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인 서인주의 죽음으로 인해 그간 인주의 행적을 찾아헤매던 이정희는 인섭이라는 이름을 가진 심리 상담소장을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게 되는데, 그간의 이야기의 흐름과는 약간은 결이 다른 느낌의 이야기가 새롭게 시작된다.

갑자기 좀 생뚱맞긴 한데, 상담소장이 이정희에게 이성적인 감정을 느꼈다는 말이 나온 것이다. 독자인 나는 처음에 좀 의아했다. 물론 남녀사이에 이성적인 끌림이야 얼마든지 있을수 있다고는 하지만 소설 속에서 어떻게 아무런 맥락없이 처음 본 사람한테 강렬한 이성적인 끌림이 생겨나는지 도무지 납득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행히도 이러한 의구심은 뒤이어지는 등장인물들의 과거 이야기들을 통해 어느정도 해결되긴 했다. 물론 아직 다 읽은 건 아니라서 약간의 의구심은 남아있긴 하지만 말이다.

뒤에 나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상담소장은 과거 대학생이던 시절 진수라는 이름을 가진 고위층의 자제에게 영어 과외를 했던 사람이라고 한다. 그리고 진수에게 수학을 가르쳤던 여자 선생님이 있었는데, 이동선이라는 이름으로 나온다.

개인적으로는 이 이동선이라는 이름을 보고 읽으면서 약간 소름이 돋았다. 이 소설 속 등장인물들이 꽤나 많이 나오는 관계로 독자인 나는 인물들이 새롭게 나올때마다 그들의 이름이나 다른 인물들간의 관계도, 개개인의 인적 특이사항 등을 별도의 메모지에 적어가면서 이 소설을 읽고 있는데, 이동선이라는 이름이 이미 한참 전에 그 메모지에 적혀있었기 때문이다. 이동선은 서인주의 어머니라고 내가 적어놓았던 메모를 보면서, 이게 연결고리가 되어 상담소장과 이정희 간에 무언가가 생겨날 수 있겠다는 예상을 해볼 수 있었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이동선에 대한 얘기를 좀 더 하자면, 그녀는 음악에 관심이 많아서 각종 유명한 교향곡들을 즐겨 듣거나 혹은 자신이 익숙한 멜로디를 흥얼거릴정도였다고 한다.

과외학생인 진수를 매개로 서로 알게된 인섭과 이동선은 조금씩 처음의 서먹서먹함을 깨나가기 시작했는데, 그러던 어느날 인섭은 아버지가 사회 고위층이라 집안 형편이 좋은 진수의 집에 있는 최고급 음악 관련 장비들을 보고 진수에게 제안을 하여 그 집에서 수학 과외선생님인 이동선과 함께 음악을 들어보는 시간을 가져보자는 제안을 한다. 때마침 진수도 수학 과외선생님에게 이성적인 호감이 있던 터라, 진수는 인섭의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인다.

오늘 처음 밑줄친 문장은 위에서 언급한 상황이 조성된 뒤 셋이 함께 음악을 들으면서 인섭이 느꼈던 감정과 생각을 표현한 것인데, 단지 몇 마디 말로는 다 나타내기 힘든 음악이 주는 내면의 울림을 적절하게 표현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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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이어 좀 더 읽다보니 처음에 좋아보였던 분위기가 갑작스럽게 변한다. 물론 이는 소설의 앞부분에서 화자인 인섭의 말로 인해 어느정도 예상됐던 것이기도 한데, 너무나도 갑작스럽기도 했고 작은 꽃(?)이라도 피울 줄 알았던 로맨스도 너무 빨리 끝나버려서 개인적으로는 조금 아쉬웠다. 그래도 이 소설의 전반적인 전개상 로맨스적인 요소가 잠깐이나마 나왔다는 거 자체가 어쩌면 신기한 일일 수도 있다. 누군가의 죽음과 그로 인한 고통에 관한 얘기가 주를 이루어 왔었기 때문이다.

갑작스럽게 소설 속 분위기가 바뀐 이유는 얼핏보면 이동선의 동생이 몸이 좋지 않다는 것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조금만 더 깊이 들여다보면 그 이면에는 동생을 진료하러 온 의사에 대한 인섭의 질투심이 있었다.

이와 관련해 여기서 하나 더 추가로 언급하자면 위에서 내가 이동선의 이름을 보고 놀랐다고 말했던 것과 비슷한 맥락으로 인섭의 질투심을 유발한 사람이 의사라는 것을 보고 다시 한 번 놀랐다. 그 이유는 내가 이 소설의 앞부분을 읽을 때 적어놓았던 인물들의 특이사항 중에서 서인주의 아버지 직업을 의사라고 적어놓은 메모를 봤기 때문이었다. 지금 읽고 있는 부분은 오래전 과거를 회상하는 부분이기에 이를 통해 결국 이동선과 이 의사라는 사람이 후에 결혼을 하여 서인주를 자녀로 낳았음을 합리적인 근거로 추론해볼 수 있었다. 개인적으로는 이 추론을 통해 엄청 먼 곳에 떨어져 있던 퍼즐을 찾아서 맞춰 끼운 것 같은 짜릿한 느낌을 받았다. 만약 내가 등장인물들에 대한 일절의 메모없이 이 부분을 읽었다면 이러한 짜릿함은 결코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독자인 나는 이 부분을 읽으면서 집착이라는 게 참으로 무섭다는 것을 다시금 느낄 수 있었는데, 그 이유는 집착이라는 것이 궁극적으로 그 집착하는 사람을 밑도 끝도 없이 망가뜨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 소설 속에서도 집착은 궁극적으로 인섭이나 진수에게 어떤 긍정적인 감정보다는 부정적인 감정을 훨씬 더 많이 느끼게 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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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더 이어 읽다보니 이동선이 과거에 겪었던 위험했던(?) 순간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여기 별도로 자세하게 밑줄치진 않았지만 독자인 나는 이 부분에서 ‘미시령‘이라는 키워드가 등장하는 걸 다시금 확인할 수 있었다. 미시령은 이 소설의 앞부분에 나왔던 서인주의 메모에 적혀있던 것인데, 이를 통해 조금씩 베일에 쌓여있던 비하인드 스토리가 조금씩 그 모습을 드러낼 거라는 기대감을 가질 수 있었다.

이어지는 내용에서 인섭과 이동선 그리고 진수 이 세 사람은 마치 무언가에 홀린듯 무작정 차를 몰고 미시령으로 간다. 눈발이 매섭게 몰아치는 영하 20도의 추위를 아랑곳하지 않고 술 기운에 충동적으로 움직인 듯하다. 여기 자세히 밑줄치진 않았지만 본문을 읽다보면 막장 드라마(?)같은 사건이 벌어지기도 하는데, 이 막장 드라마의 결말이 어떻게 마무리 될 지 지금으로선 딱히 감이 오질 않는다. 물론 큰 틀에서는 아마도 서인주와 관련된 이야기로 어쨌든 이어질 것으로 보이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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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사람이 우여곡절 끝에 미시령에서 돌아오면서 차를 몰고 미친듯이 미시령으로 갔던 일은 이제 그냥 단순한 일탈 정도로 마무리 되는 줄 알았는데 상황이 갑자기 급변한다. 질투심에 휩싸였던 진수가 기어코 사고를 친 것이다. 물론 이 부분의 화자인 인섭도 질투심에 휩싸였던 것은 마찬가지였으나 적어도 그는 다른 사람을 해하지는 않았다. 근데 전혀 예상치도 못하게 진수가 이동선의 남자친구라고 알려진 레지던트 의사를 차로 들이받아 버린 것이다. 그 자리에서 그 의사는 즉사했고, 진수는 이성을 잃고 의사가 근무하던 병원 외벽을 다시 들이받았다고 한다.

이 일로 인해 화자인 인섭은 몇 일간 악몽같은 날들을 보내게 되는데, 이후에 더 황당한 것은 진수가 고위층의 자제여서 그랬는지 진수의 잘못을 화자인 인섭이 뒤집어쓰게 된 것이다. 본문에 직접적인 표현이 나오진 않았지만 아마도 운전자 바꿔치기를 통해 모든 행위를 인섭에게 엎어 씌운 것으로 보인다. 인섭 입장에서는 당연히 부당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그 당시에 살아남기 위해서는 그저 형량을 최소한으로 줄이는 것만이 최선이었다고 회고한다. 이 부분을 보면서 권력의 폐혜가 이런 거구나 라는 것을 다시금 느낄 수 있었다. 만약 내가 인섭이었다면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분노에 휩싸였을 것 같다. 차마 상상이 되지 않을 정도의 분노일 것이다.

완전하게 집중한 상태에서 음악을 들을 때 우리의 내면이 겪는 것들을 언어로 바꾼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날 그 음악 속에서 우리가 겪은 것 역시, 결코 말로는 설명할 수 없을 것입니다. 위태로울 만큼의 집중력으로 그녀가 음악을 빨아들이는 것을 나는 느꼈습니다. - P281

그러나 그보다 위태해 보인 것은 진수의 반응이었습니다. 누군가와 함께 음악을 듣는다는 것이 그토록 위험한 일이라는 것을 나는 그때까지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 나이에만 가능할, 비뚤어진 조숙함 때문에 더욱 강해졌을 집중력으로, 진수는 음악과 그녀를 동시에 빨아들였습니다. 그녀의 진지함, 그녀의 나약함, 지각처럼 단단한 슬픔 아래 숨겨진 관능까지. - P281

다음은 언제지, 라고 그녀는 진수에게 물었습니다. 부활의 5악장, 격정적인 구원의 혼성합창이, 그 격정을 손상시키지 않는 뜨거운 기악 코다가 아직 공기 속에 꿈틀거리고 있었습니다. 반짝이던 살얼음이 완전히 녹아 눈시울에 따스하게 고인 눈으로, 그녀는 자신을 사랑하는 두 남자를 번갈아 바라보았습니다. 모든 것을 용서한 듯, 모든 것들로부터 용서받은 듯 고요하게.
다음 주 금요일. 이 시간이요.
서툴러 보이지 않기 위해 애쓰는, 자제하는 어른 남자의 음성으로 진수가 대답했습니다. - P281

눈에 띄게 명랑해진 가정부들에게 고개 숙여 인사한 뒤 2층으로 올라가는 금요일들이 계속되었습니다. 차츰 세 사람은 서로의 감정 속으로 들어갔고, 예민한 지진계처럼 서로의 균열을 읽었습니다. 한마디 말없이 눈짓으로 말하는 삼중주단처럼 서로의 고통의 회로를 익혀갔고, 그렇게 발견한 어떤 감정의 비밀도 입 밖으로 꺼낼 수 없었고, 멈출 수 없었습니다. - P282

마치 세계 전부가 나를 조롱하며 침을 뱉는 듯 크라이슬러의 앞유리에 뭉클뭉클 몸을 으깨던 물기 많은 눈송이들에 대해서. - P282

내 뺨과 그녀의 손이 하나의 영원히 따스한 덩어리로 느껴진 순간, 그것이 다시 올 수 없는 순간이라는 것을 몰랐던 나 자신에 대해서. - P282

그녀가 나에게서 멀어진 것은 점진적인 과정이 아니었습니다. 언제나처럼 일요일 오후를 기다려 집으로 찾아간 나를, 갑자기 대문 안으로 들여보내주지 않았습니다. - P283

안 돼. 지금......
독을 뱉거나 삼키듯이, 화살을 쏘거나 스스로에게 겨누듯이 그녀는 힘주어 말을 맺었습니다.
의사가 와 있어.
그 한마디가 일깨운 내 몸속의 지옥을 그녀는 상상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 P283

나는 집착했습니다. 매달렸습니다. 그녀와 나를 동시에 학대했습니다. 그녀의 집 앞에서, 학교 앞에서, 버스 정류장에서 기다렸습니다. 그녀는 단호했습니다. 마치 군인처럼, 정보요원처럼. 이 세상에서 가장 차가운 여자처럼. - P283

배신감보다 고통스러웠던 것은, 그 레지던트와 그녀가 단둘이서 나누고 있으리라고 내가 순간순간 상상한 모든 것이었습니다. 원한에 가까운 갈망ㅡ그녀의 육체에 대한 정직한 갈망 속에서 나는 처음으로 일종의 광기를 경험했던 것 같습니다. - P283

눈짓으로 말하던 삼중주단은 깨어졌습니다. ...(중략)... 나는 갈망과 절망을 조금도 숨길 수 없는 상태였고, 진수 역시 우울하고 혼란스러운 기색이 역력했습니다. - P284

금방이라도 책상을 내리칠 듯한 녀석의 깡마른 주먹을 나는 보았습니다. 나는 짐작하고ㅡ이해하고ㅡ있었습니다. 수년 동안 그녀가 녀석에게 상상 속의 연인이었다는 것을. 그를 버린 젊은 어머니, 버려진 유년, 따스한 것, 빛나는 것, 눈물, 욕정, 구원, 누더기를 입은 천사였다는 것을. - P284

그녀는 나를 돌아보았습니다. 그녀의 눈이 내 눈과 허공에서 만난 순간, 세차게 가슴이 뛰었습니다. 아무것도 끝나지 않았다고,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할 수 있다고 나는 확신했습니다. 그녀의 눈 때문이었습니다. 군인의 눈도, 정보요원의 눈도 아닌, 다만 혼란을 느끼는 눈. 외면하지 않는 눈. - P287

그 레지던트는 나보다 나은 사람임이 분명했습니다. 그녀가 술을 끊도록 하는 것은 내 간절한 바람이었는데, 막상 그녀가 술을 끊었다고 말하자 나는 찌르는 것 같은 패배감과 상실감을 느꼈습니다. - P287

흔들고 싶었습니다. 무너뜨리고 싶었습니다. 부둥켜안고 싶었습니다. 소리치고 싶었습니다. - P287

나는 알고 있었습니다. 예전에 그녀를 위해 알코올중독에 대한 책들을 읽었기 때문입니다. 단 한 잔이면 충분했습니다. 단 한 모금의 방심이면 되었습니다. - P288

마침내 그녀가 한 모금을 마시는 것을 나는 보았습니다. 그녀가 천천히 취기 속으로 가라앉는 것을 보고 싶었습니다. 내가 그토록 사랑했던 느슨하고 쓸쓸한 미소를 짓는 것을 보고 싶었습니다. 더 흔들고 싶었습니다. 더 무너뜨리고 싶었습니다. 소리치고 싶었습니다. 부둥켜안고 싶었습니다. - P288

너는 결코 모든 것을 잃지 않았다.
너의 존재, 너의 고통은 헛되지 않다.
고통, 모든 사물에 깃든 이 고통.
나는 너를 극복했다.
죽음, 모든 것을 정복하는 이 죽음.
나는 너를 이겼다. - P289

이 모든 것을 너는 잃었다.
너의 존재, 너의 고통은 헛되다.
고통, 모든 사물에 깃든 이 고통.
나는 너를 이기지 못한다.
죽음, 모든 것을 정복하는 이 죽음.
나는 너에게 패배한다. - P290

이런 음악은 말이야. 사실은 가짜야.
...(중략)...
언제나 시작은 정직하지. 인간을 들여다보고, 고통을 직시해. 그런데 그 절망으로부터 이런 5악장에 이르는 과정은 말이지...... 순수하게 음악적인 거야. 삶의 힘이 아니라, 음악 자체의 힘으로 밀고 가는거야. 차라리 저 가사를, 내가 했던 것처럼 모두 거꾸로 했더라면...... 가혹함만으로 끝까지 나아갈 수 있다고 믿었다면. - P290

왜 술을 마시느냐고 나한테 물었지?
...(중략)...
불안 때문이야...... 불안을 알아? 진짜 불안이 뭔지 알아? 돈. 빌어먹을 추위. 가망 없는 그 애의 병. 내가 인간이라는 거. 이 모든 걸, 빌어먹을 누구와도 나눠서 짐 질 수 없다는 거. - P291

더 흔들고 싶었습니다. 더 무너뜨리고 싶었습니다. 부둥켜안고 싶었습니다. 나는 그녀의 잔에 술을 부었습니다. - P291

내가 정말 가고 싶은 데는 거기야.
...(중략)...
・・・・・・ 아니, 가장 가고 싶지 않은 데가 거기야. - P292

어머니를 이해했지만, 이해하고 싶지 않았어. 용서했지만, 용서하고 싶지 않았어. 어머니가 죽는 바로 그날까지…………… 그날의 기억은 내 지옥이었어. - P293

.....그런데, 이상한 게 있어. 그날, 버스가 회전하며 절벽을 향해 기울어가던 그 순간을 생각할 때마다. 눈을 뜰 수 없을 만큼 강한 빛이 그곳에 흘러넘치고 있었던 것처럼 기억돼. 마치 거대한 천사 같은게 날 막아서 돌려보내고 있었던 것처럼. - P293

이걸 더 마셔요. 기분이 좋아질 거예요. 점심 무렵이면 돌아올 수 있을 거예요. 가고 싶다고 했잖아요. 단칼로 끊어낸 것처럼 죽음과 삶이 갈라지던 순간을 다시 경험하고 싶다고 했잖아요. 거기서부터 새로 시작하고 싶다고 했잖아요. - P295

나는 어떤 종교도 가지고 있지 않지만, 기독교에서 말하는 성탄제의 의미에 대해서는 들은 적이 있었습니다. 인간의 육체로 신이 태어난 날. 그 통로로 단 한 번 하늘과 땅이 연결된 날, ‘하늘과 땅이 연결된다‘는 말을 글자 그대로 실감한 것은 그날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습니다. - P296

막막한 경탄과 공포 사이에서 몸이 떨려왔습니다. 마치 내 몸이 어떤 경계 위에 서 있는 것 같았습니다. 무엇인가가 내 안에서 격렬하게 무너지고 있었습니다. 다시는 무너지기 전의 상태로 되돌아갈 수 없을 것 같았습니다. - P300

하늘과 땅이 한몸의 서늘한 육체가 되어 펄펄 흩날렸던 기적ㅡ재앙ㅡ은 끝났습니다. - P302

추위보다, 공포보다 견디기 어려웠던 것은 내 상상력이었습니다. 이제야 모든 것을 ㅡ 그토록 뻔한 신파의 내막을 ㅡ 이해할 수 있었지만, 이해할 수 없었던 지옥이 지금의 지옥보다 나은 것이었습니다. 눈꺼풀 속에서 조용히 불꽃이 타올랐습니다. 만취한 그녀를 임신시키는 남자의 이미지는 좀 전에 보았던 진수의 행위와, 절망적인 나의 수음 속에서 이루어졌던 숱한 상상의 세부사항들과 뒤섞여, 악마의 꼬챙이처럼 내 눈을 찌르고 꿰었습니다. - P302

내 고통은 생명을 가진 짐승처럼 밤새워 나를 파먹어갔습니다. 그녀의 숨소리와 살 냄새, 옷 스치는 소리가 회칼처럼 내 몸을 가르고 살을 발랐습니다. - P303

왜 날 가만 놔두지 않았어요, 라고 항의하듯 녀석은 나를 올려다보았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그 눈 속에서, 사이좋게 저 여자의 안에 들어갔다 나올 수 있었는지도 몰라요. 그 의사 새끼가 그렇게 했던 것처럼. 나는 수없이 꿈꿨던 진짜 악마가 되고, 우리는 서로를 증오하는 공범이 되고, 사이좋게 그 새끼를, 쥐도 새도 모르게 죽였을지도 모르고, 그리고 우리는……… - P304

남은 것도 없고 잃은 것도 없어, 라고 문득 운전석에서 입속으로 중얼거렸던 기억이 납니다. 그러면 된 거라고. 기억들은 모두 잊으면 되는 거라고.
그것이 얼마나 비겁한 자기 위안이었는지 깨닫는 데 두 시간이 채 걸리지 않았습니다. D병원 현관 앞에 서 있는, 흰 가운을 입고 눈살을 찌푸린, 이 세상 모든 모범생들의 얼굴을 합해놓은 것 같은 남자를 보았을 때 나는 구역질이 났고, 목구멍이 터질 듯 아파오는 것을 느꼈습니다. - P304

굉음에 놀라 몸을 일으켰을 때에는 모든 것이 끝나 있었습니다. 그녀는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없는 피를 온몸에 뒤집어쓴 채 비명을 질렀고, 흰 옷 입은 남자는 이미 절명했고, 진수는 한 번 더 전속력으로 액셀러레이터를 밟아 병원 외벽에 차체를 들이받았습니다. - P305

어떤 죄도, 혐의도 나에게는 없었습니다.
오직 악몽만이 내 무죄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학교 앞 자취방에서 이불 속에 웅크려 보낸 며칠 동안, 나는 그 흰옷 입은 남자를 절명시킨 사람이었습니다. 피투성이가 된 앞범퍼를 병원 외벽에 들이받은 사람이었습니다. 까마득한 벼랑에 걸쳐져 휘청거리는 버스에서, 출구를 향해 기어가는 계집아이를 밀치고 뛰어내린 사람이었습니다. - P306

그녀를 처음 만났던 날 성북동 집 앞에서 진수의 아버지를 보았을 뿐, 나는 두 번 다시 그를 보지 못했습니다. 범인에서 목격자로 뒤바뀐 진수의 증언 역시 직접 듣지 못했습니다. 그녀를 포함한 어떤 증인도 출석하지 않은 텅 빈 법정에서 나는 자술서의 진술을 번복했습니다. 단지 술에 취해 있었다고. 후진하려던 것이 그만 앞으로 차를 몰게 된 것이라고, 누군가를 죽일 의도는 조금도 없었다고 끝까지 주장해 형량을 줄였습니다. 오직 그것만이 그 순간 나를 지킬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었습니다. - P306

하룻밤의 광기와 맞바꿔야 했던 수형 생활의 기억 따위는 당신에게 의미 없는 것이겠지요. 이런 고백은 더욱이 의심스러운 것이겠지요. 그 시절, 닳지 않는 샘처럼 내가 꺼내 마신 기억이 어리석게도 그녀와 함께한 시간이었다는 것은. - P307

.....설령 애정을 가지기 어려운 내담자였다 해도, 그가 자살했다는 소식은 상담자에게 지워지지 않는 상처를 남긴다. 두 사람이 나누었던 모든 대화를 일일이 복기하며, 끈질기게 반복되는 자책에 사로잡혀 수개월을 보낸 뒤에야 다음 상담에 몰입하는 것이 가능하지만, 어떤 의미로든 그것이 극복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 P309

그 겨울이 끝날 때까지 나는 앓았습니다. 일을 할 수 없을 정도는 아니었지만, 해질 무렵이면 원인을 알 수 없는 38도 내외의 발열이 시작되곤 했습니다. 감쪽같이 덮어두었다고 믿었던 무력감과 억울함, 죄의식과 혼란이 생생하게 되살아나 명치를 짓눌렀습니다. - P309

아무것도 바라지 않았습니다.
그녀에게 말하고 싶었을 뿐입니다.
내가 저지르지 않은 죄 때문에 오 년 가까운 시간을 감옥에서 견뎠다고. 마음으로 저지른 죄까지 모두 치러낸 셈이 되었다고. 당신이 진실을 말하지 않은 것을, 나를 변호해주지 않은 것을 이해한다고. 다만 아직 내가 살아 있고, 그동안 당신 역시 살아내주어서 다행이라고. - P310

대문까지 따라나온 그녀의 동생에게 나는 이름과 집 주소, 직장의 전화번호를 적은 쪽지를 내밀었습니다. - P310

이제 짐작하겠습니까.
당신의 친구는 그 메모를 간직했던 것입니다.
어린 시절 잠깐 보았을 뿐인 그 이상한 손님을 기억했던 것입니다.
어머니의 과거에 대해 알고 있으리라 짐작되는 유일한 사람, 나를 추적해 만나려 했던 것입니다. - P311

왜냐구요.
이것은 당신이 품고 있는 의문과 직접 연결되는 대답이겠지요.
자신의 어머니가 술 마시기를 멈추지 않았던 이유를 당신의 친구는 알고자 했던 것입니다. 당신의 친구의 끔찍한 표현에 따르면, 감염된 환부처럼, 죽은 짐승의 육체처럼 서서히 썩어가기를 스스로 택했던 이유를 알아야만 했던 것입니다. - P311

왜냐구요.
바로 자신 안에 그런 충동이 비명을 지르고 있었기 때문에.
똑같은 방법으로 죽어가고 있다고 느꼈기 때문에. - P312

당신은 그걸 부인하고 싶어 하지요.
이렇게 말하는 나를 견디기 어렵겠지요.
그러나 나는 알고 있습니다.
그녀들은 똑같은 눈을 가졌습니다.
그녀들은 살아남지 못했습니다. - P312

아직 밝아지지 않았습니다.

가까운 지하철역으로 첫 열차가 들어오는 소리가 들립니다.
고요한 음악이, 운석과 운석 사이의 침묵처럼 희박해지며 끝나가고 있습니다. - P312

유년 시절에 경험한 형제들의 죽음 때문에 말러는 ‘죽은 아이들을 기리는 노래‘ 연작을 썼습니다. 그것이 저주처럼 자신의 어린 딸의 죽음을 불러오리라고는 결코 예상할 수 없었겠지요. 마지막 심장 발작을 앞두고 교향곡 9번의 4악장을 쓰며, 옛 연작 중 한 곡의 선율을 빌려 그는 독백합니다. 아이들은 산책 나갔고, 다시는 돌아오기를 희망하지 않는다고. 성글게 잦아드는 눈발처럼 고요하고 서늘한 선율입니다. - P312

오래전 그녀가 음악을 들었던 방식으로 바꿔 들으면, 거기 숨겨진 진실은 이제 그가 산책 나가리라는 것입니다. 처음의 빛 속으로 걸어 들어가기를, 다시 돌아오지 않기를 희망한다는 고백입니다. 어스름 속의 후회, 잔혹하게 몸을 으깨는 진눈깨비, 핏기 잃은 질문들, 무한히 시간이 느려지는 밤 속에서 더 찢기지 않겠다는 결의입니다.
그래요. 그녀는 산책 나갔고, 다시 돌아오기를 희망하지 않았습니다. - P313

허락된다면,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조언ㅡ당신의 친구에게 똑같이 던지고 싶었던 조언을 당신에게 해도 될까요. 아니, 허락 따위는 구하지 않고 말하겠습니다.
모든 죽은 사람의 관 뚜껑을 닫고, 거칠게 못질을 하고, 영원히 버리십시오. 그 얼굴을 눈동자들을 끈덕진 자책과 결의 따위를. - P314

이제 나는 어리석은 산책길로 들어서려고 합니다. 오해하지는 않기를 바랍니다. 그녀 때문도, 당신의 친구 때문도, 그렇다고 당신 때문도 아닙니다. 단지 오랫동안 지쳐왔을 뿐입니다.
이제 나는 늙었지만, 어떤 위엄도 깨달음도 마침내 얻어내지 못했습니다. 만나온 사람들과 주어진 시간을 서서히 파괴해왔고, 자신 역시 무사하지도 온전하지도 못했습니다. 어떤 교훈도 치유도 돌이킴도 없이,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흔들리며 끔찍하게 어두운 길을 가겠습니다. 어떤 사람과도 어떤 전생의 기억과도 마주치지 않기를. 다시는 돌아오지 않기를 기도합니다. 믿지 않는 영혼과 천사들을 위해, 내가 그르친 모든 것을 위해, 당신을 위해, 아멘. - P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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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이 온다 -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한강 지음 / 창비 / 2014년 5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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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 5월 그날의 고통과 아픔을 직접 경험해보지 못한 사람들이 이 소설을 읽어본다면 그 시대를 온 몸으로 겪어온 사람들의 물리적, 정신적 상처를 조금이나마 헤아려볼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개인적으로는 그날의 잔혹함을 이 소설만큼 적나라하게 표현한 책이 과연 있을까 싶을 정도로 엄청난 몰입감을 가지고 읽을 수 있었다. 이러한 비극이 이 땅에서 다시는 일어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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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읽는 부분에서는 소설 속 수많은 등장인물들 중 임선주라는 사람이 화자가 되어 과거의 끔찍했던 사건들을 회상하는 장면이 나온다. 임선주는 5월 당시 동료들과 함께 시민군의 시신을 수습했던 사람인데, 시신을 수습할 당시 여러모로 상황이 여의치 않아 이런저런 고민 끝에 시신을 태극기로 감쌌다고 한다.

당시 선주와 함께 시신을 수습했던 동료인 동호와 은숙은 국가가 군인들을 시켜서 시민군을 죽였는데, 국가를 상징하는 태극기로 시민군의 시신을 덮는 것이 과연 맞는 것인가 하는 의문을 가졌다. 이 의문은 소설의 앞부분에 나왔던 것인데 독자인 나도 이 부분을 읽으면서 동호와 은숙의 논리에 자연스럽게 동의할 수 있었다. 뭔가 아이러니한 상황이지 않은가. 시민군을 죽인 국가를 상징하는 국기를 시민군의 시신에 덮는다는 행위 자체가 말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그당시를 다시금 떠올린 선주는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군인들의 총에 맞아 죽은 사람들의 죽음이 아무런 의미가 없게 된다(그저 도륙된 고깃덩어리로만 남을 뿐이다)는 생각때문에 시민군의 시신들에 태극기를 덮고 묵념을 하고 애국가를 불렀다고 회고한다.

지난번 포스팅의 후반부에 나왔던 문장 중에 ‘우리는 고귀해‘ 라는 것이 있었다. 이 말은 과거 선주와 함께 일했던 김성희라는 사람이 자주 했던 말인데, 독자인 나는 위에서 언급한 태극기를 시신위에 덮어주었던 선주의 행동도 어쩌면 ‘우리는 고귀해‘ 라는 김성희의 말에 영향을 받아 나온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고귀한 한 사람 한 사람에게 할 수 있는 최선의 예우를 하는 것이 ‘우리는 고귀해‘라는 생각을 제대로 실천할 수 있는 방법 중 하나가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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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마지막 파트인 6번째 파트에서는 소설 속 주인공인 동호의 엄마가 그 시절의 기억을 회상하면서 이런저런 얘기들을 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순수했던 시절을 뒤로 하고 군인들의 총칼에 짓밟힌 어린 학생들의 이야기를 읽다보면 참 이게 무슨 일인가 싶다. 개인적으로는 이 부분을 읽으면서 잔혹함과 동시에 허무함이 느껴져서 마음이 갑절로 먹먹해졌던 것 같다.

태극기로, 고작 그걸로 감싸보려던 거야. 우린 도륙된 고깃덩어리들이 아니어야 하니까, 필사적으로 묵념을 하고 애국가를 부른 거야. - P173

그들이 욕설을 뱉으며 당신의 몸에 물을 끼얹던 순간을 등지고 여기까지 왔다. 그 여름 이전으로 돌아갈 길은 끊어졌다. 학살 이전, 고문 이전의 세계로 돌아갈 방법은 없다. - P174

그 발소리가 누구의 것인지 나는 몰라.

언제나 같은 사람인지, 그때마다 다른 사람인지도 몰라.

어쩌면 한사람씩 오는 게 아닌지도 몰라. 수많은 사람들이 희미하게 번지고 서로 스며들어서, 가볍디가벼운 한 몸이 돼서 오는 건지도 몰라. - P174

만일 혼들의 장소가 있다면 그곳은 어두울까, 어렴풋이 밝을까. - P175

우리들을 희생자라고 부르도록 놔둬선 안돼. - P175

나라에서 죽인 동생 원수를 무슨 수로 갚는다냐. - P182

인자는 암것도 모르겄어야. - P183

그리 허망하게 죽을 것을, 왜 끝까장 나를 안 들여보내줬으까이. - P185

그라제, 내가 그 불쌍한 남매를 원망하면 큰 죄를 받제. - P187

그 고운 처녀가 우리 집에 들어와서 빨래 바구니를 보듬고, 물이 뚝뚝 떨어지는 운동화하고 칫솔을 들고 저 마당을 왔다 갔다 하던 일이 무신 전생의 꿈 같아야. - P187

목숨이 쇠심줄 같어서 너를 잃고도 밥이 먹어졌제. - P187

네 피가 아직 안 말랐는디. - P188

무섭지 않았어야.
죽어도 좋다는 마음인디, 무서울 것이 어디 있겄냐. - P188

엄마들, 여기서 왜 이러고 있소? 엄마들이 무슨 죄를 지었소? - P189

맞어, 내가 무슨 죄를 지었단가. - P189

벽에 걸린 살인자 사진을 끌어내렸다이. 밟아 부순게 발에 유리가 박혔다이. 눈물이 흐르는지도 피가 튀는지도 몰랐다이. - P189

난간에 기대서서 현수막을 길게 내리고 소리 질렀다이. 내아들을 살려내라아. 살인마 전두환을 찢어죽이자아. 정수리까지 피가 뜨거워지게 소리 질렀다이. 경찰들이 비상계단으로 올라올 때까지, 나를 들쳐메고서 입원실 침대에 던져놓을 때까지 그렇게 소리 질렀다이. - P190

그저 겨울이 지나간게 봄이 오드마는. - P190

점퍼의 지퍼를 끝까지 올리고, 해가 질 때까지 여기 있을 것이다. 소년의 얼굴이 또렷해질 때까지. 그의 목소리가 들릴 때까지. 안 보이는 마룻장 위를 걸어가는 그의 뒷모습이 어른어른 비칠 때까지. - P200

그 시절, 머리를 깎고 교복을 입은 소년들은 모두 비슷해 보였는지도 모른다. 저렇게 순한 외꺼풀 눈은. 키가 크느라 야윈 볼과 기름한 목은. - P203

구할 수 있는 모든 자료를 읽는다는 것이 처음의 원칙이었다. 십이월 초부터 다른 아무것도 읽지 않고, 글을 쓰지 않고, 되도록 약속도 잡지 않고 자료를 읽었다. 그렇게 두달이 지나 일월이 끝나갈즈음 더 계속할 수 없다고 느꼈다.
꿈 때문이었다. - P203

입속이 타들어가던 한순간 눈을 떴다. 꿈이었어. 움켜쥐고 있던 주먹을 펴면서, 어둠속에서 반복해서 중얼거렸다. 꿈이었어, 꿈이었어. - P204

예식장의 샹들리에는 화려했다. 사람들은 화사하고 태연하고 낯설어 보였다. 믿을 수 없었다. 사람이 얼마나 많이 죽었는데. 평론을 쓰는 한 선배는 나에게 왜 소설집을 보내주지 않느냐며 웃으면서 항의했다. 믿을 수 없었다. 사람이 얼마나 많이 죽었는데. - P205

나는 기다리고 있다. 아무도 올 사람이 없지만 기다린다. 내가 이곳에 있다는 걸 아무도 알지 못하지만 기다린다. - P205

한참 걷다가 오른손이 여태 가슴 왼편에 얹혀 있었던 걸 깨달았다. 심장 언저리에 금이 벌어진 것처럼. 그렇게 해야 무사하게 운반할 수 있는 무엇이 된 것처럼. - P206

1979년 가을 부마항쟁을 진압할 때 청와대 경호실장 차지철은 박정희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전해진다. 캄보디아에서는 이백만명도 더 죽였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못할 이유가 없습니다. - P206

그 경험은 방사능 피폭과 비슷해요,라고 고문 생존자가 말하는 인터뷰를 읽었다. 뼈와 근육에 침착된 방사성 물질이 수십년간 몸속에 머무르며 염색체를 변형시킨다. 세포를 암으로 만들어 생명을 공격한다. 피폭된 자가 죽는다 해도, 몸을 태워 뼈만 남긴다 해도 그 물질이 사라지지 않는다. - P207

광주는 고립된 것, 힘으로 짓밟힌 것, 훼손된 것, 훼손되지 말았어야 했던 것의 다른 이름이었다. 피폭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 광주가 수없이 되태어나 살해되었다. 덧나고 폭발하며 피투성이로 재건되었다. - P207

허락이요? 물론 허락합니다. 대신 잘 써주셔야 합니다. 제대로 써야 합니다. 아무도 내 동생을 더이상 모독할 수 없도록 써주세요. - P211

특별히 잔인한 군인들이 있었던 것처럼, 특별히 소극적인 군인들이 있었다. - P212

패배할 것을 알면서 왜 남았느냐는 질문에, 살아남은 증언자들은 모두 비슷하게 대답했다. 모르겠습니다. 그냥 그래야 할 것 같았습니다. - P213

그들이 희생자라고 생각했던 것은 내 오해였다. 그들은 희생자가 되기를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거기 남았다. - P213

그 도시의 열흘을 생각하면, 죽음에 가까운 린치를 당하던 사람이 힘을 다해 눈을 뜨는 순간이 떠오른다. 입안에 가득 찬 피와 이빨 조각들을 뱉으며, 떠지지 않는 눈꺼풀을 밀어올려 상대를 마주 보는 순간 자신의 얼굴과 목소리를, 전생의 것 같은 존엄을 기억해내는 순간 그 순간을 짓부수며 학살이 온다, 고문이 온다, 강제진압이 온다. 밀어붙인다. 짓이긴다. 쓸어버린다. 하지만 지금, 눈을 뜨고 있는 한, 응시하고 있는 한 끝끝내 우리는..... - P213

이제 당신이 나를 이끌고 가기를 바랍니다. 당신이 나를 밝은 쪽으로, 빛이 비치는 쪽으로, 꽃이 핀 쪽으로 끌고 가기를 바랍니다. - P213

목이 길고 옷이 얇은 소년이 무덤 사이 눈 덮인 길을 걷고 있다. 소년이 앞서 나아가는 대로 나는 따라 걷는다. - P213

날을 받아 유족들이 다 같이 이장을 했는데, 관들을 열어보니 처참했던 모습 그대로인 겁니다. 유골에 비닐이 친친 둘러져 있고, 피묻은 태극기가 덮이고………… 동호는 그래도 처음에 가족이 수습했기 때문에 유골이 얌전했습니다. 우린 무명천을 한마 끊어가서, 누구에게도 맡기기 싫어 뼈 한마디 한마디를 직접 닦았어요. 어머니가 머리 부분을 맡으면 충격이 크실까봐, 내가 얼른 집어서 이빨 하나하나까지 정성껏 닦아줬습니다. 그랬어도 그 일을 이기기가 힘드셨던가봅니다. 그때 내가 우겨서 집에 계시게 했어야 했는데. - P214

어젯밤 그의 형은 계속해서 말했다. 동생이 운이 좋았다고, 총을 맞고 바로 숨이 끊어졌으니 얼마나 다행이냐고, 그렇게 생각하지 않느냐고, 이상하게 열기 띤 눈으로 내 동의를 구했다. 동생과 나란히 도청에서 총을 맞았으며 동생과 나란히 묻힌 고등학생 하나는 바로 안 죽고 살아 있다가 확인사살을 당했던 모양이라고, 이장하면서 보니 이마 중앙에 구멍이 뚫리고 두개골 뒤쪽은 텅 비어 있었다고 말했다. 머리가 하얗게 센 그 학생의 아버지가 입을 막고 소리 없이 울었다고 말했다. - P215

반투명한 날개처럼 파닥이는 불꽃의 가장자리를 나는 묵묵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 P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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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 정신>이라는 잡지에 글을 쓰는 강석원이 사망한 서인주에 대해 자신만의 왜곡된 관점으로 쓴 평전을 내려고하자 서인주의 친구인 이정희는 서인주의 자식인 민서에게 악영향이 갈 것을 우려하여 그 평전의 출간을 막기위해 사방팔방 수소문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는 인주에 관해 왜곡되지 않은 올바른 정보를 얻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

여기저기 수소문한 끝에 이정희는 친구인 서인주가 예전에 그림을 전시했다던 명 화랑의 관장인 명은숙을 만난다. 명은숙은 그간 자신의 화랑에서 있었던 서인주와 관련된 이런저런 얘기들을 해준다. 인주는 처음엔 그닥 유명세가 없었으나 이후 이어진 몇 번의 전시를 통해 유명세가 생겼고 이후에 상업 화랑들이 인주에게 달려들면서 나중에는 명 화랑보다 규모가 좀 더 큰 대형 화랑인 P화랑으로 옮겨갔다고 한다. 아이를 혼자 키워야 했던 인주의 상황상 경제적으로 훨씬 더 나은 대우를 해주는 P화랑의 유혹을 뿌리치기는 매우 힘들었을 거라고 명은숙은 회고한다.

근데 아무래도 P화랑은 대형 상업 화랑이다보니 조금만 성과가 안보인다 싶으면 가차없이 내치는 경우들이 많았다고 하는데, 이로인해 자신만의 색깔이 강했던 인주가 결과적으로 자기 색깔을 잃어버리면서 괴로워했을거라는 게 명은숙의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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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이어 정희가 수소문끝에 만난 사람은 인주가 과거에 일했던 미술학원의 원장인 주승우였다. 그는 인주를 회고하면서 그렇게 좋은 사람이 없었다며 악착같이 살려고 발버둥쳤던 사람이기에 절대로 자살할 사람이 아니라고 강하게 말한다.

한편 여기 별도로 밑줄치진 않았지만, 서인주와 관련하여 만나달라는 이정희의 부탁을 끝내 거절하는 소설 속 인물들도 적지 않았다. 자기와 직접적으로 상관없거나 딱히 신경쓰고 싶지 않다는 단순한 이유에서였다. 이런 건 어쩌면 소설 뿐만 아니라 요즘 우리 시대 사람들의 각박한 모습과도 일정부분 닮아 보인다.

계속 읽다보니 이러한 이정희의 수소문과는 별개로 강석원이 결국 서인주에 관한 평전을 책으로 출간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아직 그 책에 정확히 어떤 내용이 나와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정희의 입장에서는 위기상황인 것은 분명해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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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서 7장 ‘얼음 화산‘ 이라는 챕터로 넘어가는데 여기선 김영신이라는 인물이 새롭게 나온다. 근데 실은 엄밀히 말하면 새롭게라고 하기도 조금 애매한게, 위에서 언급했던 이정희의 수소문 과정에서 김영신의 이름이 아주 잠깐 나오긴 했었다. 다만 그때는 서인주에 대한 얘기를 부탁했던 이정희와의 만남을 단칼에 거절했었기에 그냥 스쳐지나가는 인물 정도로만 여겼었는데, 그런 스쳐지나가는 인물의 구체적인 이름이 나왔던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새롭게 시작하는 7장에서 김영신이 이야기 속의 핵심 인물로 중심이 되는 것을 보며, 소설에서 구체적인 이름이 나온다는 건 분명 그럴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온 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문제는, 서인주 씨가 정말 그리고 싶은 게 그 시리즈는 아니었을거란 거죠. 가슴에 불이 타는 사람인데, 그냥 불이 아니라 시커먼 불이 타는데, 그렇게 고요한 숲 그림은 어쩌다 한 번, 문득 마음이 고요할 때 나오는 거지. 그래서 죽은 것 아닐까 싶어요. 자기 안에서 뭐랄까, 분열이 싹튼 거겠죠. - P203

《미술정신》에 실린 작품은 흥미롭게 봤어요. 도판만 봐서 정확히 말하긴 어렵지만, 이미지 자체는 괜찮더군요. 문제는 빨리 자기 작업을 브랜드로 만들어서 팔아야 살아남는 게 이 바닥인데, 구상하다 비구상하다, 난데없이 한지에 먹으로 재료를 바꾸고…………… P화랑에선 좋게 보지 않았을 거예요. 그쪽 사람들, 작가들 피를 말리는 걸로 유명해요. 시간을 안 주죠. - P204

강석원 교수를 만나봤지요? 서 작가와 조금이라도 인연이 있는 사람이면 전부 인터뷰했다던데. 거절하고 싶었지만, 고인을 생각해서저도 인터뷰에 응했어요. 저희로선 강 교수한테 섭섭한 게 많아요. P화랑 대표를 서 작가한테 소개시켜준 장본인이니까. 지금 유고전을 기획하는 모양인데, 물론 일이 이렇게 됐으니 P화랑이랑 하는 게 당연하지만, 저희를 이렇게까지 철저하게 배제할 순 없는 거예요. - P204

가난, 빌어먹을 가난이 죄지. 홍콩에서 경매로 그림 몇 점 판 돈이면 다 메우고 꿰매고, 팔자 고칠 수 있는 가난. - P208

말도 안 되지. 서 선생이 왜 자살을 해. 당연히 사고지. 서 선생을 눈곱만큼이라도 아는 사람은 그런 말 못 해. 얼마나 아등바등 살았어. 얼마나 몸부림을 쳐댔어. 살려고 그렇게 몸부림을 쳤지, 죽으려고 그랬겠어요? 애는 또 얼마나 어리고. 그 애한테 얼마나 끔찍했어? 그렇게 정 많은 사람은 자살 못 해. 여기 배우는 애들한테도 정성이었어요. 안 해도 될 일들을 다 껴안고 골병이 들었지. 다들 그렇게 생각한다구? 데려와봐요. 평론가? 교수? 미술판 사람들? 웃기고들 있군. 미안해요. 내가 요즘 마음이 이래.. 이 빌어먹을 눈물이. - P208

모르겠어, 이 모든 게 어떤 미친 짓이었는지. 무엇을 위해 나는 떠벌이고, 미소 짓고, 변명하고, 애원하고, 간절하고, 진지하고, 걷고, 뛰고, 인파를 헤치고, 먹고, 굶고, 목마르고, 계단을 오르고, 엘리베이터 단추를 누르고, 명함을 받고, 화장실에서 루주를 바르고, 눈을 맞추고, 미소 짓고, 고개를 끄덕이고, 결의에 차고, 기다리고, 메모를 남기고, 전화번호를 받아 적고, 사과하고, 감사하고, 수없이 네 이름을 말하고, 휴대폰 배터리를 바꿔 끼우고, 계단을 내려가고, 시계를 보고, 걷고, 간판을 읽고, 발뒤꿈치가 벗겨지고, 그리고 - P211

이 책을 펼치고 싶지 않아.
펼치는 순간 책장들이 부스러질 것 같아. 손가락에 엉기며 녹아내릴것 같아. 촛농처럼 끓어오를 것 같아. - P211

강석원이 창조해낸 인주는 책장과 책장 사이를 절름거리며 건너다녔다. 강석원의 문체는 딱딱함과 열의, 반짝임과 둔감함, 진지함과 얄팍함이 뒤섞인 묘한 것이었다. 무엇인가가 불쾌했고, 무엇인가가 가짜였고, 동시에 무엇인가가 진짜였다. - P212

흔히 예술혼이라고 불리는 과장된 열정, 새 발자국 같은 필체로 적힌 편지들ㅡ그중 어떤 것들은 나를 실망시켰다ㅡ, 지인들이 부풀리고 때로 미화한 기억들을 나는 읽었다. - P212

허점이 드러날 만한 곳마다 수사와 감상이 조악하게, 때로는 말끔하게 덧칠된 책을 읽었다. - P213

아름답게 편집된 책, 방금 세상의 것이 된 책, 인주가 무수히 덧그은 검은 선들이 꿈틀거리는 책을 읽었다. 손가락에 닿은 책장들이 뜨겁게 부스러질 것 같은 책. 불같은 책. 아니, 얼음 같은 책. 소리치는책. 아니,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 책. 벙어리 책. 더러운 책. 피 한 방울 묻지 않은 책. 방금 이 세상에 폭약처럼 던져진 책. 내 두 눈으로 똑똑히 읽은 책. 한 문장 한 문장, 한 단어 한 단어가 짧고 얕은 무수한 칼자국들처럼, 수만 개의 촘촘한 바늘처럼 이마를 가르고 들어와 박힌 책을 읽었다. - P213

......달이 지구를 중심으로 공전하며 우리에게 보이는 면이 언제나 같은 쪽이라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오랜 세월 운석들과 충돌해 수두를 앓은 흉터 같아진 뒷면은, 오직 우주선에서 찍은 사진으로만 관측할 수 있다. - P218

운이 좋았기 때문에 나는 서인주라는 사람의 가까이에 있었다. 그녀는 타고난 위대함의 씨앗을 가진 예술가였고, 주변을 감화시키는 힘을 가진 특별한 자연인이었다. 바로 그 때문에 그녀의 마지막 선택은 우리에게 더욱 큰 충격이었다. 그녀가 살아 있는 육체를 가지고 우리를 둘러싼 궤도를 돌고 있을 때, 안타깝게도 우리는 그녀의 뒷면을 보지 못했다. 수없이 부서지고 파인 자국들을 어루만져주지 못했다. - P218

그녀는 작업실의 달력 가장자리에 적었다. ‘내가 아픈 곳은 달의 뒷면 같은 데. 피 흘리는 곳도, 아무는 곳도, 짓무르고 덧나는 곳, 썩어가는 곳도 거기 당신에게도, 누구에게도, 나 자신에게도 보이지 않는다.‘ - P219

알고 있다. 로베르 르파주의 일인극 「달의 저편」의 대사처럼, 그녀의 미술관을 지어야 할 진실한 장소는 오직 달의 뒷면뿐이다. 우리들의 시선으로 더럽혀지지 않을 시시각각 충돌해오는 운석들과 맞서 부서지기를 택해야 할 그 고요한 곳...... - P219

강석원은 알지 못했거나, 의도적으로 누락했다.
인주가 달력에 쓴 것은 내가 쓴 대사였다.
십일 년 전 공연되었던, 모두에게서 잊혀진 연극의 무대에서, 이제는 퇴역 배우가 된 여주인공은 객석을 향해 독백했다.
내가 아픈 곳은 달의 뒷면 같은 데예요. 피 흘리는 곳도, 아무는 곳도, 짓무르고 덧나는 곳, 썩어가는 곳도 거기예요. 당신에게도, 누구에게도...... 나 자신에게도 보이지 않아요. - P219

컴퓨터 책상 위에 걸린 4호 크기의 액자에 담긴 것은, 얼음에 덮인 미시령의 흑백사진이었다. - P226

어린 지구는 처음에 마그마가 일렁이는 붉은 얼굴이었다가, 수천만년 동안 펄펄 끓는 비를 맞고서 파란 얼굴이 되었고...... 빙하에 덮이면 하얗게 얼어붙은 얼굴이 되었다가, 그 얼음이 녹아서 바다가 되면 다시 파랗게 되기를 반복했겠지. - P228

궁금해.
지구가 가장 차가웠을 때, 가장 선명한 흰빛의 얼음덩어리였을 때, 그 위로 눈이 내리는 건 어떤 모습이었을까. - P228

버려진 것들을 좋아해요. 지금 앉은 소파, 걸상도 주워온 거예요. - P230

고래는 한번 피를 흘리기 시작하면 멎지 않는다고. 워낙 덩치가 커서 바로 안 죽는 것뿐이지, 결국은 죽고 만다고. - P232

천천히 아랫입술을 씹다가, 뱉듯이 짧게 그녀는 말했다.
......상처받았지. - P233

어리석지 않아요? 저것들을 깎느라 나무 열두 그루를 끝장내다니. 마티카라고, 두 팔로도 다 못 안는 인도네시아 활엽순데...... 열두그루면 숲이라고 불러야겠죠. 그것들을 다 베어 죽이고, 나는 늙고..... 하나뿐인 친구였던 사람은 날 버리고. - P233

무엇인가에 복수하는 것 같은, 복수하며 스스로 비명을 지르는 것 같은 전기톱 소리가 다시 시작되었다. - P234

지워지지 않고 나는 끝까지 걸었다. - P237

나는 인주를 몰랐다.
인주가 나를 몰랐던 것보다 더. - P240

인주는 나에게 한번도 어머니에 대해 말한 적이 없었다. 삼촌에 대해 인주가 말할 수 있는 상대가 있었다는 것도 오늘 처음 알았다. 김영신은 인주의 과거의 많은 부분을 나보다 더 알고 있다. 강석원을 십분 만에 돌려보낸 것은, 그와 인주의 관계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녀가 나에게 이 편지와 가락지를 준 것 역시, 충분히 나를 알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 P241

적막에도 형상이 있다고 삼촌은 말했다.

적막은 육각형의 작은 눈송이 하나 속에,
빙하기에 내리는 눈과 다르지 않게,
얼음에 싸인 불꽃처럼 거기 있다고 했다. - P241

생각해보겠습니다, 라고 그는 나에게 말했다. 무엇을 생각한다는 걸까. 무엇을 말할 것인가를? 무엇을 숨길 것인가를? - P245

「닥쳐」는 무대에 올라간 내 첫 희곡이었다. 심리치료의 임상 사례에서 모티프를 따온 것으로, 어린 시절 어머니로부터 은밀히 학대받았던 여자가 주인공이었다. 여자는 누군가와 긴밀한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곧 지배당하는 것이며 자신을 잃는 것이라는 공포 때문에 고립된 삶을 살아가는데, 어느 날 수수께끼 같은 남자를 만나 그가 제안한 ‘닥쳐‘ 게임을 한다. 그가 무슨 말을 하든 ‘닥쳐‘라고 응수하는 것이 그 게임의 유일한 규칙이다. - P246

무대 바닥에 엎드려 있던 여자가 어두운 객석을 향해 천천히 돌아앉으며 말한다. 혹시, 이것으로 내가 아픈 데를 다 알았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죠. 여자는 희미하게 웃는다. 내가 아픈 데는 달의 뒷면 같은 데에요. 누구에게도, 당신에게도...... 나 자신에게도 보이지 않아요. - P248

밤도 이상한데...... 새벽은 더 이상해. 삼 년쯤 잠을 안 자면 사람이 이상해지는 걸까? 그러니까, 내가 이상해져서 새벽이 이상하게 느껴지는 걸까? 밤에는 결이 있고 마디가 있고 틈이 있는데.. 새벽은 안 그래. 어떤 물결이야. 어떤 핏줄, 어떤 생명 같은 거...... 두근거림 같은 거. 빠담! 빠담! 빠담! 이 노래 가사가 무슨 뜻인지 알아? 심장 뛰는 소리야. 두근두근 뛰는 소리가 아니라, 쿠쿵! 쿠쿵! 쿠쿵! 새벽은 그래. 심장처럼 뛰어. 아무리 죽이려고 해도 죽일 수 없는게 내 안에 있어. 그게 느껴져......내가 미친 것 같니? 이상한 것 같아? - P251

둘 다일 수는 없다.

한 사람이, 자살한 동시에 자살하지 않은 것일 수는 없다.
모든 것을 버리는 동시에 버리지 않았을 수는 없다.
갓길 없는 미시령의 눈 쌓인 길에서, 벼랑의 안쪽과 바깥쪽 중 하나를 택해야 하는 단 한순간, 둘 다를 택할 수는 없다.
주저할 수도,
얼버무릴 수도 없다. - P256

인주가 재현한 삼촌의 별이 한 면 가득 태어나고 있다. 희고 뜨겁고 타오르는 것, 둥근 불꽃의 적막이 캄캄한 피 같은 먹 속으로 번진다. - P256

생각해보겠습니다, 라고 방금 그는 여자에게 말했다. 한 시간여 전에 나에게 했던 것과 같은 말이었다. 그것은 직업적인 습관일까. 변명일까. 진심일까. - P258

생명이 꺼지면 영혼은 고통 없는 곳으로 간다는 말을 당신은 믿습니까.
그 믿음에 의지해 때로 사람들은 피 흘리는 동료, 신음하는 개를 앞당겨 죽입니다. 하지만 사실일까요. 전장에서, 동물병원에서 그들의 고통을 사라지게 할 때, 정말 사라지는 것은 그들을 지켜보던 우리의 고통 아닐까요. - P259

넉 줄짜리 사회면 기사에 실린 그녀의 이름을 일 년 뒤 조간신문에서 보았을 때, 아무도 내 기도 따위를 듣고 있지 않았다는 당연한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둔하고 느린 동작으로 신문을 접어 책상 한쪽으로 밀어놓고 나는 기다렸습니다. 무엇인가가 내부에서 무너지기를. 무너지지 않았습니다.
몸 어디에서건 피가 철철 흘러나오기를. 피 흐르지 않았습니다. - P260

그날 당신이 꺼내놓은 추측들은 모두 틀렸지만, 이 사진을 내가 직접 찍었으리라는 짐작만은 옳았습니다. 오래전, 내가 그곳에서 이 사진을 찍었습니다. 그렇게 했던 것을 후회해왔습니다. 사진을 없애는 것으로 그곳을 잊을 수 있었다면 수십 번 그렇게 했을 겁니다. 그러나 그럴 수 없었습니다. 시시로 그곳을 기억하지 않았다면, 김에 덮인 거울 속의 사람처럼 내 인생은 지워지고 흘러내렸을 겁니다. 당신에게 이 편지를 쓰고 있는 지금, 거울 속의 그 사람이 이제 힘차게 흘러내려 지워지고 있는 것을 느낍니다. - P261

그녀에게 그곳이 어떤 장소였느냐고 당신은 물었지요. 나는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그곳이 그녀의 죽음의 장소가 된 이유를 알고 있느냐고 당신은 고쳐 물었지요. 당신의 입술이 떨리고, 열기 띤 눈이 세차게 깜박이는 사이 나는 조용히 반문했습니다. 그 사람에 대한 모든 것을 알아내 당신의 머릿속에서 합한다 해도, 결국은 순수한 추측만으로 메워야 하는 빈 곳이 남지 않겠느냐고. 강석원이라는 사람이 쓴, 당신이 동의하지 않는다는 저 책과 다름없이. - P261

처음 태어난 우주는 너무 작고 밀도가 높아 빛조차도 그 안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고 당신은 말했지요. 우주가 팽창하면서 간신히 활동할 수 있게 된 빛은 엄청난 열기와 함께 뿜어져 나왔고, 그 파동이 아직 완전히 식지 않은 채 온 우주에 퍼져 있다고 했습니다. 우주 어느곳에나 균일하게 남아 있는 그것이 바로 빅뱅의 증거, 모든 것이 처음에는 하나였다는 증거라고 했습니다. 텔레비전과 전화의 잡음 중에 그 우주 복사로 인한 것이 있다고, 처음 그것을 발견한 사람은 사막에서 전신주를 수리하던 사람들이었다고도 했습니다. - P262

우주가 무한하지 않다면, 빛의 속력으로 다다를 수 있는 시각의 힘으로 닿을 수 있는 먼 과거의 우주가 언젠가는 보일 거예요. 가깝게는 빙하기의 지구를 볼 수 있고, 지구가 태어나기 전의 어둠도 볼 수 있겠지요. 말하자면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의 풍경을, 먼 미래의 다른 별에 살아남은 사람이 고배율의 망원경으로 볼 수 있을거예요. 우주가 유한하고 거대한 입방형의 덩어리라면, 움푹 파이고 휘어진 채 팽창하는 공간 어딘가에 우리의 과거와 미래가………… - P262

두려움 없이 내가 할 일을 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돼요.
그게 어떤 일입니까?
인주가 왜 죽었는지 알아내는 거예요. 그 죽음을 왜곡하는 사람들을 막는 거예요.
그리고?
거짓으로부터 인주의 아이를 보호하는 거예요. - P263

사십 년 전, 삼십 년 전, 이 년 전에도 그렇게 하지 못했듯이, 나는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 P264

나는 믿지 않습니다. 어떤 것도 찾아지지 않고, 어떤 것도 완성되지 않을 것입니다. 만의 하나 완성된다 한들 누구도 당신을 믿지 않을 것입니다. 당신이 진실이라고 믿는 언어를, 눈물을, 피를 믿지 않을 것입니다. 잔인하게도, 내가 당신에게 이 편지를 쓰는 것은 당신이 입을 틀어막힌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누구에게도 내 이야기를 전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니, 덜 가혹하게 말하겠습니다. 당신이 쓸 그 불가능한 책을 연민하기 때문입니다. 아니, 솔직하게 말하겠습니다. 목마른 사람처럼 이 편지를 남김 없이, 삼킬 듯이 읽어가는 당신의 얼굴을 상상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그 상상 속에서 당신의 입술, 혼란 때문에 벌어진 입술에 내 입술을 문지르고 싶기 때문입니다. 단 한순간, 어리석고 병적인 그 상상이 나를 위무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니, 위악적으로 말하지 않겠습니다. 당신이, 수십 년의 시간을 건너와 나를, 어깨가 굽고 머리가 희어진 나를 찾아낸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 P265

그렇습니다. 수십 년 전의 이야기입니다. 당신의 친구가 태어나기 전의 이야기입니다. 당신이 힘겹게 맞춰온 퍼즐의 어디에도 들어맞지 않을 이야기입니다. 수십 년 동안 서서히 나를 죽여왔고, 이제 새벽이 되기 전에 나를 죽인 뒤 가까스로 끝날 이야기입니다. 한 여자의 눈에서 시작되는 이야기입니다. 총명한 눈, 방금 살얼음이 녹은 것처럼 젖어 있던 눈, 누구도 차마 오래 맞받아 바라볼 수 없었던 눈에서시작되는 이야기입니다. - P265

한 번의 삶에서 여러 인생을 살았다고 느낄 때가 있습니다. 시간은 흐르는 것이 아니라 마디마디 끊어지는 것이었다고, 어떤 마디의 기억들은 전생처럼 멀고 어둑하다고 느낄 때가 있습니다. - P265

내 옆으로 두 발짝 떨어져 앉은 그녀는 허밍으로 말러 2번 교향곡의 선율들을 들려주었습니다. 취한 사람 특유의 유순하고 부드러운 도취 속에서 그녀는 설명했습니다. 1악장의 회로가 얼마나 복잡하고 극적인지. 그것을 종결하는 방식이 얼마나 미묘한지. 삶과의 춤을 그린 2악장이 얼마나 대조적으로 세속적인지. 반면에 죽음과의 무도인 3악장에 어려 있는 씁쓸한 유머에 대해서. 그리고 4분55초의 알토 독창으로 처리한 ‘처음의 빛‘이라는 제목의 4악장. 그 견결하고 끔찍한 아름다움에 대해서. - P274

오, 붉은 장미여

인간은 거대한 가난 속에 있네.
인간은 거대한 고통 속에 있네.
차라리 나는 천국에 가서 머물고 싶네.

마침내 나는 널따란 길에 다다랐네.
한 천사가 그 길을 막고 나를 돌려보내려 하네.
아, 안돼.
나를 돌려보내지 말아줘.

나는 신에게서 왔으니 신에게로 돌아가려네.
사랑의 신은 나에게 빛을 비추겠지.
영원한 생명의 축복을 얻을 때까지. - P275

그 노래의 마지막 단어, 리베ㅡ생명ㅡ를 부르던 그녀의 떨리는 가성을 기억합니다. 지금까지 여러 음반을 찾아서 들어보았지만, 사십년 전 그녀의 부엌에서 들었던 만큼의 처절함을 느끼게 하는 가수는 없었습니다. 자신이 발음하는 영원한 생명을 향해 오직 절망과 갈망만으로 다다르려 하는, 다시 살아나고 싶지 않아 천사에게 애원할만큼의 고통을 알고 있는 사람의 목소리.

그렇게 열병의 날들이 시작되었습니다. - P275

오토 클렘페러네요. 브루너 발터가 지휘한 것 나한테 있는데. 말러를 좋아하시는 줄은 몰랐어요. - P2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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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의 3장인 ‘일곱개의 뺨‘ 이라는 파트를 읽고 있는데, 소설인지 연극인지 간혹 헷갈릴 정도로 배경의 전환이 수시로 이루어진다. 저자의 필력 덕분인지 개인적으로는 엄청난 몰입감을 가지고 본문의 내용들을 시간가는 줄 모르고 순식간에 읽어나갈 수 있었다. 소설 속에선 그 날의 참상이 아주 세세하게 묘사되어 있는데, 이 소설 속에 나오는 소재들로 만든 또다른 연극을 통해 그 날의 참상을 다시금 재조명하는 장면이 나온다. 처음 밑줄친 문장은 그 연극의 극중 여주인공의 대사인데, 길지 않은 문장 속에 많은 것들이 내포되어 있음을 간접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이 소설을 이미 읽어보신 분들은 잘 아시겠지만 소설 속 시대 배경 자체가 검열이 일상화되어있는 숨막히는 통제 사회였기에 소설 속에서 연극을 기획한 사람도 노골적으로 그 날의 참상을 표현하는데는 제약이 많았다. 아마 연극을 기획하면서도 검열로 인해 끌려가지는 않을까 조마조마한 마음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여기 별도로 밑줄치진 않았지만 본문을 통해 군인들에 의해 무참히 짓밟히고 죽어나간 이름모를 주검들의 모습들을 보면서 그 날의 아픔을 직접 경험했던 분들의 마음을 어떤 말로도 감히 표현하기가 힘들겠다는 생각도 해볼 수 있었다.

아직도 이 사회에는 자신이 직접 겪어보지 않고 다른 사람의 아픔과 상처에 대해 함부로 말하는 사람들이 수없이 많다. 비록 서로가 서로를 완전히 100% 이해하는 것은 어렵더라도 상대방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이해하려는 자세가 그 어느때보다 필요한 시대가 아닌가 싶다. 각박한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필요한 마음가짐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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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이어지는 내용에서는 등장인물들 개개인이 겪었던 고통에 대한 묘사가 좀 더 자세하게 나오는데, 이 부분을 읽으면서 그 시대를 직접 겪었던 분들의 고통과 트라우마가 단지 그 당시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그 이후의 삶에서도 계속 이어지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씻을 수 없는 상처라는 말이 어떤 의미인지를 뼈저리게 느낀 시간이었다.

당신이 죽은 뒤 장례식을 치르지 못해,
내 삶이 장례식이 되었습니다. - P99

어이, 돌아오소.
어어이, 내가 이름을 부르니 지금 돌아오소.
더 늦으면 안되오. 지금 돌아오소. - P100

당신이 죽은 뒤 장례를 치르지 못해,
당신을 보았던 내 눈이 사원이 되었습니다.
당신의 목소리를 들었던 내 귀가 사원이 되었습니다.
당신의 숨을 들이마신 허파가 사원이 되었습니다. - P100

봄에 피는 꽃들, 버드나무들, 빗방울과 눈송이들이 사원이 되었습니다.
날마다 찾아오는 아침, 날마다 찾아오는 저녁들이 사원이 되었습니다. - P101

네가 죽은 뒤 장례식을 치르지 못해, 내 삶이 장례식이 되었다.
네가 방수 모포에 싸여 청소차에 실려간 뒤에.
용서할 수 없는 물줄기가 번쩍이며 분수대에서 뿜어져나온 뒤에.
어디서나 사원의 불빛이 타고 있었다.
봄에 피는 꽃들 속에, 눈송이들 속에. 날마다 찾아오는 저녁들 속에. 다 쓴 음료수 병에 네가 꽂은 양초 불꽃들이. - P103

군인들이 압도적으로 강하다는 걸 모르지 않았습니다. 다만 이상한 건, 그들의 힘만큼이나 강렬한 무엇인가가 나를 압도하고 있었다는 겁니다.
양심.
그래요, 양심.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게 그겁니다. - P114

군인들이 쏘아 죽인 사람들의 시신을 리어카에 실어 앞세우고 수십만의 사람들과 함께 총구 앞에 섰던 날, 느닷없이 발견한 내 안의 깨끗한 무엇에 나는 놀랐습니다. 더이상 두렵지 않다는 느낌, 지금 죽어도 좋다는 느낌, 수십만 사람들의 피가 모여 거대한 혈관을 이룬 것 같았던 생생한 느낌을 기억합니다. 그 혈관에 흐르며 고동치는, 세상에서 가장 거대하고 숭고한 심장의 맥박을 나는 느꼈습니다. 감히 내가 그것의 일부가 되었다고 느꼈습니다. - P114

가만있으면 다 죽어요. 우릴 다 쏴 죽일 거란 말이오. - P115

내가 총을 들 수 있는지, 살아 있는 사람을 향해 방아쇠를 당길 수 있는지 생각했습니다. 군인들이 가진 수천정의 총이 수십만의 사람들을 살해할 수 있다는 것, 쇠가 몸을 뚫으면 사람이 쓰러진다는 것, 더웠던 몸들이 차가워진다는 것을 생각했습니다. - P115

선생은 압니까, 자신이 완전하게 깨끗하고 선한 존재가 되었다는 느낌이 얼마나 강렬한 것인지. 양심이라는 눈부시게 깨끗한 보석이 내 이마에 들어와 박힌 것 같은 순간의 광휘를. - P116

그날 도청에 남은 어린 친구들도 아마 비슷한 경험을 했을 겁니다. 그 양심의 보석을 죽음과 맞바꿔도 좋다고 판단했을 겁니다. - P116

계단을 올라온 군인들이 어둠속에서 다가오는 것을 보면서도, 우리 조의 누구도 방아쇠를 당기지 않았습니다. 방아쇠를 당기면 사람이 죽는다는 걸 알면서 그렇게 할 수가 없었습니다. 우린 쏠 수 없는 총을 나눠 가진 아이들이었던 겁니다. - P117

그 새벽 캄캄한 도청 계단을 따라 글자 그대로 콸콸 소리를 내며 흐르던 피가 떠오를 때마다 생각합니다. 그건 그들만의 죽음이 아니라, 누군가의 죽음들을 대신한 거였다고, 수천곱절의 죽음, 수천곱절의 피였다고. - P118

이제 그들이 원하는 것은 실제로 일어난 일들의 세목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마련한 각본에 우리들의 이름으로 빈칸을 채울 수 있도록, 우리들이 해야 할 일은 거짓 자백뿐이었습니다. - P118

참을 만큼 참았어. 그렇게 네가 다 처먹으면 난 어쩌란 말이야. - P119

그, 그러지 마요. ...(중략)... 우, 우리는...... 주, 죽을 가, 각오를 했었잖아요. - P119

순간 깨달았습니다. 그들이 원한 게 무엇이었는지. 우리를 굶기고 고문하면서 그들이 하고 싶었던 말이 무엇이었는지. 너희들이 태극기를 흔들고 애국가를 부른 게 얼마나 웃기는 일이었는지, 우리가 깨닫게 해주겠다. 냄새를 풍기는 더러운 몸, 상처가 문드러지는 몸, 굶주린 짐승 같은 몸뚱어리들이 너희들이라는 걸, 우리가 증명해주겠다. - P119

카, 카스테라가 제, 제, 제일 머, 먹고 싶어요. 사, 사이다하고 가, 같이. - P120

생각하고 또 생각했습니다.
이해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어떻게든 내가 겪은 일들을 이해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 P120

묽은 진물과 진득한 고름, 냄새나는 침, 피, 눈물과 콧물, 속옷에 지린 오줌과 똥. 그것들이 내가 가진 전부였습니다. 아니, 그것들 자체가 바로 나였습니다. 그것들 속에서 썩어가는 살덩어리가 나였습니다. - P120

지금도 나는 여름을 견디지 못합니다. 벌레 같은 땀이 스멀스멀 가슴팍과 등으로 흘러내리면, 내가 살덩어리였던 순간들의 기억이 고스란히 돌아와 있는 걸 느끼며 깊은 숨을 쉽니다. 이를 악물고 더 깊은 숨을 쉽니다. - P121

몸이 사라져주기를, 지금 제발, 지금 내 몸이 지워지기를, - P121

죽음은 새 수의같이 서늘한 것일지도 모른다고 그때 생각했습니다. 지나간 여름이 삶이었다면, 피고름과 땀으로 얼룩진 몸뚱이가 삶이었다면, 아무리 신음해도 흐르지 않던 일초들이, 치욕적인 허기 속에서 쉰 콩나물을 씹던 순간들이 삶이었다면, 죽음은 그 모든 걸 한번에 지우는 깨끗한 붓질 같은 것이리라고. - P122

우리는 총을 들었지, 그렇지?
나는 고개를 끄덕이지도, 그에게 대꾸하지도 않았습니다.
그게 우릴 지켜줄 줄 알았지.
스스로 묻고 스스로 답하는 일에 익숙한 듯, 그는 술잔을 향해 희미하게 웃었습니다.
하지만 우린 그걸 쏘지도 못했어. - P127

그러니까 형, 영혼이란 건 아무것도 아닌 건가.
아니, 그건 무슨 유리 같은 건가.
유리는 투명하고 깨지기 쉽지. 그게 유리의 본성이지. 그러니까 유리로 만든 물건은 조심해서 다뤄야 하는 거지. 금이 가거나 부서지면 못쓰게 되니까, 버려야 하니까.
예전에 우린 깨지지 않은 유리를 갖고 있었지. 그게 유린지 뭔지 확인도 안해본, 단단하고 투명한 진짜였지. 그러니까 우린, 부서지면서 우리가 영혼을 갖고 있었단 걸 보여준 거지. 진짜 유리로 만들어진 인간이었단 걸 증명한 거야. - P130

우리는 서로에게 의지했지만, 동시에 언제나 서로의 얼굴을 후려치고 싶어했습니다. 지우고 싶어했습니다. 영원히 밀어내고 싶어했습니다. - P132

무슨 권리로 그걸 나에게 요구합니까. - P132

아시겠습니까. 그러니까 이 사진에서 이 아이들이 나란히 누워있는 건, 이렇게 가지런히 옮겨놓은 게 아닙니다. 한줄로 아이들이 걸어오고 있었던 겁니다. 우리가 시킨 대로 두 팔을 들고, 줄을 맞춰 걸어오고 있었던 겁니다. - P133

어떤 기억은 아물지 않습니다. 시간이 흘러 기억이 흐릿해지는게 아니라, 오히려 그 기억만 남기고 다른 모든 것이 서서히 마모됩니다. 색 전구가 하나씩 나가듯 세계가 어두워집니다. - P134

인간은, 근본적으로 잔인한 존재인 것입니까? 우리들은 단지 보편적인 경험을 한 것뿐입니까? 우리는 존엄하다는 착각속에 살고 있을 뿐, 언제든 아무것도 아닌 것, 벌레, 짐승, 고름과 진물의 덩어리로 변할 수 있는 겁니까? 굴욕당하고 훼손되고 살해되는 것, 그것이 역사 속에서 증명된 인간의 본질입니까? - P134

흙탕물처럼 시간이 나를 쓸어가길 기다립니다. 내가 밤낮없이 짊어지고 있는 더러운 죽음의 기억이, 진짜 죽음을 만나 깨끗이 나를 놓아주기를 기다립니다. - P135

나는 싸우고 있습니다. 날마다 혼자서 싸웁니다. 살아남았다는, 아직도 살아 있다는 치욕과 싸웁니다. 내가 인간이라는 사실과 싸웁니다. 오직 죽음만이 그 사실로부터 앞당겨 벗어날 유일한 길이란 생각과 싸웁니다. - P135

달은 밤의 눈동자래. - P136

이상하지.

단지 물이 떨어지는 소리였을 뿐인데, 누군가가 정말 왔던 것처럼 기억돼.

그 겨울 새벽, 명치가 되어드는 통증 속에서 생각했던 그 걸음걸이가 생시였고, 수건에서 흐른 물로 젖어 있던 바닥은 꿈이었던 것 같아. - P142

녹음의 편리한 점은 직접 얼굴을 마주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뿐 아니라, 지우고 싶은 부분을 언제든 지우고 다시 증언할 수 있다는 데 있다고 - P143

어두운 창문으로 축축한 바람이 불어들어오고 있다. 무엇인가가 길게 내쉬는 숨 같다고 문득 당신은 생각한다. 거대한 생물 같은 밤이 입을 열고 습기찬 날숨을 뱉어낸다. 사무실 가득 밀폐돼 있던 뜨거운 공기를 캄캄한 허파 속으로 빨아들인다. - P151

성희 언니는 나와 달라.
언니는 신도 믿고 인간도 믿으니까.

난 한번도 언니에게 설득되지 않았어.
오직 사랑으로 우릴 지켜본다는 존재를 믿을 수 없었어.
주기도문조차 끝까지 소리 내 읽을 수 없었어.

내가 그들의 죄를 사한 것같이 아버지가 내 죄를 사할 거라니.
난 아무것도 사하지 않고 사함 받지 않아. - P151

견디는 것은 당신이 가장 잘하는 일이다. - P154

일은 당신에게 고독을 보장해준다. 일과 짧은 휴식과 잠의 규칙적인 리듬 속에서 혼자 삶을 꾸려갈 수 있는 한, 빛의 동그라미 바깥을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 P154

우리는 고귀해. - P155

헌법에 따르면, 우리는 모든 사람들과 똑같이 고귀해. 그리고 노동법에 따르면 우리에겐 정당한 권리가 있어. - P155

우리들은 정의파다 좋다 좋다
같이 죽고 같이 산다 좋다 좋다
무릎 꿇고 살기보다 서서 죽길 원한단다
우리들은 정의파다 - P158

무릎 꿇고 살기보다 서서 죽길 원한단다 먼저 가신 임들을 위해 다 같이 묵념합시다. 먼저 가신 임들을 따라 끝까지 싸웁시다 그러니까………… 우리는 고귀하니까. - P160

악몽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일깨워주는 기억들이 조용히 당신의 머리맡에서 기다리고 있다. - P161

나 자신을 지키는 일로 남은 인생을 흘려보내진 않았을 거란 말이야. - P162

조금만 참아. 곧 의사가 올 거야. - P163

증언. 의미. 기억. 미래를 위해. - P166

썰물처럼 잠이 밀려나가며 고통의 윤곽이 뚜렷해지는 순간, 어떤 악몽보다 차가운 순간이 다시 왔다. 당신이 겪은 모든 게 꿈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하는 순간. 기억해달라고 윤은 말했다. 직면하고 증언해달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 P166

그 밤 이후로는 젖은 수건을 문고리에 걸어두지 않았어.

하지만 그 겨울이 갈 때까지, 더이상 물수건이 필요 없는 봄이 된 뒤에도 그 소리가 문 쪽에서 들렸어.
아직도 이따금, 용케 악몽 없이 잠에서 깨어나려는 순간이면 그 소리가 들려.
그때마다 난 어둠을 향해 떨리는 눈꺼풀을 열어.

누구야.
누가 오는 거야.

누가 이렇게 가벼운 걸음으로 걸어오는 거야. - P169

그러니까 그 여름에 넌 죽어 있었어. 내 몸이 끝없이 피를 쏟아낼 때, 네 몸은 땅속에서 맹렬하게 썩어가고 있었어.
그 순간 네가 날 살렸어. 삽시간에 내 피를 끓게 해 펄펄 되살게 했어. 심장이 터질 것 같은 고통의 힘, 분노의 힘으로. - P1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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