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 있는 자들을 위한 죽음 수업 - 한 법의학자가 수천의 인생을 마주하며 깨달은 삶의 철학
이호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2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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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가 법의학자로 일하면서 느끼고 생각했던 것들을 독자들에게 진솔하게 전달한다. 죽음과 관련된 다양한 이야기들을 접하면서 평소 죽음에 대해 잘 생각하지 않고 살아가던 사람들에게 경각심을 일깨워주는 책이기도 하다. 개인적으로는 잘 사는 것 못지 않게 잘 죽는 것도 중요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또한 죽음과 관련된 사회제도적 시스템 전반에 대한 저자의 생각도 엿볼 수 있어서 이 쪽 분야에 뜻이 있는 독자가 있다면 지금보다 좀 더 나은 방향으로의 개선책을 생각해보는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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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읽기 시작한 부분에서 잘 사는 것, 잘 죽는 것과 관련된 이런저런 얘기들이 나오는데, 개인적으로 눈길을 끌었던 키워드는 바로 ‘웰빈well-貧‘ 이라는 것이었다. 저자는 이를 ‘잘 비우는 삶‘이라고 정의한다.

우리 각자가 가지고 있는 수많은 물건들이 있지만, 언제인지는 몰라도 결국 저세상으로 떠날 땐 하다못해 볼펜 한 자루도 가지고 갈 수 없는 게 현실이다. 저자는 본문에서 이를 ‘영원한 내 것이란 없다‘는 문장으로 표현했는데, 이 부분을 읽으면서 물욕과 탐욕의 바다에서 허우적거려왔던 내 자신의 모습을 반성하게 되었다. 이미 생활하는데 필요한 웬만한 것들은 기본적으로 갖추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냥 단지 갖고 싶다는 욕망에 이끌려 꼭 필요하지도 않은 것들을 습관처럼 구매하지는 않았는지 되돌아보게 되었다.

그리고 이 책 외에도 예전에 죽음과 관련된 주제를 다뤘던 책을 한 권 읽었던 적이 있는데, 늘 그렇듯 죽음이라는 주제를 다룬 이야기들을 읽다보면 내 삶에서 더 채워야 할 것을 생각하기보다는 덜어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되는 것 같다. 이를 통해 단지 잘 사는 것을 넘어서 잘 죽는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조금이라도 더 생각해보게 되는 것 같다.

본문에 직접적으로 나온 말은 아니지만 어쩌면 잘 죽는다는 것은 내게 주어진 자원들을 남김없이 다 쓰고 죽는 게 아닐까하는 생각도 해보게 되었다. 어차피 죽으면 어떤 것도 내 것이 아니기에 죽기 전에 이 땅에 내 소유의 자원을 하나도 남김없이 다 쓰고나서 깔끔하게 저 세상으로 가는 게 뭔가 시작과 끝이 깔끔한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정확히 기억은 안나지만 이 세상에 처음 나올 때도 다들 몸뚱아리 하나만 가지고 빈 손으로 왔던 것을 생각해본다면 더더욱 그런 생각이 든다. 글을 쓰다보니 문득 공수래 공수거空手來 空手去라는 말이 생각났다.

좋은 삶을 살아야 좋은 죽음이 오고, 평안한 죽음을 통해 좋은 삶이 완성된다. 죽음과 삶은 결코 별개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 P225

안락사로 번역되는 ‘유타나시아 euthanasia‘를 직역하면 ‘아름다운 죽음‘을 뜻한다. 그러나 원래는 불치의 병에 걸리거나 여러 이유로 치료나 생명 유지가 무의미하다고 판단되는 생물에 대해 직간접적인 방법으로 고통 없이 죽음에 이르게 하는 인위적인 행위를 의미하는 말이다. - P226

존엄사는 영어로 ‘웰다잉well-dying‘ 이라고 한다. 인간으로서 존엄성과 가치, 품위를 지키며 삶을 마무리하는 것을 의미한다. 잘 사는 것뿐만 아니라 잘 죽는 것도 중요하다는 역발상을 통해 나타난 새로운 흐름이다. 생의 마지막까지 사람답게 살다 가고 싶다는 새로운 인식이 생겨나면서 주목받은 개념이다. 무의미한 연명 치료를 중단한다는 기존의 관점에서 의미가 확산되어 최근에는 잘 죽기 위한 최종 목표로서 웰다잉이 제안되기도 했다. - P226

잘 사는 웰빙도, 잘 죽는 웰다잉도 중요하지만, 나는 여기에 한 가지 더해 ‘웰빈well-貧‘을 이야기하고 싶다. ‘잘 비우는 삶‘을 말한다. 삶을 길게 바라보면 내가 가진 어떤 것도 내 것이 아님을 알게 된다. 매일 들고 다니는 휴대폰도, 옷이며 신발도, 언젠가는 사라질 것들이다. 영원히 움켜쥘 수 있을 것만 같은 돈도, 자동차도, 집도, 죽는 순간에는 아무것도 아닌 한갓 사물에 불과하다. 그저 이 세상을 잠시 살아가는 동안 빌려 쓰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영원한 내 것이란 없다. 그렇게 가벼운 마음으로 살아가자. - P227

만일 도저히 회생 불가능하다면 연명을 중단하고 싶다고 스스로 의지를 밝힐 수 있고, 또 그 뜻대로 해줄 수 있어야 한다. "나는 이러이러한 처치를 원치 않는다." "신체 유지 장치 같은 불필요한 것은 달지 않겠다." 이런 식으로 구체적인 사항들을 생전에 미리 정리해두는 것이다. 의식을 잃거나 아픈 상태에서는 자신의 의지를 밝힐 수 없으니, 미리 준비를 해두는 것이다. - P227

자기 주도적으로 삶을 이끌어가는 것이 중요하듯 죽음에서도 마찬가지다. 자기가 주인이 되어 죽음의 태도와 방식을 결정할 수 있어야 한다. 죽음을 맞는 태도와 방식 역시 살아가는 것만큼이나 중요하다. - P228

남은 인생을 최대한 행복하게 살다가 가는 것 - P228

남아 있는 시간 동안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고, 만나고 싶은 사람을 만나고, 가고 싶은 곳에 가고 싶다. 남아 있는 시간을 병원에서 투병하며 흘려보내는 건 너무 아깝다는 생각이 든다. 며칠, 몇 달을 연장하기 위해 병마와 싸우는 고통스러운 투병을 하기보다는 좋은 사람들과 의미 있는 시간을 보내다가 마무리를 하고 싶다. 그러다 부지불식간에 찾아오는 죽음을 받아들이고 싶다. - P229

어떤 태도로 마지막을 맞느냐에 대해 더 성숙하고 자유로운 논의가 이루어져야 한다. 선택은 각자의 몫이지만 막연히 금기시하기보다는 진솔하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때 더욱 성숙한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논의들은 결국 더 좋은 삶에 대한 고민으로 이어질 것이다. - P229

어떤 태도로 사느냐에 따라 죽음의 모습이 달라진다. 또 얼마나 좋은 죽음을 맞느냐에 따라 좋은 삶이 결정된다. - P232

죽음에 대해 조금은 편안하게 이야기하는 문화, 고독한 이의 죽음을 함께 나누는 문화, 삶만큼이나 죽음도 우리 가까이에 있다는 걸 받아들이는 문화가 확산되면 좋겠다. 행복하게 사는 것 못지않게 죽음을 평온하게 받아들이는 것 역시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 P232

"큰형은 증상이 나타나기 전에 치료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이 병에 걸렸는지조차 모르지요. 둘째 형은 증상이 나타나면 바로 치료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이 중병인 줄 모르고 지나갑니다. 저는 중병만 치료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제가 가장 실력 있는 의사라고 아는 것이지요" _화타 - P235

이미 병이 깊어져서 온 사람보다 병이 심해지기 전에 미리 진단해야 하며, 그것을 예방할 수 있으면 더 좋다는 것이다. - P235

‘일구이족삼약사기一口二足三藥四技‘라는 말이 있다. 훌륭한 의사의 조건을 제시한 말이다. 첫 번째 조건은 ‘일구一口‘이다. 환자와 대화를 많이 해야 함을 의미한다. 어떠한 말과 태도로 환자에게 설명해줄 것이며, 또 환자의 말을 듣고 위로해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누군가 아픈 이의 말을 들어준다면 절반 이상은 낫는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환자의 고충을 잘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치유 효과가 있음을 내포한다. - P236

두 번째 조건 ‘이족二足‘은 부지런함을 말한다. 열심히 발로 뛰고, 환자가 있는 곳이라면 먼 거리도 마다하지 않고 가는 게 명의다. 의술의 신으로 추앙받는 아스클레피오스가 뱀이 휘감긴 지팡이를 들고 있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아스클레피오스의 지팡이는 환자가 있는 곳이라면 지팡이를 들고 어디든 마다하지 않고 가겠다는 ‘편력遍歷‘의 상징이다. 그만큼 부지런히 다니라는 뜻이다. 세 번째 ‘삼약三藥‘은 증상에 맞는 좋은 약을 쓰는 것이고, 네 번째 ‘사기四技‘는 최신 기술을 쓴다는 것이다. - P236

명의에게 중요한 것은 환자와 많은 대화를 나누는 것이며, 약과 의술은 그다음 순서라는 것이다. - P236

암 덩어리를 도려내고 좋은 약을 처방하는 것이 의사에게 주어진 역할의 전부가 아니다. 의사는 인간의 마지막 결정을 돕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만큼 이해와 공감, 배려심이 필요하며 폭넓은 사고를 할 수 있어야 한다. 기술이 아니라 영혼과 영혼이 맞닿는 치료를 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러하기에 의사는 더 많은 영혼을 경험해야 한다. - P237

의사는 영혼을 어루만져주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사실 환자를 온전히 이해하고 환자에게 공감하기 위해서는 직접 병에 걸려 아파보는 것이 최고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그럴수 없는 노릇이니 그에 준할 만큼 많은 경험이 필요하다. 그래야 다른 이의 영혼을 어루만지는 단계까지 갈 수 있다. 유일하게 인간만이 할 수 있는 것이 공감이고 배려라는 걸 기억해야 한다. 그만큼 소중하고 값진 자산이다. - P237

똑같은 진단을 받고, 똑같은 치료를 받아도 마음이 어루만져진다는 느낌이 들면 치료 효과가 다르다. - P238

약제의 효과를 판정하는 데 사용하는 방법으로 이중 맹검법이란 것이 있다. 원래 있던 약(구약)이 있고, 새로 나온 약(신약)이 있다. 환자가 이걸 구분하지 못하도록 해서 투약한 뒤 약제의 효과를 확인하는 것이다. 약제에 대해 환자가 갖고 있던 선입견, 즉 플라세보 효과placebo effect (위약 효과)가 작용하지 못하도록 하는 일종의 블라인드 테스트다. 사람이 먹은 마음에 따라 실제로 약의 효과가 달라지기도 하기에 이를 사전에 방지하는 것이다. - P239

‘플라세보placebo‘라는 말은 ‘기쁘게 하다‘라는 뜻의 라틴어 ‘플라케레 placere‘에서 유래했다. 따라서 플라세보 효과는 환자의 마음가짐이 의료적 효능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말이다. - P239

반면 플라세보 효과에는 어두운 면도 존재하는데, 이걸 노세보 효과nocebo effect라고 한다. 환자가 어떤 약에 대한 부정적인 믿음을 가지게 되면 실제로 부정적인 결과가 나타나는 현상을 말한다. 생각이 실재하는 결과를 만들어낼수 있다는 것이다. - P239

휘발유 차에 몰래 경유를 넣으면 절대 차가 갈 수 없다.
그런데 사람은 다르다. 휘발유 차에 경유를 넣어도 갈 수 있는 게 사람의 마음, 바로 마음의 힘이다. 자신의 믿음에 따라 효과가 달라지는 것, 그것이 바로 플라세보다. - P239

약의 효과를 판별하기 위해 플라세보, 즉 위약 효과를 걷어내는 작업을 한다는 건 역으로 위약 효과가 상당히 크게 작용한다는 뜻이다. - P240

결국 중요한 건 마음의 자세다. 비관주의자는 기회를 만나도 안 될 이유를 찾아내고, 낙관주의자는 곤경에 빠져도 거기서 기회를 찾아낸다. 자기 업을 대할 때 스스로 낙관하고 기회를 찾아내는 사람은 분명 남들과는 다른 태도로 일할 것이다. - P240

직업을 가리키는 말 중에 ‘사‘자로 끝나는 것이 많다. 의사, 변호사, 검사, 판사... 변호사는 ‘선비 사士‘ 자를 쓴다. 공부하는 사람이라는 의미다. 검사와 판사는 ‘일 사事‘ 자를 쓴다. 국가의 사무처로 일을 하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반면의사는 ‘스승 사師‘자를 쓴다. 간호사, 미용사 등도 스승 사를 쓴다. 가르치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혼자서 책을 붙들고이론만 공부해서는 안 되고, 스승으로부터 직접 배우며 실기를 익혀야 온전히 그 일을 맡아 해낼 수 있는 직업이라는의미일 것이다. 스승으로부터 배우고, 자신도 스승이 되어가르쳐야 한다. - P241

질병을 진단하는 일은 ‘가르치는‘ 일보다는 ‘알려주는‘ 일에 가깝다. 그래서 한 사람을 ‘인체‘로만 볼 것이 아니라 ‘인간‘으로 보는 게 중요하다. 인체의 구조, 인체 반응과 병태생리 같은 인체에 대한 배움에서 시작하더라도 마지막에는 인간을 알아야 한다. 인간을 배우지 못하고 인체만 배우다 보면 진료 현장에서 환자들을 맞았을 때 미숙할수밖에 없다. - P241

사람은 물체가 아니기 때문에 자신이 살아가는 시대적 상황과 유기적 관계를 맺는다. 그래서 "당신이 여기까지 온 것은 당신의 문제가 아닙니다. 당신이 속했던 환경의 문제이고 관계의 문제이고 사회 집단의 문제입니다"라는 걸 알려줄 수 있어야 한다. 마치 그림 하나를 놓고 관련된 전반적인 설명을 해주는 도슨트처럼. ‘가르치다‘의 의미를 계속 되새겨야 한다. - P242

‘공감‘의 의미를 가장 잘 나타내는 영어 표현으로 "다른 사람의 신발을 신고 걸어보라 Put yourself in someone‘s shoes"라는 말이 있다. - P242

겉으로 좋아 보이는 신발도 막상 신으면 발이 아플 수 있듯이 세상 모든 일이 직접 경험해보지 않고는 모르는 것이다. 하물며 다른 이의 고통을 겉으로 봐서는 제대로 이해하기 어렵다. 직접 신발을 신어보듯이, 타인의 감정과 고통에 최대한 자신을 이입하면서 공감해보는 연습이 필요하다. - P243

의사는 영혼으로 아픈 환자를 보아야 하기 때문에 많은 경험을 할수록 좋다 _플라톤《국가》 - P243

환자를 질병의 관점에서만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사람 그 자체로서 이해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런 의미에서 인문학이 중요하다. - P244

‘인문‘은 공부해야 하는 게 아니고 느끼는 것이다. 사람들 사이의 공기 같은 것이다. 사람들이 서로 관계 맺고 살아가는 것 자체가 인문이다. - P244

어떤 것을 공부한다는 것은 나와 그 세계를 분리해서, 곧 대상화시켜 생각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미 이 사회 속에서 살아가고 있지 않은가. 그러니 공부한다는 마음으로 접근하기보다는 관심 어린 시선으로 먼저 공감하려고 노력하면 좋겠다. 내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안테나를 세우고, 현상과 이면을 읽어내는 안목과 인사이트가 필요하다. - P245

나와 타인, 나와 사회를 분리하고 대상화하는 공부가 아니라 함께 어우러져 살아가기 위한 공부가 필요하다. - P246

아무리 많은 물을 부어도 깨진 곳의 위치를 넘어 물이 채워질 수 없듯이 가장 약한 부분이 우리 사회의 높이를 결정한다. 이는 독일의 화학자 리비히 von Liebig가 제시한 ‘최소율의 법칙‘과도 통한다. 리비히에 따르면 "식물의 성장을 좌우하는 것은 넘치는 요소가 아니라 가장 모자라는 요소"라고 한다. 식물이 성장하는 데는 탄소, 산소, 수소, 질소, 인산, 유황, 칼륨, 칼슘, 마그네슘, 철 이렇게 꼭 필요한 10가지 영양소가 있다. 이 중 9가지 영양소가 필요량의 100배, 1,000배가 된다 해도 나머지 하나의 영양소가 부족하면 결국 그 식물은 제대로 성장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 역시 사회의 현주소를 살피려면 가장 낮은 곳을 봐야 한다. - P250

물통은 구멍이 난 부분 이상으로 물을 채울 수 없고, 목걸이가 끊어질 때도 가장 약한 고리가 먼저 끊어진다. 우리 사회 역시 가장 약한 부분에서 무너지기 시작한다. 그래서 자연재해든 인재든 언제나 가난한 이들, 사회에서 소외받은 이들이 가장 큰 희생자가 된다. 그리고 그렇게 시작된 희생과 비극은 결국 사회 전체로 번진다. 이것이 우리가 불편을 감수하고, 가장 약한 곳에서 출발해야 하는 이유다. - P252

우리 사회는 새들을 위해 감나무의 감을 다 따지 않고 남겨두는 사회였다. 힘들게 일한 소를 위해 걷기를 택한 농부의 마음이 있던 사회였다. 우리는 이런 여유와 공감, 연대의식을 갖고 있었던 나라다. 그리고 분명 우리 안에는 아직도 그런 것들이 숨 쉬고 있다. - P254

죽음에는 세 종류가 있다. ‘나의 죽음, 너의 죽음, 그들의 죽음‘이다. 나의 죽음은 경험할 수 없다. 너의 죽음은 가족과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이라 상실과 애도가 있다. 그들의 죽음은 나하고 상관없는 죽음이다. 하지만 조금 생각을 바꿔서 ‘나의 죽음, 너의 죽음, 우리의 죽음‘이 있다고 생각했으면 좋겠다. 그들의 죽음이 아닌 우리의 죽음. 그들로 대상화하는 게 아니라 우리로 포용하는 것이다. - P255

나뭇잎은 바람에 흩날려도 서로 간에 상처를 주지 않는다. - P255

스승님들의 등을 보고 걷던 내가 이제는 누군가를 이끌어주는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앞으로 선생님보다 더 크고 따뜻한 스승이 되도록 노력하겠다고. - P2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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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식주의자 (리마스터판) -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창비 리마스터 소설선
한강 지음 / 창비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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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채식주의자', '몽고반점', '나무 불꽃' 이렇게 크게 세 챕터로 구성되어 있다. 개인적으로는 사전에 아무것도 모르고 읽어나갔기에 처음에는 각각의 단편소설 묶음인줄로 착각했었는데, 읽다보니 3개가 제목만 다를 뿐 묘하게 이어져 있는 이야기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가장 먼저 첫번째 챕터인 '채식주의자'는 영혜라는 여자와 그녀의 남편 간에 있었던 얘기들을 다룬다. 이 책의 핵심인물인 영혜는 어느날 문득 채식을 하겠다고 선언하고는 고기와 관련된 것들은 일절 먹지 않는다. 본문에 따르면 어떤 기묘한 꿈을 꿔서 그렇다는 식으로 얘기가 전개되는데, 솔직히 뒤에 나오는 몽고반점과 나무 불꽃을 읽지않았다면 영혜의 행동을 쉽사리 납득하기가 어렵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미스테리한 영혜의 행동과 그녀가 풍기는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느낄 수 있었다.

뒤이어지는 '몽고반점'에서는 채식주의자에 등장했던 영혜와 영혜의 친언니인 인혜의 남편이 주요 인물이다. 여기서 몽고반점은 영혜의 둔부에 있는 커다란 몽고반점을 지칭하는 것인데, 이와 관련하여 인혜의 남편이 평소 자신이 갖고 있던 성적 판타지를 영혜를 통해 실현하려는 장면이 나온다. 일반적인 상식선에서는 다소 이해하기 난감한 장면들이 많이 나오는데, 대략적인 얘기만 잠시 해보자면 무슨 몸에다가 이런저런 화려하고 아름다운 색채를 가진 꽃 그림같은 것을 그린다. 때마침 이 그림이 채식주의자가 된 영혜의 취향과 조화(?)를 이루면서 인혜의 남편이 영혜를 통해 실현하고자했던 성적 판타지가 소설 속에서 얼마간 실현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를 눈치챈 인혜는 그들을 신고하고 정신병원으로 보내버리면서 다음 챕터인 '나무 불꽃'이 시작된다.

'나무 불꽃'은 앞서 언급한 인혜와 영혜 자매가 핵심 인물이 되어 관련된 이야기가 전개된다. 이 챕터의 핵심 내용은 정신병원에 입원한 동생을 만나러 인혜가 병문안을 가서 벌어지는 이런저런 에피소드들에 관한 것이다. 정신병원에 있어서였는지는 몰라도 영혜는 자꾸 이상한 이야기를 언니인 인혜에게 해댄다. 한 예를 들자면, 자기가 물구나무를 섰는데 무슨 손에서 뿌리가 뻗어나가고 다리에서 가지가 뻗어나갔다느니 하는 등의 현실적으로 이해하기 힘든 소리를 종종 했던 것이다.

이 소설(나무 불꽃)의 후반부를 읽다보면 영혜의 정신이 이상해진 이유에 대해 짐작해볼만한 단서가 하나 나온다. 그런데 이는 앞서 나왔던 이야기인 '채식주의자'에서 나왔던 에피소드 중 하나와도 관련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아버지의 손찌검' 이었는데, 아버지가 크게 혼내기 전에 눈치껏 행동했던 다른 두 남매(인혜, 영호)와는 달리 영혜는 상대적으로 눈치가 없고 고지식한 면이 있어서 그랬는지 다른 형제자매에 비해 상대적으로 아버지의 비위를 잘 맞추지 못하다 결국 아버지의 분풀이 대상이 되어버린 것이었다. 더군다나 말이 많이 없는 내성적인 성격이었던 영혜였던지라 아버지로부터 받은 폭력이 단지 물리적 상처를 남긴 것만이 아니라 마음의 상처 또는 정신적인 트라우마까지 남긴 건지도 모르겠다.

결국 소설 전체를 다 읽고 돌이켜보니 이러한 트라우마가 발단이 되어 영혜는 꿈을 꿔도 괴상하고 무서운 꿈을 자주 꾸게 된 것이고 이러한 무의식이 정신을 지배하자 뭔가 폭력적으로 느껴지는 육식을 거부하고 상대적으로 폭력적이라고 느껴지지 않는 채식만을 하는 채식주의자가 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이것은 지극히 주관적인 해석이기에 이 작품을 쓰신 작가님의 생각과는 얼마든지 다를 수 있다는 점을 밝힌다. 다만 독자인 내가 이런식으로 추론을 해보았다는 것이다. 쉽게 말해 소설 위에 작은 소설(?)을 하나 더 써봤다는 말이다.

또한 마지막에 나온 '나무 불꽃'에서는 영혜의 친언니인 인혜가 머릿속으로 하는 생각들을 종종 엿볼 수 있었는데, '이 모든 게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라는 명확한 답을 내리기 어려운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는 모습을 보면서 인생이라는 것이 내가 생각하거나 바라는대로 흘러가는 것이 참으로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물론 소설 속에서 인혜는 적어도 그녀 자신만 놓고 본다면 성실하게 자기 할 일 잘하면서 열심히 살아온 사람이었지만, 인생이라는 게 나 하나만 잘한다고 다 잘 풀리는 게 아니지 않은가. 가족이나 친구, 지인 등 자기 주변 사람들을 잘 만나는 것도 인생길을 순탄하게 풀어나가는데 있어 자기자신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이다. 여기서 자기자신 외에 나머지 요소들을 많은 사람들은 단순하게 '운'이라는 말로 퉁쳐서 표현하기도 하는데, 이 소설을 읽고 지금 이 리뷰를 쓰면서 개인적으로는 '운칠기삼'이라는 사자성어의 의미가 좀 더 생생하고 실감나게 느껴졌다. 인생은 결국 내가 통제할 수 있는 것보다는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요소들이 훨씬 많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 소설 속에서도 인혜의 주변 인물들을 보면 인혜의 남편도 인혜가 전혀 통제할 수 없는 괴상한(?) 성적 판타지에 빠져서 가정을 파탄 냈고, 동생인 영혜는 앞서 말했던 것처럼 아버지의 반복된 손찌검으로 인해 정신이상자가 되어 정신병원에 들어가서 결국 거기서 헤어나오질 못한다. 그리고 이 소설에서 그나마 정상인이라고 할 수 있는 인혜마저도 자기 주변 사람들로 인해 조금씩 정신이 피폐해져가는 모습을 보면서 참 인생이라는 게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음을 다시금 느끼게 된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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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까지 리뷰를 쓰고 이 책에 대해 다른 분들이 써주신 리뷰들을 찾아서 몇 개 읽어보았는데, 정말 심도있는 이해와 감상을 남겨주신 몇 분의 리뷰를 만날 수 있었다. 개인적으로 내가 놓쳤거나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들에 대한 얘기들도 읽어볼 수 있었기에 이 작품을 좀 더 다양한 각도에서 바라보는데 도움이 되었다. 또한 수준 높은 리뷰들을 보면서 이 작품에 대한 나의 이해나 감상이 상대적으로 좀 부족했음을 자각할 수 있었다. 이 자리를 빌어 심도있는 리뷰를 남겨주신 독자분들께 감사드린다. 많은 공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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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식주의자 (리마스터판) -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창비 리마스터 소설선
한강 지음 / 창비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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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에 나온 표면적인 글 자체는 잘 읽혔기에 가독성이 좋았지만 그 내용의 이면에 있는 작가의 의도를 온전히 파악하는데 있어서는 개인적으로 그렇게 호락호락한 책은 아니었다. 그래도 완독하고 난 뒤 내 나름대로 주관적으로 느꼈던 것들과 몇몇 심도있는 다른 독자님들의 리뷰를 통해 많은 것을 느끼고 배울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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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 -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문학과지성 시인선 438
한강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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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집을 통해 저자의 감정선이 어떤 느낌인지 엿볼 수 있었다. 저자의 다른 작품들을 읽을 때 여기서 느꼈던 감정선을 다시금 떠올리며 읽어나간다면 작품의 이해와 감상에 조금이나마 그 깊이를 더할 수 있을 듯하다. 또한 마지막에 수록된 해설자의 설명을 통해 내가 미처 느끼지 못했던 것들까지도 배울 수 있어서 큰 도움이 되었다. 책의 두께는 얇지만, 그 속에 내재된 의미의 두께는 결코 얇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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