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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생의 심장 가까이 ㅣ 암실문고
클라리시 리스펙토르 지음, 민승남 옮김 / 을유문화사 / 2022년 11월
평점 :
어떤 책은 첫문장에서부터 빠져들고 어떤 책은 책을 덮으며 빠져든다. '야생의 심장 가까이'는 후자에 속한다. 책의 서사는 선명하지 않다. 등장인물의 생각과 의도들을 따라가며 나는 그것을 짐작하고 느낄 뿐이다. 읽는 내내 알 것 같으면서도 정확히는 잘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곤 했다. 하지만 책의 마지막 장을 덮자 문장을 따라가는 동안 겹겹이 쌓아둔 주아나의 감정들이 갑자기 훅 밀려들어왔다. 만약 영화를 보았다면, 예술 영화를 보고 난 후 불이 켜진 극장을 빠져나오는 기분이라고 할까. 지금부터 책이 또다시 시작되는 느낌이다.
p.169
그를 만나기 전, 그녀는 늘 두 손을 내밀었으니, 불시에 받아들인 것들이 얼마나, 오, 얼마나 많았던가! 한 줄기 빛처럼, 작은 빛들의 소나기처럼 너무도 불시에...... 이제 그녀의 시간은 모두 그에게 주어졌고, 작은 얼음조각들로 쪼개졌다. 그녀는 그것들이 녹기 전에 재빨리 마셔 버려야 했다. 그러고는 전속력으로 달리라며 자신을 채찍질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시간만이 자유니까! 어서, 빨리 생각해, 어서, 빨리 너 자신을 찾아, 어서...... 끝났어! 이제는-얼음조각들이 든 쟁반은 나중에야 다시 나타난다. 그때 당신은 거기에 있다. 이미 뚝뚝 떨어지기 시작한 물방울들을 홀린 듯 바라보며.
p.175
'미루자, 그냥 미뤄.' 주아나는 생각을 멈추기 전에 그렇게 생각했다. 왜냐하면 마지막 얼음 조각이 녹았고, 이제 그녀는 슬프게도 행복한 여자가 되었으니까.
2부의 첫 장 <결혼>에서 나는 주아나에게 처음 반하게 되였다. 오타비우와의 결혼으로 인해 구속받는 자신의 삶을 못견뎌하며 '헤어져야지' 생각하면서도 옥타비우의 품에 머리를 기대며 행복을 느끼는 주아나를 이해했기 때문이다. 나에게는 주아나에게도 클라리시 리스펙토르에게도 마음이 통하는 지점이 되었던 것 같다.
주아나의 삶은 클라리시 리스펙토르와도 닮아있는 것 같다. 결국 오타비우와 헤어진 주아나처럼 외교관 부인의 삶을 포기하고 작가의 삶을 선택한 그녀. 글은 작가의 삶과 생각을 반영하고 있다는 것을 다시 한번 느낀다.
p.14
"아빠, 나 시 지었어요."
"제목이 뭔데?"
"'해와 나.'"그녀는 아주 잠깐뜸을 들이다가 시를 암송했다. "마당의 암탉들이 지렁이 두 마리를 먹었지만 나는 그 지렁이들을 보지 못했지."
"응? 해와 네가 그 시와 무슨 관계가 있니?"
그녀는 잠시 아버지를 쳐다보았다. 아버지는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아빠, 해는 지렁이들 위에 있고, 나는 그 시를 지었는데 그 지렁이를 보지 못했으니......"
완독 후 책을 훑어보며 앞의 문장들을 다시 읽으니 주아나도, 이 책도 너무나 알 것 같았다. 이보다 클라리시 리스펙토르에 대해 이해할 수 있을 문장들이 있을까. '모든 것을 보고 있는 해가 아니지만 나는 시를 짓고, 시를 짓는 나는 모든 것을 알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니 굳이 해석하는 것은 불필요하다'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이 책을 읽는 내내 나는 글자를 읽는다기보다는 누군가의 생각을 읽는 것 같았다. 주인공 '주아나'의 시선을 따라 그녀의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것 같았다. 사실 리뷰를 쓰는 게 어렵다. 분석해야 하는가? 이해해야 하는가? 책을 읽고 난 이후 이게 다 무슨 소용인가 싶었다. 참, 이상한 책이다. 느껴지는 것은 많은 것 같은데 글로 표현하기가 쉽지 않다.
클라리시 리스펙토르 책은 [달걀과 닭], [ G.H.에 따른 수난] 두권을 갖고 있지만 둘 다 완독하지 못했다. 책을 읽으며 매혹되었지만 작가의 의도를 파악하는 데에 나의 능력이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조금 미뤄두고 있었다. 그러나 이번에 작가의 초기작 [야생의 심장 가까이]를 읽으며, 특히 위의 문장들을 다시 읽으며 조금은 작가에 대해 알게 된 것 같다. 다시 클라리시 리스펙토르의 책을 펼쳐봐야겠다.
p.26
내 의식은 길을 잃었지만 상관없다. 나는 환각 속에서 가장 큰 평온을 발견하니까.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없다는 건 기이한 일이다. 너무 잘 아는 걸 말할 수가 없으니까. 무엇보다도 그걸 말하기가 두렵다. 말하려는 순간 내가 느끼는 걸 표현할 수 없을뿐더러, 내가 느끼는 것이 서서히 내가 말하는 것으로 변하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을 때에도, 내가 느끼는 것이 아니라 내가 말하는 것이 나를 행동으로 이끌곤 한다. 내가 누구인지 느낄 때, 그 느낌은 뇌의 꼭대기에, 입에-특히 혀에-, 팔의 살갗에 박히고, 또 내 몸을 관통하여 몸 속 깊숙한 곳에, 하지만 어디인지, 정확히 말할 수 없는 곳에 닿는다.
p.48
"점, 차원을 지니지 않은 점 하나가, 극단의 고독이라는 생각, 해 본 적 있어? 점은 심지어 스스로를 믿고 의지할 수도 없잖아. 보통 그 자신의 바깥에 있으니까."
p.78
"이상적인 인간이라는 건, 다른 사람들에게 더 가치 있는 존재를 뜻하는 게 아니야. 자기 안에서 더 가치 있는 존재를 뜻하는 거지. 내 말 이해하겠니? 주아나?"
p.121
무엇보다도, 그 여자는 삶을 이해한다. 삶을 이해하지 못할 만큼 지적이지 못하니까.
p.150
"감정과 말의 분리. 이미 그 점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있어. 가장 신기한 일은, 내가 무슨 말을 하려는 순간이 오면 내가 느끼는 걸 표현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내가 느꼈던 게 서서히 내가 말하는 걸로 변해 간다는 거야. 아니면 최소한 이렇게 말할 수는 있겠지. 나를 행동하게 만드는 건 내 느낌이 아니라 내 말들이라고. 그건 정말 확실하다고."
p.152
그는 그녀의 냉정함과 당당함이 필요했다. 그것과 함께라면, 그는 어렸을 때처럼 안전한 보호 속에서 거의 의기양양하게 이렇게 말할 수 있을 터였다: 그건 내탓이 아냐......
............그는 그녀와 함께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녀로부터 그 자신이 계속 살아가도 된다는 허락을 얻기 위해 그녀를 원했다. 그 자신을 넘어서서, 그의 과거를 넘어서서, 그가 비겁하게 저질렀으며 또한 비럽하게도 여전히 애착을 갖고 잇는 사소한 악행들을 넘어서서 살 수 있도록. 옽타비우는 주아나의 곁에서라면 계속 죄를 지을 수 있을 것 같았다.
p.181
"병자는 세상을 상상하고, 건강한 자는 세상을 갖죠." 주아나가 계속해서 말했다. "병자는 자신이 허약하다는 이유만으로 세상을 가질 수 없다고 생각하고, 건강한 자는 자신의 힘이 쓸모없다고 느끼죠."
p.292
그는 꽃이 주아나처럼, 거짓말을 할 때의 주아나처럼 커져가는 매력으로 자신을 침범해 오는 걸 느끼며 무력한 분노에 사로잡혔다: 그는 장미를 으스러뜨리고, 씹고, 파괴했다.
지금, 그녀를, 뭐라고 규정할 수 없는 그 얼굴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문득 사촌 이자벨의 정원으로 돌아가 그 해묵은 감정을 복원해 보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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