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그네 (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31
헤르타 뮐러 지음, 박경희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4월
평점 :
절판


  

정의는 없다. 우파든 좌파든, 서로 상대방에 대한 폭력의 양태는 모두 같다. 이념은 정반대인데, 자신들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다루는 방법은 동일한 이 아이러니는 절대로 변할 수 없다. 유태인 학살의 주범들도 수용소에 들어가면 어느덧 자신들이 만들어 놓은 방법에 의해 조롱당한다. 유태인역시 그들이 지금 가자지구에서 자행하고 있는 폭력을 들여다보면 더하면 더했지, 결코 인류애든 반성의 기미든 아무 것도 없다. 불쌍한 인본주의.
 

흑인 대통령이 정권을 잡더라도, 여전히 산타나모 수용소가 존재할 수 밖에 없는 것은, 이념은 개나발이고, 그 이념에 빌붙어 사는 기회주의와 배타주의만이 공공의 존재감을 갖기 때문이다. 갈수록, 더, 발전하는 세계를 둘러볼수록, 점차 공상과학만화에서나 볼 수 있었던 문명의 질이 현실화 되면 될수록, 상대적으로 아니, 절대적으로도 전혀 변함없는 도덕의 피아구별없이 자행되고 있는 폭력의 역사. 단지 이게 우울할 뿐이다.

그 기조에는 어떤 화해와 용서에도 지워지지 않는 집단기억이 있다. 어떤 가해자가 사과와 보상을 완벽하게 했다손 치더라도, 그건, 지엽적이다. 뇌 속에 숨어 있는 그 기억은 절대로 지워지지 않는다. 그런데 이 무한반복 되는 행위는 도대체 어떤 자만심으로부터 기인하는 가? 몇 백년전은 돌이키지 말기로 하자. 궁금한 것은, 적어도, 인본주의를 얘기하고, 삶을 얘기하며, 가치를 숭상한다는 계몽주의 이후의 역사로만 국한하기로 하자.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상의 진보와 함께 자행되었던 우리 인간의 퇴보적 행동, 야욕과 폭력이 계몽사상의 확산과 같은 질량으로 더 심화되고 있다는 것이 때때로 삶은 지독히도 꾸며진 (그저 시대에 따라 그 권력의 양태만 달라지는) 장미 한 송이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여전히 이게 우울할 뿐이다.


헤르타 뮐러의 소설책이 두 권 발행되었다는 뉴스에 망설인 것은, 어쩌면 이런 폭력의 역사에 대한 진부한 해석과 표현이 부담스러운 것일 수 있겠다. 노벨문학상이라는 타이틀, 2차대전, 전범, 수용소. 그 황량함을 다시 기억해 내어야 한다는 것은, 오랜 역사, 박해와 불균형의 결과로 얻은 피해의식이 유전형질로 변해 집단기억을 내려 받고 있는 내게도 상당히 불편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울했던 모양이다.


참전경험이라곤 전혀 없는 우리가 러시아인들에게는
히틀러가 저지른 범죄에 책임이 있는 독일인이었다.

소설 ‘숨그네’는 2차대전 종전을 앞두고 재빨리 노선을 바꾼 국가, 루마니아에 살던 독일인 가계의 17살 주인공이 우크라이나 수용소에서 5년간 지낸 일기장이다. 1945년 1월 15일 영화 15도의 추위가 기승을 부리던 새벽 3시 순찰대에 이끌러 기차를 타고, 수용소에 격리되고, 334명이 시체로 귀환한 그 곳에서, 강제노역과 굶주림, 같이 일상을 만들어 냈던 사람들을 소름끼치도록 아름다운 문장으로 묘사한 소설이다. 다분히 비인간적이며, 완장의 폭력에 길들여져야 하며, ‘배고픈 천사’로 대변되는 굶주림의 장소인 그 수용소, 작가가 영혼으로 키운 문장, 그 장미와 같이 아름다운 표현속에 빠져서 ‘메타포’가 주는 위대함에 가려진 그 수용소에 대한 집단기억의 재생이다. 그 때문에 몹시 우울할 수밖에 없는 소설이다.

숨그네는 무엇과도 견줄 수 없을 만큼 심한 숨결을 그네뛰게 한다.
눈을 올려 저 위로 조용한 여름솜, 구름의 뜨개질,
내 뇌는 바늘 끝에 하늘에 고정된 채 꿈틀거린다.
 

다시 고향으로 돌아 와 몇 십년이 지나도록 결코 지울 수 없는 고통들. 그 처참한 기억의 공간에서 서정시인처럼 일상들을 관조하던 그 시선과 작가의 독특한 표현들(설명을 통해 많은 단어들을 작가가 만들어 낸 조어들임을 알았다만)속에 숨어 있는 공포는 어쩔 수 없이, 결과를 뻔히 알고 있으면서도, 검은 포플라나무 심기 현장과 감자밭에서의 주인공이 죽음에 대한 공포에 이성을 잃고 동조한 것도 바로 이 아름다운 문장 때문이다. 밀린 급여를 받고 다시 인간으로 돌아가 치장을 하고, 성적 대상들을 찾고, 그리고 탕진하는, 귀향 후 암살을 당하는 간수나, 함께 시간을 보냈던 이웃이나 외면으로 지나칠 수 밖에 없었던 것은, 살아 있으되, 이미 죽은자들과의 동질의 고통으로 살아야 하는 생존자들의 아픔일 것이다. 이 때문에 더 더욱 우울하다.

당연히 솔제니친의 ‘수용소군도’와 ‘이반데니소비치의 하루’를 떠올리며 부담스러워 했던 소설읽기는 몇 장을 넘기면서, 문장에 취하고, 그 고통에 취하고, 그 수용소의 아름다움에 취했다. 마치 스톡홀름 증후군처럼 그렇게 길들여져 가는 삶, 지금의 현실에 대입해 봐도 여전히 똑같은 이 ‘길들어짐’. 부인해야 하는데, 이젠 '아니다'라고 강하게 반항해야 하는데, 소설 ‘숨그네’에서 읽을 수 있었던 이 ‘어찌할 수 없는 길들어짐과 굴복과 복종’의 미화외에는 여전히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오늘 내 삶이 질리도록 우울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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