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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롱보다 몽롱 - 우리 여성 작가 12인의 이토록 사적인 술 이야기
허은실 외 지음 / 을유문화사 / 2021년 12월
평점 :
#영롱보다몽롱 #을유문화사 #에세이 #술 #도서협찬
생각해보니 법적으로 술을 마셔도 되는 20살 이후 친밀한 누군가와의 사적인 자리에는 늘 술이 있었다. 감정표현이 서툰 나는 술의 힘을 빌려 용기를 내기도 하고, 벌개진 얼굴로 친구들과 끝없는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대학교 신입생오리엔테션에서 처음 술을 마신 이후(물론 수능 100일전 엄마가 저녁식사를 하며 소주 한숟가락을 신생아 약 먹이듯 입에 털어넣어 준것은 예외다. 그것은 주술적 의미를 갖는 신성한 100일주였으므로) 술은 내 인생의 동반자가 되었다. 20대에는 알콜과 싸워서 누가 이기나하는 심정으로 술을 마셨고, 30대에는 육아에 힘든 동지들과 바쁜 일상의 틈을 가까스로 벌리고 만나서는, 서로의 한창때를 그리워하며 마셨다. 지금은 팬데믹과 바빠진 일상에 밤에 책을 읽으며, 뜨개를 하며, 영화를 보며 혼자 마신다. 이제 술은 나의 삶과 떨어뜨려 놓을 수 없다. 어쩌면 술은 나의 일상과 이상의 간극을 메우는 완충제일지도 모르겠다.
'영롱보다 몽롱'은 혼자 술을 마시는 밤, 자꾸만 펼치게 되는 책이었다. 책과 함께 하려니 자꾸만 테이블 맞은편에 누군가와 대화를 하며 술을 마시고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천천히 읽어가던 어느날인가는 '아 오늘은 술을 마시지 말아야지'라고 결심한 참이었는데도 책을 읽다가 갑자기 냉장고로 달려가 맥주캔을 꺼내오기도 하고, 와인을 한두잔 따르기도 하였다. 혼자 마시는 술도 즐거웠지만, 그래… 난 이렇게 누군가와 대화하는 것이 좋다라는 생각이 들어 마음이 말랑말랑해졌다. 이렇게 '영롱보다 몽롱'을 읽어가는 순간은 술자리에서 친구와 끝이 없는 대화를 하는 것과도 같았다.
눈이 많이 오던 날 읽었던 ‘꾸시시허' 허은실 작가님의 인생 술이야기는 그것을 읽어가며 내가 마시던 맥주와 찰떡이었다. 어린시절부터 술과 사람과 글이 함께한 인생이야기를 읽으며 나의 어린시절과 학생 시절이 떠올라 눈오는 창밖을 보았으니 말이다. 백세희 작가님의 아픈 기억과 혼자 마시는 술이 맛있음에 가슴 아프면서도 찡해지고 ,‘아 그래, 술은 쓰기도 하지……’ 라는 생각을 삼켰다. 다자이 오사무처럼 술로 할 수 있는 것은 모든 해보려하는 한은형 작가님에게 나도 그럴거라며 허공에 대고 '치얼스'를 외치기도 했다. 시를 마시는지 술을 마시는지 헷갈리도록 감상적이 되던 문정희 작가님의 글을 읽으며 그날 마신 맥주가 더 찌~인하게 느껴지고, 안마셔도 되는 술을 거절하는, 금주를 지지하는 이다혜 작가님의 생각에 박수를 보냈다. 시인에게 선물받은 '샤스 스플린'-슬픔,우울을 쫒아낸다는 뜻이라고 한다-으로 그 시인의 삶을 확인할 수 있었던 황인숙 작가님의 일화에 애잔해지고, 술을 못마시던 나희덕 작가님이 부정맥에 레드와인이 좋다는 말에 술을 마시게 되었다는 문장을 보곤 괜히 나도 와인 한잔을 마셨다. 신미나 작가님의 어린시절 한때를 함께했던, OB맥주를 마시던 수미언니의 인생 한 조각이 그렇게 쓸쓸하게 지나가버린 것에 마음이 공허해지고, 술로 인해 불쾌해지곤 하던 술자리로 인해 술을 피했지만 여전히 술에 대한 기대를 저버리지 않은 박소란 작가님의 -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 취하지 않는다는 것- 왠지 띵~ 울림이 있는 마지막 문장에 마음이 스르륵 풀려버렸다. 제주에 혼자 살고 술은 약하다는 글을 쓰셨던 이원하 작가님이 독주만은 끊지 못하겠다고, 목구멍이 타오르는 느낌 뒤 환생한 기분이라는 표현과 독주의 강렬함으로 과거의 기억을 지운다는 문장에 동감했다. 우다영 작가님의 술친구, 그 중 첫번째 술친구는 나와도 같아서 나의 어린시절 집의 풍경을 그려보게 되었다. 금주시즌이 되어서 주당시즌의 과거를 기억하며 술 밖에서 술 안을 바라보는 강혜빈 작가님의 시쓰는 마음과 술마시는 마음에 대해 가만히 귀기울이게 되었다.
책을 읽고나니 12명의 친구, 언니, 동생과 맘 속 깊은 이야기를 나눈 느낌이다. 전화통화나 메시지로는 전달할 수 없는 깊은 대화가 그리웠다.
술 예찬을 늘어놓으려니 누군가는 술의 효과를 빌린 관계가 진실하냐고 물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나의 경우는 함께 마신 술의 효과인지 그날의 분위기 때문인지, 보이지 않던 선이 지워지는 마음 때문에 그 자리에서도 그 이후에도 그들에게 진심을 담아는다고 자신있게 말할수 있다. 나는 진심을 보이고 싶지 않은 사람과는 술도 마시고 싶지 않으니까.
참, 이 책은 아껴가며 야금야금 읽었는데 타이밍 딱 맞게도 그 사이사이 드라마 ‘술 마시는 도시 여자들’을 함께 보았다. 고민이 한가득인 날 내 말을 밤새도록 들어줄 술친구, 기분이 너무나도 업되어서 상또라이가 되어도 그날의 내 모습은 가볍게 무시해 줄 술친구가 그립구나. 나도 여전히 친구들에게 그럴 수 있는데. 부디 올해는 친구들과 눈을 바라보며 술 한 잔 기울일 수 있는 날이 왔으면 좋겠다.
아, 책이야기를 써야하는데…… 나도 막 다른 여성작가들과 술과 문학과 인생과 철학이 담긴 이야기를 쓰고 싶은데 친구랑 술마시고 싶다는 이야기만 쓰고있다니. 이건 모두 술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