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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받지 않을 권리 - 욕망에 흔들리는 삶을 위한 인문학적 보고서
강신주 지음 / 프로네시스(웅진) / 2009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신은 존재한다. 인간이 만들었기 때문이다. 손에 쥘 수 없는 것이라 할지라도, 선사시대부터 인간은 인간을 뛰어넘는 존재를 기대하였고, 결국, 신을 창조하기에 이른다. 그런데 그 신은, 예수든, 석가든, 마호멧이든, 온갖 잡신이든.. 정령신앙을 제외한다면, 지배를 꿈꾸는 무리들이 창조한 듯 하다. 그 날 그 날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미처 생각하지 못한, 대중의 관심을 한 곳으로 끌어 모아 그 위에 군림하고 싶은, 그러니까 소위 현실의 집권층에 대항하는 또 다른 권력의 축으로서 말이다. 그리고는 이 두 정치와 신앙의 두 권력은 자신들의 이익에 근거하여 합종연횡 그림을 그린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이것들이 늘 전제하고 있는 것이 바로 “힘없는 가련한 인민”을 위한 것이나, 역설적으로 늘 그 “인민”을 착취에 대상으로 취급하고 있는 현실을 감안하면, 정말 가당찮은 명분인데.. 이 “소명”에 적어도 누천년동안 우리 인류는 속고 있으며, 대안마저도 찾지 못하고 있으니.. 거 참.
“자본주의”, 도구의 발달, 잉여물자, 교환, 시장의 생성을 통해 천천히 이뤄지고 있던 이 보다 나은 삶, 행복한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한 시스템으로부터, 산업혁명을 거쳐, 보이지 않는 손으로, 소위 본격적으로 “행복한 지구”를 꿈꾸면서, 우리는 또 다른 신. “자본주의”라는 신을 창조해 냈다. 그런데, 이 자본주의가 분명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한 최적의 시스템이라는 것에는 동의하겠는데, 이상하게 뭔가 속은 느낌, 이상하게 십일조와 감사헌금에 빠져, 점점 더 가진 것을 잃어가는 느낌, 그리고 그 대신 얻어지는 것은 갈수록 빈약해 진다는 허망함을 지울 수 없다. 그것이 자본주의가 우리에게 제대로 선물한 “상처” 아니겠는가?
농촌에서 도시로의 전이는 자급주의에서 교환으로, 자연순리에 대한 복종에서, 리모델링으로 표현할 수 있다. 그리고 그 도시는 인간이 가진 욕망으로 인해 끊없이 그 허영에 복종하게 한다. 그 뒤에서 음흉하고 웃고 있는 “자본주의”의 썩은 미소와 함께....
책 “상처받지 않을 권리”는 바로 이 자본주의가 인간에게 주는 상처들에 대해 이야기 한다. 도시화의 휘황찬란한 불빛 속에 부나비처럼 몰려드는 인간의 속성, 그리고 그 허영과 욕망을 이용하여, 끝없는 변태로 대중을 장악하고 노예화하는 자본주의의 탐욕을 보여주는 일련의 과정들을 보여주고 있다.
“1부 무의식의 투라우마를 찾아서”와 “2부 화려한 이곳에서 어떻게 살아 남을까?”에서는 작가 이상과 보를레르를 통해 도시라는 쇼윈도우 안에서의 현기증을 불러일으키는 욕망과 허영, 그리고 그 속에서 잠식당하는 인간, 권태와 소외로 추락하는 문학적 행로를 짐벨과 벤야민의 사회학적 이론으로 뒷받침하고 있으며, “3부 메트릭스는 우리 내면에 있다”와 “4부 건강한 노동을 선물하기”에서는 투르니에와 유하가 가진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적 감수성을 부르디외와 보드리야르로 감싸주고 있다. 이 구성, 제시와 대비, 문학과 철학 사회학을 통한 열거는, 이 책의 덕목으로 강조할 수 밖에 없는데, 왜냐하면, 이 까다로운 화두를, 특히 나같이 “경제”, “자본”이라는 단어에만도 머리가 아파오는 나에게는 마치 손쉽게 다가가기 편한 사례들기로 “문학”이 접목되었다는 이유에서다. 사례로 들고 있는 작가들의 이름, 아니 작품들, 특히 “날개”와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을 다시 만날 수 있는 기쁨은 매우 컸는데, 당시 읽었을 때와 또 다른 시각으로 같은 책을 통해 사회를 진단함으로해서, 통계와 이론이 아닌, 감수성으로도 얼마든지 경제를 논할 수 있다는 “통섭” 효과에 대해 재차 확인한 꼴이 된 셈이다.
백화점을 이용하는 허영, 상류사회와 동일시되고 싶은 하층계급의 욕망을 전제로, 그것을 이용하는 자본주의의 마켓팅, 그 곳에서 상처받는 사람들, 꼼짝달싹할 수 없게 만들어 놓은 노동의 결과, 미래의 행복이란 신기루를 꿈꾸며, 현재를 저당잡힌 노동의 수레, 결코 저항할 수 없는 “구별짓기”의 파편들, 이 왕성한 자본이 만들어 놓은 올가미 속에서 점차로 종속되어지는 층이 넓어져가고 있는 이 모순. 분명, 행복은 눈 앞에 있는데, 결국 “타자의 욕망”을 대신 충족시켜주는 이 “노동과 정신적인 궁핍”의 역사에 길들어져 가고 있는 상처들을 문학작품속에 나타난 그 정제된 묘사들을 화두로 삼아 재미있게 풀어 주었다.
그런데, 저자 후기에서도 현상은 제시하였으나, 대안을 피력하지 못함을 안스러워 했듯이, 이 자본주의가 쥐어 준 다중날의 칼, 종속되어 노예처럼 살던지, 아니면, 생산-소비 협동조합의 미래를 꿈꾸든지, 아니면, 쓸모없어진 전공에 의해 버려진 노숙자로 살든지, 어떤 선택이든 우리에게 주어 진 것은 자해용 칼날뿐이니, 올바른 선택이란 무엇인가 자문해 볼 필요가 있는 것 같다.
“....로빈슨은 알아버렸습니다.
자신의 삶이 초월적 목적이 아니라 내재적 목적이 있다는 것,
삶은 놀이의 주체이지 결코 노동의 주체가 아니라는 것,
나아가 오직 현재만이 긍정의 대상이라는 것을 ...
제 3부, 6. 허영, 내면 깊숙한 소외의 논리.. 본문 303p 중...”
그렇다. 이 칼날을 피하는 방법은, 호모루덴스, 놀이하는 인간으로써의 본분을 지켜보는 것일 수도 있다.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는 문구처럼, 어차피 자본가로 떵떵거리고 지낼 수 있는 자격은 애당초 잃어버린 지금, 적당한 타협이 필요할 뿐인데, 이 협상은 그들과 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자리매김이니, 노동을 놀이로 전환시켜 상징과 가치로 사물, 우리 현실을 아우르는 방법 밖에 없을 것이다. “내일일은 난 몰라요, 우리 주님..”으로 시작하는 찬송가처럼... 아, 물론, 이 “즐김”역시 자본가가 설치한 “보람” 이라는 덫을 피하는 것을 전제로 말이다. 그것이 양날의 칼, 날을 잡는 것이 아니라, 손잡이를 잡을 수 있는 지혜가 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