 개발이익을 선주민에게 (나는 선주민보다는 원주민이라는 단어가 더 좋다. 선주민하면 왠지 나중에 들어 온 놈들이 앞 선 사람들과 대등한 권리를 주장하는 것 같지만, 원주민 하면, 원래 살던 사람들, 왠지 주체적인 느낌이 들어서이다) 성인이 되면 10만달러를 지급함으로써, 도리어 그들이 성장기에 공부를 멀리하고, 돈을 받으면 스포츠카나 흥청망청으로 소진해 버리고, 암울한 미래로 나아가는 경우, 또는 대한민국에서 새 삶은 찾은 새터민들이 하나원을 나오면서 받는 정착금(일부는 물론, 남쪽을 오기 위해 브러커들에게 그 돈을 주기로 약속한 경우도 있지만)을 서툰 남쪽생활에 바로 소진하고 서민의 길로 들어서야 하는 것처럼, 이 "시점간 선택"에 의한 피해와 기대하지 않은 결과로 복지와 기부가 쓰일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우파가 주장하는 개인적 책임으로 그들을 놓아 버려야 할까? 일단 돈을 지급했다고 공적책임은 모두 완수한 것일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있는 자들을 위한 제도적 장치를 만들 듯, 그들이 그 돈을, 그 기금을 제대로 이용하여, 보다 바람직한 구성원으로 발돋음할 수 있는 프로그램들도 함께 운영되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있는 자들을 위한 제도적 장치는, 대개가 새로운 재화를 창출해 낸다. 이를테면 수수료, 사례금 등의 적합한 장치로 인해 민간에서 그 수고를 충분히 수용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그런데, 이 재생프로그램을 운영할 인력는 몇몇의 자선 및 사회단체를 제외한다면 수요를 만족할 만큼의 공급이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그렇다면 그 부족한 부분을 바로 정부가 책임져야 한다는 것이다. 왜? 개인의 책임을 국가가 떠맡아야 한다고 반론을 피겠다면, 우파를 위해 책임지고 있는 사회보험을 한번 생각해 보라. 대기업의 파산이 경제에 미치는 영향을 핑계로 쏟아 붓고 있는 공적자금, 각종 구제제도의 비용과 비교하면, 모르긴 해도 이 재생프로그램, 정착프로그램에 들어가는 비용은 터무니 없이 보잘 것 없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재원은 어떻하냐고, 그 재원을 위해 우리는 세금을 걷고, 공공기금을 활용하고, 노블리스 오블리제 정신에 입각한 활동을 받아내면 될 것이다. 여기에다가, 특히 우리나라의 경우, 말이 안될 정도로 자발적인 가난한 자가 가난한 자를 돕는 인정까지 덧붙인다면, 제대로 된 운영시스템을 전제로 하면 까짓 못할 것도 없다고 본다.
“죄악세”가 있다면 “허영세”도 있어야 한다. 그것이 “지위세”라는 이름으로 포장하더라도 말이다. 청교도식의 절제된 자본주의, 이웃을 내 몸같이 여기는 소중한 윤리의식을 바탕으로 둔, 국가 경영을 국가간에 경쟁(?)한다면, 절대로 이 아름다운 자본주의가 멸망하지 않으리라는, 절대적 빈곤과 상대적 빈곤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는 기회는 이미 백년전부터 던져져 있는 것이고, 어느 시점에 이걸 잡아야 하는 것인지, 이제 더 늦기 전에, 그걸 고민할 때가 아닌가 싶다. 왜 이런 고민이 필요하냐면, 바로, 이웃을 나처럼 생각하는 것이, 사회를 고민하게 되고, 국가를 이롭게 하며, 더 나아가, 결국, 인류가 하나라는 진정한 인본주의의 구현이 가능할 것으로 굳게 믿고 있기 때문이다.
만일 그 고민이 정말 필요하다면, 이 책은 어느 정도 그 해법에 대한 지침서가 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