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개발의 기억
에드문드 데스노에스 지음, 정승희 옮김 / 수르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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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고, 내용이 너무 좋아 몇 번을 읽었다는, 그러다가 문득, 쿠바여행을 다녀 온 내가 생각났다는, 여행가기 전에 읽었으면 더 더욱 그 여행이 좋았을 것이라는, 때 늦은 감이 있지만, 한번 읽어보라는, 고작 며칠 다녀 온 쿠바 여행을 여전히 기억해 주고, 추천해 준 친구 덕에 집어 든 책 쿠바작가 에드문도 데스노에스의 “저개발의 기억”이다.

 

중,단편집이라고 해야 하나? 아니면, 소설 “저개발의 기억”속에 언급되어 있던 화자의 작품들을 같은 제목인 “잭과 버스기사”, “믿거나 말거나”, “요도로”로 담겼으니, 소설속의 소설이라고 보고 장편으로 봐야하나... 싱거운 시비겠지?

 


“아바나의 여인들은 타인의 눈을 중시한다. 남의 시선을 즐기고 자신도 남을 쳐다본다”

 


보다 안락하고, 편안한 삶을 위하여 이혼을 하고 “90마일”(쿠바와 마이애미사이의 거리)밖으로 떠난 아내 라우라를 보내고, 혼자 남은 화자는 레포르마 우르바나법(쿠바혁명 후 건물등을 국가가 가져간 대신, 소유주에게는 일정한 연금을 죽을 때까지 지급하던 법)에 의존하며 건조한 일상을 보낸다. 그는 이 황량한 일상을 아내가 남겨놓은 립스틱놀이와 스타킹의 바스락거리는 소음을 즐기게 되고, 어느 날 무릎이 예쁜 미성년자 엘레나와 잠자리를 한다. 이 건조한 사랑역시 이내 시들해져 18번의 전화벨소리를 무시하고, 노크소리를 버려두다가 “거부당한다고 느끼면 독사가 되어버리는 여자들의 속성”에 의해 미성년자 강간으로 뒤집어 쓸 뻔한 나날들, 그리고 그 허탈한 타성은 다시 1년 이상 자신을 돌봐 준 가정부 노에미와의 잠자리, 13세에 친구의 도움으로 창녀를 산 경험으로 출발한 15세에 천재소리를 들었으며, 22세에 라파엘 거리의 가구점 사장이 된, 39세의 쿠바 부르조아 부류인 화자는, 그렇게 투명한 유리로 가로막힌 쇳소리에 귀가 멀수도 있는 짓누른 세월을 바라보고 있다.


 

“여자들은 항상 내인생을 양분해 온 존재들이다.

그들은 내게 큰 쾌락을 주기도 했으며,

인생을 최악의 혼란으로 빠뜨리게 하기도 했다.

책을 읽고, 그림을 보고, 영화관에 있는 나는 편안하다고 느끼지만,

그 것들은 모두 거짓말이다.

여자는 살아있는 책이고, 영화고, 그림이다. . . . . . . ”

 


아니 이게 한축이라면, 호세 마르티로 시작하여, 헤밍웨이, 동시대의 작가들에 대한 상념과 그가 시도한 몇 편의 단편소설들을 손보며, 아바나를 배회하면서, 모퉁이, 거리, 호텔 앞에 배어있는 그의 냄새들을 떠올리고, 소설가로서의 그의 일상을 고백한다. 혁명을 성공했다고 하지만, 이제 인민들은 모두 행복이란 단어로만 치장되어야 한다고 믿고 있는데, 이 저개발의 국가에서는 “코르크마개”가 없어서 콜라를 생산할 수 없고, 일상품에 대한 공급과 일거리를 구하지 못하고, 거리에서 호텔 앞에서, 미성년 매춘을 시도해야 하는 사회로 남아있다. “72시간 전투”에서 승리했다곤 하지만, 적대국 미국이 남겨준 헤밍웨이 기념관에서는 새로운 지배자 러시아 군인들의 땀냄새가 다시 풍겨 올 뿐인, 이 저개발 국가는 “우리는 힘있는 문명국들의 조악한 모방일 뿐이다”라는 자조만을 남길 뿐이다. 부르조아 출신의 화자, 이 카리브해 연안의 섬나라, 강열한 햇빛과 나른한 오후, 터질듯한 권태의 조롱앞에서 진정으로 하고 싶은 일은 “인간을 느끼게 해 주는” 소설을 써야된다는 강박감이고, 남아 있는 희망은 “이 위기의 나날들에 대해 깨끗하고 텅빈 시각을 유지하고” 싶은 것이며, 그는 다음과 같이 외칠 수 밖에 없을 뿐이다.


 

“나는 살기를 원한다”

 


투명한 공포, 눈을 뜨지 못하게 하는 햇빛속에 감쳐진 속박, 그리고 패배의식, 그리고 조정이 불가능한 권태로 일관된, 시니컬한 그의 독백과 고민을 자전적 기술로 쓰여 내려간 소설, 모처럼 “문학”이란 분류의 책을 읽으면서, 여름날 나른한 오후의 권태가 함께 밀려 왔다. 그 궤적을 함께 추적하면서, 박태원의 “소설가 구보씨의 하루”의 제목을 차용한 최인훈의 동명의 소설을 떠 올렸으며, 마르셀 프로스트와 제임스 조이스라는 작가들의 이름을 생각해 낸 것은, 동 시대 작가들의 고민과 20세기 후렵의 그 혼란스런 관념의 방황을 함께 읽었기 때문이다.

 

읽은 것이 몇 권 되지도 않지만, 중남미 문학이 소개되면서, 가브리엘 마르께스처럼 중남미의 신화와 상징으로 점철된 주제가 아니면, 카를로스 푸엔테스처럼 마초주의에 대한, 현실에 대한 애정어린 충고들, 아니면, 대표적인 중남미의 고민, 제 3세계가 안고 있는 현실에 대한 주제들이 드러나는 것들로만 인식되어진 차에 이런류의 소설을 읽게 된 것은 또 다른 경험이다. 내가 모를 뿐이겠다만.. 많은 작가들이 남겨 놓은 것들 중 이렇게 하나를 만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며칠 되지 않는 아바나 체류기간에 다녔던 그 골목길 이름들. .낯익은 지명들을 떠 올리면서, 40년의 시대의 간극속에서도 황폐한 60년대를 간간히 내포하고 있는, 그 오후의 햇살을 다시한번 떠올리게 했던, 흥미로운 책읽기였다.  



사족이다만, 이런 의식의 흐름은 혁명쿠바 속에서 남아 있을 수 없는 것일까? 1930년 아바나에서 태어나 뉴욕유학(이 시간동안 많은 국가들을 여행한 것으로 보인다만), 쿠바혁명을 기회로 쿠바로 돌아와 지내다가, 1979년 베니스비엔날레 비평가그룹 참가를 계기로 다시 망명길에 오른 작가, 에드문도 데스노에스의 이력을 살펴보면서 문득 든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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