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램덩크 신장재편판 6 - 북산 문제아 군단
이노우에 타케히코 지음 / 대원씨아이(만화)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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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에 나온 캐릭터는 향후 북산고 농구부에 합류하게 되는 정대만인데, 뭔가 우울하게 느껴지는 표정을 보다보면 그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 같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실제로 6권에서 이 정대만과 관련된 비하인드 스토리가 비중있게 다뤄지는데, 중간중간 다소 폭력적인 내용들도 나오긴 하지만 개인적으로 굉장히 긴장감을 가지고 흥미롭게 읽을 수 있었다. 또한 6권에서는 향후 이어질 이 만화의 스토리를 어느정도 예측해볼 수 있는 새로운 캐릭터들의 등장도 눈길을 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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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랑무늬영원 -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개정판
한강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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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집에는 총 7개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다. 개인적으로《밝아지기 전에》,《훈자》같은 작품을 통해서는 소설 속 내용과는 별개로 이국적인 장소들에 대한 호기심이 샘솟았고, 《회복하는 인간》에서는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인생에 대해 잠시나마 생각해볼 수 있었다. 《에우로파》는 목성의 위성을 지칭하는 용어인데, 이것이 상징하는 의미를 생각하면서 읽었던 기억이 난다. 개인적으로는 가깝지만 일정한 거리를 두는 관계를 상징한다고 생각했다.

또한,《파란돌》에서는 작가님이 쓰신 다른 작품인《바람이 분다, 가라》의 모태가 되는 이야기를 일부 만날 수 있었는데, 개인적으로 예전에 읽었던 작품이라 그랬는지 좀 더 관심이 갔다.

《왼손》은 처음에는 큰 기대없이 읽어나갔었는데, 읽다보니 나름대로 흥미롭게 읽었던 기억이 난다. 통제되지 않는 본능과 그 본능을 통제하려는 오른손 간에 벌어지는 일련의 사건들을 보다보면 우리 내면에서 벌어지는 갈등의 상황을 외면화 한 것 같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이 소설집의 제목이자 마지막에 수록된《노랑무늬영원》은 앞에 나왔던 6개 작품의 핵심 모티브들을 한 곳으로 끌어모아서 이야기를 만들어낸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핵심 키워드 몇 개만 나열해보자면 왼손, 개, 그림 등과 같은 것들이 있는데, 이런 소재들이 《노랑무늬영원》이야기 속에 적절히 섞여들어가 있다고 보면 되겠다. 각 작품별로 대략적인 느낌 또는 간략한 생각들만 적어보았고 디테일한 요소들은 책을 직접 읽어보시길 바란다.

소설이 다 끝나고 맨 마지막에는 앞에 나왔던 소설들에 관한 문학평론가의 해설이 나오는데 개인적으로는 다소 난해하게 느껴지는 용어들이 많이 나와 읽는데 조금 애를 먹기도 했으나, 확실히 어떤 작품 감상의 깊이나 밀도적인 측면에서 나같은 일반인들과는 차원이 다른 내공을 느낄 수 있었다. 문학 작품을 감상하는 시야를 조금이나마 넓히는데 도움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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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랑무늬영원 -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개정판
한강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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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각의 작품들마다 작가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는 조금씩 다르지만, 작품의 이면에 숨겨진 어떤 알맹이(핵심 메시지)들의 깊이만큼은 한결같이 깊었고, 독자인 나로 하여금 다양한 생각들을 해보게 만들었다. 읽으면 읽을수록 삶에 대한 내공과 생각이 결코 가볍지 않은 작가라는 것을 다시금 느낀다. 그래서 작가님의 작품을 계속해서 찾아 읽어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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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덧 이 책의 거의 막바지에 이르렀다. 처음 밑줄친 두 문장은 소설 속에서 Q라고 지칭되는 93세에 사망한 재일 교포 일 세대 화가가 80세에 했던 인터뷰에서 했던 말을 적은 것인데, Q 특유의 낙관적인 태도와 함께, 어떤 특정한 상황에서 타이밍이라는 것이 정말로 중요하다는 점을 독자인 나로 하여금 여실히 느끼게 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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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마지막에 나온 문학평론가의 해설도 읽어봤는데, 개인적으로는 해설에 나온 몇몇 용어들이 생소하게 느껴져서 인터넷에 검색해가며 읽느라 시간이 좀 지체되기도 했지만, 뭐 좋게 생각하자면 잘 몰랐던 말들을 새롭게 배울 수 있는 시간이기도 했다. 이제와서 하는 얘기지만 이런 점은 비단 여기에 수록된 평론가님의 해설뿐만 아니라 작품을 쓰신 작가님의 작품 속에서도 비슷하게 느껴왔던 것이다. 내가 한국사람인데도 아직까지도 생소한 한국말이 결코 적지 않다는 걸 독서과정 중에 수도없이 겪다보니, 내가 진짜 한국사람 맞나 싶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익숙하다고 생각했던 국어도 점점 깊이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그 깊이가 결코 얕지 않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잠시 곁길로 샜는데,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평론가 분들의 해설을 읽을 때마다 느끼는거지만 확실히 작품을 감상하는 차원과 깊이가 나같은 평범한 독자들과는 엄연히 다르다는 것을 매번 느낀다. ‘어떻게 이런 심오한 생각들을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나같은 경우 어떤 책을 한 번 진하게 읽고 나면 진이 빠져서 그런지는 몰라도 웬만해서는 그 책을 다시 쳐다보고도 싶어하지 않는 경우가 거의 대부분인데, 평론하시는 분들은 직업적인 특성때문인지는 몰라도 어떤 책을 일단 한 번 완독하는 것은 기본이고 작품에서 느껴지는 무언가를 조금이라도 더 잡아내기 위해 똑같은 책을 반복해서 읽으면서 한 문장 한 문장을 곱씹어 보시는 듯하다. 어쩌면 이러한 반복의 과정이 일반적인 나같은 독자들과 전문적인 평론을 업業으로 하시는 분들 간의 차이일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시간이 해결해주겠지요. 나는 기대하고 있어요. - P293

그녀가 유일하게 길게 대답한 질문은 색채들에 관한 것이다. 노랑에 대해 그녀는 말한다.
노랑은 태양입니다. 아침이나 어스름 저녁의 태양이 아니라, 대낮의 태양이에요. 신비도 그윽함도 벗어던져버린, 가장생생한 빛의 입자들로 이뤄진, 가장 가벼운 덩어리입니다. 그것을 보려면 대낮 안에 있어야지요. 그것을 겪으려면. 그것을 견디려면, 그것으로 들어 올려지려면…… 그것이, 되려면 말입니다. - P293

저것은 빛인가. 저것은 아름다움인가, 생명인가. 다만 그렇게 나는 서 있다. 말없이. - P295

누구에게나 낙관과 재기가 넘치는 시절이 한 번쯤은 있다.
세계가 일사일언으로 가볍게 교환되고 넓어도 회색이 되지않는 시절, 그렇게, 사랑하기에 부적절하지 않은 한 시절이어쩌면 잠시 손바닥 위에 머무를지도 모른다. 그리고는 연민이다. - P296

수난이 욕망이라는 것을 뒤늦게야 알게 된 이들에게 가장 오래 동행이 되는 것이 연민이다. - P296

담대한 철학자들은 이성의 지도에 따르기만 한다면 연민은 불필요한 감정이 될 것이라고 역설했지만 그러나 실은 불필요함을 역설할 만큼 좀처럼 다루기 어려운 것이 연민임을 자백한 것과 다르지 않다. - P296

한번 붙들리면 가장 힘세게 잡아끄는 것이 연민이라는 것, - P296

물론 고통은 어떤 형태로든 지나가지만 어떠한 고통도 지나가기 마련이라는 인식조차 고통이 되는 현재도 있다. 이것은 페시미즘도 마조히즘도 윤리도 수난 주간도 아니다. 그저 이조차도 삶이 품고 있는 주름들의 켜가 불현듯 드러내는 민낯일 따름이다. 그러니 역설이겠으나, 어쩌면 매 순간이 이렇게 대단원일까. - P298

삶을 속속들이 들여다볼 줄 안다는 망연한 자부심이 때로 우리의 음역과 시계(視界)를 얼마나 그르치고 있는지를 생각해보게 된다. 이를 수습하고 다시 귀를 기울이면 그제야 비로소 하나의 특수한 슬픔을 잘 품고 있는 경험 일반의 더께가 느껴진다. 이 음역과 시계는 연민과 슬픔을 도드라진 몸피로 지닌 이들에게 허용되는 것이지만 연민만을 지닌 이에게는 현상하지 않는다. - P299

파토스의 영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간섭들이 합류하여 영점에 수렴되는 상호보정이 있을 뿐이다. 어쩌면 가장 평온한, 어쩌면 가장 위험한 어떤 응축과 확산의 임계점을 삶은 간섭들을 중계하며 운용한다. - P300

우리의 삶이 냉기로 파쇄되기보다 차갑게 끓는 임계점들의 연속이기 쉽다 - P300

한강은 직접화법이나 드러난 기승전결대신 종종 이미지로 말한다. 그리고 그것은 상징으로 무거워지는 것과는 완전히 상반된 방향에서 다시 삶의 겹과 무늬를 드러내 보이는 데 성공한다. 여러 작품에서 독자의 시계에 선뜻 들어차는 이미지를 어렵지 않게 그려볼 수 있다. - P300

어떤 방식으로든 이미지에 붙들리는 이는 어떤 한계 지점부근에서 골몰하고 있는 이일 가능성이 높다. - P301

한 가설에 의하면, 지각 정보로부터 판단을 거쳐 구체적 실행에 옮겨지기까지의 0.5초 동안에, 판단과 실행 사이의, 우리가 의식할 수 없는 경계에서 수도 없이 많은 결정과 번복이 이루어진다고 한다. 흥미롭게도 한 연구자는 그 0.5초에 가상계che virtual라는 이름을 붙였다. 왜냐하면 그것이 어쩌면 현실이 되었을 수도 있는 가능성들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도래한 현실이었을 수 있는 저 ‘가상의 현실‘은 ‘드러난manifest 현실‘보다 훨씬 더 웅숭깊은 것일지도 모른다. - P301

엄연한 것은 소름 돋도록 무섭다. - P301

엄연히 존재하는,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사건의 연쇄에 의해서 발생하지만 언제나 사후에만 그 전의 의미들까지도 수습이 되고 결정이 되는 사실관계의 수납과정 - P301

결과를 알고도 피할 수 없는 선택이 있는가하면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을 통해 확인되는 차가운 사실관계들도 있기 마련이다. 전자는 헬라 비극 속 영웅의 것이지만 후자는 현대 소극의 빈번한 주제이다. 물론 이런 일이 없었더라면 어땠을까를 묻고 싶으나 묻는 것이 의미가 없는 일들도 있다. - P302

이미지는 때로 상징이 되어 군림하기도 한다. 그때 이미지는 주제화된 문장들을 자동적으로 풀어낸다. 그러나 처음의 자리에서 고집스럽게 번뜩이는 이미지들도 있기 마련이다. - P302

무엇이든 작은 것에까지 집중하고 세심하게 살펴볼 수 있는 마음을 북돋는 것이 문학이 아닐까. - P303

겹으로서 삶을 넓히고, 삶의 세목들, 그 세세히 작은 것들에까지 곁을 주어보는 마음을 북돋는 것이 문학이 아닐까. - P303

단편은 성냥 불꽃 같은 데가 있다.
먼저 불을 당기고, 그게 꺼질 때까지 온 힘으로 지켜본다.
그 순간들이 힘껏 내 등을 앞으로 떠밀어줬다. - P304

돌이킬 수 없이 배어든 정서들이 있다. 두텁디두텁게. 간절하게. 때로는 이상하리만치 선명하게. 찌르듯 고통을 주며. - P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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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읽는 부분은 이 소설집의 마지막에 수록됨과 동시에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한 ‘노랑무늬영원‘이다.

처음 밑줄친 두 문장은 개인적으로 표현이 신박하다고 느껴져서 적어보았다. 지난번 포스팅에서도 간단히 언급했었지만 이 소설은 읽으면 읽을수록 그동안 앞에서 읽었던 단편 소설들에 나왔던 핵심 모티브들을 차용한 듯한 느낌을 많이 받았다. 그래서 개인적으로는 앞에서 읽었던 소설들의 핵심 내용들을 다시금 상기할 수 있었다. 물론 세부적인 내용들이야 제각기 다르겠지만, 적어도 무언가 교집합이 되는 부분이 있다는 사실을 눈치챘다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간 독서를 허투루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깊은 밤, 잠에서 깨어 세면대에 딸린 거울을 보면, 숱한 동물적 감정들로 출렁거리는 내 내면이 간신히 한 겹의 피부로 봉합되어 있는 것 같았다. - P231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처럼, 어느 어둠 속의 창고에서 내 얼굴이 추악하게 일그러지고 있었을까. 퇴행과 은밀한 발광의 흔적을 고스란히 이목구비에 새겨가고 있었을까. - P232

그곳은 내 집이 아니다. 나에게는 집이 없다. 이 삶은 나의 삶이 아니다. 어떤 정서적 유대도 느낄 수 없다. 어떤 장소, 어떤 기억, 어떤 미래에 대해서도. - P232

내 얼굴에 흐르는 땀, 쇠약해진 다리의 비척거리는 느낌, 늘어뜨려진 두 손ㅡ몸의 작은 감각 하나하나에 집중한다. 나는 살아 있다. 이 순간 나는 살아 있다. 보고 듣고 숨 쉰다. 분명한 것은 그것뿐이다. 그것만이 나에게 남았다. - P232

대개 승용차에는 주인의 취향이 배어 있게 마련 - P233

모든 상황에는 조건이 있다. 우리의 평화는 내 건강을 전제한 것이었다. 조건이 달라지면 상황도 달라진다. 그것은 자연스러운 과정이다. - P234

그 과정에는 어떤 부도덕도, 죄악도 없었다. 당연한 일일 뿐이었다. 나도 예전의 내가 아니며, 그도 그때의 그가 아닌 것뿐이었다. 모든 것이 지나가버렸을 따름이었다. - P234

외딴섬에 단둘이 표류된 사람들처럼, 우리는 서서히 서로를 질식시켰다. 그렇게 다시 건널 수 없는 강을 만들어갔다. 서로에 대한 배려, 이타적 관계, 우정, 동료의식 들은 강 저편에 남았다. 애초에 완전한 타인이었다는 것ㅡ그 한 가지 명료한 사실만이 이편의 강가에 남았다. - P234

저 사람은 이런 사람이 아니었다. 기본적으로 심성이 여리고 다정했었다. 그러나 닳아간다. 타이어가 닳는 것처럼, 이런저런 일들을 몸으로 겪으면서. 그와 나만 그런 것은 아닐 것이다. 누구나 그렇게 조금씩, 닳아간다는 것을 의식 못 하면서 조금씩, 바퀴가 미끄러워진다. 미끄러워지고, 미끄러워져서, 어느 날 아침 갑자기 브레이크가 듣지 않는다. - P245

그러나 나는 그럴 수 없었다. 억지로 그럴 수 없었다. 억지로 배를 쥐고 웃을 수 없는 것과 같이, 사랑할 수 없었다. 오히려 내가 한 일은, 모든 사랑을 잃은 뒤 다시 찾으려 하지 않은 것이다. 끌어안고 있던 짐을 물살에 떠밀리는 동안 놓쳐버리고 만 것처럼, 매우 쉽게. - P246

그런 나를 자책하지 않는다. 눈에 보이는 대로의 진실이 가리키는 길로 가볼 수밖에 없다.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 볼 것이다. 뜬 눈으로ㅡ설령 훗날 돌이켜보아 감은 눈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더라도ㅡ뜬 눈으로 가볼 수밖에 없다. - P246

다른 길이 없다. 자기기만은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 속임수 없는 희망이 아니라면 소용없다. 어떤 속임수도 나에게 먹히지 않는다. 여태껏 한 번도 가져보지 못한 투명함이 나에게 생겼기 때문이다. 전에는, 이렇게 자신을 잘 들여다볼 수 없었다. 이제는 마치 내가 한 마리 빙어가 된 것처럼, 뼈마디 하나하나까지 들여다보인다. 아무것도 자신에게 속일 수가 없다. - P247

지금 생각하면 그것은 자만이었다. 내가 사랑하는 일을 죽을 때까지 할 수 있으리라 믿었던 자만. 내 생에서 중요한 것들은 아무것도 변하지 않으리라 생각했던 자만. - P248

빛이 화면 뒤에서 비쳐 나온다. 구원의ㅡ떠오르는ㅡ잠잠한ㅡ승화된 눈물의 빛. 서로 다른 빛깔의 동그라미들이 겹쳐져 더 진해지고 어두워져야 할 바로 그 자리에 떠오른, 물을 섞은 유채꽃 빛깔의 노랑. 간혹 그보다 강렬한 주황. 멀리서 보면 이 그림들은 결코 위력적이지 않다. 가까이 갈수록 착시처럼 더 밝아지는, 실제로 튀어나오며 확장되는, 눈과 혼을 홀리는 노란 빛방울들. - P250

무엇이 그녀로 하여금 이 빛을 내면에서 보고, 그것을 나에게 다시 보게 했는지, 빛의 지문(指紋)과 같은 이 점들을 찍으며, 사랑하며, 어루만지고 빨려들고 바라보며, 그녀는 자신의 영혼을 불어넣었고, 나는 거기에 다시 내 영혼을 내려놓은 건가? - P251

가슴으로 생의, 우주의, 한없이 깊고 밝고 가벼운 빛이 물처럼. - P251

문득 생각한다. 이런 거라면 나도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 P251

나는 자신에게 묻는다. 지금 이와 같은 것을 하고 싶은가.
그렇지 않다, 라고 나는 대답한다. - P251

이 세계는, 이 감동적인 세계는 나에게 억지와 같다. 나는 이렇게 억지로 초월할 수 없다. 아름다워질 수 없다. 소리 없이, 내가 입술을 물고 울기 시작한 것을 깨닫는다.
나는, 그릴 수 없다. - P251

내가 기억할 수 있는 한, 아주 어린 시절부터 내 존재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던 것이 그림이었다. 그림 그리는 사람 외에 다른 것이 되어보고 싶었던 적이 없었다. 나는 원래 나약하고 혼란스러운, 의지력이 없으며 미성숙한 인간이었지만, 그림이 모든 것을 이기고 나를 끌고 다녔다. 만병통치약처럼, 모든 인간적 약점의 처방으로서 그림은 나를 살렸다. 거짓, 나태함, 자기중심성, 비굴함, 천박함으로부터 나를 끌어올렸다. 그래서 그것을 포기했을 때, 나는 곧장 낮은 지점, 가장 동물적인 지점으로 내려갔던 것이다. 먹고 배설하고 잠을 자는, 본능만으로 남은 존재가 되었던 것이다. - P252

그림 없이 존재의 균형을 잡는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나는 예전에 미처 알고 있지 못했다. 내 모든 에너지는 그림을 위해 삶에서 유보되었고 저축되었다. 오로지 작업을 위해 모든 것이 유보된 상태, 그것이 자연인으로서의 내 삶이었다. 다시 말해, 나는 살아보았던 적이 없다. 나는 사는 법을 모른다. - P252

이렇게 비어 있을 수가. 내 지나온 모든 시간이 완벽하게,
고스란히 비어 있을 수가. 텅 빈 어두운 방을 들여다보는 것같다. - P252

이름도, 나이도, 직업도 전혀 모르는 남자의 이미지가, 십년이 지난 지금 되살아나, 그 자리에 고스란히 있다. 만일 내가 그 남자와 수작을 나눴다면 이렇게 밝은 기억으로 남아 있지 않을 것이다. 내가 그와 나눈 것은 침묵이었다. 비장하지도 우울하지도 않은, 그저 침묵. 말하지 않았기 때문에 더 깊이 새겨진 몸의 따스함. - P270

소진이 거실의 오디오를 켠다. 에릭 클랩튼의 오래된 음반이다. 네 살 된 아들을 잃고 만들었다는 조용한 노래가 흘러나온다.
나는 고단한 몸을 소파에 파묻은 채 노래 가사에 귀를 기울인다. 시간은 너를 밑바닥까지 내려놓을 수 있지. 네 무릎을꿇게 만들 수 있지. 네 가슴을 영원히 찢어놓고, 구걸하고 애원하게 할 수 있지. - P276

소진의 대답이 노래 가사의 일부 같다. 다 흩어져버린다는걸. 남김없이 닳아지고 사라져버린다는 걸. - P277

이거, 이름 있니?
나는 묻는다.
영원이요.
영원?
네, 노랑무늬영원. - P275

노랑무늬영원
불도마뱀
Fire Salamander - P278

나는 알 수 없는 힘에 이끌려, 그 동물의 사진에서 눈을 떼지 못한다. 만져보면 축축하고 차가울 듯한 피부. 끝부분이 갈라진, 허공으로 길게 내민 혀, 근육질의 긴 꼬리. 민첩해 보이는 네 개의 짧은 다리들. - P278

중동의 사막 지방에서 서식하는 그 동물은, 불 속에서 사는 것으로 이집트인들에게 믿어졌었다고 거기 씌어 있다. 도마뱀의 재생력과 불의 정화력이 결합된 믿음일 것이다. - P279

그 짐승의 징그러운 외양에 대조돼 더욱 돋보이는 무늬의 아름다움을 나는 오랫동안 음미한다. 이글거리는 태양에 가까운 지역이 아니라면 결코 새겨질 수 없을 화려함이다. 밝은 레몬빛에 가까운 투명한 색채, 나비나 흰 새, 젊은 여자의 스카프에 어울릴 법한 강렬한 패턴. - P279

노랑무늬영원, 하고 나는 입속으로 중얼거려본다. 영원이란 도롱뇽과에 딸린 속명일 뿐이라고 씌어 있지만, 그 동명이의어의 울림은 가냘프게 내 마음을 움직인다. 왜인지, 어떤 것인지를 설명하기 어려울 만큼 미미한 움직임이다. - P279

네 말대로 우울해질 때도 있지만, 꼭 그렇기만 한 것도 아니야. 특히 둘째를 보면 순간순간 놀라. 배만 안 고프면 저 애는 웃거든. 끊임없이 장난할 거리를 찾고, 행복하고, 활기에 넘쳐. 가장 자연스러운 상태일 때 인간은 그런 존재인가봐. 우리도 원래는 그랬지만, 그 뒤로 프로그래밍이 된 상태니까 원래의 상태를 잊고 사는 거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 - P279

그런가...... 그런데 기억이 안 나니까.
뭐가?
나는 대답한다.
내가 저만했을 때, 어땠는지.
......기억할 수 없는 시절은 정말 무의식 속에 들어가 있는걸까? 그렇다면 좋겠어. 그런 자연스러운 상태가 숨어 있다가, 가장 필요한 순간에 우릴 도와준다면. - P280

그림 다시 그리고 싶지 않아?
생각 없어. 안 그리니까 편해. 그냥 이렇게 사는 게 좋아. - P280

나는 떤다. 두렵기 때문이다. 너무 아름다운 것도 고통이 된다는 것을 처음 알았기 때문이다. 그것이 못이나 씨앗처럼 몸 안에 박히기도 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이 평생토록, 끈덕지게 죽지 않고 살아 꿈틀거리리라는 것까지 열세 살의 나는 아직 모른다. 갈망과 절망, 풀리지 않는 긴장으로 내 몸이 들뜨고 지칠 것임을 모른다. - P282

사랑받는다는 것은 황홀하구나. - P283

우거진 나무를 올려다보다가 나는 문득 놀란다. 역광을 받은 나뭇잎들의 형상이 낯익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무수한, 어두운 초록빛 동그라미들 틈으로 비쳐 나오는 햇빛.
좀더 걸어가다가 나는 흠칫 깨닫는다.
Q가 그린 것, 저것이었나. 저 노랑이었나. - P283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에서 나는 계속해서 가로수들을 올려다본다. 따가운 햇빛을 역광으로 받은, 반짝이는 잎사귀, 잎사귀의 동그라미들. - P284

그 모든 것들이 고요히, 그 사진관의 먼지 낀 상자 속에서 잠들어 있었다. 내 시계처럼. 이 년 동안 어둠 속에서 죽지 않고 고요히 돌아가고 있었던 초침처럼. - P284

만나고 싶다고 나는 생각한다. 지금의 그가 아니라, 그때의그를. 아니, 실은 그때의 나를 그 여자를 고집 세고, 무엇에도 물들지 않은, 그래서 성숙하지 않은 그 여자를 그러다가, 뜻밖에도 불에 덴 듯 깨닫는다. 그때로 돌아가고 싶지는 않은 자신을. 그, 아무것도 모르던 때로 돌아갈 수는 없는 거라고 생각하는 자신을. - P284

나는 시큰거리는 손가락들을 내 따뜻한 목덜미에 문지른다. 그때 안다. 만일 내가 이 세상에서, 사랑을 가진 인간으로서 다시 살아나가야 한다면, 내 안의 죽은 부분을 되살려서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그 부분은 영원히 죽었으므로 그것을 송두리째 새로 태어나게 해야 하는 것이다. 처음부터 다시 배워야 하는 것이다. - P285

손이란 그런 것이다. 한 사람의 거의 전부다. 나는 언제나 독립적이고 강한 인간이기 위해 노력했지만, 손을 쓰지 못하는 나는 조금의 경제력도 가질 수 없는 인간이다. 죽는 순간까지 작업에 몰두하는 것이 나의 삶이 될 것임을 의심한 적 없었지만, 고작 서른세 살에 붓을 꺾은 사람이다. 누구에게도 폐가 되고 싶지 않았으나,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고통스러운 부담이 되고 있다. 단지 숨 쉬며 존재한다는 것만으로. - P287

이렇게 더 작아져간다. 더 지워지고 뭉개어진다. 다만 이상한 것은, 모든 것이 뭉개어지는 데 비례하여 오히려 감각들은 선명하게 살아난다는 것이다. 회칼처럼 예리해진, 예전에는 가져본 적 없었던 눈과 귀와 코와 피부와 혀의 감각들을 느낀다. 그리고 그보다 명징한 이름 붙일 수 없는 감각. 육체에서라고도, 영혼에서라고도 할 수 없는, 그것들이 분리될 수 없는 어떤 부분에서 뻗어 나온, 무섭도록 절실한 촉수를 느낀다. - P287

하얗게 다시 덮쳐온다. 이번에는 아주 가까이, 한 마리 한마리의 물고기들이 시야 가득 확대돼 퍼덕거린다. 비늘들이 번쩍인다. 아가미들이 벌컥벌컥 벌어졌다가 다물어진다. 한마리 한 마리의 투명한 물고기들이 물을 가르려 안간힘 쓴다. 나아가기 위해, 퍼렇게 멍든 몸들을 단단한 물살에 부딪친다. 몸부림친다. - P288

삶을 정리할 여지 따위도 없었다. 아팠을 뿐이다. 무서웠을 뿐이다. 죽고 싶지 않았을 뿐이다. - P289

나는 가끔 생각했다. 다시 그와 같은 순간이 닥친다면, 그게 언제든, 죽음의 얼굴을 마주본 그 자리에서 나는 좀더 꿋꿋할 수 있을까. - P289

분명한 것은 이대로 그 순간을 맞을 수 없다는 것이다. 어떻게든 살아내지 않는다면, 진실을 살아보지 않는다면, 다시그 순간이 닥칠 때 결단코 두려움과 후회 말고는 기대할 것이 없다. - P289

그러나 그 진실이란 무엇인가. 모든 것이 환영과 잿더미가되어버린 뒤, 내가 움켜쥘 수 있는 진실이 무엇인가.
그게 무엇인가. - P289

어떤 인간이든, 자신이 사랑하는 것만을 소유할 수 있는 거지. - P290

남편이 사랑스럽지 않아진 것이 아니라, 내 사랑이 메말랐다. 내 사랑이 마르자 삶이 사막이 되었다. 내 사랑이 말라서, 나는 가장 가난한 사람이 되었다. 흔히 들었던 성경 구절을 이제 이해한다. 내가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 P2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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