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구들 - 여성은 왜 원하는가
캐럴라인 냅 지음, 정지인 옮김 / 북하우스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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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41
많은 여성들의 마음속에 깔린 가장 주된 욕구는 아마 욕구에 대한 욕구일 것이다. 자신의 진짜 욕구가 무엇인지 있는 그대로 밝힐 수 있을만큼 충분히 안전하고 안정되었다고 느끼고 싶고, 그 욕구를 만족시킬 충분한 자격과 힘을 갖추었다고 느끼고 싶은 갈망 말이다.
P.128
나는 아버지에게는 직업이, 어머니에게는 취미가 있다고 생각하며 자랐다.

이 책을 읽으며 수많은 인덱스들을 붙였지만 내 뇌리에 깊이 남은건 위의 두 문장이다. 여성은 진짜로 갈망하는 것이 무엇인지 확신하지 못하고, 그리고 그것을 찾더라도 실현시키는 것을 주저하거나 포기하는 것이 자연스럽도록 학습된지도 모르겠다.

욕구라는 단어를 사전적으로 정의하면 ‘무엇을 얻거나 무슨 일을 하고자 바라는 일’이다. 인간이 무언가를 얻고자 하고 바라는 것은 자연스러운 삶의 태도이고 좋은 삶을 영위하고자 하는 의지일 것이다. 그러나 ‘욕구’라는 단어 앞에 ‘여성’이라는 단어를 채워 넣는 순간 욕구의 사전적 의미와 이미지는 퇴색되어 버린다. '여성의 욕구'는 쾌락, 탐닉이라는 단어와 슬며시 연결되고 그 단어의 꼬리를 물고 있는 것은 억제, 자제, 갈등, 수치심 등의 부정적인 단어들이다. 그리고 욕망에 대한 성취를 누리는 것이 쉽지 않을 거라는 예감에 사로잡히게 된다. 왜 이런 생각을 하게 되는 걸까?

우리는 생각해보아야 한다.
여성은 왜 원하는가?
여성의 진짜 욕구는 무엇일까?

[욕구들]에서 캐럴라인 냅은 거식증에 걸렸던 자신의 과거를 반추하며 여성의 욕구들에 대해 통찰한다. 그녀에게 거식증은 자기혐오, 슬픔에서 발생하는 모든 불안감을 해소시켜줄 실마리라는 잘못된 강박의 결과였다. 배에 움푹 들어간 굴곡이 생기고 스판덱스 레깅스의 무릎이 불룩 튀어나올 정도로 깡마른 다리는 자신의 수많은 욕구를 단 하나의 욕구로 대체시키고 그것을 외현화한 것이라 여겼다. 욕망의 대상을 문제가 아닌 해결책으로 여기는 착각에 빠져 있었다고 말하는 캐럴라인 냅의 솔직한 고백을 들으며 우리는 각자의 내면을 탐색하고 여성의 가치에 대해 고민하게 된다.

사회에서 요구하는 여성상은 어떤 모습일까.

여성에 대한 가치판단 기준이 아직 서지 않은 유아기에 읽은 동화는 남성과 여성의 특성을 확연히 다르게 그리고 있고, 여성은 외적인 아름다움을 갖추어야만 된다는 인식을 심어주었다. 선한 여성은 아름답고, 악한 여성은 끊임없이 아름다움을 탐내고 시기 질투한다.(신데렐라, 백설공주, 콩쥐팥쥐) 결핍이 있는 여성은 사랑받기 위해 자신의 힘으로 적극적으로 노력하기보다는 무언가를 포기한다.(인어공주) 그리고 대부분의 동화에서 수동적이고 힘이 없지만 아름다움을 갖고 있는 여성은 남성에 의해 위험에서 구출된다.

T.V나 영화, 또는 책에서 보게되는 여성은 어떠한가. 욕망을 갖고 표현하고 적극적으로 행동에 옮기는 여성은 한정과 제한이라는 벽에 수도 없이 부딪히고 온갖 시련을 겪어낸다. 영상과 문자로 형상화된 구체적인 표현을 바라보게 되면 욕구와 그에 따른 책임, 가능성의 범위와 행동의 범위, 사회적 허용과 도덕적 잣대가 남성과 여성에게 각기 다르게 적용되는 것을 알 수 있다. 남성을 가리키는 주체성, 독립성, 권력은 여성에게서 찾아보기 힘들다. 시련을 이겨내는 것이 여성성을 파괴하는 것은 아닐까 의문이 생긴다.

오랜 세월 동안 이렇듯 여성을 대상화하고 부정적 관념들의 지배를 받고 자란 것이다. 따라서 사회에서의 여성상은 축소될 수밖에 없고, 여성의 몸에는 이런 문화가 기입되어 자신의 욕구에 대한 통제와 억압을 하는 것을 내면화하게 된다. 그리고 여성은 한계와 제한으로 점철된 삶 속에서 감정적 허기를 느끼게 되고 공허함을 채울 무언가를 원하게 된다.

그러나 여성은 자신의 욕구를 향한 권리의식에 확신을 갖지 못하고 불안감을 느낀다. 육체와 영혼의 즐거움을 찾는 것에 소극적이 되고 그것을 인정하고 누리는 데에 어려움을 느낀다. 그때 여성은 자신이 실현시킬 수 있는 가짜 욕구를 통해 돌파구를 찾으려 한다. 날씬하고 아름다운 몸의 이미지에 집착하게 되고, 쇼핑중독에 빠지고, 존중받지 못하는 이성과의 관계에 빠지게 된다. 그럼으로써 여성은 허기를 결코 채울 수 없으리라는 두려움을 느끼고 자기혐오와 슬픔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 묻는다. 이것이 진정으로 원했던 욕구인가? 사랑, 기쁨, 열정에서 중핵을 뺀 껍데기뿐인 충동 아닐까.

우리는 자신의 내면을 탐색하고 자신의 감정적 허기로 인한 진정한 욕구가 무엇인지를 이해하고 인정해야 한다. [욕구들]에서 인간 허기의 근원은 사랑이라고 말한다. 사랑받고자 하는 마음은 우리를 끊임없이 욕망하게 한다. 욕구 자체가 아니라 본질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아는 것은 그것을 온전히 실현하고 충만해짐으로 가는 첫걸음일 것이다.

[욕구들]의 마지막 장을 덮으며 본인의 내면을 응시하는 캐럴라인 냅의 고뇌가 느껴지고, 그녀가 투쟁하는 삶을 통해 얻은 통찰과 감정을 깊이 공유했다고 느낀다. 캐럴라인 냅과 함께 어둡고 긴 터널을 통과한 우리는 내면적 허기를 채운 충만한 미래를 꾸려가려는 의지를 다잡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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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 끝의 온실
김초엽 지음 / 자이언트북스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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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미래에는 문어를 닮은 외계인이나 광포한 미지의 생물체가 지구를 습격할지도 모른다는 공포감이 있었다. 넓고 넓은 우주의 어딘가에는 다른 생명체도 존재하고 있을 거라고, 분명 그들이 우리를 찾아올 것이라는 막연한 두려움과 호기심을 품었다. 밑도 끝도 없는 지구종말에 대한 불안감을 느끼던 세기말에도 그것의 원인은 외부에서 오는 적이라고 생각했다. 인간이 그것을 자초하지 않을 것이라고 굳게 믿었다.

어른이 된 지금, 2021년의 지구는 어린 시절 품은 두려움의 씨앗들과 상관없는 이유들로 인해 위기에 봉착해 있다. 기후위기로 세계 곳곳은 삶의 유지를 고민함을 넘어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나들게 되었다. 과학의 발전과 생활의 편의를 위해 생산된 물건들은 쉽게 쓰고 버려져 삶의 터전을 황폐하게 만들고 있다. 바이러스의 창궐은 질병의 고통과 죽음에 대한 공포로 인해 사람들의 연대마저 흔들리게 하고 있다. 혼란한 시기를 지나며 우리는 원인보다는 현상에만 집중하게 되었다. 평화와 연대를 모색하기보다는 지금 현재의 안락함에만 몰두하게 되었다. 우리는 스스로에게 물어야 할 것이다. 이 혼란의 원인은 무엇인가, 이 혼란을 이겨내기 위해 어떤 노력들을 해야 할까? [지구 끝의 온실]은 그에 대한 해답을 주는 책이었다.

[지구 끝의 온실]은 21세기 중반에 일어난 더스트 폴 전후의 혼란한 상황을 살아가는 아마라와 나오미의 이야기, 22세기 초반 세계 재건이 이루어진 후 더스트생태연구소에서 근무하는 아영의 이야기가 교차되며 서술된다. 과거 속 나오미와 아마라의 생존을 위한 여정을 따라가며 황폐한 세계에서 인간이 얼마나 잔인해질 수 있는지를 생각하게 된다. 그 세계는 생존을 위해 건설된 돔이 선택된 자에게만 열려있고, 한정된 자원을 차지하기 위해 인간의 생명조차 사소한 것이 되는 세계이다. 생존이 최고의 이념이 되는 곳이다. 이런 잔혹한 세계를 사는 아마라와 나오미는 약탈과 살인을 일삼는 권력자들에게 쫓기고 달아나는 중 프림빌리지라는 마을을 만난다. 온실을 품고 있는 그곳은 암울한 세계에서 만난 인간답게 사는 곳이었다.

22세기 초, 현재에는 모스바나 이상증식이 일어난 해월을 방문한 아영이 모스바나의 정체를 연구하는 과정을 그린다. 모스바나는 독성을 지닌 식물이라 위험하고 강한 번식력으로 다른 식물들에게도 피해를 주어서 한동안 이롭지 않은 식물이라 여겨졌다. 하지만 과거를 거슬러 모스바나의 시초를 찾고 연구를 해보니 더스트를 응집시켜 증식을 막는, 종말에 다다른 세상을 구한 식물이었다. 아영은 모스바나의 비밀들을 밝혀내며 과거와 현재를 연결한다.

책의 주요한 모티프인 모스바나는 끈질긴 생명력과 번식력으로 다른 생명체를 위협하는 식물이다. 그러나 그와 모순되게도 더스트를 줄이는데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인간의 생존을 위해서는 꼭 필요한 식물이다. 이런 양가적인 측면은 위기에 처한 인간과도 많은 부분 겹쳐 보인다. 위기를 만든 존재이지만 그 상황을 타계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존재, 생존을 위해 다른 사람의 것을 빼앗아야 할 상황을 필연이라고 느끼지만 타인의 도움 없이 혼자서 세상을 살아갈 수는 없는 존재이다.

왜 식물에게서 희망을 발견하게 될까 생각해 보았다. 식물이란 이해관계나 이기심을 뺀 생명체가 아닐까. 이기심이나 탐욕과 같은 다른 어떠한 관념 부여도 하지 않고 생명을 유지하는 존재가 아닐까. 그래서인지 마지막, 온실을 사이에 둔 지수와 레이첼의 아무 계산 없이 느끼는 서로를 향한 따뜻한 감정은 인간의 연대야말로 가장 큰 가치가 될 것이라는 깨달음을 준다. 인간들에 의해 더스트 시대가 시작되었고 프림빌리지가 파괴되었지만 다정함과 따뜻함을 품은 연대의 힘을 가진 우리에게는 아직 희망이 있음을 느끼게 한다.

우리에게 공포감을 주는 소설 속의 디스토피아도 등장인물들에게는 익숙한 배경일지도 모른다. 이 세계를 마주하지 않기 위해 우리는 현재 우리가 야기한 불편한 진실을 대면하고 앞으로의 삶에 어떤 가치를 첫 번째로 두어야 할지 고민해야 한다. 이로부터 인간은 스스로를 지킬 것이라는 어린 시절의 믿음, 그 믿음이 진실에 점점 더 가까워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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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과 나의 자서전 - 김혜진 소설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24
김혜진 지음 / 현대문학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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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진 작가의 <불과 나의 자서전>을 읽으며 나의 어린 시절을 떠올렸다. 아빠의 사업이 어려워지면서 우리는 여러번 이사를 다녔다. 길을 사이에 두고 이사를 간다는, 그 의미를 알지 못하는 나와 동생들은 그저 뛰어노는 것만으로도 즐거웠고 문 밖으로 나오면 친구들을 만날수 있다는 사실로도 행복했었다. 하지만 기억을 더듬다보면 그런 추억과 상반되는 장면들이 여러가지 떠오른다. 책을 읽고 어린시절을 반추하는 나의 목구멍에서 왠지 모를 쓴맛이 느껴진다. 어른이 된 지금의 나는 행복했던 어린 시절의 뒷편을 바라보게 되었다. 잊고있던 나의 어린시절을 생각하며 어린 시절부터 보고 듣고 느껴서 내 안에 자리 잡은 이쪽과 저쪽을 나누는 경계의 기준이 무엇인지 감지했다. 어른이 되며 개인의 능력이나 노력을 경제력에 빗대어 판단하려는 속물스러움을 정면으로 마주했다. 사람 간의 관계에서 조장되는 편 가르기에 다수의 편에 서려는 옹졸함을 깨달았다.

<불과 나의 자서전>의 주인공 최홍이 주해와 수아를 만나며 부모님이 그토록 벗어나려 했던 남일동의 본모습을 마주하는 것을, 남일동 안에서 희망을 찾으려는 주해의 모습을, 주해와의 교류를 통해 회사 내 왕따 문제로 괴롭힘을 당한 아픔을 극복하려는 최홍의 의지가 보이는 것을 마음 졸이며 지켜보았다. 결코 바뀌지 않을 거라 생각했던 것들에 개인의 노력이라는 불씨가 영향력을 발휘하는 것에 감동했다. 터무니없이 작다고 생각한 개인의 노력들이 이쪽과 저쪽을 나누는 경계를 삭제하는 하나의 가능성이라는 희망을 가졌다. 그 희망을 마주하고 나니 어쩌면 모든 것에 대해 체념하며 살았던 우리의 태도가 그 경계를 만들어 낸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간의 본질을 눈에 보이는 것들로 대상화하여 가치 판단하고 그에 따른 경계를 만들어 철저하게 저쪽 편의 그들과 구분 지으려는 마음. 그것은 다수에 소속되어 낙오되지 않으려는 근원적 불안감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그런 것이라면 주해의 노력과 같은 작은 불씨가 큰 불로 번져서 연대의 힘을 모두가 느끼게 된다면 극복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결국 모든 노력들이 실패로 돌아가고 다시 남일동 골목에 쓰레기가 버려진 것을 보고 현실의 냉혹함에 좌절감이 느껴졌다. 또한 최홍이 과거의 상처를 극복하지 못했고 본인이 경험했음에도 경계선 건너편의 불안과 욕망을 인정하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는 것에 왠지 모를 패배감도 느껴졌다. 그런 최홍에게 ‘불’은 남과 다르지 않은 자신에 대한 분노의 표출이자 경계의 소멸을 간절히 바라는 의지의 표현 도구였다.

나의 인생 속 중첩된 기억들은 안정감이 세상살이의 최고 덕목이라는 깨달음을 주었다. 아이를 키우는 어른인 나 역시 집에 대한 욕망은 불안감 없이 잘 살아보고자 하는 의지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동안 쌓아온 것들의 가치를 폄하하고 싶지 않다는 소망, 그것을 가시적인 효과로 보여줄 수 있는 방법 중 하나가 내가 가진 집일 거란 생각, 아이에게 가난을 물려주고 싶지 않다는 바람을 버릴 수는 없다. 그러나 친구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책을 읽고 아이가 커가는 모습을 보면서 개인의 행복을 규정짓는 것이 내가 가진 것, 나의 안정감만이 아니라는 것을 배우고 있다. 최홍이 주해와 수아를 만나 자신의 한계를 발견하고 불을 통해 현실을 직시했듯이 나 역시 나의 의식이 나만의 행복을 추구하는 일에만 잠식하지 않도록 삶의 기준을 확고하게 세워야겠다는 다짐을 한다.

내게 <불과 나의 자서전>이란 책은 마치 주인공 최홍의 ‘불’과 같은 의미로 다가왔다. 알지만 외면하고 싶던 생각과 행동을 곰곰이 떠올려보았다. 옳지 않다고 생각되었던 것들, 부끄러운 것들의 발화를 통해 더 깊이 삶의 가치들에 대해 고민하게 되었다. 나의 어린 시절을 떠올렸을 때 골목과 산으로 뛰어다니며 친구들과 깔깔거리며 놀았던 기억만 간직하고 싶다. 조금 더 나이가 들어 내 인생을 가로지르는 자서전을 쓰게 될 때 내 인생은 경계와 분할이 없는 가치 있는 삶을 살았다고 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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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카메론 프로젝트 - 팬데믹 시대를 건너는 29개의 이야기
빅터 라발 외 지음, 정해영 옮김 / 인플루엔셜(주)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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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이 순간 코로나바이러스로 인한 수도권거리두기를 4단계로 격상한다는 속보가 뜨고 있다. 3학년 아들은 원격으로 학교 수업을 하는 중이고 아마도 다음주부터는 1학년 딸도 원격수업을 할 것이다. 다시 집안에 격리된 일상을 보내야하는 것인가. 최근 4차 대유행 조짐이 보여서 불안하더니 매일 1000명이 넘는 신규확진자 소식에 이제 다시 공포에 떨고 있다. 백신접종이 순차적으로 이루어지고 있고 어느 정도 바이러스 유행도 잡히고 있는 분위기라서 7월이 되면 외출도 자유로워질거라 예상하고 친구들과 오랫만에 모임을 갖기로 했었다. 희망을 갖는다는 것이 이렇게 잔인한 일이었던가 생각한다. 시간이 지나며 무뎌졌던 바이러스에 대한 경각심으로 인해 마음가짐이 달라져서인지, 좋아질 거란 희망이 깨져버렸기 때문인지 다시 집안으로 대피해야하는 이 상황에 깊은 우울감이 느껴진다. 처음 바이러스가 유행했던 작년초에 비해 더 비극으로 치닫고 있는 느낌이다.

10여년 전쯤 모임에서 만난 분의 닉네임이 '데카메론'이었다. 데카메론이란 제목은 학교에서 배웠던 희미한 기억만 갖고 있던 때라 왜 그런 닉네임을 쓰셨는지 궁금했었다. 정확히는 기억나지 않지만 그 분은 그 책을 읽고 굉장한 감동을 받았다고 하셨다. 서로 이야기를 나누며 위험상황에서 격리를 결정한 사람들이 그 상황을 이겨내고 희망을 찾는 책이라는, 쉽고 재밌고 유쾌하고 야하지만 이야기를 통해 전달되는 메세지는 가볍지 않다고 했던 기억이 난다.

팬데믹 상황에서 카뮈의 '페스트'와 함께 관심을 끄는 책이 있는데 보카치오의 '데카메론'이다. 페스트로 인해 지금과 같은 팬데믹 상황에서 격리된 젊은이들이 서로 재미있는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씌여진 책이다. 나는 아직 보카치오의 데카메론을 읽지 않았다. 그러나 ‘데카메론 프로젝트'를 읽으며 왜 이야기의 힘이 대단한지를 알게된 것 같다. 360여 페이지에 담긴 29개의 이야기. 사실 나는 여러 소설가들이 참여했다는 사실 외에도 '데카메론'이라는 단어에 꽂혀서 왠지 무언가 심오한 이야기들이 담겨 있을 줄 알았다. 책을 읽으며 '뭐야. 이게 끝이야?'하는 이야기들이 여러편 있다는 사실을 고백한다. 왜 그랬을까 생각해보았다. 아마도 지난 1년 반동안 내가 경험한 일상이 그려진, 지금의 우리에겐 너무 평범한 하루, 감정, 사건들이기 때문일 것이다. 마스크를 쓰지 않은 사람을 경멸의 시선으로 바라보고 피해 다니고, 외출을 하고 싶은 욕망을 갖고, 또 오랜 기간 봉쇄조치로 인한 감금에 비슷한 생활을 하다가 밖으로 나와 적응하려고 애쓰는 모습이나, 바이러스 감염으로 이웃이 사망하는 사건이라던가, 아이가 아파도 병원에 가야할지 말아야할지 고민하는 모습이라던가, 개의 산책은 가능하나 아이의 산책은 불가해서 tv시청을 허락하는 이야기라던가, 교도소에서 감염된 사람이 격리시설로 들어가 치료를 받는 이야기라던가, 보건시설에서 나온 직원을 강도로 생각하는 노인이라던가(직원은 노인의 스킨십에 격렬히 저항함 ㅋ), 봉쇄기간 중 임시방편으로 만들어 먹던 아이스아이스크림과 그것으로 오래된 불화를 깨버리는 일이라던가, 개를 산책시키는 것은 용인하는 봉쇄조치 하에서 개를 대여하는 사업을 한다던가.

물론 데카메론의 이야기와 비슷한 액자형 소설도, 팬데믹과 큰 관련이 없는 소설도 있었다. 외계인이 (격리중인)지구인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소설(애트우드의 참을성 없는 그리젤다), 환상을 갖게된 여인을 찾고 만나게 된 소설(빨간 가방을 든 여인), 분별 있는 살인을 저지른 여인들 이야기(분별 있는 여자들) 등.

책을 덮고는 이 이야기를 팬데믹이 훨씬 지난 시기에 읽으면 어떤 책이라는 생각을 할까 하는 의문이 생겼다. 14세기 페스트가 유행하던 시절 쓰여진 보카치오의 '데카메론'을 바라보듯 이 글들을 보게 될까? 기이한 이야기? 어처구니 없지만 유쾌한 이야기? 상상력이 풍부한 이야기? 라는 생각이 들까? 지금 우리에게 또는 주변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이런 일들이 언젠가는 '아 그 시절에 이런 일들도 있었지.'라는 생각에 허탈한 웃음이 나올수도 있을테고, 지금의 일을 돌아보며 자조의 메세지를 얻을수도 있을것 같다. 그렇지만 어떤 방향으로 이 이야기들을 바라본다고 해도 이야기의 힘이 크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지금의 우리에게는 나와 비슷한 사람들의 일상과 감정을 공유하며 마음의 안정을 얻는 의미가 될 수도 있고, 결국 희망을 갖아야 한다는 의미가 될 수도 있고, 이후의 누군가에게는 지금 현재의 일들을 바라보며 혼란 상황에서 인간과 사회에 대한 지혜나 진실을 찾아볼 수도 있을 것이다.

책을 덮으며 나는 이제는 일상화되었을 지라도, 사실은 혼란한 이 시기가 이야기가 되었다는 사실이 좋았다. 감정이나 행동들이 구체화되어 확장해서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일까. 지금은 어쩌면 나의 일상에 대한 불평이나 우울감에 대해 두리뭉실하게 이야기 하는 것이 누군가와 하는 대화의 주된 내용일텐데 그 감정들이 구체화 된 이 이야기들은 내 감정에 형태를 부여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인지 책을 읽는 나는 책과의 대화, 또는 교류를 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리브카 갈첸의 '데카메론' 서평에서 한 문장을 가져와 본다.

어려운 시기에 소설을 읽는 것은 그 시기를 이해하는 방식이자 그 시기를 끈기 있게 버텨내는 방식이기도 하다.

* 이 포스팅은 ‘인플루엔셜’에서 도서를 제공 받아 작성되었습니다.

#데카메론프로젝트 #소설추천 #인플루엔셜 @in__fic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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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개의 나 - 세르주 갱스부르와 제인 버킨, 그 사랑의 기억
베로니크 모르테뉴 지음, 이현희 옮김 / 을유문화사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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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어느 겨울보다도 더 추운 것 같은 올해 겨울, 열정보다는 냉정을 유지해야하는 지금, 이 책을 만나면 단숨에 읽어버릴 것 같았다. 한 시대를 대표하는 예술과 문화의 아이콘이었던 세르주 갱스부르와 제인 버킨의 이야기는 내 가슴을 뜨겁게 해줄 것 같았고, 억눌린 일상과 권태로운 하루하루에 자극을 줄 것 같았다. 어쩌면 올 해의 마지막에 무언가를 결심하게 만들어 줄 신호탄이 될 책이 될지도 모르겠다는. 그런데 생각보다 술술 읽지는 못했는데 내가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그들이 사실은 어디선가 들은 소개글과 이름뿐이었다는 생각 때문이다. 인터넷 검색창에 그들의 사진과 작품들을 검색해보고, 유튜브에 영상들을 찾아보다보니 일주일이 넘게 책을 잡고 있었나보다. 그리고 난 지난 일주일 동안 그들에게 빠져 지냈다.

둘은 너무 달랐다. 세르즈 갱스부르는 전쟁을 겪은 유대인이었으며 나이도 많았고 외모도 잘생긴 편이 아니었다. 예술적 재능과 열정은 넘쳤으나 늘 담배와 술, 여자가 끊이지 않는 인생을 살았다. 제인 버킨은 배우인 어머니와 군인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상류층의 영국 아가씨였고 어리고 꾸밈이 없는 성격에 가족을 지킬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렇지만 그 둘의 다름은 서로의 재능과 매력을 끌어오게 하고 증폭시켜 그들의 아름다움을 최대로 이끌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들도 그것을 알았던 것 같다. 서로에게 이끌리는만큼 서로가 필요한 존재라는 걸. 그 시절의 이야기를 책을 따라 읽다보면 화려하지만 어쩐지 우울하고 괴상한 일들이 많지만 그 시절도 그들만의 무언가를 이루어가는 과정들로 차곡차곡 쌓여가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들이 함께한 시간동안 서로에게 자신을 더 빛나게 해줄 조력자가 되고 안식처가 되어 주었지만 동시에 타오르는 불꽃처럼 뜨겁고 불안했다.

둘은 12년이 지나 헤어졌고,(세르주 갱스부르의 기행들로인해! 나같으면 절대 12년을 못버텼을...) 세르주 갱스부르는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지만 제인 버킨은 그와 늘 함께 한 듯한 느낌이다. 일흔살이 넘은 제인 버킨이 세르주 갱스부르를 회상할 때는 너무나 편안해 보인다. 그를 기억하는 것이 곧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는 것이므로. 대중의 관심에 노출된 화려한 삶이고 예술과 광기가 어울어져 상처를 주기도 했지만 서로의 삶을 관통하는 그들의 사랑과 열정에 경외의 마음도 느껴진다.

나는 연예인을 열렬하게 좋아해 본 적도 없고 가까운 이가 아닌 누군가의 삶을 깊게 궁금해 해본 적이 없어서 이 책을 읽기 전에는 그들의 삶과 얼마나 가까워질 수 있을지 가늠하지 못했다. 문자로 전달 되는 그들의 삶에 적극적으로 공감할 수 있을지. 그러나 책을 읽어갈수록 그들의 말과 행동이 이해가 되었고, 그 말과 행동을 하는 그들의 음악과 영화들이 궁금했고 찾아보며 빠져들었으며, 그 두 사람의 인생에 대해 먼발치에서나마 바라보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은밀한 사생활까지도.
그리고 책을 덮으며 이들처럼 인생의 한 지점을 강렬하게 각인시키는 한 때, 그리고 함께 한 누군가가 있다면 나이가 들어 나의 뒤를 회상해 볼 때 얼마나 행복할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들의 예술적 재능이나 풍부한 감정들이 내겐 없다 해도. 그런 한 때를 지나 온 그들의 지나온 세월은 시간이 지났어도 찬란히 빛나고 있다는 느낌이 가득하다.

책에 오자도 몇개 발견했고 글의 흐름과 관계없는 뜬금없는 문장에 작가의 의도가 궁금한 적도 몇번 있었다. 그렇지만 이런 류의 책은 처음 읽었고 대중문화에 대한 숨겨진 이야기와 음악들에 폭 빠져 지낸 일주일은 간접적이었만 참 격렬한 한 때를 보낸 듯한 느낌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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