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이 온다 -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한강 지음 / 창비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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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 5월 그날의 고통과 아픔을 직접 경험해보지 못한 사람들이 이 소설을 읽어본다면 그 시대를 온 몸으로 겪어온 사람들의 물리적, 정신적 상처를 조금이나마 헤아려볼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개인적으로는 그날의 잔혹함을 이 소설만큼 적나라하게 표현한 책이 과연 있을까 싶을 정도로 엄청난 몰입감을 가지고 읽을 수 있었다. 이러한 비극이 이 땅에서 다시는 일어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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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읽는 부분에서는 소설 속 수많은 등장인물들 중 임선주라는 사람이 화자가 되어 과거의 끔찍했던 사건들을 회상하는 장면이 나온다. 임선주는 5월 당시 동료들과 함께 시민군의 시신을 수습했던 사람인데, 시신을 수습할 당시 여러모로 상황이 여의치 않아 이런저런 고민 끝에 시신을 태극기로 감쌌다고 한다.

당시 선주와 함께 시신을 수습했던 동료인 동호와 은숙은 국가가 군인들을 시켜서 시민군을 죽였는데, 국가를 상징하는 태극기로 시민군의 시신을 덮는 것이 과연 맞는 것인가 하는 의문을 가졌다. 이 의문은 소설의 앞부분에 나왔던 것인데 독자인 나도 이 부분을 읽으면서 동호와 은숙의 논리에 자연스럽게 동의할 수 있었다. 뭔가 아이러니한 상황이지 않은가. 시민군을 죽인 국가를 상징하는 국기를 시민군의 시신에 덮는다는 행위 자체가 말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그당시를 다시금 떠올린 선주는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군인들의 총에 맞아 죽은 사람들의 죽음이 아무런 의미가 없게 된다(그저 도륙된 고깃덩어리로만 남을 뿐이다)는 생각때문에 시민군의 시신들에 태극기를 덮고 묵념을 하고 애국가를 불렀다고 회고한다.

지난번 포스팅의 후반부에 나왔던 문장 중에 ‘우리는 고귀해‘ 라는 것이 있었다. 이 말은 과거 선주와 함께 일했던 김성희라는 사람이 자주 했던 말인데, 독자인 나는 위에서 언급한 태극기를 시신위에 덮어주었던 선주의 행동도 어쩌면 ‘우리는 고귀해‘ 라는 김성희의 말에 영향을 받아 나온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고귀한 한 사람 한 사람에게 할 수 있는 최선의 예우를 하는 것이 ‘우리는 고귀해‘라는 생각을 제대로 실천할 수 있는 방법 중 하나가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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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마지막 파트인 6번째 파트에서는 소설 속 주인공인 동호의 엄마가 그 시절의 기억을 회상하면서 이런저런 얘기들을 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순수했던 시절을 뒤로 하고 군인들의 총칼에 짓밟힌 어린 학생들의 이야기를 읽다보면 참 이게 무슨 일인가 싶다. 개인적으로는 이 부분을 읽으면서 잔혹함과 동시에 허무함이 느껴져서 마음이 갑절로 먹먹해졌던 것 같다.

태극기로, 고작 그걸로 감싸보려던 거야. 우린 도륙된 고깃덩어리들이 아니어야 하니까, 필사적으로 묵념을 하고 애국가를 부른 거야. - P173

그들이 욕설을 뱉으며 당신의 몸에 물을 끼얹던 순간을 등지고 여기까지 왔다. 그 여름 이전으로 돌아갈 길은 끊어졌다. 학살 이전, 고문 이전의 세계로 돌아갈 방법은 없다. - P174

그 발소리가 누구의 것인지 나는 몰라.

언제나 같은 사람인지, 그때마다 다른 사람인지도 몰라.

어쩌면 한사람씩 오는 게 아닌지도 몰라. 수많은 사람들이 희미하게 번지고 서로 스며들어서, 가볍디가벼운 한 몸이 돼서 오는 건지도 몰라. - P174

만일 혼들의 장소가 있다면 그곳은 어두울까, 어렴풋이 밝을까. - P175

우리들을 희생자라고 부르도록 놔둬선 안돼. - P175

나라에서 죽인 동생 원수를 무슨 수로 갚는다냐. - P182

인자는 암것도 모르겄어야. - P183

그리 허망하게 죽을 것을, 왜 끝까장 나를 안 들여보내줬으까이. - P185

그라제, 내가 그 불쌍한 남매를 원망하면 큰 죄를 받제. - P187

그 고운 처녀가 우리 집에 들어와서 빨래 바구니를 보듬고, 물이 뚝뚝 떨어지는 운동화하고 칫솔을 들고 저 마당을 왔다 갔다 하던 일이 무신 전생의 꿈 같아야. - P187

목숨이 쇠심줄 같어서 너를 잃고도 밥이 먹어졌제. - P187

네 피가 아직 안 말랐는디. - P188

무섭지 않았어야.
죽어도 좋다는 마음인디, 무서울 것이 어디 있겄냐. - P188

엄마들, 여기서 왜 이러고 있소? 엄마들이 무슨 죄를 지었소? - P189

맞어, 내가 무슨 죄를 지었단가. - P189

벽에 걸린 살인자 사진을 끌어내렸다이. 밟아 부순게 발에 유리가 박혔다이. 눈물이 흐르는지도 피가 튀는지도 몰랐다이. - P189

난간에 기대서서 현수막을 길게 내리고 소리 질렀다이. 내아들을 살려내라아. 살인마 전두환을 찢어죽이자아. 정수리까지 피가 뜨거워지게 소리 질렀다이. 경찰들이 비상계단으로 올라올 때까지, 나를 들쳐메고서 입원실 침대에 던져놓을 때까지 그렇게 소리 질렀다이. - P190

그저 겨울이 지나간게 봄이 오드마는. - P190

점퍼의 지퍼를 끝까지 올리고, 해가 질 때까지 여기 있을 것이다. 소년의 얼굴이 또렷해질 때까지. 그의 목소리가 들릴 때까지. 안 보이는 마룻장 위를 걸어가는 그의 뒷모습이 어른어른 비칠 때까지. - P200

그 시절, 머리를 깎고 교복을 입은 소년들은 모두 비슷해 보였는지도 모른다. 저렇게 순한 외꺼풀 눈은. 키가 크느라 야윈 볼과 기름한 목은. - P203

구할 수 있는 모든 자료를 읽는다는 것이 처음의 원칙이었다. 십이월 초부터 다른 아무것도 읽지 않고, 글을 쓰지 않고, 되도록 약속도 잡지 않고 자료를 읽었다. 그렇게 두달이 지나 일월이 끝나갈즈음 더 계속할 수 없다고 느꼈다.
꿈 때문이었다. - P203

입속이 타들어가던 한순간 눈을 떴다. 꿈이었어. 움켜쥐고 있던 주먹을 펴면서, 어둠속에서 반복해서 중얼거렸다. 꿈이었어, 꿈이었어. - P204

예식장의 샹들리에는 화려했다. 사람들은 화사하고 태연하고 낯설어 보였다. 믿을 수 없었다. 사람이 얼마나 많이 죽었는데. 평론을 쓰는 한 선배는 나에게 왜 소설집을 보내주지 않느냐며 웃으면서 항의했다. 믿을 수 없었다. 사람이 얼마나 많이 죽었는데. - P205

나는 기다리고 있다. 아무도 올 사람이 없지만 기다린다. 내가 이곳에 있다는 걸 아무도 알지 못하지만 기다린다. - P205

한참 걷다가 오른손이 여태 가슴 왼편에 얹혀 있었던 걸 깨달았다. 심장 언저리에 금이 벌어진 것처럼. 그렇게 해야 무사하게 운반할 수 있는 무엇이 된 것처럼. - P206

1979년 가을 부마항쟁을 진압할 때 청와대 경호실장 차지철은 박정희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전해진다. 캄보디아에서는 이백만명도 더 죽였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못할 이유가 없습니다. - P206

그 경험은 방사능 피폭과 비슷해요,라고 고문 생존자가 말하는 인터뷰를 읽었다. 뼈와 근육에 침착된 방사성 물질이 수십년간 몸속에 머무르며 염색체를 변형시킨다. 세포를 암으로 만들어 생명을 공격한다. 피폭된 자가 죽는다 해도, 몸을 태워 뼈만 남긴다 해도 그 물질이 사라지지 않는다. - P207

광주는 고립된 것, 힘으로 짓밟힌 것, 훼손된 것, 훼손되지 말았어야 했던 것의 다른 이름이었다. 피폭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 광주가 수없이 되태어나 살해되었다. 덧나고 폭발하며 피투성이로 재건되었다. - P207

허락이요? 물론 허락합니다. 대신 잘 써주셔야 합니다. 제대로 써야 합니다. 아무도 내 동생을 더이상 모독할 수 없도록 써주세요. - P211

특별히 잔인한 군인들이 있었던 것처럼, 특별히 소극적인 군인들이 있었다. - P212

패배할 것을 알면서 왜 남았느냐는 질문에, 살아남은 증언자들은 모두 비슷하게 대답했다. 모르겠습니다. 그냥 그래야 할 것 같았습니다. - P213

그들이 희생자라고 생각했던 것은 내 오해였다. 그들은 희생자가 되기를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거기 남았다. - P213

그 도시의 열흘을 생각하면, 죽음에 가까운 린치를 당하던 사람이 힘을 다해 눈을 뜨는 순간이 떠오른다. 입안에 가득 찬 피와 이빨 조각들을 뱉으며, 떠지지 않는 눈꺼풀을 밀어올려 상대를 마주 보는 순간 자신의 얼굴과 목소리를, 전생의 것 같은 존엄을 기억해내는 순간 그 순간을 짓부수며 학살이 온다, 고문이 온다, 강제진압이 온다. 밀어붙인다. 짓이긴다. 쓸어버린다. 하지만 지금, 눈을 뜨고 있는 한, 응시하고 있는 한 끝끝내 우리는..... - P213

이제 당신이 나를 이끌고 가기를 바랍니다. 당신이 나를 밝은 쪽으로, 빛이 비치는 쪽으로, 꽃이 핀 쪽으로 끌고 가기를 바랍니다. - P213

목이 길고 옷이 얇은 소년이 무덤 사이 눈 덮인 길을 걷고 있다. 소년이 앞서 나아가는 대로 나는 따라 걷는다. - P213

날을 받아 유족들이 다 같이 이장을 했는데, 관들을 열어보니 처참했던 모습 그대로인 겁니다. 유골에 비닐이 친친 둘러져 있고, 피묻은 태극기가 덮이고………… 동호는 그래도 처음에 가족이 수습했기 때문에 유골이 얌전했습니다. 우린 무명천을 한마 끊어가서, 누구에게도 맡기기 싫어 뼈 한마디 한마디를 직접 닦았어요. 어머니가 머리 부분을 맡으면 충격이 크실까봐, 내가 얼른 집어서 이빨 하나하나까지 정성껏 닦아줬습니다. 그랬어도 그 일을 이기기가 힘드셨던가봅니다. 그때 내가 우겨서 집에 계시게 했어야 했는데. - P214

어젯밤 그의 형은 계속해서 말했다. 동생이 운이 좋았다고, 총을 맞고 바로 숨이 끊어졌으니 얼마나 다행이냐고, 그렇게 생각하지 않느냐고, 이상하게 열기 띤 눈으로 내 동의를 구했다. 동생과 나란히 도청에서 총을 맞았으며 동생과 나란히 묻힌 고등학생 하나는 바로 안 죽고 살아 있다가 확인사살을 당했던 모양이라고, 이장하면서 보니 이마 중앙에 구멍이 뚫리고 두개골 뒤쪽은 텅 비어 있었다고 말했다. 머리가 하얗게 센 그 학생의 아버지가 입을 막고 소리 없이 울었다고 말했다. - P215

반투명한 날개처럼 파닥이는 불꽃의 가장자리를 나는 묵묵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 P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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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 정신>이라는 잡지에 글을 쓰는 강석원이 사망한 서인주에 대해 자신만의 왜곡된 관점으로 쓴 평전을 내려고하자 서인주의 친구인 이정희는 서인주의 자식인 민서에게 악영향이 갈 것을 우려하여 그 평전의 출간을 막기위해 사방팔방 수소문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는 인주에 관해 왜곡되지 않은 올바른 정보를 얻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

여기저기 수소문한 끝에 이정희는 친구인 서인주가 예전에 그림을 전시했다던 명 화랑의 관장인 명은숙을 만난다. 명은숙은 그간 자신의 화랑에서 있었던 서인주와 관련된 이런저런 얘기들을 해준다. 인주는 처음엔 그닥 유명세가 없었으나 이후 이어진 몇 번의 전시를 통해 유명세가 생겼고 이후에 상업 화랑들이 인주에게 달려들면서 나중에는 명 화랑보다 규모가 좀 더 큰 대형 화랑인 P화랑으로 옮겨갔다고 한다. 아이를 혼자 키워야 했던 인주의 상황상 경제적으로 훨씬 더 나은 대우를 해주는 P화랑의 유혹을 뿌리치기는 매우 힘들었을 거라고 명은숙은 회고한다.

근데 아무래도 P화랑은 대형 상업 화랑이다보니 조금만 성과가 안보인다 싶으면 가차없이 내치는 경우들이 많았다고 하는데, 이로인해 자신만의 색깔이 강했던 인주가 결과적으로 자기 색깔을 잃어버리면서 괴로워했을거라는 게 명은숙의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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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이어 정희가 수소문끝에 만난 사람은 인주가 과거에 일했던 미술학원의 원장인 주승우였다. 그는 인주를 회고하면서 그렇게 좋은 사람이 없었다며 악착같이 살려고 발버둥쳤던 사람이기에 절대로 자살할 사람이 아니라고 강하게 말한다.

한편 여기 별도로 밑줄치진 않았지만, 서인주와 관련하여 만나달라는 이정희의 부탁을 끝내 거절하는 소설 속 인물들도 적지 않았다. 자기와 직접적으로 상관없거나 딱히 신경쓰고 싶지 않다는 단순한 이유에서였다. 이런 건 어쩌면 소설 뿐만 아니라 요즘 우리 시대 사람들의 각박한 모습과도 일정부분 닮아 보인다.

계속 읽다보니 이러한 이정희의 수소문과는 별개로 강석원이 결국 서인주에 관한 평전을 책으로 출간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아직 그 책에 정확히 어떤 내용이 나와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정희의 입장에서는 위기상황인 것은 분명해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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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서 7장 ‘얼음 화산‘ 이라는 챕터로 넘어가는데 여기선 김영신이라는 인물이 새롭게 나온다. 근데 실은 엄밀히 말하면 새롭게라고 하기도 조금 애매한게, 위에서 언급했던 이정희의 수소문 과정에서 김영신의 이름이 아주 잠깐 나오긴 했었다. 다만 그때는 서인주에 대한 얘기를 부탁했던 이정희와의 만남을 단칼에 거절했었기에 그냥 스쳐지나가는 인물 정도로만 여겼었는데, 그런 스쳐지나가는 인물의 구체적인 이름이 나왔던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새롭게 시작하는 7장에서 김영신이 이야기 속의 핵심 인물로 중심이 되는 것을 보며, 소설에서 구체적인 이름이 나온다는 건 분명 그럴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온 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문제는, 서인주 씨가 정말 그리고 싶은 게 그 시리즈는 아니었을거란 거죠. 가슴에 불이 타는 사람인데, 그냥 불이 아니라 시커먼 불이 타는데, 그렇게 고요한 숲 그림은 어쩌다 한 번, 문득 마음이 고요할 때 나오는 거지. 그래서 죽은 것 아닐까 싶어요. 자기 안에서 뭐랄까, 분열이 싹튼 거겠죠. - P203

《미술정신》에 실린 작품은 흥미롭게 봤어요. 도판만 봐서 정확히 말하긴 어렵지만, 이미지 자체는 괜찮더군요. 문제는 빨리 자기 작업을 브랜드로 만들어서 팔아야 살아남는 게 이 바닥인데, 구상하다 비구상하다, 난데없이 한지에 먹으로 재료를 바꾸고…………… P화랑에선 좋게 보지 않았을 거예요. 그쪽 사람들, 작가들 피를 말리는 걸로 유명해요. 시간을 안 주죠. - P204

강석원 교수를 만나봤지요? 서 작가와 조금이라도 인연이 있는 사람이면 전부 인터뷰했다던데. 거절하고 싶었지만, 고인을 생각해서저도 인터뷰에 응했어요. 저희로선 강 교수한테 섭섭한 게 많아요. P화랑 대표를 서 작가한테 소개시켜준 장본인이니까. 지금 유고전을 기획하는 모양인데, 물론 일이 이렇게 됐으니 P화랑이랑 하는 게 당연하지만, 저희를 이렇게까지 철저하게 배제할 순 없는 거예요. - P204

가난, 빌어먹을 가난이 죄지. 홍콩에서 경매로 그림 몇 점 판 돈이면 다 메우고 꿰매고, 팔자 고칠 수 있는 가난. - P208

말도 안 되지. 서 선생이 왜 자살을 해. 당연히 사고지. 서 선생을 눈곱만큼이라도 아는 사람은 그런 말 못 해. 얼마나 아등바등 살았어. 얼마나 몸부림을 쳐댔어. 살려고 그렇게 몸부림을 쳤지, 죽으려고 그랬겠어요? 애는 또 얼마나 어리고. 그 애한테 얼마나 끔찍했어? 그렇게 정 많은 사람은 자살 못 해. 여기 배우는 애들한테도 정성이었어요. 안 해도 될 일들을 다 껴안고 골병이 들었지. 다들 그렇게 생각한다구? 데려와봐요. 평론가? 교수? 미술판 사람들? 웃기고들 있군. 미안해요. 내가 요즘 마음이 이래.. 이 빌어먹을 눈물이. - P208

모르겠어, 이 모든 게 어떤 미친 짓이었는지. 무엇을 위해 나는 떠벌이고, 미소 짓고, 변명하고, 애원하고, 간절하고, 진지하고, 걷고, 뛰고, 인파를 헤치고, 먹고, 굶고, 목마르고, 계단을 오르고, 엘리베이터 단추를 누르고, 명함을 받고, 화장실에서 루주를 바르고, 눈을 맞추고, 미소 짓고, 고개를 끄덕이고, 결의에 차고, 기다리고, 메모를 남기고, 전화번호를 받아 적고, 사과하고, 감사하고, 수없이 네 이름을 말하고, 휴대폰 배터리를 바꿔 끼우고, 계단을 내려가고, 시계를 보고, 걷고, 간판을 읽고, 발뒤꿈치가 벗겨지고, 그리고 - P211

이 책을 펼치고 싶지 않아.
펼치는 순간 책장들이 부스러질 것 같아. 손가락에 엉기며 녹아내릴것 같아. 촛농처럼 끓어오를 것 같아. - P211

강석원이 창조해낸 인주는 책장과 책장 사이를 절름거리며 건너다녔다. 강석원의 문체는 딱딱함과 열의, 반짝임과 둔감함, 진지함과 얄팍함이 뒤섞인 묘한 것이었다. 무엇인가가 불쾌했고, 무엇인가가 가짜였고, 동시에 무엇인가가 진짜였다. - P212

흔히 예술혼이라고 불리는 과장된 열정, 새 발자국 같은 필체로 적힌 편지들ㅡ그중 어떤 것들은 나를 실망시켰다ㅡ, 지인들이 부풀리고 때로 미화한 기억들을 나는 읽었다. - P212

허점이 드러날 만한 곳마다 수사와 감상이 조악하게, 때로는 말끔하게 덧칠된 책을 읽었다. - P213

아름답게 편집된 책, 방금 세상의 것이 된 책, 인주가 무수히 덧그은 검은 선들이 꿈틀거리는 책을 읽었다. 손가락에 닿은 책장들이 뜨겁게 부스러질 것 같은 책. 불같은 책. 아니, 얼음 같은 책. 소리치는책. 아니,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 책. 벙어리 책. 더러운 책. 피 한 방울 묻지 않은 책. 방금 이 세상에 폭약처럼 던져진 책. 내 두 눈으로 똑똑히 읽은 책. 한 문장 한 문장, 한 단어 한 단어가 짧고 얕은 무수한 칼자국들처럼, 수만 개의 촘촘한 바늘처럼 이마를 가르고 들어와 박힌 책을 읽었다. - P213

......달이 지구를 중심으로 공전하며 우리에게 보이는 면이 언제나 같은 쪽이라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오랜 세월 운석들과 충돌해 수두를 앓은 흉터 같아진 뒷면은, 오직 우주선에서 찍은 사진으로만 관측할 수 있다. - P218

운이 좋았기 때문에 나는 서인주라는 사람의 가까이에 있었다. 그녀는 타고난 위대함의 씨앗을 가진 예술가였고, 주변을 감화시키는 힘을 가진 특별한 자연인이었다. 바로 그 때문에 그녀의 마지막 선택은 우리에게 더욱 큰 충격이었다. 그녀가 살아 있는 육체를 가지고 우리를 둘러싼 궤도를 돌고 있을 때, 안타깝게도 우리는 그녀의 뒷면을 보지 못했다. 수없이 부서지고 파인 자국들을 어루만져주지 못했다. - P218

그녀는 작업실의 달력 가장자리에 적었다. ‘내가 아픈 곳은 달의 뒷면 같은 데. 피 흘리는 곳도, 아무는 곳도, 짓무르고 덧나는 곳, 썩어가는 곳도 거기 당신에게도, 누구에게도, 나 자신에게도 보이지 않는다.‘ - P219

알고 있다. 로베르 르파주의 일인극 「달의 저편」의 대사처럼, 그녀의 미술관을 지어야 할 진실한 장소는 오직 달의 뒷면뿐이다. 우리들의 시선으로 더럽혀지지 않을 시시각각 충돌해오는 운석들과 맞서 부서지기를 택해야 할 그 고요한 곳...... - P219

강석원은 알지 못했거나, 의도적으로 누락했다.
인주가 달력에 쓴 것은 내가 쓴 대사였다.
십일 년 전 공연되었던, 모두에게서 잊혀진 연극의 무대에서, 이제는 퇴역 배우가 된 여주인공은 객석을 향해 독백했다.
내가 아픈 곳은 달의 뒷면 같은 데예요. 피 흘리는 곳도, 아무는 곳도, 짓무르고 덧나는 곳, 썩어가는 곳도 거기예요. 당신에게도, 누구에게도...... 나 자신에게도 보이지 않아요. - P219

컴퓨터 책상 위에 걸린 4호 크기의 액자에 담긴 것은, 얼음에 덮인 미시령의 흑백사진이었다. - P226

어린 지구는 처음에 마그마가 일렁이는 붉은 얼굴이었다가, 수천만년 동안 펄펄 끓는 비를 맞고서 파란 얼굴이 되었고...... 빙하에 덮이면 하얗게 얼어붙은 얼굴이 되었다가, 그 얼음이 녹아서 바다가 되면 다시 파랗게 되기를 반복했겠지. - P228

궁금해.
지구가 가장 차가웠을 때, 가장 선명한 흰빛의 얼음덩어리였을 때, 그 위로 눈이 내리는 건 어떤 모습이었을까. - P228

버려진 것들을 좋아해요. 지금 앉은 소파, 걸상도 주워온 거예요. - P230

고래는 한번 피를 흘리기 시작하면 멎지 않는다고. 워낙 덩치가 커서 바로 안 죽는 것뿐이지, 결국은 죽고 만다고. - P232

천천히 아랫입술을 씹다가, 뱉듯이 짧게 그녀는 말했다.
......상처받았지. - P233

어리석지 않아요? 저것들을 깎느라 나무 열두 그루를 끝장내다니. 마티카라고, 두 팔로도 다 못 안는 인도네시아 활엽순데...... 열두그루면 숲이라고 불러야겠죠. 그것들을 다 베어 죽이고, 나는 늙고..... 하나뿐인 친구였던 사람은 날 버리고. - P233

무엇인가에 복수하는 것 같은, 복수하며 스스로 비명을 지르는 것 같은 전기톱 소리가 다시 시작되었다. - P234

지워지지 않고 나는 끝까지 걸었다. - P237

나는 인주를 몰랐다.
인주가 나를 몰랐던 것보다 더. - P240

인주는 나에게 한번도 어머니에 대해 말한 적이 없었다. 삼촌에 대해 인주가 말할 수 있는 상대가 있었다는 것도 오늘 처음 알았다. 김영신은 인주의 과거의 많은 부분을 나보다 더 알고 있다. 강석원을 십분 만에 돌려보낸 것은, 그와 인주의 관계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녀가 나에게 이 편지와 가락지를 준 것 역시, 충분히 나를 알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 P241

적막에도 형상이 있다고 삼촌은 말했다.

적막은 육각형의 작은 눈송이 하나 속에,
빙하기에 내리는 눈과 다르지 않게,
얼음에 싸인 불꽃처럼 거기 있다고 했다. - P241

생각해보겠습니다, 라고 그는 나에게 말했다. 무엇을 생각한다는 걸까. 무엇을 말할 것인가를? 무엇을 숨길 것인가를? - P245

「닥쳐」는 무대에 올라간 내 첫 희곡이었다. 심리치료의 임상 사례에서 모티프를 따온 것으로, 어린 시절 어머니로부터 은밀히 학대받았던 여자가 주인공이었다. 여자는 누군가와 긴밀한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곧 지배당하는 것이며 자신을 잃는 것이라는 공포 때문에 고립된 삶을 살아가는데, 어느 날 수수께끼 같은 남자를 만나 그가 제안한 ‘닥쳐‘ 게임을 한다. 그가 무슨 말을 하든 ‘닥쳐‘라고 응수하는 것이 그 게임의 유일한 규칙이다. - P246

무대 바닥에 엎드려 있던 여자가 어두운 객석을 향해 천천히 돌아앉으며 말한다. 혹시, 이것으로 내가 아픈 데를 다 알았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죠. 여자는 희미하게 웃는다. 내가 아픈 데는 달의 뒷면 같은 데에요. 누구에게도, 당신에게도...... 나 자신에게도 보이지 않아요. - P248

밤도 이상한데...... 새벽은 더 이상해. 삼 년쯤 잠을 안 자면 사람이 이상해지는 걸까? 그러니까, 내가 이상해져서 새벽이 이상하게 느껴지는 걸까? 밤에는 결이 있고 마디가 있고 틈이 있는데.. 새벽은 안 그래. 어떤 물결이야. 어떤 핏줄, 어떤 생명 같은 거...... 두근거림 같은 거. 빠담! 빠담! 빠담! 이 노래 가사가 무슨 뜻인지 알아? 심장 뛰는 소리야. 두근두근 뛰는 소리가 아니라, 쿠쿵! 쿠쿵! 쿠쿵! 새벽은 그래. 심장처럼 뛰어. 아무리 죽이려고 해도 죽일 수 없는게 내 안에 있어. 그게 느껴져......내가 미친 것 같니? 이상한 것 같아? - P251

둘 다일 수는 없다.

한 사람이, 자살한 동시에 자살하지 않은 것일 수는 없다.
모든 것을 버리는 동시에 버리지 않았을 수는 없다.
갓길 없는 미시령의 눈 쌓인 길에서, 벼랑의 안쪽과 바깥쪽 중 하나를 택해야 하는 단 한순간, 둘 다를 택할 수는 없다.
주저할 수도,
얼버무릴 수도 없다. - P256

인주가 재현한 삼촌의 별이 한 면 가득 태어나고 있다. 희고 뜨겁고 타오르는 것, 둥근 불꽃의 적막이 캄캄한 피 같은 먹 속으로 번진다. - P256

생각해보겠습니다, 라고 방금 그는 여자에게 말했다. 한 시간여 전에 나에게 했던 것과 같은 말이었다. 그것은 직업적인 습관일까. 변명일까. 진심일까. - P258

생명이 꺼지면 영혼은 고통 없는 곳으로 간다는 말을 당신은 믿습니까.
그 믿음에 의지해 때로 사람들은 피 흘리는 동료, 신음하는 개를 앞당겨 죽입니다. 하지만 사실일까요. 전장에서, 동물병원에서 그들의 고통을 사라지게 할 때, 정말 사라지는 것은 그들을 지켜보던 우리의 고통 아닐까요. - P259

넉 줄짜리 사회면 기사에 실린 그녀의 이름을 일 년 뒤 조간신문에서 보았을 때, 아무도 내 기도 따위를 듣고 있지 않았다는 당연한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둔하고 느린 동작으로 신문을 접어 책상 한쪽으로 밀어놓고 나는 기다렸습니다. 무엇인가가 내부에서 무너지기를. 무너지지 않았습니다.
몸 어디에서건 피가 철철 흘러나오기를. 피 흐르지 않았습니다. - P260

그날 당신이 꺼내놓은 추측들은 모두 틀렸지만, 이 사진을 내가 직접 찍었으리라는 짐작만은 옳았습니다. 오래전, 내가 그곳에서 이 사진을 찍었습니다. 그렇게 했던 것을 후회해왔습니다. 사진을 없애는 것으로 그곳을 잊을 수 있었다면 수십 번 그렇게 했을 겁니다. 그러나 그럴 수 없었습니다. 시시로 그곳을 기억하지 않았다면, 김에 덮인 거울 속의 사람처럼 내 인생은 지워지고 흘러내렸을 겁니다. 당신에게 이 편지를 쓰고 있는 지금, 거울 속의 그 사람이 이제 힘차게 흘러내려 지워지고 있는 것을 느낍니다. - P261

그녀에게 그곳이 어떤 장소였느냐고 당신은 물었지요. 나는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그곳이 그녀의 죽음의 장소가 된 이유를 알고 있느냐고 당신은 고쳐 물었지요. 당신의 입술이 떨리고, 열기 띤 눈이 세차게 깜박이는 사이 나는 조용히 반문했습니다. 그 사람에 대한 모든 것을 알아내 당신의 머릿속에서 합한다 해도, 결국은 순수한 추측만으로 메워야 하는 빈 곳이 남지 않겠느냐고. 강석원이라는 사람이 쓴, 당신이 동의하지 않는다는 저 책과 다름없이. - P261

처음 태어난 우주는 너무 작고 밀도가 높아 빛조차도 그 안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고 당신은 말했지요. 우주가 팽창하면서 간신히 활동할 수 있게 된 빛은 엄청난 열기와 함께 뿜어져 나왔고, 그 파동이 아직 완전히 식지 않은 채 온 우주에 퍼져 있다고 했습니다. 우주 어느곳에나 균일하게 남아 있는 그것이 바로 빅뱅의 증거, 모든 것이 처음에는 하나였다는 증거라고 했습니다. 텔레비전과 전화의 잡음 중에 그 우주 복사로 인한 것이 있다고, 처음 그것을 발견한 사람은 사막에서 전신주를 수리하던 사람들이었다고도 했습니다. - P262

우주가 무한하지 않다면, 빛의 속력으로 다다를 수 있는 시각의 힘으로 닿을 수 있는 먼 과거의 우주가 언젠가는 보일 거예요. 가깝게는 빙하기의 지구를 볼 수 있고, 지구가 태어나기 전의 어둠도 볼 수 있겠지요. 말하자면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의 풍경을, 먼 미래의 다른 별에 살아남은 사람이 고배율의 망원경으로 볼 수 있을거예요. 우주가 유한하고 거대한 입방형의 덩어리라면, 움푹 파이고 휘어진 채 팽창하는 공간 어딘가에 우리의 과거와 미래가………… - P262

두려움 없이 내가 할 일을 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돼요.
그게 어떤 일입니까?
인주가 왜 죽었는지 알아내는 거예요. 그 죽음을 왜곡하는 사람들을 막는 거예요.
그리고?
거짓으로부터 인주의 아이를 보호하는 거예요. - P263

사십 년 전, 삼십 년 전, 이 년 전에도 그렇게 하지 못했듯이, 나는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 P264

나는 믿지 않습니다. 어떤 것도 찾아지지 않고, 어떤 것도 완성되지 않을 것입니다. 만의 하나 완성된다 한들 누구도 당신을 믿지 않을 것입니다. 당신이 진실이라고 믿는 언어를, 눈물을, 피를 믿지 않을 것입니다. 잔인하게도, 내가 당신에게 이 편지를 쓰는 것은 당신이 입을 틀어막힌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누구에게도 내 이야기를 전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니, 덜 가혹하게 말하겠습니다. 당신이 쓸 그 불가능한 책을 연민하기 때문입니다. 아니, 솔직하게 말하겠습니다. 목마른 사람처럼 이 편지를 남김 없이, 삼킬 듯이 읽어가는 당신의 얼굴을 상상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그 상상 속에서 당신의 입술, 혼란 때문에 벌어진 입술에 내 입술을 문지르고 싶기 때문입니다. 단 한순간, 어리석고 병적인 그 상상이 나를 위무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니, 위악적으로 말하지 않겠습니다. 당신이, 수십 년의 시간을 건너와 나를, 어깨가 굽고 머리가 희어진 나를 찾아낸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 P265

그렇습니다. 수십 년 전의 이야기입니다. 당신의 친구가 태어나기 전의 이야기입니다. 당신이 힘겹게 맞춰온 퍼즐의 어디에도 들어맞지 않을 이야기입니다. 수십 년 동안 서서히 나를 죽여왔고, 이제 새벽이 되기 전에 나를 죽인 뒤 가까스로 끝날 이야기입니다. 한 여자의 눈에서 시작되는 이야기입니다. 총명한 눈, 방금 살얼음이 녹은 것처럼 젖어 있던 눈, 누구도 차마 오래 맞받아 바라볼 수 없었던 눈에서시작되는 이야기입니다. - P265

한 번의 삶에서 여러 인생을 살았다고 느낄 때가 있습니다. 시간은 흐르는 것이 아니라 마디마디 끊어지는 것이었다고, 어떤 마디의 기억들은 전생처럼 멀고 어둑하다고 느낄 때가 있습니다. - P265

내 옆으로 두 발짝 떨어져 앉은 그녀는 허밍으로 말러 2번 교향곡의 선율들을 들려주었습니다. 취한 사람 특유의 유순하고 부드러운 도취 속에서 그녀는 설명했습니다. 1악장의 회로가 얼마나 복잡하고 극적인지. 그것을 종결하는 방식이 얼마나 미묘한지. 삶과의 춤을 그린 2악장이 얼마나 대조적으로 세속적인지. 반면에 죽음과의 무도인 3악장에 어려 있는 씁쓸한 유머에 대해서. 그리고 4분55초의 알토 독창으로 처리한 ‘처음의 빛‘이라는 제목의 4악장. 그 견결하고 끔찍한 아름다움에 대해서. - P274

오, 붉은 장미여

인간은 거대한 가난 속에 있네.
인간은 거대한 고통 속에 있네.
차라리 나는 천국에 가서 머물고 싶네.

마침내 나는 널따란 길에 다다랐네.
한 천사가 그 길을 막고 나를 돌려보내려 하네.
아, 안돼.
나를 돌려보내지 말아줘.

나는 신에게서 왔으니 신에게로 돌아가려네.
사랑의 신은 나에게 빛을 비추겠지.
영원한 생명의 축복을 얻을 때까지. - P275

그 노래의 마지막 단어, 리베ㅡ생명ㅡ를 부르던 그녀의 떨리는 가성을 기억합니다. 지금까지 여러 음반을 찾아서 들어보았지만, 사십년 전 그녀의 부엌에서 들었던 만큼의 처절함을 느끼게 하는 가수는 없었습니다. 자신이 발음하는 영원한 생명을 향해 오직 절망과 갈망만으로 다다르려 하는, 다시 살아나고 싶지 않아 천사에게 애원할만큼의 고통을 알고 있는 사람의 목소리.

그렇게 열병의 날들이 시작되었습니다. - P275

오토 클렘페러네요. 브루너 발터가 지휘한 것 나한테 있는데. 말러를 좋아하시는 줄은 몰랐어요. - P2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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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의 3장인 ‘일곱개의 뺨‘ 이라는 파트를 읽고 있는데, 소설인지 연극인지 간혹 헷갈릴 정도로 배경의 전환이 수시로 이루어진다. 저자의 필력 덕분인지 개인적으로는 엄청난 몰입감을 가지고 본문의 내용들을 시간가는 줄 모르고 순식간에 읽어나갈 수 있었다. 소설 속에선 그 날의 참상이 아주 세세하게 묘사되어 있는데, 이 소설 속에 나오는 소재들로 만든 또다른 연극을 통해 그 날의 참상을 다시금 재조명하는 장면이 나온다. 처음 밑줄친 문장은 그 연극의 극중 여주인공의 대사인데, 길지 않은 문장 속에 많은 것들이 내포되어 있음을 간접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이 소설을 이미 읽어보신 분들은 잘 아시겠지만 소설 속 시대 배경 자체가 검열이 일상화되어있는 숨막히는 통제 사회였기에 소설 속에서 연극을 기획한 사람도 노골적으로 그 날의 참상을 표현하는데는 제약이 많았다. 아마 연극을 기획하면서도 검열로 인해 끌려가지는 않을까 조마조마한 마음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여기 별도로 밑줄치진 않았지만 본문을 통해 군인들에 의해 무참히 짓밟히고 죽어나간 이름모를 주검들의 모습들을 보면서 그 날의 아픔을 직접 경험했던 분들의 마음을 어떤 말로도 감히 표현하기가 힘들겠다는 생각도 해볼 수 있었다.

아직도 이 사회에는 자신이 직접 겪어보지 않고 다른 사람의 아픔과 상처에 대해 함부로 말하는 사람들이 수없이 많다. 비록 서로가 서로를 완전히 100% 이해하는 것은 어렵더라도 상대방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이해하려는 자세가 그 어느때보다 필요한 시대가 아닌가 싶다. 각박한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필요한 마음가짐이 아닐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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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이어지는 내용에서는 등장인물들 개개인이 겪었던 고통에 대한 묘사가 좀 더 자세하게 나오는데, 이 부분을 읽으면서 그 시대를 직접 겪었던 분들의 고통과 트라우마가 단지 그 당시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그 이후의 삶에서도 계속 이어지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씻을 수 없는 상처라는 말이 어떤 의미인지를 뼈저리게 느낀 시간이었다.

당신이 죽은 뒤 장례식을 치르지 못해,
내 삶이 장례식이 되었습니다. - P99

어이, 돌아오소.
어어이, 내가 이름을 부르니 지금 돌아오소.
더 늦으면 안되오. 지금 돌아오소. - P100

당신이 죽은 뒤 장례를 치르지 못해,
당신을 보았던 내 눈이 사원이 되었습니다.
당신의 목소리를 들었던 내 귀가 사원이 되었습니다.
당신의 숨을 들이마신 허파가 사원이 되었습니다. - P100

봄에 피는 꽃들, 버드나무들, 빗방울과 눈송이들이 사원이 되었습니다.
날마다 찾아오는 아침, 날마다 찾아오는 저녁들이 사원이 되었습니다. - P101

네가 죽은 뒤 장례식을 치르지 못해, 내 삶이 장례식이 되었다.
네가 방수 모포에 싸여 청소차에 실려간 뒤에.
용서할 수 없는 물줄기가 번쩍이며 분수대에서 뿜어져나온 뒤에.
어디서나 사원의 불빛이 타고 있었다.
봄에 피는 꽃들 속에, 눈송이들 속에. 날마다 찾아오는 저녁들 속에. 다 쓴 음료수 병에 네가 꽂은 양초 불꽃들이. - P103

군인들이 압도적으로 강하다는 걸 모르지 않았습니다. 다만 이상한 건, 그들의 힘만큼이나 강렬한 무엇인가가 나를 압도하고 있었다는 겁니다.
양심.
그래요, 양심.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게 그겁니다. - P114

군인들이 쏘아 죽인 사람들의 시신을 리어카에 실어 앞세우고 수십만의 사람들과 함께 총구 앞에 섰던 날, 느닷없이 발견한 내 안의 깨끗한 무엇에 나는 놀랐습니다. 더이상 두렵지 않다는 느낌, 지금 죽어도 좋다는 느낌, 수십만 사람들의 피가 모여 거대한 혈관을 이룬 것 같았던 생생한 느낌을 기억합니다. 그 혈관에 흐르며 고동치는, 세상에서 가장 거대하고 숭고한 심장의 맥박을 나는 느꼈습니다. 감히 내가 그것의 일부가 되었다고 느꼈습니다. - P114

가만있으면 다 죽어요. 우릴 다 쏴 죽일 거란 말이오. - P115

내가 총을 들 수 있는지, 살아 있는 사람을 향해 방아쇠를 당길 수 있는지 생각했습니다. 군인들이 가진 수천정의 총이 수십만의 사람들을 살해할 수 있다는 것, 쇠가 몸을 뚫으면 사람이 쓰러진다는 것, 더웠던 몸들이 차가워진다는 것을 생각했습니다. - P115

선생은 압니까, 자신이 완전하게 깨끗하고 선한 존재가 되었다는 느낌이 얼마나 강렬한 것인지. 양심이라는 눈부시게 깨끗한 보석이 내 이마에 들어와 박힌 것 같은 순간의 광휘를. - P116

그날 도청에 남은 어린 친구들도 아마 비슷한 경험을 했을 겁니다. 그 양심의 보석을 죽음과 맞바꿔도 좋다고 판단했을 겁니다. - P116

계단을 올라온 군인들이 어둠속에서 다가오는 것을 보면서도, 우리 조의 누구도 방아쇠를 당기지 않았습니다. 방아쇠를 당기면 사람이 죽는다는 걸 알면서 그렇게 할 수가 없었습니다. 우린 쏠 수 없는 총을 나눠 가진 아이들이었던 겁니다. - P117

그 새벽 캄캄한 도청 계단을 따라 글자 그대로 콸콸 소리를 내며 흐르던 피가 떠오를 때마다 생각합니다. 그건 그들만의 죽음이 아니라, 누군가의 죽음들을 대신한 거였다고, 수천곱절의 죽음, 수천곱절의 피였다고. - P118

이제 그들이 원하는 것은 실제로 일어난 일들의 세목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마련한 각본에 우리들의 이름으로 빈칸을 채울 수 있도록, 우리들이 해야 할 일은 거짓 자백뿐이었습니다. - P118

참을 만큼 참았어. 그렇게 네가 다 처먹으면 난 어쩌란 말이야. - P119

그, 그러지 마요. ...(중략)... 우, 우리는...... 주, 죽을 가, 각오를 했었잖아요. - P119

순간 깨달았습니다. 그들이 원한 게 무엇이었는지. 우리를 굶기고 고문하면서 그들이 하고 싶었던 말이 무엇이었는지. 너희들이 태극기를 흔들고 애국가를 부른 게 얼마나 웃기는 일이었는지, 우리가 깨닫게 해주겠다. 냄새를 풍기는 더러운 몸, 상처가 문드러지는 몸, 굶주린 짐승 같은 몸뚱어리들이 너희들이라는 걸, 우리가 증명해주겠다. - P119

카, 카스테라가 제, 제, 제일 머, 먹고 싶어요. 사, 사이다하고 가, 같이. - P120

생각하고 또 생각했습니다.
이해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어떻게든 내가 겪은 일들을 이해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 P120

묽은 진물과 진득한 고름, 냄새나는 침, 피, 눈물과 콧물, 속옷에 지린 오줌과 똥. 그것들이 내가 가진 전부였습니다. 아니, 그것들 자체가 바로 나였습니다. 그것들 속에서 썩어가는 살덩어리가 나였습니다. - P120

지금도 나는 여름을 견디지 못합니다. 벌레 같은 땀이 스멀스멀 가슴팍과 등으로 흘러내리면, 내가 살덩어리였던 순간들의 기억이 고스란히 돌아와 있는 걸 느끼며 깊은 숨을 쉽니다. 이를 악물고 더 깊은 숨을 쉽니다. - P121

몸이 사라져주기를, 지금 제발, 지금 내 몸이 지워지기를, - P121

죽음은 새 수의같이 서늘한 것일지도 모른다고 그때 생각했습니다. 지나간 여름이 삶이었다면, 피고름과 땀으로 얼룩진 몸뚱이가 삶이었다면, 아무리 신음해도 흐르지 않던 일초들이, 치욕적인 허기 속에서 쉰 콩나물을 씹던 순간들이 삶이었다면, 죽음은 그 모든 걸 한번에 지우는 깨끗한 붓질 같은 것이리라고. - P122

우리는 총을 들었지, 그렇지?
나는 고개를 끄덕이지도, 그에게 대꾸하지도 않았습니다.
그게 우릴 지켜줄 줄 알았지.
스스로 묻고 스스로 답하는 일에 익숙한 듯, 그는 술잔을 향해 희미하게 웃었습니다.
하지만 우린 그걸 쏘지도 못했어. - P127

그러니까 형, 영혼이란 건 아무것도 아닌 건가.
아니, 그건 무슨 유리 같은 건가.
유리는 투명하고 깨지기 쉽지. 그게 유리의 본성이지. 그러니까 유리로 만든 물건은 조심해서 다뤄야 하는 거지. 금이 가거나 부서지면 못쓰게 되니까, 버려야 하니까.
예전에 우린 깨지지 않은 유리를 갖고 있었지. 그게 유린지 뭔지 확인도 안해본, 단단하고 투명한 진짜였지. 그러니까 우린, 부서지면서 우리가 영혼을 갖고 있었단 걸 보여준 거지. 진짜 유리로 만들어진 인간이었단 걸 증명한 거야. - P130

우리는 서로에게 의지했지만, 동시에 언제나 서로의 얼굴을 후려치고 싶어했습니다. 지우고 싶어했습니다. 영원히 밀어내고 싶어했습니다. - P132

무슨 권리로 그걸 나에게 요구합니까. - P132

아시겠습니까. 그러니까 이 사진에서 이 아이들이 나란히 누워있는 건, 이렇게 가지런히 옮겨놓은 게 아닙니다. 한줄로 아이들이 걸어오고 있었던 겁니다. 우리가 시킨 대로 두 팔을 들고, 줄을 맞춰 걸어오고 있었던 겁니다. - P133

어떤 기억은 아물지 않습니다. 시간이 흘러 기억이 흐릿해지는게 아니라, 오히려 그 기억만 남기고 다른 모든 것이 서서히 마모됩니다. 색 전구가 하나씩 나가듯 세계가 어두워집니다. - P134

인간은, 근본적으로 잔인한 존재인 것입니까? 우리들은 단지 보편적인 경험을 한 것뿐입니까? 우리는 존엄하다는 착각속에 살고 있을 뿐, 언제든 아무것도 아닌 것, 벌레, 짐승, 고름과 진물의 덩어리로 변할 수 있는 겁니까? 굴욕당하고 훼손되고 살해되는 것, 그것이 역사 속에서 증명된 인간의 본질입니까? - P134

흙탕물처럼 시간이 나를 쓸어가길 기다립니다. 내가 밤낮없이 짊어지고 있는 더러운 죽음의 기억이, 진짜 죽음을 만나 깨끗이 나를 놓아주기를 기다립니다. - P135

나는 싸우고 있습니다. 날마다 혼자서 싸웁니다. 살아남았다는, 아직도 살아 있다는 치욕과 싸웁니다. 내가 인간이라는 사실과 싸웁니다. 오직 죽음만이 그 사실로부터 앞당겨 벗어날 유일한 길이란 생각과 싸웁니다. - P135

달은 밤의 눈동자래. - P136

이상하지.

단지 물이 떨어지는 소리였을 뿐인데, 누군가가 정말 왔던 것처럼 기억돼.

그 겨울 새벽, 명치가 되어드는 통증 속에서 생각했던 그 걸음걸이가 생시였고, 수건에서 흐른 물로 젖어 있던 바닥은 꿈이었던 것 같아. - P142

녹음의 편리한 점은 직접 얼굴을 마주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뿐 아니라, 지우고 싶은 부분을 언제든 지우고 다시 증언할 수 있다는 데 있다고 - P143

어두운 창문으로 축축한 바람이 불어들어오고 있다. 무엇인가가 길게 내쉬는 숨 같다고 문득 당신은 생각한다. 거대한 생물 같은 밤이 입을 열고 습기찬 날숨을 뱉어낸다. 사무실 가득 밀폐돼 있던 뜨거운 공기를 캄캄한 허파 속으로 빨아들인다. - P151

성희 언니는 나와 달라.
언니는 신도 믿고 인간도 믿으니까.

난 한번도 언니에게 설득되지 않았어.
오직 사랑으로 우릴 지켜본다는 존재를 믿을 수 없었어.
주기도문조차 끝까지 소리 내 읽을 수 없었어.

내가 그들의 죄를 사한 것같이 아버지가 내 죄를 사할 거라니.
난 아무것도 사하지 않고 사함 받지 않아. - P151

견디는 것은 당신이 가장 잘하는 일이다. - P154

일은 당신에게 고독을 보장해준다. 일과 짧은 휴식과 잠의 규칙적인 리듬 속에서 혼자 삶을 꾸려갈 수 있는 한, 빛의 동그라미 바깥을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 P154

우리는 고귀해. - P155

헌법에 따르면, 우리는 모든 사람들과 똑같이 고귀해. 그리고 노동법에 따르면 우리에겐 정당한 권리가 있어. - P155

우리들은 정의파다 좋다 좋다
같이 죽고 같이 산다 좋다 좋다
무릎 꿇고 살기보다 서서 죽길 원한단다
우리들은 정의파다 - P158

무릎 꿇고 살기보다 서서 죽길 원한단다 먼저 가신 임들을 위해 다 같이 묵념합시다. 먼저 가신 임들을 따라 끝까지 싸웁시다 그러니까………… 우리는 고귀하니까. - P160

악몽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일깨워주는 기억들이 조용히 당신의 머리맡에서 기다리고 있다. - P161

나 자신을 지키는 일로 남은 인생을 흘려보내진 않았을 거란 말이야. - P162

조금만 참아. 곧 의사가 올 거야. - P163

증언. 의미. 기억. 미래를 위해. - P166

썰물처럼 잠이 밀려나가며 고통의 윤곽이 뚜렷해지는 순간, 어떤 악몽보다 차가운 순간이 다시 왔다. 당신이 겪은 모든 게 꿈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하는 순간. 기억해달라고 윤은 말했다. 직면하고 증언해달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 P166

그 밤 이후로는 젖은 수건을 문고리에 걸어두지 않았어.

하지만 그 겨울이 갈 때까지, 더이상 물수건이 필요 없는 봄이 된 뒤에도 그 소리가 문 쪽에서 들렸어.
아직도 이따금, 용케 악몽 없이 잠에서 깨어나려는 순간이면 그 소리가 들려.
그때마다 난 어둠을 향해 떨리는 눈꺼풀을 열어.

누구야.
누가 오는 거야.

누가 이렇게 가벼운 걸음으로 걸어오는 거야. - P169

그러니까 그 여름에 넌 죽어 있었어. 내 몸이 끝없이 피를 쏟아낼 때, 네 몸은 땅속에서 맹렬하게 썩어가고 있었어.
그 순간 네가 날 살렸어. 삽시간에 내 피를 끓게 해 펄펄 되살게 했어. 심장이 터질 것 같은 고통의 힘, 분노의 힘으로. - P1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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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새 개인적으로 한강 작가님의 책들을 집중적으로 읽고 있다. 가장 먼저는 시집인《서랍에 저녁을 넣어두었다》를 통해 전반적인 저자의 감성이 어떤 것인지를 조금이나마 느껴볼 수 있었고, 뒤이어 소설《채식주의자》를 통해 물리적, 정신적 상처로 인한 고통과 아픔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었다. 또한 소설《희랍어 시간》에서는 특정한 핸디캡을 가진 사람들이 비록 완벽하진 않지만 서로를 이해하기 위해 애쓰는 모습들을 보면서 뭔지 모를 잔잔한 감동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비록 아직 절반정도 밖에 읽진 못했지만 개인적으로 흥미를 가지고 읽고 있는 소설인 《바람이 분다, 가라》는 여러 등장인물들 간에 얽히고설킨 관계 속에서 전개되는 이야기의 흐름이 마치 긴장감있는 영화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물론 이 소설도 윗 문단에서 언급했던 작품들에서 느껴졌던 분위기와 감성들이 기본적으로 깔려있긴 하지만 그 규모면에서 독자인 내가 읽었던 이전 작품들보다는 좀 더 확대된듯한 느낌을 받았다.

오늘 읽기 시작한 이 책《소년이 온다》는 개인적으로 이런저런 경로들을 통해 80년 5월의 민주화운동을 소재로 쓰여진 소설이라는 얘기를 많이 들어왔었기에 소설의 도입부에서 느껴지는 뭔가 엄숙한 분위기가 그리 낯설게 느껴지진 않았다. 여기 별도로 밑줄치진 않았지만, 소설의 도입부에는 추도식을 하는 장면과 관련된 내용들이 나오는데, 저자의 디테일한 문장 묘사를 통해 80년 5월의 참혹함을 간접적으로나마 느낄 수 있었다.

밑줄친 문장은 죽은 시신을 보면서 생각에 잠긴 소설 속 화자의 생각을 적은 것인데, 이를 통해 육신과 영혼이라는 것에 대해 잠시나마 진지하게 생각해볼 수 있었다. 여기서 좀 더 깊이 들어가면 종교적인 것 또는 철학적인 것까지도 생각해볼 수 있겠으나 일단은 이 소설을 읽는데 집중해보고자 한다.

몸이 죽으면 혼은 어디로 갈까, 문득 너는 생각한다. 얼마나 오래 자기 몸 곁에 머물러 있을까. - P12

산 사람이 죽은 사람을 들여다볼 때, 혼도 곁에서 함께 제 얼굴을 들여다보진 않을까. - P13

네가 이해할 수 없었던 한가지 일은, 입관을 마친 뒤 약식으로 치르는 짧은 추도식에서 유족들이 애국가를 부른다는 것이었다. 관 위에 태극기를 반듯이 펴고 친친 끈으로 묶어놓는 것도 이상했다. 군인들이 죽인 사람들에게 왜 애국가를 불러주는 걸까. 왜 태극기로 관을 감싸는 걸까. 마치 나라가 그들을 죽인 게 아니라는 듯이. - P17

군인들이 반란을 일으킨 거잖아, 권력을 잡으려고. 너도 봤을 거아냐. 한낮에 사람들을 때리고 찌르고, 그래도 안되니까 총을 쐈잖아. 그렇게 하라고 그들이 명령한 거야. 그 사람들을 어떻게 나라라고 부를 수 있어. - P17

저들이 시키는 대로 무조건 무기를 돌려주고 항복할 순 없습니다. 저들이 먼저 우리 시민들의 시신을 돌려줘야 합니다. 끌고 간 시민 수백명도 풀어줘야 합니다. 무엇보다 여기서 일어난 일들의 진상을 전국에 밝혀서, 우리 명예를 회복시킨다는 약속을 받아내야 합니다. 그런 다음 총기를 반납하는 게 옳지 않겠습니까 여러분. - P22

너무 많은 피를 흘리지 않았습니까. 어떻게 그 피를 그냥 덮으란 말입니까. 먼저 가신 혼들이 눈을 뜨고 우릴 지켜보고 있습니다. - P22

혼한테는 몸이 없는데, 어떻게 눈을 뜨고 우릴 지켜볼까. - P22

온화한 성품만큼이나 외할머니의 임종은 조용한 것이었다. 산소마스크를 쓴 채 눈을 감고 있던 외할머니의 얼굴에서 새 같은 무언가가 문득 빠져 나갔다. 순식간에 주검이 된 주름진 얼굴을 보며, 그 어린 새 같은 것이 어디로 가버렸는지 몰라 너는 멍하게 서 있었다. - P23

지금 상무관에 있는 사람들의 혼도 갑자기 새처럼 몸을 빠져나갔을까. 놀란 그 새들은 어디 있을까. - P23

혼의 눈물은 차갑구나. - P24

나무들은 하루에 딱 한차례 숨 쉰다고 했다. 해가 뜨면 길게 길게 햇빛을 들이마셨다가, 해가 지면 길게 길게 이산화탄소를 내쉰다고 했다. - P24

지난 일주일이 실감되지 않는 것만큼이나, 그 다른 세상의 시간이 더이상 실감되지 않는다. - P24

사람이 죽으면 빠져나가는 어린 새는, 살았을 땐 몸 어디에 있을까. 찌푸린 저 미간에, 후광처럼 정수리 뒤에, 아니면 심장 어디께에 있을까. - P27

죽을 거 같으면, 도청을 비우고 다 같이 피해버리면 되잖아요. 왜 누군가고 누군 남아요. - P28

지금 나가면 개죽음이여. - P32

맨주먹으로 총을 어떻게 당한다냐. - P34

공처럼 허리를 말고 장판 바닥에 누웠다. 정신을 잃듯 잠 속으로 빨려든 뒤 몇분 지나지 않아, 기억할 수 없는 무서운 꿈에 퍼뜩 눈을 떴다. 꿈보다 무서운 생시가 너를 기다리고 있었다. - P34

정적 속에서 너는 정대의 얼굴을 떠올렸다. 연한 하늘색 체육복바지가 꿈틀거리던 모습을 기억한 순간, 불덩어리가 명치를 막은 것같이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숨을 쉬려고 너는 평소의 정대를 생각했다.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대문을 열고 들어올 것 같은 정대를 생각했다. - P35

그러고도 네가 친구냐. 그러고도 네가 사람이야. - P36

총검이 네 얼굴을, 가슴을 베고 찌르는 환각에 몸을 뒤틀었다. - P44

혼은 자기 몸 곁에 얼마나 오래 머물러 있을까.
그게 무슨 날개같이 파닥이기도 할까. 촛불의 가장자릴 흔들리게 할까. - P45

눈이 더 나빠져 가까운 것도 흐릿하게 보이면 좋겠다고 너는 생각한다. 그러나 아무것도 흐릿하게 보이지 않는다. 무명천을 걷기전에 너는 눈을 감지 않는다. 피가 비칠 때까지 입술 안쪽을 악물며 천을 걷는다. 걷은 다음에도, 천천히 다시 덮으면서도 눈을 감지 않는다. 달아났을 거다,라고 이를 악물며 너는 생각한다. 그때 쓰러진 게 정대가 아니라 이 여자였다 해도 너는 달아났을 거다. 형들이었다 해도, 아버지였다 해도, 엄마였다 해도 달아났을 거다. - P45

체머리 떠는 노인의 얼굴을 너는 돌아본다. 손녀따님인가요, 묻지 않고 참을성 있게 그의 말을 기다린다. 용서하지 않을 거다. 이승에서 가장 끔찍한 것을 본 사람처럼 꿈적거리는 노인의 두 눈을 너는 마주 본다. 아무것도 용서하지 않을 거다. 나 자신까지도. - P45

우리들의 몸은 열십자로 겹겹이 포개져 있었어. - P46

난 내 몸을 놓치지 않으려고 뺨에, 목덜미에 어른어른 매달려 트럭에 올라탔어. 이상하게도 나는 혼자였어. 그러니까 혼들은 만날 수 없는 거였어. 지척에 혼들이 아무리 많아도,
우린 서로를 볼 수도 느낄 수도 없었어. 저세상에서 만나자는 말따윈 의미없는 거였어. - P47

혼이란 건 가까이 있는 혼들이 누구인지는 알지 못하면서, 누군가가 죽었는지 죽지 않았는지만은 온 힘으로 생각하면 알 수 있는 거였어. - P50

이상하고 격렬한 힘이 생겨나 있었는데, 그건 죽음 때문이 아니라 오직 멈추지 않는 생각들 때문에 생겨난 거였어. 누가 나를 죽였을까, 누가 누나를 죽였을까. 왜 죽였을까. 생각할수록 그 낯선 힘은 단단해졌어. 눈도 뺨도 없는 곳에서 끊임없이 흐르는 피를 진하고 끈적끈적하게 만들었어. - P51

어디선가 누나의 혼도 어른거리고 있을 텐데, 그곳이 어딜까. 이제 우리한텐 몸이 없으니 만나기 위해서 몸을 움직일 필요는 없을텐데. 하지만 몸 없이 누나를 어떻게 만날까. 몸 없는 누나를 어떻게 알아볼까. - P51

누나가 어디 있는지 생각하는 데 지친 나는 이제 그들을 생각하기 시작했어. 나를 죽인 사람과 누나를 죽인 사람은 지금 어디 있을까. 아직 죽지 않았다해도 그들에게도 혼이 있을 테니, 생각하고 생각하면 닿을 수 있을것 같았어. 내 몸을 버리고 싶었어. 죽은 그 몸뚱이로부터 얇고 팽팽한 거미줄같이 뻗어나와 끌어당기는 힘을 잘라내고 싶었어. 그들을 향해 날아가고 싶었어. 묻고 싶었어. 왜 나를 죽였지. 왜 누나를 죽였지, 어떻게 죽였지. - P52

꿈속으로 숨을 수 있다면.
아니, 기억 속으로라도. - P54

더 많은 기억이 필요했어.
더 빨리, 끊어지지 않게 기억을 이어가야 했어. - P56

썩어가는 내 옆구리를 생각해.
거길 관통한 총알을 생각해.
처음엔 차디찬 몽둥이 같았던 그것.
순식간에 뱃속을 휘젓는 불덩어리가 된 그것,
그게 반대편 옆구리에 만들어놓은, 내 모든 따뜻한 피를 흘러나가게 한 구멍을 생각해.
그걸 쏘아보낸 총구를 생각해.
차디찬 방아쇠를 생각해.
그걸 당긴 따뜻한 손가락을 생각해.
나를 조준한 눈을 생각해.
쏘라고 명령한 사람의 눈을 생각해. - P57

그들의 얼굴을 보고 싶다. 잠든 그들의 눈꺼풀 위로 어른거리고싶다. 꿈속으로 불쑥 들어가고 싶다. 그 이마, 그 눈꺼풀들을 밤새 건너다니며 어른거리고 싶다. 그들이 악몽 속에서 피 흐르는 내 눈을 볼 때까지. 내 목소리를 들을 때까지, 왜 나를 쐈지, 왜 나를 죽였지. - P58

만약 그렇게 좀더 시간이 흘렀다면, 어느 순간 우리는 서로를 알게 될 수 있었을까. 마침내 어떤 말을, 어떤 생각을 주고받을 방법을 찾아낼 수 있었을까. - P60

우리들의 몸은 계속 불꽃을 뿜으며 타들어갔어. 장기들이 끓으며 오그라들었어. 간헐적으로 쉭쉭 뿜어져나오는 검은 연기는 우리들의 썩은 몸이 내쉬는 숨 같았어. 그 거친 숨이 잦아든 자리에 희끗한 뼈들이 드러났어. 뼈가 드러난 몸들의 혼은 어느샌가 멀어져, 더이상 어른거리는 그림자가 느껴지지 않았어. 그러니까 마침내 자유였어, 이제 우린 어디든 갈 수 있었어. - P62

공터의 축축한 모래흙에, 거기 드리워진 검푸른 숲그늘에 어른거리며 나는 생각했어. 어떻게, 어디로 가야 할까. 괴롭지 않았어, 썩어가던 내 거뭇한 얼굴이 이제 깨끗이 사라질 것이 아깝지 않았어, 그 치욕스러운 몸이 남김없이 불타버릴 것이 목숨을 가졌을 때 그랬던 것처럼 난 단순해지고 싶었어. 아무것도 두려워하고 싶지 않았어. - P63

너에게 가자.
그러자 모든 게 분명해졌어. - P63

그녀는 고기를 좋아하지 않는다기보다, 불판 위에서 고기가 익어가는 순간을 견디지 못했다. 살점 위에 피와 육즙이 고이면 고개를 돌렸다. 머리가 있는 생선을 구울 때는 눈을 감았다. 프라이팬이 달궈지며 얼었던 눈동자에 물기가 맺히고, 벌어진 입에서 희끗한 진물이 흘러나오는 순간, 그 죽은 물고기가 뭔가를 말하려 하는 것 같은 순간을 외면했다. - P72

누군가를 공격할 땐 본능적으로 감정에 관계된 왼손이 움직이는건가 - P74

얼굴은 어떻게 내면을 숨기는가, 그녀는 생각한다. 어떻게 무감각을, 잔인성을, 살인을 숨기는가. - P77

앞쪽의 열 페이지에 드문드문 살아남은 문장들을 그녀는 머릿속으로 더듬는다.
당신들을 잃은 뒤, 우리들의 시간은 저녁이 되었습니다.
우리들의 집과 거리가 저녁이 되었습니다.
더이상 어두워지지도, 다시 밝아지지도 않는 저녁 속에서 우리들은 밥을 먹고, 걸음을 걷고 잠을 잡니다. - P79

어떻게 분수대에서 물이 나옵니까. 무슨 축제라고 물이 나옵니까. - P80

서 선생의 손이 날렵하게 가제본을 들어올린다. 그것이 젖지 않도록. 그 지워진 책 속에 아직 무엇이 남아 있기라도 한 것처럼. - P83

묵묵히 쌀알을 씹으며 그녀는 생각했다. 치욕스러운 데가 있다, 먹는다는 것엔. 익숙한 치욕 속에서 그녀는 죽은 사람들을 생각했다. 그 사람들은 언제까지나 배가 고프지 않을 것이다. 삶이 없으니까. 그러나 그녀에게는 삶이 있었고 배가 고팠다. 지난 오년 동안 끈질지게 그녀를 괴롭혀온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 허기를 느끼며 음식 앞에서 입맛이 도는 것. - P85

죽어도 좋다고 생각했지만, 동시에 죽음을 피하고 싶었다. 죽은 사람들의 모습을 많이 봤기 때문에 둔감해졌다고 생각했지만, 그래서 더 두려웠다. 입을 벌리고 몸에 구멍이 뚫린 채, 반투명한 창자를 쏟아내며 숨이 끊어지고 싶지 않았다. - P89

우리는 끝까지 싸울 것입니다. 함께 나와서 싸워주십시오. - P91

같이 가자, 동호야. 지금 같이 나가야 돼. 위태하게 이층 난간을 붙들고 서서 너는 떨었다. 마지막으로 눈이 마주쳤을 때, 살고 싶어서, 무서워서 네 눈꺼풀은 떨렸다. - P92

군중의 도덕성을 좌우하는 결정적인 요인이 무엇인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흥미로운 사실은, 군중을 이루는 개개인의 도덕적 수준과 별개로 특정한 윤리적 파동이 현장에서 발생된다는 것이다. 어떤 군중은 상점의 약탈과 살인, 강간을 서슴지 않으며, 어떤 군중은 개인이었다면 다다르기 어려웠을 이타성과 용기를 획득한다. 후자의 개인들이 특별히 숭고했다기보다는 인간이 근본적으로 지닌 숭고함이 군중의 힘을 빌려 발현된 것이며, 전자의 개인들이 특별히 야만적이었던 것이 아니라 인간의 근원적인 야만이 군중의힘을 빌려 극대화된 것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 P95

그렇다면 우리에게 남는 질문은 이것이다. 인간은 무엇인가. 인간이 무엇이지 않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 P95

그녀는 인간을 믿지 않았다. 어떤 표정, 어떤 진실, 어떤 유려한 문장도 완전하게 신뢰하지 않았다. 오로지 끈질긴 의심과 차가운 질문들 속에서 살아 나아가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 P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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