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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 동물원
켄 리우 지음, 장성주 옮김 / 황금가지 / 2018년 12월
평점 :
단편 소설집이라고 생각해서 가벼운 마음으로 책을 읽기 시작했었습니다. 하지만 각 단편의 이야기들에서는 작가의 깊은 내공이 느껴졌고, 중요한 의미들이 부여되어 있었습니다. 결코 가벼운 소설 단편선이 아니었어요.
역사와 일상, 미래사회 그리고 SF의 콜라보. 특히 그 중에서도 역사 관련 이야기들이 흥미롭게 느껴졌습니다. 확실히 그 역사를 잘 안다면 더 흥미로웠겠지만, 아니더라도 이야기를 읽는 데는 큰 문제가 되지는 않았습니다. 우리의 역사와 겹쳐보이는 이야기들도 많았고요. 특히나 731부대를 소재로 한 소설은 우리에게도 의미하는 바가 크다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책을 받았던 그 때보다, 지금 읽어서 더 의미가 크게 와닿았다는 생각도 들어요.
이 책에 나오는 14편의 단편 중 주관적인 베스트 목록을 꼽아보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1위 ) 역사에 종지부를 찍은 사람들
멀지 않은 미래, 양자 역학을 활용한 방법으로 선택된 사람들이 과거를 목격하고 올 수 있게 됩니다. 이 사람들이 목격하고 오는 것은 바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731 부대의 모습. 하지만 이 목격은 단 한 번, 그 선택된 사람만이 가능하기 때문에 기록이 될 수도 없으며, 목격 자체가 증거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무엇을 진실로 보아야 하는 것인가를 중점으로 여러 사람의 인터뷰가 진행이 되는데요. 이 작품에서 나오는 731 부대의 희생자들은 중국인이지만, 중국 대신 한국이라는 단어를 넣어도 무방하다 싶을 만큼 우리가 겪어왔던 고통과 다르지 않았답니다. 역사를 부정하는 사람들의 행태도 비슷했구요.
광복절이 다가오는 이 시점에, 특히나 요즘과 같은 시국에 읽어서 더 의미가 새롭게 느껴졌던 책이었습니다. 이 책의 여러 단편 중에서 꼭 한 편만 읽어야 한다면 이 작품을 권해드리고 싶습니다.
2위 ) 천생연분
인공지능 시스템에 의해서 조종당하는 사람들의 이야기. 이 작품을 읽기 전에 <그녀(Her)>와 <트랜센던스 (Transcendence)>를 다루었던 <방구석 1열>을 앞서 보았기 때문에 좀 더 흥미롭게 읽었을 수도 있습니다. 예전 다른 영화들에서는 인공지능 로봇들이 지구를 지배하는 것이 다소 허무맹랑하게 느껴졌지만, 이 작품에서 나오듯 인간의 감정과 생각을 지배하는 정도는 멀지 않은 미래에 충분히 가능할 수도 있겠구나 생각하니 조금 소름돋기도 했습니다. 인공지능까지는 아니더라도 우리는 지금도 많은 정보와 비밀들을 스마트폰에 담고 있으니, 불가능한 모습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3위) 종이 동물원
이 책에서 처음 읽었던 단편. 가볍고 읽기 쉬운 단편부터 읽기를 원하신다면 단연 <종이 동물원>을 먼저 추천해드립니다. 처음에는 종이 동물들이 움직이는 것을 상상하며 읽으니, 이 책이 판타지인가 꿈인가 싶기도 했지만요. 어머니의 사랑을 느낄 수 있었던 작품. 전체 작품 중에서 가장 이해하기도 쉽고, 감동적입니다.
4위 ) 파(波)
인류의 새로운 삶의 터전을 마련하기 위해 떠난 우주선에, 늙지 않고 죽지 않는 바이러스가 제공됩니다. 우주선에 타고 있는 성인 남녀는 이 바이러스를 자신들이 받아들일지, 아니면 자신들은 인간으로서 생을 마감하고, 자녀들에게 이것을 넘길지 고민합니다. 결국 성인 남녀는 각각 다른 선택을 하게 되는데요. 이후 제2의 행성에 도착하고 나니, 이제는 영생을 넘어, 기계인간으로 다시 한 번 시대의 변화가 이루어지죠. 영생과 인간의 의미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던 작품. 어쩐지 <은하철도 999>라는 작품도 떠올랐습니다. 과연 이런 상황이 오게 되면 우리는 영생을 택하게 될까요?
기본적으로는 SF 소설이라서 그런지 몇 몇 작품들은 이해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끝까지 다 읽고나서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읽은 단편들도 있었죠. 읽으면서 느꼈던 것은, 이 책은 한 문장 한 문장 곱씹으며 읽어야 할 소설이라는 것. 속독으로 휙휙 읽다가는 이야기의 흐름을 제대로 놓칠 수도 있는 책이었어요. 문장 문장마다 의미가 깃들어 있는 책이니, 꼭 천천히 정독해서 읽으시기를 추천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