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번 포스팅의 마지막 부분에서 과학자들이 전파 망원경으로 ‘우주 배경 복사의 세기‘를 관측하고 정밀 분석한 결과 우주 배경 복사에 약간의 비대칭성이 드러났다는 얘기를 했었다. 그런데 여기에 ‘우리 은하수 은하가 자신이 속해 있는 국부 은하군의 다른 은하들과 함께 처녀자리 은하단 방향으로 초속 600km 이상의 속력으로 달려간다‘(p.511)는 가정을 덧붙이면 비대칭성의 문제를 깔끔하게 해결할 수 있다고 했었다. (솔직히 이 부분은 대략적인 글의 맥락만 이해했을 뿐이다. 본문의 내용이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지만 최대한 이해하려 애써볼 뿐이다.)

아무튼, 이러한 가정에 뿌리를 두고 오늘 포스팅에선 우리 은하가 처녀자리 은하단으로 돌진하는 이유에 대한 설명부터 살펴보며 시작한다.

왜 우리 은하는 처녀자리 은하단으로 돌진하고 있을까? 우주 배경 복사를 고공에서 관측한 조지 스무트George Smoot와 그의 동료들은 처녀자리 은하단의 중력 작용으로 우리 은하수 은하가 이 은하단의 중심으로 빨려 들어가는 중이라는 제안을 내놓았다. - P511

스무트는 그 은하단 내부에 여태껏 알려진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수의 은하들이 존재할 것으로 예상했으며, 이 은하단이 차지한 공간 역시 20억 광년을 가로지르는 방대한 규모라고 밝혔다. - P511

우주의 탄생 초기에 물질 분포의 비균질성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자라서 지금의 처녀자리 초은하단 정도의 질량을 끌어 모으기에는 우주의 나이가 충분하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주 배경 복사의 관측 결과는 처녀자리 초은하단에 그렇게 거대한 양의 물질이 몰려 있어야만 하는 것으로 해석됐던 것이다. - P512

따라서 스무트는 대폭발 당시 우주의 물질 분포에는 상당한 수준의 비균질성이 있었을 것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비록 그가 수행한 우주 배경 복사의 고공 관측 결과가 자신의 예상에 걸맞은 수준의 비균질성을 보이지 않았지만 처녀자리 초은하단의 질량으로부터 그는 우주 초기의 물질 분포가 심하게 불균일했다는 결론에 도달할 수 있었던 것이다. - P512

완전 대칭인 배경 복사장 안에서 관측자가 움직인다면, 운동 방향에서 오는 빛은 청색 이동을 일으키고 반대 방향에서 오는 빛은 적색 이동을 할 것이다. 즉 우주 배경 복사가 관측자의 후방보다 전방에서 약간 더 밝게 보일 것이다. - P512

또한 밝기의 차이는 속력에 비례할 것이다. 밝기 분포의 이러한 비대칭 성분을 우리는 쌍극자성분이라고 부른다. 스무트의 우주 배경 복사 관측에서 쌍극자 성분이 검출됐으며, 이것을 이용해 우리 은하수 은하의 운동방향과 속력을 결정할 수 있었다. 운동의 방향은 처녀자리 쪽이었고 처녀자리 초은하단의 질량은 속력에서 가늠할 수 있었다. - P512

은하수 은하가 처녀자리 쪽으로 움직인다는 사실만을 놓고 볼 때 처녀자리 초은하단에 막대한 양의 질량이 몰려 있어야 한다. 그런데 우주 배경 복사의 고공 관측 결과에서는 그러한 규모의 비균질성이 드러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패러독스라는 말이다. - P512

거의 동시에 매우 좁은 영역에서 두 개 또는 그 이상의 대폭발이 있었다면, 이 패러독스를 해결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 P513

현대 관측에서는 다양한 척도의 비균질 분포 구조를 우주 배경 복사에서 검출할 수 있었으며 이러한 관측결과가 우주론의 제한 조건으로 쓰인다. - P512

사람들은 보통 특이점에서 벌어진 상황에 대한 설명을 신의 몫으로 떠넘긴다. 이것은 여러 문화권에 공통된 현상이다. - P513

하지만 신이 무無에서 우주를 창조했다는 답은 임시변통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가 근원을 묻는 이 질문에 정면으로 대결하려면 당연히 "그렇다면 그 창조주는 어디에서 왔는가?"라는 질문을 해결해야 한다. 만일 이 질문에는 답이 없다는 식의 결론밖에 내리지 못한다면, 차라리 우주의 기원 문제에는 답이 없다 하고 한 단계 단축하는 것이 어떨까? 또 한편으로, 신은 항시 존재했다는 결론을 내린다면, 역시 한 단계 줄여, 우주가 항시 존재했다고 하면 어떻겠는가? - P513

어느 문화권이든지 창조 이전의 세상과 세계 창조에 관한 신화를 갖고 있다. 세상이 "신들의 짝짓기에서 만들어졌다."라거나, "우주의 알에서 태어났다."라는 식의 소박한 우주관을 우리는 세계 도처에서 만나게 된다. 이러한 신화들은 우주가 사람이나 동물이 하는 바를 따라했다는 순진한 상상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 P513

과학은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고 제안의 사실 여부를 검증하기 위하여 실험하고 관찰한다 - P515

어느 문화권이든 사람들은 자연에 내재하는 주기성을 즐기며 그 주기성을 최대로 활용한다. - P515

사람들은 오랫동안 ‘신이 의도하지 않아도 자연의 주기성이 가능할 수 있을까?‘를 고민했다. 수십 년 세월의 인생에도 주기성이 있다면 영겁의 신의 세계라고 주기성이 없으란 법이 있겠는가? - P515

인류 문화의 위대한 종교들 중에서 힌두교만이 코스모스가무한 반복된다는 것을 믿는다. 우주가 생生과 멸滅의 끝없는 순환을 반복한다는 것이다. - P515

현대 우주론이 밝힌 시간 척도와 비슷한 크기의 척도로 시간의 흐름을 이야기하는 유일한 종교가 바로 힌두교이다. - P515

일상의 하루는 낮과 밤 24시간이다. 그러나 브라흐마의 하루는 지구인의 시간으로 86억 4000만 년에 해당한다. 86억 4000만 년이라니! 이것은 지구나 태양의 나이보다 긴 시간이고 우주가 대폭발 이래 오늘에 이르기까지 경과한 시간의 절반도 넘는 참으로 장구한 시간이다. 힌두교의 가르침은 브라흐마의 1년보다 더 긴 세월도 언급한다. - P516

우주가 신의 꿈에 불과하다는 생각에는 누구나 심오한 매력을 느끼게 된다. - P516

신은 브라흐마의 1년이 100번 지난 다음에 스스로를 분해하여 꿈 없는 잠의 세계와 합일한다. 그러면 우주도 스스로를 해체해서 신과 합일된 상태에서 브라흐마의 1세기를 지낸다. 그 다음에 신은 잠에 빠진 스스로를 꿈틀거리며 깨워 자신을 재구성한다. 그리고 다시 우주적 꿈으로 빠져 들어간다. 이렇게 하여 무한히 많은 세계들이 생긴다. 그리고 이 세계에는 각각 우주적 꿈을 꾸는 무수한 신들이 있다. - P516

그런데 힌두교의 이 위대한 가르침은 다른 가르침, 어찌 보면 더 위대한 가르침을 통해 발전될 수 있다. 그것은 사람이라는 존재가 신의 꿈이 아니라, 신이 사람이 꾸는 꿈의 소산일지도 모른다는 가르침이다. - P516

인도 문화에는 신이 많은데, 같은 신일지라도 그 현현 양식이 다양하다. - P516

11세기에 만들어진 촐라 Chola 왕조의 청동상에서 우리는 시바 Shiva 신의 다양한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시바 신의 여러 현신現身 중에서 우주의 새로운 주기가 시작할 때마다 이루어지는 창조를 춤으로 형상화한 것이 가장 우아하고 장대하다. - P516

시바의 우주적 춤을 모티프로 한 이 청동상에서 시바 신은 네 개의 손을 가진 춤의 제왕 나타라자 Nataraja로 나타난다. 위로 치켜든 오른손은 창조의 소리를 내는 북을 들고, 왼손은 화염을 쥐고 있다. 널름거리는 불꽃의 혀는 이번에 새로 태어나는 우주도 수십억년 후에 다시 멸망함을 상징한다. - P516

심원한 의미를 담고 있는 아름다운 이 신상들에서 나는 현대 천문학에서 태어날 각종 아이디어들의 전조를 즐거운 마음으로 읽어 낼 수 있다. - P517

마야 문명의 유적에서 볼 수 있는 시간 개념도 아득한 과거에서 때로는 먼 미래로 넘나든다. 100만 년 이상의 과거를 언급한 유적이 하나 있다. 마야 문명을 연구하는 학자들이 논의하는 중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또 다른 유적은 4억 년 전의 과거를 이야기하고 있다. 이러한 유적에 언급된 사건 자체는 신화적 설화일지 모르지만, 그들이 생각할 수 있었던 시간의 척도에서 우리는 마야 문명의 비범성을 만나게 된다. - P517

세상의 나이가 겨우 수천 년이라는 성서적 사고의 오류를 유럽 문명이 겨우 인식하기 시작한 게 인류사의 아주 최근의 일이 아닌가. 그런데 그보다 1,000년 전에 마야 문명은 이미 100만 년의 세월을 생각할 줄 알았고, 인도인들은 수십억 년을 상상할 수 있었다. - P517

우주는 대폭발 이래 지금까지 계속해서 팽창해 왔을 가능성이 크다. 그렇다고 해서 앞으로 우주가 영원무궁 팽창할지는 아직 확신할 수 없다. 우주 팽창의 속도가 점점 느려지다가 결국 멈춘 다음, 팽창의 방향을 바꿔 수축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 P517

우주에 내재하는 물질의 밀도가 어떤 임곗값보다 작으면 현재 후퇴 운동 중인 은하들 사이의 중력이 팽창을 멈추기에는 역부족이어서 우주의 팽창은 영원히 지속될 수 있다. - P517

그러나 만일, 빛으로 관측 가능한 물질의 질량보다 훨씬 많은 양의 물질이 우주 여기저기에 숨어 있다면 후퇴하던 은하들은 중력으로 서로 묶여서 인도의 창조 신화에서 볼 수 있는 팽창과 수축을 반복하는 우주적 주기 운동에 동참할 수 있다. - P517

한편 빛으로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지 않는 소위 ‘잃어버린 물질‘의 후보로서 블랙홀을 쉽게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 P517

밀도가 매우 낮고 온도가 지극히 높은 물질도 천문학자들의 관측에 쉽게 걸리지 않는데, 은하들 사이의 공간이 저밀도고온의 물질로 채워져 있을 수 있다. 그러므로 빛을 이용한 관측으로 검출할 수 있는 천체들의 총질량보다 훨씬 많은 물질이 우주에 내재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그렇다면 코스모스는 영원히 팽창과 수축을 반복할 것이다. - P518

수축과 팽창의 새로운 주기가 열릴 때마다 새롭게 태어나는 코스모스, 그것은 바로 인도 신화가 우리에게 가르쳐 준 우주의 실상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코스모스가 바로 그렇게 진동하는 우주라면 대폭발은 우주 창조의 순간으로 볼 수 있지만 동시에 이전 우주가 완전히 파괴되는 최후의 순간으로 볼 수도 있다. - P518

우리는 영원히 팽창하는 우주도 싫고 팽창과 수축을 반복하는 진동 우주도 달갑지 않다. 우선 지금으로부터 100억 년 전인지 200억 년전인지 그 구체적 시간은 크게 문제가 되지 않지만, 어떻든 하나의 우주가 어느 순간에 갑자기 생겨 팽창을 시작한 것은 확실하다. - P518

무한정 계속 팽창하는 우주론에 따르면 은하들은 팽창과 더불어 우주의 지평선cosmic horizon 너머로 하나둘씩 사라질 것이다. 그러다가 은하수 은하의 지평선 안에 끝까지 남아 있던 마지막 은하마저 지평선 너머로 사라지고 나면 홀로 남은 은하수 은하는 우주적 고독을 혼자 참아 내야 한다. 이렇게 되면 지구상에 살던 외계 은하 연구자들의 일거리가 없어진다. - P518

어디 그뿐인가. 별들은 차갑게 식어 모두 죽고, 물질은 모조리 소립자의 상태로 돌아간다. 결국 소립자들만이 흐릿하게 분포하는 아주 재미없고 적막한 세상이 도래한다. 이것이 영원히 팽창하는 우주가 맞이할 최후의 운명인 것이다. - P518

진동 우주의 운명은 어떻게 되는가? 진동 우주에서 코스모스는 시작도 없고 끝도 없으며 끝없이 반복되는 생과 멸의 중간에 자리할 뿐이다. 한 주기가 끝나고 다음 주기로 넘어갈 때, 앞의 코스모스에서 다음 코스모스로 어떠한 정보도 흘러 들어가지 못한다. 전생 우주에 있던 은하, 별, 행성, 생물 그리고 문명이 후생 우주가 태어나는 대폭발의 특이점을 넘지 못하고 모두 사라지고 만다. - P519

영원무궁의 팽창 우주든 팽창과 수축을 반복하는 진동 우주든 우울하기는 마찬가지이다. 한 가지 위안 삼을 만한 점이 있다면 운명의 그 순간까지 아직 긴 시간이 남아 있다는 사실이다. 앞으로 수백억 년, 또는 이보다 더 긴 세월이 남아 있다. 코스모스가 멸망할 때까지 수백억 년의 세월 동안 현생 인류와 그의 후손이 이룩할 위업에 대한 기대와 희망이 우리를 우주적 우울증에서 구원해 줄 것이다. - P519

우주가 실제로 진동한다면 의문의 행렬은 계속된다. 팽창에서 수축으로 바뀔 때, 그래서 은하의 적색 이동이 청색 이동으로 반전될 때 인과因果관계에도 역전이 생겨 결과가 원인에 앞설 수 있다고 생각하는 학자들이 있다. 연못에 파문이 먼저 생기고 그 다음에 내가 돌을 던지는 격이란 이야기이다. 또 횃불이 타기 시작하고, 그 다음에 성냥을 그어 댄다는 식의 현상이 벌어질 수도 있다. 팽창이 수축으로 반전될 시기에는 무덤에서 탄생을 맞고 어머니 뱃속에서 죽음으로 삶을 마감한다니, 도대체 뭐가 뭔지 통 알아들을 수가 없다. 우리는 인과 관계의 역전을 제대로 이해했다고 아는 체하기 어렵다. 시간이 거꾸로 흐를까? - P519

과학자들은 팽창이 수축으로 바뀌는 순간 진동 우주에 어떤 일이 일어날까 궁금해 한다. 자연의 법칙들이 그 순간 무작위적으로 마구 뒤섞인다고 믿는 학자들도 있다.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우주에서 일어나는 온갖 자연 현상을 지배한다고 알려진 물리학과 화학의 제반 법칙들은 무수히 많은 가능성들 중 하나일 뿐이기 때문이다. 매우 제한된 범위의 법칙들만이 현생 우주에서 볼 수 있는 은하, 별, 행성, 생명 그리고 지능 등의 현상을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 - P520

우주의 팽창과 수축이 역전되는 순간에 법칙들이 멋대로 뒤섞인다면 그때 얻어지는 법칙이 현생 우주를 설명하는 법칙들과 우연히 일치할 확률은 실질적으로 0이다. 그러니까 전생 우주와 현생 우주 사이에 어떤 공통성도 기대할 수 없다. - P520

자연법칙의 뒤섞임이 팽창과 수축의 변환점에서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 P520

우주가 이미 여러 차례 팽창과 수축을 반복했으며 그때마다 다른 중력 법칙들이 선택됐다고 하자. 중력 법칙의 후보들 대부분이 실제로는 매우 미약한 중력을 동반한다. 이렇게 미약한 세기의 중력만으로는 우주를 한데 묶어 둘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주가 선택한 대부분의 중력에서는 우주가 흩어질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더 이상 팽창과 수축의 반복은 기대할 수 없다. 결과적으로 중력 법칙의 새로운 후보가 채택될 가능성이 자동적으로 배제된다. - P520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달한다. 우주가 유한한 기간 동안만 존속하든가, 팽창ㆍ수축의 매 주기마다 자연은 제한된 극히 일부의 법칙들만 선택할 것이다. 그렇다면 팽창이 수축으로 반전되는 순간에 일어나는 자연법칙의 뒤섞임이 완전히 제멋대로일 수는 없다. 후보 법칙들에서 선택이 이루어질 때 모종의 규칙이 준수돼야 할 것이다. 어떤 법칙은 선택되고 어떤 것들은 선택해서는 안 되고 하는 식의 제한 조건들이 있을 것이란 말이다. - P520

‘법칙 선택의 법칙‘ 은 기존의 물리학을 뛰어넘는 새로운 물리학으로 우리에게 다가올 것이다. 이 지경에 이르면 인간의 언어는 빛을 잃는다. 새로운 물리학에 붙일 적당한 이름을 찾기 어렵다. ‘파라물리paraphysics‘ 이니 ‘메타물리 meta-physics‘ 니 하는 이름들은 여기서 요구되는 의미와는 전혀 다른 뜻으로 이미 사용되고 있다. 그렇다면 ‘초월물리transphysics‘ 라는 표현은 어떨까? - P520

우리 우주가 영원무궁 팽창하는 우주인지, 아니면 팽창과 수축을 주기적으로 반복하는 우주인지 누구나 확인하고 싶을 것이다. 구별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 우주 물질의 재고를 조사하는 것이 그 한 가지 방법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코스모스의 끝, 영원의 벼랑 끝까지 가보는 것이다. - P520

전파 망원경은 아주 멀리 있는 천체의 미약한 신호도 잡아낸다. 그래서 우리는 수억 광년 이상 떨어져 있는 퀘이사의 신호도 확인할 수 있다. 가장 가까운 퀘이사라고 해도 5억 광년은 떨어져 있고, 100억 광년, 120억 광년, 아니 이보다 더 먼 거리에 있는 퀘이사들도 많다. - P520

공간적으로 멀리 떨어진 곳을 볼수록 시간적으로는 먼 과거에 일어난 상황을 보는 것이라는 이야기를 앞에서도 했다. 따라서 120억 광년 떨어져 있는 퀘이사를 관찰하는 것은 그 퀘이사의 120억 년 전 모습을 보는 것이다. 멀리 볼수록 더 오래된 과거에 손을 대는 것이다. 우주의 지평선 근처를 본다면 우리는 대폭발 시대의 우주와 같이 하게 되는 것이다. - P521

대형 배열VLA, Very Large Array은 27대의 전파 망원경으로 구성된 전과 간섭계로서 뉴멕시코 주의 오지에 설치돼 있다. 개별 망원경이 수신하는 전파 신호의 위상을 모두 고려해서 망원경의 배열을 미리 결정하고 관측을 시작한다. 구성 망원경들을 전선으로 연결하여 각 망원경으로 들어오는 신호의 세기와 위상을 합성함으로써 망원경 27대가 하나의 망원경같이 작동하도록 고안됐다. - P521

가장 먼 두 안테나의 거리가 합성 망원경의 지름에 해당한다. 그러므로 대형 배열은 지름이 수십 킬로미터에 이르는 거대한 전파 망원경이라고 생각해도 좋다. 따라서 대형 배열은 가시광선 대역을 분석하는 광학 망원경처럼 전파 대역의 자잘한 스펙트럼을 상세하게 분석할 수 있는 지상 최대의 전파 망원경이다. - P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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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덧 이 책의 중후반부를 지나고 있는데, 오늘 읽기 시작하는 부분은 뭔가 좀 추상적인 얘기들이라 약간 뜬구름 잡는 듯한 말처럼 느껴진다. 그래도 최대한 이해하기 위해 애써보고자 한다. 예전에 이 책에 대한 서평을 읽었을 때도 내용이 다소 난해했다는 얘기들이 있었는데, 오늘 읽는 부분이 그런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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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밑줄 친 부분에서 ‘무의식‘ 이라는 키워드가 자주 등장하는데, 우연인지는 몰라도 개인적으로 최근 함께 읽고 있는《나는 나의 스무 살을 가장 존중한다》라는 책에서 ‘무의식이 현실을 만든다‘ 라는 문장을 봤던 기억이 문득 떠올랐다. 이를 통해 ‘무의식‘이라는 것에 대한 호기심이 자연스럽게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본문을 읽어나가면서 더 알아봐야겠다.


내가 나 스스로에게 요구하는 것은 서로 대립되는 것들 뒤로 물러나 그로 인한 혼돈을 오롯이 받아들이는 것이다.

즉 우리는 적어도 한 번은 스스로가 가지고 있는 판단 기준을 버리고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무의식의 표현이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그대로, 도덕심이나 의협심, 혹은 근사한 겉모습 따위는 모두 떨쳐 버리고 우리의 충동과 욕구, 불안, 고통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것 말이다. 그것이 이뤄졌을 때 우리는 원점으로 돌아가 비로소 우리가 살아 내야 하는 실제의 삶을 위한 가치관을 세우고, 긍정과 부정, 선과 악을 명확하게 구분하며 규율과 금지 사항을 정하고자 노력해야 하는 것이다.

무의식적인 것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낯선 힘과 관계를 맺는 것과 같다

atman(아트만): 인도 철학에서 가장 기본적인 개념으로 인간 존재의 영원한 핵을 말하는데이는 죽은 뒤에도 살아남아 새로운 생명으로 다시 태어난다고 한다. 브라흐마가 우주작용의 근거라면 아트만은 인간의 모든 행위를 근거 짓는 핵이다.

내가 알고 있으며 예감하고 있기도 하지만, 바로 나 자신이 내면적으로는 아직 소유하고 있지 못한 그 무언가

스스로를 괴롭히고 아프게 만들었던 것, 나의 생각과 작품들을 가득 채우고 있는 것, 내가 《싯다르타》에서 묘사하고자 했던 것

심리 분석은 구제의 수단이자 동양의 가르침(붓다, 베단타, 노자)에 가장 가깝게 다가갈 수 있는 길

심리분석이 단순한 치료 수단으로써가 아니라 ‘새로운 가르침‘, 즉 새로운 단계의 인류 발전에 있어 중요한 요소로 간주되는 것

학문은 돈벌이 혹은 하찮은 장난으로 전락해버렸다(칸트와 헤겔을 비롯하여 모든 독일 철학자들이 사색의 결과를 실제 삶에 적용하는 것을 거부함으로써 그에 결정적인 기여를 한 셈이다).

문학은 오락이자 장난이며 기만에 불과하고 그 전체가 허영으로 가득 찬 장사판과도 같다.

에른스트 찬과 토마스 만 혹은 강호퍼와 헤르만 헤세 사이에는 이제 이렇다 할 차이가 더이상 존재하지 않으며,

어느 곳에나 도덕과 신성한 가치, 그리고 초개인적인 힘을 얻기 위해 진정한 노력을 기울이려는 시도가 결여되어 있다. 모두가 자기 자신과 자신의 명성, 혹은 어떤 당파를 위해 일하고 노력하며 생각하고 정치 활동을 한다.

노동을 하고 정신적 노력을 기울이며 그것을 더 높이 세우려는 시도는 오직 인류만이 할 수 있는 것이기에 모두 강물처럼 함께 흘러 들어가야 하는 것이 옳다. 그 강물 안에서는 마치 초기 교회의 성직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개개인의 업적이나 실수는 즉시 익명의 것이 되어 버린다. 그러고 나서야 비로소 쓰는 사람이나 읽는 사람 모두 진지하게 그것을 믿을 수 있고, 기쁨이나 신념, 그리고 진실이 담겨 있기 때문에 그것을 위해 죽을 수도 있는 것들이 독일 작가의 손끝에서 써질 수 있는 것이다.

모든 고통에는 한계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한계에 이르면 고통은 끝이 나거나 다른 모습으로 변하여 삶의 색채를 띠게 된다. 그래도 고통스러운 것은 여전하겠지만, 그럴 때의 고통은 생명이자 희망이다.

고통스러웠던 것만큼 나는 또 고독했다. 지금 나는 내게 최악이었던 시기와 조금도 다를바 없이 외롭다. 하지만 고독은 나를 더 이상 달랠 수도 없고 아프게 할 수도 없는 독약과도 같다. 나는 그 독성에 대한 저항력이 충분히 강해질 만큼 그것을 많이 마셨다. 그러나 그것은 독이 아니라 단지 고독이 변한 것일 뿐이었다.

우리가 받아들일 줄 모르고 사랑할 줄 모르며 고맙게 받아 마실 줄 모르는 것은 모두 독이다.

우리가 사랑할 수 있고 우리의 삶이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모두 생명이며 큰 가치를 지니고 있는 것들이다.

오랫동안 나는 사색의 힘을 과대평가해 왔으며 사색을 위해 많은 것을 희생하기도 했다. 사색을 하는 동안 나는 패배자가 되기도 하고 승리자가 되기도 했다.

나는 사색을 통해서 배운 것이 없으며 내가 읽은 글의 수많은 저자들이 지니고 있는 사상으로부터 얻은 것은 더더욱 없다.

나는 단번에 세계를 확실하게 이해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수없이 많은 본보기의 소용돌이 속에서 자신의 내면에 무언가를 새기고 따를 수 있는 근사한 순간들 가운데 일부를 경험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세계를 이해한다는 것은 오로지 그처럼 보기 드문 순간들이 끊이지 않고 이어지는 삶을 영위하는 것을 의미한다. 철학이 그와 같은 순간을 체험할 수 있는 수천 가지의 수단 가운데 하나에 불과하다는 것을 나는 느끼고 있었지만, 오랫동안 믿으려 하지 않았다.

실제로 내가 칸트나 쇼펜하우어, 셀링을 통해서 체험한 것은 <마태 수난곡>이나 만테냐의 그림,《파우스트 Faust》 등에서 체험한 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우월한 가치를 지니는 철학이란 창조적인 철학자를 위해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 제자나 독자 혹은 비평가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철학자는 모든 존재가 성숙과 성취의 순간에 느끼는 것, 이를테면 여인이 출산할 때나 예술가가 창작할 때 혹은 나무가 계절과 해가 바뀔 때 느끼는 것을 자신의 세계 창조에서 체험하는 것이다. 다른 존재들이 그런 것을 ‘단지‘ 무의식적으로 체험하는 반면에 철학자는 ‘의식적으로‘ 체험한다는 것은 오래된 고정관념이다.

그저 의식 하나에 그처럼 우월한 가치를 부여하는 것에 이의를 제기한다.

내가 중요하게 여기는 사물의 범위를 끊임없이 내 의식의 시야 안에 두고 있다는 것은 나의 자아가 지니는 가치와 그것을 높이 평가하는 것에 결정적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니라, 단지 내가 의식과 무의식의 영역 사이에서 복잡하지 않고 막힘없는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는 것일뿐이다.

우리는 생각하는 기계가 아니라 살아 숨쉬는 생물체이며, 로마 웅변가의 유명한 비유로 표현하자면 우리의 몸 안에서 무의식은 위胃와 비슷한 위치를 차지한다.

논쟁을 벌일 의향이 없는 사람에게는 내 생각을 표현하기가 쉽지 않다.

당신의 존재가 좁고 깊은 호수라고 한번 상상해 보라.
그리고 그 수면이 바로 의식이다. 그곳은 밝은 빛을 비추고 있으며 우리가 생각이라고 부르는 일이 그곳에서 일어난다.

수면에 있는 물 분자 자체는 쉴 새 없이 바뀐다. 끊임없이 밑에 있는 물 분자가 위로 올라오고, 또 위에 있는 물 분자가아래로 내려가면서 흐름이 생기고 보충을 하기도 하고 위치이동이 일어난다. 또한 어느 물 분자나 한번쯤은 위에 머물고 싶어한다.

물로 이루어진 호수처럼 우리의 자아 혹은 우리의 정신 역시 수천, 수백만 개의 분자, 즉 끊임없이 성장하고 교체되며, 무언가를 소유하고 기억하며 표현하려는 욕구로 이루어져 있다.

호수에서 우리의 의식이 보는 부분은 좁은 수면뿐이다. 정신은 수면 밑에 펼쳐진 무한하게 넓은 부분을 보지 못한다. 그러나 넓고 어두운 공간을 벗어나 좁은 수면의 밝은 부분을 향해 끊임없이 움직이면서 교체가 진행되는 정신은 풍부하고 건전하며 다행히도 능력이 있는 것 같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끝도 없이 많은 생각들을 마음속에 품는다. 그런 것들은 밝은 표면 위로 올라오는 일이 결코 없으며 밑에서 고통스럽게 썩어 간다. 그런 생각은 부패해 가며 고통을 주는 것이기에 의식에 의해 계속 거부를 당하게 되고 의심과 우려의 대상이 된다. 해롭다고 인식되는 것은 표면 위로 올라올 수 없다는 것이며 그것이 바로 모든 윤리가 가지고 있는 본질이다.

사실상 해롭거나 이로운 것은 아무것도 없다. 모든 것은 선하거나 중립적이다.

개인은 누구나 자신에게 속하며 스스로에게 유익하지만 표면 위로 올라와서는 안 되는 것들을 내면에 지니고 있다. 윤리는 그런 것들이 위로 올라오면 불행이 따른다고 가르친다. 하지만 그로 인해 오히려 행복이 따를 수도 있는 일이다. 그러므로 모든 것은 표면 위로 올라와야 하며 윤리에 복종하는 사람만 불쌍해질 뿐이다.

예술은 길고 인생은 짧다고 하지 않았던가!

단지 관념적인 입장이나 어떤 미학적인 염세주의 때문이 아니라, 육체적으로 그리고 현실적으로 삶이 슬픔과 고통이라고 느끼는 사람들이 있다. 그렇게 느끼는 것은 그들의 운명이다.

그런 사람들은 쾌락을 느끼는 것보다 고통을 느끼는 데 더욱 재능이 있다. 그리고 숨 쉬는 것과 잠자는 것, 먹는 것, 소화시키는 것 등 가장 단순하고 본능적인 행위는 모두 그들에게 기쁨을 주기보다 오히려 그들을 고통스럽고 번거롭게 만든다.

하지만 그들도 자연의 순리에 따라 삶을 긍정하고 고통을 이기며 자포자기하지 않으려는 욕구를 내적으로 느낀다.
그렇기 때문에 그 사람들은 조금이라도 기쁘고 유쾌한 것이나 조금이라도 행복해지고 따뜻해질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반드시 가지려 한다. 게다가 평범하고 건강하며 정상적이고 성실한 사람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으면서 그처럼 그럴싸한 것들에게는 대단한 가치를 둔다.

한편 자연은 그런 사람들의 인생행로에서 최고로 멋지고 복잡한 것을 완성시킨다. 그것은 거의 모든 사람들이 어느 정도 경외심을 갖게 되는 것, 바로 유머다.

고통스러워하는 사람들, 혹은 너무나 감상적이고 별로 잽싸지 못한 데다가 지나치게 즐거움을 좇으며 위안받기에 집착하는 사람들의 내면에도 때때로 흔히 유머라고 하는 것이 생겨난다. 그것은 깊고 지속적인 고통 속에서만 자라는 수정과도 같으며, 어쨌든 그것은 인류의 생산물 가운데 좀 더 나은 것에 속한다.

고통스러워하는 사람들이 힘든 삶을 그대로 견뎌 내고 심지어 찬미하기 위해 만들어 낸 이 유머는 희한하게도 다른 사람들, 즉 건강하고 고통스러워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항상 정반대로 작용하여 마치 억제할 수 없는 삶의 기쁨과 유쾌함이 폭발하는 것처럼 보인다. 유머를 들으면서 건강한 사람들은 허벅지를 마구 내리치며 큰 소리로 웃어 댄다.

항상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쓴다고는 하지만, 유머리스트들이 내세우는 제목과 주제는 모두 구실에 불과하다. 사실상그들의 주제는 예외 없이 단 한 가지뿐이다. 즉 별난 슬픔과더러운 (이렇게 표현해도 좋을지 모르겠지만) 인간사, 그리고 삶이 그토록 비참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아름답고 근사할 수도 있다는 사실에 대한 놀라움이다.

구두 수선공은 구두 수선공으로 남아야 하는 것처럼 은자도 은자로 남아야 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자신이 가진 직업을 버리고 다른 곳에서 기웃대는 행동을 할 때에는 충분히 그럴 만한 이유에서 그렇게 하는 경우도 있겠고, 사람들도 그것을 납득하겠지만, 보통은 단지 어리석음 때문에 그런 일이 일어난다.

그 당시에는 삶을 밝고 긍정적인 것으로 보았던 반면, 지금의 나는 삶을 사랑하지도 부정하지도 않고 그저 받아들일 뿐이다.

그 고립감은, 나의 내면에 인생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려는 까닭 모를 욕구가 자리하고 있는 반면에, 다른 사람들은 모두 내가 알지 못하는 비밀스런 게임 규칙에 따라 인생을 유쾌한 단체 게임으로 여기고 함께 즐기는 데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좋지 못하고 어리석은 짓은 얼마나 빨리 배우게 되는지,
또 게을러빠진 개나 게걸스럽게 먹어 대는 돼지가 되는 것이 얼마나 쉬운 일인지 믿을 수가 없을 정도다. 육체적인 나쁜 습관과 나태함은 정신적으로도 그와 같은 상태를 수반하는 법이다.

나태함이 이성보다 더 강하고, 게을러서 살찐 배가 조심스럽게 호소하는 정신보다 더 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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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의 언어들 (개정증보판 포레스트 에디션) - 나를 숨 쉬게 하는
김이나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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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자신이 가진 특유의 섬세한 언어 감각을 바탕으로 일상생활에서 종종 쓰는 말들의 이면에 숨겨진 뜻을 보다 더 깊이있게 들여다 본다. 이를 통해 독자들은 그 말들의 의미를 곱씹어보는 재미를 느낄 수 있다. 또한 읽으면서 저자가 왜 유명한 프로 작사가인지를 몸소 느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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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저자가 라디오 DJ를 하면서 청취자들과 나눴던 ‘실연‘ 과 관련된 글로 시작한다.

짧은 글이지만 이 글을 통해 인연의 헤어짐이라는 것에 있어서 그 이유를 반드시 나에게 귀속시킬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상대방에게 이유가 있을 수도 있는 것이고 어떤 잘못이나 문제보다는 단지 양 당사자들 간의 어떤 타이밍같은 것이 어긋나서 그럴 수도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명확하게 귀책사유가 나에게 있는 경우도 아예 없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여기서 저자가 말하고자하는 것은 어떤 관계가 틀어졌을 때 과도하게 자기자신을 탓하며 비관에 빠지는 것을 경계하려는 취지로 말한 것임을 참조해서 생각해보면 좋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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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가지 소재로 글이 더 이어진 뒤 마지막에는 작사를 본업으로 하는 저자가 직접 썼지만 아직 출시된 곡들에는 반영되지 않은 창작 가사들이 소개되어 있다. 읽으면서 중간중간 눈길을 사로잡거나 공감이 되는 가사들을 만나볼 수 있었다.

"헤어짐이라는 건 꼭 누구의 잘못 때문에 일어나는 건 아니죠. 그냥 마음이 끝났을 뿐인데."

선택받지 않았다는 사실, 그리고 선택을 받았다가 되돌아간 마음이니까 그게 참 받아들이기가 힘든 일이긴 한데…. 내가 어떤 문제가 있어서는 아니죠. 이건 그저 상대의 마음 온도가 식어가는 속도같은 게 두 사람이 맞지 않았을 때 벌어지는 일인 거죠.

좀 수줍어하고 어떤 부분에 있어서 수치심이 여전히 살아 있는 것

눈치라는 게 조심성이기도 하니까, 뭔가 남들 시선을 너무 걱정해서도 안 되겠지만, 적당한 조심성은 생명력 있는 어른을 만들어내는 원동력이 될 수 있는 거 같아요.

"소소한 일탈을 해라. 그러면 행복해진다"

늘 먹던 음식이 아닌 새로운 음식에 도전하고, 한 번도 들어보지 않았던 음악 장르를 들어보는 그런 소소한 일탈들이 모여 단조로운 일상에 생기를 불어넣는다

낭만은 내 감정에 충실하고 내 행복에 더 충실한 단어예요. ‘세상이 보기에 어떻고 나의 역할은 이래야 하고‘ 이런 거로부터 조금 더 자유로워져서 나만의 세상을 그려나가라는 의미더라고요.

문득문득 환기하지 않으면 ‘이 단어의 원래 뜻이 뭐였지?‘ 하게 되는 너무나 좋은 단어들이 있어요. 낭만 또한 그런 단어인 거 같습니다.

후회는 많은 선택권이 있을수록 더 커집니다. 내가 선택하지 못한 수많은 가능성과 가지 않은 길에 대한 아쉬움이 뒤섞여 자꾸만 내 머릿속을 어지럽히거든요.

한 작가의 말을 빌리자면 인간은 반드시 한 가지를 결정해야 할 때 본능적으로 최선을 다해 선택한다고 합니다. 돌아보면 후회밖에 없는 그 선택도 ‘그때는 제일 나은 선택이었다‘는 거죠.

수많은 노랫말을 만들어왔지만 실제로 발표된 곡은 일부분에 불과하다.

얼마나 많이 몰랐었는지 좀 알 것 같아 또 넘어질 나란 걸 알 것 같아 이제야 겨우 기댈 법을 좀 안 것 같아 어떡해야 힘을 좀 빼는지도

설렘은 내게 불안이라서 늘 겁이 났어

참 별일 다 있단 생각을 하지 살아가는 일이란 참 모를 일이야 영원할 것만 같았던 아픔이 추억이 되고 미워한 사람이 친구가 되고 궁금할 것도 없었던 널 사랑하기도 하고 흘려듣던 옛 노래가 마음에 들어오고

세상은 참 이렇게 모를 일이야 그게 참 고마운 거야 하루하루 새로운 게 알듯 말듯 하기에 여전히 난 가끔은 설레이니까

어쩌면 말이란 건 각자가 그리는 그림

우린 영원히 서로를 이해할 수 없어 헤아리고 또 헤아리면 그걸 사랑이라 부르죠

세상의 모든 건 결국 지나간다고

우리의 내일을 말하지 마 지금을 부디 흘리지 마

이 안에 이곳에 나라는 세상에 네가 숨을 쉬고 있어 니 안에 그 곳에 너라는 세상에 내가 숨을 쉬고 있기를

좋을 때, 슬플 때, 힘들 때 결국에 마음이 닿는 곳은 결국 너 이럴 땐 어쩔 땐 생각해 널 떠올리려 눈 뜨는 것 같다고

풀지 못한 문제가 있어 너라면 어떤 길로 답을 찾아 갔을까 그러면 답이 좀 보이곤 해

긴 밤엔 별을 셀 수 있어서 깊은 꿈을 꾸어서 더 먼 곳을 볼 수 있는 나를 또 만나게 돼

내게 제일 어울리는 리듬을 가슴속에 품으면 그게 내 숨인 걸 이제 알 것 같아

기억해, 그날의 아픔을
기억해, 그 모든 추억들

슬픔이라는 건 내 맘대로 버릴 수가 없다는 걸 배운 거야 니가 없는 이곳에서

넌 니가 진짜로 원한 게 뭐라고 생각해?
또 그게 옳다고 생각해?
Don‘t let it go, don‘t let it go

올려봤던 하늘에 그 달빛을 기억해 다시 머릿속에 그린다 그리고 난 꿈꾼다 나를 잃지 않도록

오늘도 부딪혀 난 툭 털고 지나쳐 난 좀처럼 안 미쳐 난 끓는점이 달러

이 세상에 난 하나뿐이길래 내가 그린 선을 따라가 네모난 종이엔 어울리지 않아 I draw my way

나를 구겨 넣으려 하지 마

그래 난 틀리진 않아 좀 달라 잘 봐, 우린 전부 남달라

이 세상에 날 보내주었길래 나는 나를 믿고 살아가 기나긴 줄 뒤에 기다리지 않아 I got my way

꽃이 피면 그땐 니가 날 알아보겠지

늘 날 비껴가던 봄이 내게도 온다면 단 한 줌의 흙으로 한 줄기 빛으로 드센 바람결에도 끝내 버틴 뿌리로 흐드러진 꽃을 피워 누가 기억해줄 한 송이로

내 이름 곁에 누군가 의미를 남겨준다면 지친 적 없이 꿈을 꿨다는 말로 날 불러주기를

걸음을 멈춰 누군가 나를 바라본다면 그 순간은 찰나라 해도 슬픔이 없기를 나의 기나긴 기다림의 이유였다고 믿을 수 있게

이제서야 나보다 더 작아진 그대를 보며 이해하려 노력하는 내가 비겁해

그댄 나의 커다란 뿌리였고 항상 나를 품은 그늘이었고 마주보지 못한 태양이었고 나보다 더 나의 이름이었어

매일이 버거운 건 당연했어 내 청춘에게 난 가장 못됐던 사람

좋은 사람, 나쁜 사람 모두 어느 순간의 나였어 울고 웃었던 건 당연했어 나는 나를 제일 몰랐던 사람

멀리서 비로소 보이는 이제야 당연한 것들 소중한 건 늘 가까이에 그리고 조금은 하찮은 것들 그렇게 선명해진 너

예민하게 수집한 단어로 감정에 이름표를 붙여주는 사람, 그 단어들로 연결된 문장으로 감각을 노래하는 사람.

노랫말은 시와 달라서 너무 생경한 단어를 쓰기도 어렵고 지나치게 난해한 표현을 써서도 안 된다. 들을 때 귀에 쉽게 감겨 와야 하니 누구나 쓸 법한 일상어가 주재료다.

보통의 언어들이 지닌 힘

말을 쓰고 다루는 방식은 결국 삶을 사는 방식과도 닿아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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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책들을 읽다보니 오래간만에 읽게 되었다. 오늘은 과학과 종교에 관련된 논쟁 중 하나인 유신론과 이신론에 대해 살펴보면서 시작한다. 다소 추상적인 주제들이기에 좀 난해하게 느껴지지만 그래도 본문을 통해 조금이나마 배울 수 있는 시간이 되길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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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을 읽어나가면서 드는 생각은 참으로 다양한 사상과 생각들이 발현되었다가 공존하기도 하고 쇠퇴하기도 한다는 것이었다. 시대 환경의 변화에 따라 주류가 되는 사상과 비주류로 밀려나는 사상이 생기는 건 어쩌면 지극히 당연한 우주나 자연의 법칙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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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이어 읽다가 저자는 서로 다른 분야의 지식을 통합하는 능력의 유무에 따라 예전의 학자들과 오늘날의 학자들을 구분짓는다. 저자의 말에 따르면 예전에는 학자들이 자기 분야 외의 분야들까지도 두루두루 섭렵하면서 다른 분야의 학자들과 소통하는 것이 원활했지만, 요즘은 각각의 분야가 워낙 세분화되고 기하학적인 속도로 성장하고 있기 때문에 자기 분야만 연구하기도 벅찰정도라고 한다. 또한 이러한 제한된 영역에 머물 수 밖에 없는 또다른 이유로 저자는 학자들이 받게 되는 연구비나 영예같은 것들이 독창적인 것을 발견함에 따라 주어지는 것일 뿐, 어떤 분야를 초월하는 폭넓은 학식이나 지혜에 따라 주어지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물론 순수한 학문이나 철학에 대한 폭넓은 앎도 아예 가치가 없는 것이라고는 할 수 없겠지만,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신의 시간을 투입한 것에 대한 어떤 물질적 또는 기타의 다른 보상이 없다고 한다면 그러한 행동을 지속해나가는 것은 현실적으로 쉽지 않은 일이다. 이런 현실적인 이유에 더해 타분야를 공부하는데 필요한 시간의 제약 등으로 인해 예전의 학자들과 오늘날의 학자들의 성향이 차이가 날 수밖에 없지 않나 싶다.

전통적인 기독교의 유신론은 지식의 두 원천이 될 수 있는 이성과 계시 모두에 뿌리를 둔다. - P79

이와는 반대로 이신론은 이성을 맨 끝에 놓고 유신론자들에게 그것을 사용해 계시를 정당화해 보라고 요구한다. - P79

계몽사상의 도전에 직면한 18세기의 전통적인 신학자들은 한치도 양보하려 하지 않았다. 그들은 기독교 신앙의 가치를 합리성의 시험대 위에 올려 놓을 수 없다고 되받아쳤다. 인간의 이해 범위를 넘어서는 심오한 진리가 존재하며 신은 언제든 원하기만 하면 자신이 택한 수단을 통해 그 진리를 계시할 것이다. - P79

이신론의 결정적 단점은 이성적인 측면이 아니라 감성적인 측면에 있었다. 순수 이성은 냉혹하기 때문에 호소력을 갖지 못한다. 신성한 비밀을 벗어 버린 의례에는 아무런 감성적인 힘이 없다. 왜냐하면 의례 참석자들이 자신의 충성 본능을 충족시키기 위해서는 더 높은 힘에 복종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특히 위험과 비극의 시기에는 비이성적인 의례가 더욱 강한 힘을 가지기 마련이다. 자비롭고 무오류적인 존재에 대한 복종, 즉 구원을 위한 봉헌을 대신할 것은 없다. - P80

내세에 대한 공식적 인정, 즉 초월을 향한 믿음의 도약을 대신할 것은 없다. 따라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신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한 과학은 매우 좋아하지만 과학으로 신의 능력을 재려 하지는 않는다. - P80

일찍이 그리스 인문주의가 그랬던 것처럼 계몽사상의 취지는 프로메테우스적인 것이었다. 계몽사상이 만들어 낸 지식은 인류를 미개한 세계에서 한 단계 위로 끌어올려 해방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 P81

하드리아누스 방벽 (로마의 하드리아누스 황제(재위 117~138년)가 픽트 족을 몰아내고 국경을 확실히 하기 위하여 쌓은 고대의 방벽, 영국 잉글랜드 북부의 동해안에서 서해안까지 걸쳐 있으며, 약 120킬로미터에 달한다.) - P81

너무 많은 권위가 주어진 과학은 스스로를 파괴하는 불경스러운 힘으로 돌변할 우려가 있다. - P81

신의 개입이 없는 과학과 기술의 창조는 사실 엄청나게 강력하며 근대 문명의 이미지를 지배하고 있다. - P81

국가들은 세계를 파괴할 기술로 서로를 협박한다. - P82

오래전부터 과학을 프로메테우스적인 것이 아니라 파우스트적인 것으로 받아들이고 두려워한 사람들은 계몽사상의 프로그램을 정신의 자유와 생명 자체에 대한 심각한 위협으로 보았다. - P82

위협에 대한 해답은 무엇인가? 경멸하는 것이다! 자연인으로 돌아가서 개인적 상상력의 탁월함과 불멸에 대한 자신감을 다시 주장하는 것이다. 예술을 통하여 더욱 고차원적인 영역으로 탈출하여 낭만주의 혁명을 진행시키는 것이다. - P82

워즈워스의 "말로 할 수 없는 힘의 호흡"을 통해서 눈은 감기고 마음은 높이 치솟으며 중력에 대한 거리의 역제곱 법칙은 날아가 버린다. 정신은 무게와 측정 단위가 미치지 않는 또 다른 실재로 들어가 버린다. 물질과 에너지에 속박된 우주를 부정할 수는 없을지 모르지만 적어도 당당히 경멸하며 무시할 수는 있을 것이다. - P83

철학에 꽃핀 낭만주의는 반란, 자발성, 열정, 영웅적 비전 등을 높이 평가했다. 낭만주의를 실천하는 사람들은 가슴으로만 느끼는 열망을 추구하며 인간이 무한한 자연의 일부이기를 꿈꾸었다. - P83

계몽사상가 목록에 종종 등장하는 장자크 루소는 실제로는 낭만주의 철학사조의 창시자이자 극단적인 공상가였다. 그에게 있어서 학습과 사회 질서는 인류의 적이었다. - P83

1749년(『과학과 예술에 대한 논의 (Discourseon the Sciences and the Arts)』)에서 1762년(「에밀 (Émile)』)까지의 작품에서 그(루소)는 "잠자는 이성"을 크게 칭찬했다. - P83

그(루소)가 생각하는 유토피아는 사람들이 책을 포함한 지적 도구를 버리고 감각과 건강을 즐기는 최소주의적 세계였다. - P83

루소는 인류가 본래 평화로운 자연 상태의 고귀한 야성을 지녔는데 문명과 학문이 이들을 타락시켰다고 주장했다. 종교, 결혼, 법률, 정부는 이기적 목적을 달성하려는 권력자들의 속임수이다. 이러한 상류 계급의 속임수를 위해 일반인이 지급하는 대가는 해악과 불행일 뿐이다. - P83

루소가 매우 부정확한 인류학을 고안한 반면, 괴테, 게오르크 헤겔(Georg Hegel), 요한 헤르더 (Johan Herder), 프리드리히 셸링(Friedrich Schelling)이 이끄는 독일 낭만주의는 과학과 철학에 형이상학을 재도입했다. 그 성과물인 ‘자연철학(Naturphilosophie)‘은 감성과 신비주의 그리고 과학적 가설의 혼합물이었다. - P83

그들 가운데 가장 걸출했던 요한 볼프강 폰 괴테(Johann Wolfgang von Goethe)는 무엇보다도 위대한 과학자가 되고 싶어 했다. 그는 문학에서 불멸의 공헌을 세웠지만, 본인은 과학자가 되고자 하는 야망을 문학가의 그것보다 위에 두었다. - P84

그(괴테)는 과학을 아이디어와 구체적 실재에 대한 접근으로 보았고 그것을 진정으로 존중했다. 그는 과학의 기본 교의를 이해하고 있었다. 예컨대 숨을 들이쉬고 내쉬는 것처럼 분석과 종합이 자연스럽게 번갈아 일어나야 한다고 말했다. - P84

한편 그(괴테)는 뉴턴 과학의 수학적 추상화에 대해서는 비판적이었다. 그리고 물리학이 우주를 설명한다면서 너무 멀리 나아가 버렸다고 불평했으며 실험 과학이 채용하는 "기술적 조작"을 경멸했다. 사실 그는 뉴턴의 광학 실험을 반복하려 했으나 결과는 좋지 않았다. - P84

인류의 영혼과 과학의 엔진을 결합하려는 숭고한 목적 - P84

그(괴테)는 심원한 정신적 감각으로 자연을 사랑했으며 누구나 자연에 대한 친근감과 심오한 감정을 양성해야 한다고 단언했다. - P84

"자연은 환상(illusion)을 사랑한다. 자연은 사람들을 안개로 감싸고 빛을 향해 밀고 간다. 자연의 환상과 함께하지 않는 자에게 자연은 폭군과 같은 엄벌을 내린다. 그 환상을 받아들이는 자를 마음으로 감싼다. 자연을 사랑하는 것만이 자연에게 접근하는 유일한 방법이다." - P84

사실들 자체는 부분적인 진리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가 지각하는 것은 우주적 흐름의 작은 부분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 P85

독일 낭만주의의 선도적 철학자였던 프리드리히 셸링은 과학적 프로메테우스의 무력함을 시가 아닌 추론으로 보여 주려 했다. 그는 인간의 이해력을 넘어서는 모든 것의 우주적 통일성을 제안했다. - P85

셸링은 자연이 살아있다고 결론지었다. 그에 따르면 자연은 완벽한 자기실현의 궁극적 상태를 향한 느낌과 더 큰 이해를 통해 진보하며 탐구자와 알려진 것을 통합하는 창조 정신이다. - P85

독일의 철학적 낭만주의는 미국의 뉴잉글랜드 초월주의(New England transcendentalism)에 반영되었다. 가장 잘 알려진 뉴잉글랜드 초월주의의 제안자는 랠프 월도 에머슨 (Ralph Waldo Emerson)과 헨리 데이비드 소로(Henry David Thoreau)이다. - P85

초월주의자들은 급진적인 개인주의자들로서 잭슨 시대에 미국 사회를 압도했던 과도한 상업주의를 거부했다. 그들은 순전히 개인적인 기풍 속에 만들어지는 정신적 우주를 상상했다. 그렇지만 그들은 유럽 낭만주의보다는 과학을 잘 받아들였다. 이것은 『씨앗 속의 신념(Faith in a Seed)』을 필두로 한 소로의 작품들에 나타난 정확한 자연 관찰을 통해 알 수 있다. - P85

(미국의 제7대 대통령인 앤드류 잭슨(Andrew Jackson)은 서민과 서부인들을 위한 강력한 정책을 폈다. 사람들은 이 시기를 ‘잭슨 시대‘라고 불렀으며, 그가 정치적으로 확립한 새로운 민주주의의 개념은 ‘잭슨 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미국의 지배적인 이념이 되어 훗날까지 영향을 미쳤다.) - P85

그들(초월주의자들) 가운데에는 완전히 과학자라 할 수 있는 사람도 포함되어 있었다. 예컨대 하버드 대학교 비교동물학 박물관 관장이자 미국 과학 아카데미의 창립 위원이었던 루이스 애거시즈(Louis Agassiz)는 지질학자이자 동물학자였으며 최고의 재능을 지닌 강사였다. 이 위대한 사람은 우주가 신의 마음속에 있는 비전이라고 생각했다. 셸링과 마찬가지로 형이상학적 탈선을 한 것이다. 루이스 애거시즈의 우주에서 과학의 신성은 신학에서와 마찬가지로 필수적이었다. - P86

계몽사상에 대한 강력한 반대에 부딪혀 대부분의 자연과학자들은 인간 정신세계에 관한 탐구를 포기했고 철학자와 시인은 한 세기 동안 더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러한 양보는 뜻하지 않게 과학 전문가들을 이롭게 만들었다. 이로써 연구자들이 형이상학의 함정에서 벗어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 - P86

19세기를 거치면서 물리학과 생물학 지식은 급격히 성장했다. 동시에 사회학, 인류학, 경제학, 정치 이론 등의 사회과학은 기초 과학과 인문학 사이에서 만들어진 영지를 장악하며 새로 등장한 고위 귀족 행세를 하기 시작했다. 지식의 거대한 가지들은 17세기와 18세기에 생성된 통일된 계몽사상의 비전에서부터 나와 자연과학, 사회과학, 인문학으로 갈라져 현재의 모습을 하게 되었다. - P86

신학의 빚을 지기는 했지만 거만하게도 비종교적인 방향으로 흘렀던 계몽사상은 서양 정신에 새로운 자유의 실마리를 제공했다. 모든 형태의 종교적 권력이나 세속 권력을 포함한, 상상할 수 있는 모든 두려움을 뿌리쳤고 자유로운 연구 윤리를 도입했다. 또한 인간을 우주 속에서 끊임없이 모험하는 존재로 그렸다. - P87

두 세기 동안 신이 인간에게 새로운 목소리로 이야기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 목소리는 일찍이 르네상스 시대에 계몽사상의 선각자로 활동했던 조반니 피코델라 미란돌라 (Giovanni Pico della Mirandola)가 1486 년에 썼던 다음 축도문에 잘 드러나 있다. - P87

우리는 천상의 것도 지상의 것도 아니며, 멸하지도 불멸하지도 않도록 창조되었다. 그리하여 선택의 자유를 가지고 훌륭히, 마치 그대 자신의 창조자가 된 것처럼 그대가 원하는 형태로 그대 자신을 만들 수 있으리라. - P87

그러나 1800년대 초반 이러한 멋진 이미지는 퇴색되고 있었다. 이성은 무시되고 지식인들은 과학의 지도력에 대한 신념을 잃었으며 지식의 통합에 대한 전망은 급속히 가라앉았다. - P87

계몽사상의 정신이 정치적 이상주의와 개별 사상가의 희망을 바탕으로 존속된 것은 사실이다. 이어지는 수십 년 동안 손상된 나무 밑동에서 솟아나오는 식물줄기처럼 제러미 벤담(Jeremy Bentham)과 존 스튜어트 밀 (John Stuart Mill)의 공리주의, 카를 마르크스(Karl Marx)와 프리드리히 엥겔스(Friedrich Engels)의 역사적 유물론, 찰스 퍼스(Charles Peirce), 윌리엄 제임스(William James), 존 듀이(John Dewey)의 실용주의 같은 새로운 학파들이 등장했다. 그렇지만 핵심 의제는 만회될 가망 없이 포기된 것으로 보였다. 지난 두 세기 동안 사상가들을 몰두하게 만들었던 거대 담론은 이제 거의 신빙성을 잃었다. - P88

과학은 제 갈 길로 갔다. 과학자, 과학적 발견 그리고 전문 학술지는 15년마다 두 배로 늘었다. 이것은 1700년대 초반부터 계속된 현상으로 1970년 무렵에야 주춤하기 시작했다. - P88

끊임없이 확대되는 과학의 성공은 우주가 질서 정연하고 이해할 수 있다는 견해에 다시 믿음을 실어 주기 시작했다. 계몽사상의 이러한 필수 전제는 베이컨과 데카르트가 최초로 생각해 낸 수학, 물리학, 생물학 분야 안에서 더 굳건히 자라났다. - P88

그렇지만 그 중심 방법인 환원주의의 화려한 성공은 계몽사상 프로그램 전체의 복구와는 정반대로 작용했다. 과학적 정보가 기하학적인 속도로 성장하고 있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개별연구자들은 지식의 통일에 관심이 없었던 것이다. 철학에 관심이 없던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었다. 그들은 그런 문제들에 대해 더욱 깊이 밝힐 것도 없고 그럴 이유도 없다고 생각했다. 특히 그들은 1700년대 후반 생물학에서 사회과학으로 가는 길목으로 여겨진 개념이자 금단의 영역인 마음의 물리적 토대를 밝히는 일에는 더욱 주저했다. - P88

큰 그림에 대한 관심이 부족한 데에는 더 소박한 이유가 있었다. 과학자들이 그 일을 할 만한 지적 에너지를 갖지 못했던 것이다. 대다수의 과학자는 장인(匠人)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다. 오늘날에는 더욱 그러하다. 그들은 전문 분야에만 집중한다. 그들의 교육 과정은 세계의 드넓은 윤곽을 볼 수 있게 해 주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최첨단 분야에서 가능한 한 빨리 자신만의 발견을 하기에 필요한 훈련을 받는다. 왜냐하면 경계 부분의 연구는 비용도 많이 들고 위태롭기 때문이다. - P88

수백만 달러짜리 실험실에 소속된 생산성 있는 과학자들은큰 그림에 대해 생각할 시간이 없으며 그것에 이득이 있다고 보지도 않는다. - P88

미국 국립 과학 아카데미에 선발된 2,000명의 과학자들이 자신의 업적에 대한 상징으로 옷깃에 달고 있는 장미 장식에는 과학을 뜻하는 금이 중앙에 있고 그 주위를 자연 철학을 뜻하는 보라색이 둘러싸고 있다. 그런데 어쩌겠나! 대부분의 선도적 과학자들의 시선이 그 금에만 고정되어 있으니. - P89

유전자가 무엇인지를 모르는 물리학자나 ‘끈 이론(string theory)‘이 바이올린과 연관돼 있다고 추측하는 생물학자가 있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과학에서 연구비와 영예는 발견에 주어지는 것이지 학식이나 지혜에 주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항상 그래 왔다. - P89

정치적 노련함을 이용하여 대법관까지 올랐던 프랜시스 베이컨이 영국 국왕에게 지식을 통합하는 계획을 달성하기 위한 자금을 개인적으로 간청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는 한 푼도 받지 못했다. - P89

인생의 절정기에 있었던 데카르트도 형식적으로 프랑스 궁정에서 생활비를 받았을 뿐이다. 그러나 그것에는 연구비가 포함되지 않았기 때문에 "바위와 얼음 틈의 곰들의 땅"인 더 관대한 스웨덴 궁정으로 갈 수밖에 없었고, 결국 그는 그곳에서 폐렴으로 사망하고 말았다. - P89

이와 동일한 극단적 전문화는 사회과학과 인문학도 괴롭혔다. 전세계의 고등 교육을 담당하는 교수들은 전문가 집단을 형성하고 있다. 그 속에서 독창적인 학자로 남는다는 것은 마치 다국어를 사용하는 다문화권 도시 캘커타에서 특정한 집단의 일원이 된다는 것과 같다. - P89

(오늘날의)직업 학자들은 대개 그 집단 안에서 전문 지식과 연구주제를 가지고 경쟁하는 일 외에는 달리 무언가를 할 수조차 없다. 성공적인 학자가 된다는 것은 세포막의 생물물리학, 낭만주의 시대의 시, 초기 미국사 같은 다른 제한된 공식 연구 영역에 종사하며 일생을 보낸다는 것을 뜻한다. - P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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