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된 후 15년 - 부모, 아이의 마음을 열다
박경남 지음 / 북씽크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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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과 다르게 산다는 것은 그저 사회적인 시선일 뿐이다. 그 시선을 두려워하며 산다면 남과 다르게 살 수 없다. 행복이란 모두에게 일률적이라고 할 수 없듯이 다르게 산다고 행복하지 않을 거라는 건 편견에 불과하다. 남들에게 보여주는 것이 행복의 가치가 아니기 때문이다. 부모가 내 아이가 사회에서 원하는 규격에 길들여지지 않는 만큼 희망 하나는 쥐고 살아갈 것이라고 믿어야 아이도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다. 부모 먼저 사회적인 잣대와 시선에서 자유로워져야 한다.」- 본문 중에서

 

부모가 된다는 것에 대하여… 그리고 아이가 무럭무럭 자라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에 대하여…

나는 어떻게 성장했을까. 나의 부모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나는 부모의 무엇을 보고 성장했으며, 그 분들은 나에게 무엇을 보여주었는가. <부모된 후 15년>을 읽고 떠오른 생각들이다. 나는 바람직한 성장의 궤도를 달려왔다고 생각한다. 적어도 지금의 내가 어떤 모습으로 존재하느냐를 두고 논한다면, 나의 부모는 최대한 나를 배려하고 존중했으며, 내가 원하는 것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고 생각한다. 이제는 내가 독립적인 인격체가 되어 나의 삶을 주도적으로 꾸려가지만, 그러한 성장의 토대를 마련해준 것은 부모님의 역할이 컸다고 말하고 싶다. 성인이 되어서 새삼 부모님의 모습을 회상하려니 가슴이 뭉클해진다. 그런 의미에서 <부모된 후 15년>이라는 책 제목이 의미심장하게 다가오는 듯하다. 이 책은 자녀를 둔 부모의 입장에서 쓴 내용이 주를 이룬다. 때로 다양한 사례를 보여주면서 부모와 아이의 관계 맺기의 중요성에 대하여 강조하기도 한다. 나는 이 책을 읽고 온갖 미사여구를 생략한 단 하나의 단어를 떠올렸다. 그것은 바로 부모와 아이의 소통이었다. 소통, 사랑을 한다는 사람들이 반드시 지녀야 할 소통의 능력… 부모와 아이는 서로 사랑함과 동시에 증오와 원망의 대상이 될 수도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부모 탓이요, 자식 탓이요를 입에 달고 사는 사람들… 그들은 서로를 향한 마음을 굳게 닫아버린 것이 틀림없다. 그러한 비운의 결과를 맞이하기 싫다면, 아이를 양육하는 시기에 부모의 역할은 정말 조심스럽고도 중요한 것임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아이는 부모의 사랑과 믿음에서 성장한다. 혹여 아이가 부모의 시선에서 벗어나는 행동을 하더라도 아이를 믿고 기다리면 아이는 제자리로 돌아온다. 부모가 그 자리를 만들어주어야 한다. 사실 믿는다는 말은 부모와 아이가 서로 책임진다는 말과도 같다. 아이를 믿어주는 만큼 아이는 스스로 책임져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본문 중에서

 

아이를 키우는 부모들은 바보가 된다. 자신들이 겪어온 어린 시절은 까맣게 잊어버리는 것이다. 사춘기를 겪는 자녀를 대하는 부모도 마찬가지다. 부모들은 아이를 이해할 수 없다고 하는데, 정작 이해할 수 없는 대상은 부모 자신이다. 성인이라면 누구나 겪어온 좌절과 고통이 동반하는 성장기를 아이가 마주하고 있는데, 아이를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한다면 더 이상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그래서 책은 이렇게 말한다. "내가 부모니까 아이를 가르친 게 아니라 아이가 날 가르쳤고, 결국 함께 성장해왔다는 걸 깨달았다."고 말이다. 좋은 부모가 되는 법, 자녀를 훌륭하게 키우는 법, 부모와 자녀의 건강한 관계맺기에 관한 책은 무수히 많다. 그러나 내용은 다 비슷하다고 할 수밖에 없다. 무언가 특별한 방법이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리라. 나는 아직 아이를 키우는 입장이 아니라서 무어라 말할 순 없겠으나, 자녀 양육에 대해 일가견있는 사람들의 책을 읽어본 바에 따르면 아이가 아무리 어려도 부모가 그 자체를 존중해주는 마음을 지녀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었다. 아직 세상을 모르고 어리다는 이유로 모든 것을 부모가 솔선수범하여 행한다면 아이는 부모의 그림자만 졸졸 따라다니는 처지가 될 것이라는 점, 그래서 부모는 때로 아이가 엉뚱한 행동을 하더라도 충분히 그럴 수 있노라며 이해해야 한다는 점이다. 부모와 아이의 갈등은 서로를 이해할 수 없는 지경에 놓였을 때 발생한다는 것만 기억하면 <부모된 후 15년>이라는 책이 내포한 의미를 진정 찾아냈다고 보면 될 것이다.

 

 



 

 


「아이가 온전히 자기 인생을 살아갈 수 있는 성인이 되기 전까지 아이에게 일어나는 모든 문제는 부모의 책임이다. 단순히 보호자로서의 책임만이 아니라 아이의 성인 이후 삶에도 부모의 영향이 지대하기 때문이다. 유년기에 형성되는 인성은 성인이 되어서도 큰 영향을 미치니 말이다. 그만큼 아이를 건강하게 자라도록 해야 할 의무가 있는 것이다.」- 본문 중에서

 

다만 아쉬운 점이 있다면, 이 책은 전달하려는 의미를 설명하려는 부차적인 요소가 중복된다는 점이다. 모두 같은 맥락에서 해석이 가능한 요소임에도 세부적으로 쪼개놓은 것은 물론 읽는 이로 하여금 갈등상황 혹 문제점에 간접적으로나마 집중할 수 있도록 유도했는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몇몇의 사례를 보여주면서 문제의 원인과 해결에 접근하는 책의 전개방식은 혹 특정 부모나 아동의 행동이 모든 가정을 대변하는 대표적인 사례라고 인식하게 될 우려도 있으며, 그에 따른 해결방식이 모든 아동에게 적합한 훈육방법으로 정의내려질 수 있다는 점이 조심스럽다는 것이다. 양육에 관한 정의는 성인의 몫이다. 그래서 성인의 관점에서 분석한 결과를 두고 정의를 내려서 양육지침서를 만드는데, 이는 성인이 바라보는 아동의 문제행동이라는 점에서 아동의 입장이 정확히 드러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러한 양육에 관한 책은 항상 모순이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부모된 후 15년>은 필자가 직접 자녀를 키우면서 느꼈던 점에 대하여 저술한 것인데, 그럼에도 나는 한편으로 씁쓸함을 느낀다. 앞서 말했듯이 모든 부모는 아이를 키우면 바보가 된다고 했는데, 이러한 현상은 그 어떤 명의가 지은 약이라도 효력을 입증할 수 없는 불변의 법칙이 아닐까싶다. 시행착오없이 순탄한 자녀양육이 과연 칭찬받아 마땅한 것일까? 그렇게 따지면 우리는 부모라는 역할을 떠나서 모두 바보인 셈이다. 모두가 아는 것을 안다고 하지 않고 애써 바보처럼 모른 척 행동하고 있으니까. 아이를 키우는 과정 속에서도 그런 모순된 행동을 하고 있지는 않을까? 나도 부모가 되서 아이를 키우게 된다면… 과연 현명하게 잘 키울 수 있을지…… 이렇게 숫한 정보를 접하면서 옳고 그름의 이치를 끊임없이 습득하고 있는데, 이 모든 정보가 과연 효력을 발휘하게 될 것인지 의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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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에 한 번, 마음 돌아보기 - 뒤늦게 후회하지 않으려면
에토 노부유키 지음, 박재현 옮김 / 흐름출판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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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기적인 측면에서 인생에 무의미한 사건은 없다. 자신에게 생긴 모든 일은 필요해서 일어난 것이다. 인간이라는 생명의 존재도 우연에 지배당하는 것 같지만, 태어나야 했기에 태어났고 죽어야 하기 때문에 죽어가는 필연적인 존재인 것이다. 우리는 거대한 강에서 한 방울의 물과 같은 존재다. 낱낱의 물방울은 거대한 강이 어디를 향해 흘러가는지 헤아릴 길이 없다. 그러나 그러한 미미함을 끌어안고 위대한 어떤 뜻에 따라 제각기 고유의 의미를 가지고 자신의 역할에 충실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본문 중에서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인생을 길게 펼쳐놓고 보면 단 하나의 사건도 무의미하게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을… 나를 찾아올 수밖에 없었던 사연도, 내가 찾아갈 수밖에 없었던 사연이 반드시 존재했던 것이다.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던 이야기의 시발점은 결국 나 자신의 깊은 가슴 속에 존재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사람이 사는 모습은 한 권의 책과 같다는 생각이 든다. 서론에 막 진입한 사람은 기세등등하고 자신의 의지를 거침없이 펼쳐놓는다. 자신이 어디서 태어났고 어떻게 살고 있는지에 대하여… 또한 무엇을 하면서 살아갈 것인지에 대하여, 그리고 본론에 들어가면 무궁무진한 계획을 실천에 옮긴다. 온갖 시행착오를 겪고 성공과 실패의 갈래를 오가면서 차츰 무언가에 길들여져 간다. 과연 그 사람은 어떤 결론을 내릴 것인가. 책의 마지막에 다다랐을 무렵이면 필시 무언가를 깨달았으리라… 결국 인생이란 무엇이다라는 자신만의 정의를 내리게 될 것이다. 그렇게 책이 완성되면 사람도 사람답게 다듬어진다. 현실의 긴박함에 현혹되어 정작 중요한 것을 잃어버리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이 잃어버리는 것은 바로 자기 자신이다.

 

 



 

 


「현대를 사는 우리는 과거에는 전혀 상상도 하지 못했던 편안하고 기분 좋은 환경에 둘러싸여 살고 있다. 돈만 있으면 원하는 것은 얼마든지 손에 넣을 수 있고, 싫은 일이나 성가신 사람과도 상대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여기에 쾌감과 불쾌감이 숨어 있다. 쾌적함이나 기분 좋은 것을 당연시하면 인간의 마음과 몸은 조금만 불편해도 견딜 수 없게 된다.」- 본문 중에서

 

삶의 질이 윤택해질수록 우리의 정서는 빈약해지고 몸만 거대하게 부풀어 오른다. 육체적인 만족이 곧 정신을 살 찌우는 것이라 착각하는 사람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하루에 한 번 마음 돌아보기>는 우리를 향해 지금 하는 모든 것을 잠시 내려놓아라고 말한다. 앞만 보고 달리는 사람, 한시라도 빨리 목적지에 도착해야 하는 사람에게 그렇게 빨리 준비해도 도착하는 시점은 큰 차이가 없다고 말이다. 당신은 얼마나 빨리 성공을 이루느냐가 바로 타인과의 경쟁에서 이기는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에 남들보다 뒤처지는 것만 걱정하고 있을 뿐, 당신의 마음이 어떤 상태에 놓여있는지에 대하여 생각하지 못한다. 마음이라고… 이기고 싶은 욕구가 현재 내 마음이 아니겠느냐고 반박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이 누구와의 경쟁인지를 유심히 살펴보라고 말하고 싶다. 직장동료, 친구와의 경쟁인가? 결국에 골병드는 입장은 당신의 마음인 것을… 그저 마음 한 번 내려놓고 다스리면 될 것을… 책은 이렇게 말한다. "자신의 보폭으로 걷는 사람이 가장 멀리까지 걷는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루에 한 번이라도 마음을 돌아보라고 당부하는 것이다. 이 자체가 너무 추상적인 의미로 느껴지는가? 실용적인 도움이 아니라서 실망했다면… 책 자체가 도움을 준다기 보다는, 그만큼 마음을 다스리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인식하라는 뜻일테다. 마음이 곧 우리의 뿌리이며, 정신적 지주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하자. 이 책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요구하지 않는다. 우리가 마음에게 너무나 많은 것을 요구하고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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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틀 벳 - 세상을 바꾼 1천 번의 작은 실험
피터 심스 지음, 안진환 옮김 / 에코의서재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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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실험적 혁신가들을 연구하면서 얻은 가장 중요한 교훈은 그들은 비전을 추구하는 데 있어 결코 완고하게 행동하지도 않았고 실패를, 그것도 때로 아주 많은 실패를 견뎌냈다는 점이다. 그들은 문제에 부딪혔을 때 궁극적인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전에는 생각지도 못한 경로를 새로 취하거나 아니면 아예 목표를 재설정할 수도 있음을 인정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기존의 위대한 아이디어를 과감히 포기하고 중요한 도전을 극복해내야 하며, 동시에 실패로 인한 감정적 충격에도 대처할 수 있어야 한다.」- 본문 중에서

 

우직지계(迂直之計), 가까운 길만 곧게 가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돌아갈 줄도 알아야 한다는 병법의 지혜다. 흔히 빠를수록 돌아가라는 말을 많이 한다. 더 나아가 정신없이 밀어닥치는 상황에서 빠져나와 전체적인 흐름을 바라볼 줄도 알아야 하는 것이 바로 우리가 인생에 대처하는 현명한 자세가 아닐까 싶기도 하다. 나는 이 현명한 자세에 대하여 곰곰히 생각해보았다. 문득 피겨선수 김연아가 떠오른다. 그녀는 한 번의 비상을 위해서 수없이 뛰어오르고 또 넘어지기를 반복했다. 그렇게 반복되는 실수를 통해서 무엇이 문제인지를 파악하게 된 것이다. 자신의 모습을 녹화해서 머리부터 발 끝까지의 미세한 움직임을 유심히 관찰하고 문제가 번복되지 않도록 연습하고 또 연습했던 것이다. 이것은 하나의 사례에 불과하다. 김연아를 비롯해서 자신의 분야에서 독창적인 성과를 이룬 사람이 걸어온 길을 살펴보면 자칫 슬럼프에 빠질 법도 한데, 결코 쉽게 쓰러지지 않고 꿋꿋히 걸어왔음을 알 수 있다.

 

 



 

 

<리틀 벳>이 소개하는 사람들을 보면, 저마다 독특한 지층을 소유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그리고 그 지층을 발판으로 삼아 끊임없이 씨를 뿌리고 거두는 결실의 기쁨을 맞이하고 있다. 겹겹이 쌓인 그들의 지층은 굴곡진 사연이 참으로 많다. 그것은 고난과 역경을 이겨낸 자만이 누릴 수 있는 탐스러운 열매가 익어가는 과정이었다. 밑바닥에 깔린 것은 그들은 강렬한 열정이었으며, 그 위로 서서히 깔리기 시작했던 것은 지나친 의욕, 현실의 장벽에 부딪힌 돌발 상황, 새로운 가능성의 유혹, 스스로를 향한 신뢰감 상실, 불투명한 자신의 미래상이었다. 그러한 갈등의 요소가 쌓이면서 지층은 위태롭게 흔들렸을 것이다. 이대로 무너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하고 그들은 다시 힘을 내서 도전한다. 그렇게 의욕을 상실했던 지층은 스스로를 단단히 다져간다.

 


「정확한 대답과 해법을 보상하는 세계에서 견본 만들기는 반직관적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행동하기 위해 생각하기보다는 생각할 수 있게 행동하는 데 역점을 둔다. 발견은 아무것도 없는 진공 상태에서 출발하더라도 일단 무언가를 행동에 옮기면 우리의 정신 또한 창조적으로 열리게 되는 것이다.」- 본문 중에서

 

 





 

빠른 실패가 빠른 배움을 낳는다. 그것은 새로운 기회와 가능성을 제공하는 것이다.

이 책은 수없이 반복되는 실패를 기회로 삼아서 눈부신 성과를 낸 사람들의 이야기를 소개한다. 누구나 주어진 일을 실수 없이 완벽하게 처리하고 싶어한다. 그러나 우리는 위기의 순간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책에 등장하는 <니모를 찾아서>의 감독 앤드류 스탠튼은 이렇게 말한다. "내가 구사한 전략은 언제나 같습니다. 가능한 한 빨리 잘못하는 거죠. 간단히 말하자면 일을 망쳤을 경우 그걸 곧바로 인정한다는 의미입니다. 실패하는 걸 두려워하지는 맙시다. 가급적이면 빨리 실패해서 해답을 얻는 게 좋아요. 사춘기를 거치지 않고 어른이 될 수는 없습니다. 처음부터 일을 잘할 수는 없어요. 하지만 아주 빨리, 신속하게 망칠 수는 있지요."라고 말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자꾸 넘어지고 부딪혀봐야 어느 부위에 어떤 통증이 도사리고 있는지를 정확히 알게 되는 것, 흉터가 생기면 생겼지, 애써 안전한 길만 찾으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리틀 벳>은 실패를 해도 좋으니, 그 과정을 통해서 반드시 문제가 번복되지 않도록 주의해서 조금 더 새로운 방법을 연구해야 한다고 말한다. 보다 중요한 것은 실패했다고 그것을 감추지 말고, 무엇이 왜 어떻게 문제가 되었는지를 생각해야 한다. 조금 늦더라도 내실을 단단히 채우면서 점진적으로 나아가는 것이 가장 현명한 처세라고 본다. 슬럼프에 빠진 사람에게 도움이 많이 될 책이라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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펜더가 우는 밤 - 제1회 살림 청소년 문학상 수상작
선자은 지음 / 살림Friends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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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조님 말씀대로 아버님의 사인은 목 골절이지만, 처음 저희 쪽에 오셨을 때 전두부를 부딪힌 상태였습니다. 저는, 저는…… 그분의 진짜 사인을 꼭 밝힐 겁니다. 그래서, 꼭 그래서…… 한을 풀어 좋은 곳으로 보내 드릴 겁니다." (…) 어쨌든 아빠는 자신이 어디서 어떻게 죽었는지 기억하지 못한다는 소리다. 그건 엄마도, 나도, 아빠 기억 속에 없다는 말이다. 그 생각을 하니 서글퍼졌다.」- 본문 중에서

 

은조의 아빠는 펜더 스트라토 캐스터를 사랑하는 기타리스트였다. 아빠의 손길에 파르르 떨면서 아름다운 선율을 자아냈던 펜더… 은둔자처럼 기타만 끌어안고 세상과의 접촉을 끊어버린 은조의 아빠, 그런 아빠의 모습을 바라보는 아내와 딸 은조는 '아빠는 친구 하나 없는 외로운 기타리스트'라고 생각한다. 아빠에게 유일한 희망은 펜더, 영원히 숨고 싶은 곳은 바로 6년 전에 새로 이사 온 집이 되었다. 은조의 아빠는 무성한 잡초로 뒤덮힌 이층 집을 저렴한 값에 구입하자, 집을 위해서 자신이 존재하는 것마냥 집착하기 시작한다. 집 안 곳곳을 고치고 꾸미기를 수십 번… 여느 잡지에 나올 법한 궁전같은 집이 부럽지 않을 정도로 재탄생 시킨 것이다. 그러던 은조의 아빠가 갑자기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난다. <펜더가 우는 밤>은 아빠의 죽음에 얽힌 미스터리를 풀어가는 딸의 심정을 복잡하게 그려낸 소설이다. 그와 더불어 아빠와 밴드 생활을 했던 존과 뚱이라는 귀신, 죽은 이의 명부특별감사를 맡고 있는 370이라는 의문의 귀신도 등장하여 함께 사건을 역추적한다.

 

 



 

 

 


「아빠가 뒷집 아저씨와 마주하고 있던 그 장면. 나는 내내 그 장면이 흔히 않은 일이어서 기억하고 있다고 여겼다. 하지만, 모든 것을 종합해 보면 그게 아니었다. 그 장면은 단순히 이웃집 아저씨와 우리 아빠의 다정한 모습을 뜻하는 게 아니었다. 어린 나는 그 장면을 더 기묘하다고 여겼다. 그래서 내내 기억하고 있던 것이다. 아빠는 뒷집 아저씨, 즉 신유네 아빠와 다투고 있었다. 아빠의 화난 모습은 나에게 너무도 낯선 풍경이었고, 그래서 내 머릿속에 깊이 새겨진 것이다.」- 본문 중에서

 

<펜더가 우는 밤>은 저자의 상상력이 돋보이는 창작소설이다. 물론 허구의 세계, 가상인물이 등장하는 소설 자체가 창작이라고 볼 수 있겠으나, 이 책은 판타지 요소가 재치있게 삽입되어 읽는 이로 하여금 즐거운 상상을 하게끔 유도한다. 비록 세상과 벽을 쌓고 단절된 생활을 했으나, 자신만의 세계를 창조한 예인으로 살다간 아빠의 업을 기리기 위하여 노력하는 딸의 모습이란… 이승을 떠난 아빠의 친구들은 다시 하나의 뜻을 위해서, 은조의 아빠를 위해서 저마다 품었던 선율을 모으기 시작한다. 음악 속에서 서로의 상처를 보듬고 치유하는 모습은 마치 저마다 숨겨놓은 아픈 사연을 꺼내어 아름다운 화음으로 승화시키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이 책은 음악을 사랑하는 자유로운 영혼의 삶을 보여준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욕심을 내보자면, 열일곱 살 은조의 내적 변화를 세심하게 드러내서 가족 구성원을 맺어준 혈연의 의미를 예술적으로, 즉 소설의 주춧돌이 되어주는 음악적 감성으로 다듬었다면, 작품의 완성도가 더욱 높아질 수 있지 않을까? …… 한밤중에 울려퍼지는 펜더의 구슬픈 소리가 귀에 들리는 듯하다.

 


「연주가 시작되었다. 펜더 바디가 우는 게 손끝으로 느껴졌다. 아빠가 왜 나에게 그 곡 연주를 가르쳐 주었는지 알 것 같다. While my guitar gently weeps. 나는 이 기타가 울리는 동안 행복해질 수 있다. 아빠는 내가 행복해지길 바란 것이다. (…) 나뭇잎이 바람에 흔들리는 소리와 구름이 지나가는 소리까지 다 우리 연주처럼 여겨졌다. 아빠가 만든 곡이 우리 집에서 완성되고 있는 것이다.」- 본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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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친 말의 수기
마광수 지음 / 꿈의열쇠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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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창조적 불복종'이라는 말을 일종의 화두로 삼고서 지금까지 여러 장르의 글쓰기를 해왔다. 다시 말하자면 '새로운 창조'란 반드시 기존의 패러다임에 대한 반항과 불복종에서 나온다는 뜻이다. 문화사적으로 보면 새로운 창조를 시도한 사람들은 기존의 진리나 윤리 등에 대해 '삐딱한 눈길'을 보낸 사람들이다. 예수는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라고 말했지만, 나는 거꾸로 "자유가 너희를 진리케 하리라"라고 말하고 싶다. 고정불면의 진리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자유롭고 유연성 있는 사고방식을 갖고서 모든 것들을 대할 수 있어야만 진리를 발견할 수 있다. 아니, 고정불면의 '진리'라는 것 자체가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본문 중에서

 

창조적 불복종, 예술은 창조성을 배제하고는 설명이 불가능한 것이라 생각한다. 예술은 우주만물을 통틀어 그 무엇일지라도 광활한 상징성을 전제로 하는 표현의 자유를 지닌다. 인간과 예술의 관계, 그 시초를 설명하자면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야 할 것이다. 예술이란 무엇인가? 그를 행하는 자를 두고 예인이라 부르는 이유는 또 무엇일까? 사회적 규범에 철저히 제약받는 예술의 아슬아슬한 외줄타기는 왜 멈추지 않는 걸까. 그렇다고 논리정연하게 구성된 예술만을 추구할 수는 없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마광수라는 작가는 완벽한 일탈을 시도한 셈이다. 그의 작품 『즐거운 사라』는 외설스럽다는 이유로 징역 8월에 집행유예 2년 판결을 받은 바 있다. 문제작이 되어버린 그 시점에 한 사람의 인생이 큰 전환기를 맞이하게 된 셈이다. 그래서 <미친 말의 수기>를 시작하기에 앞서서 '창조적 불복종'을 과감히 시도했다는 포부를 내비친 것은 아닐까 싶기도 하다.

 

 



 

 

이 책은 저자의 수필집이라고 보면 된다. 일종의 변명 아닌 자신의 진실성을 다시 한번 입증하기 위해서 <미친 말의 수기>를 출간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우여곡절도 참 많았고 자신의 사상에 대한 자의적인 질책과 신념이 뒤섞여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나도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입장이라서 누군가의 문학적 가치관과 사상에 대하여 객관적으로 분석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어디까지나 글을 읽고 쓴다는 것은 자유라고 생각하니까. 그로 인해 사회적으로 큰 파문을 일으키고 인간의 정서를 혼란스럽게 헝클어 놓았을지라도… 앞에서도 말한 바 있지만 글을 쓰는 것 자체가 사회적 규범에 어긋나지 않는 한도에서 행해져야 한다면, 이 땅의 모든 작가는 자신의 간절한 욕구를 마음껏 분출하지도 못하고 일정한 선에서 그치고 머물러야만 한다는 것인가? 물론 마광수라는 사람이 지닌 사상이 보여준 결과물-그것을 결코 결과물이라 한정지을 순 없겠으나-을 두고 비정상적인 항목에 집어넣어야 한다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보편적인 사회적 범주 속에 속해있는 자들의 주장일 뿐이다.

 

 



 

 


「내가 새로 소설이나 시집을 내면 거의 모두가 <19금禁>이 된다. 그러니 출판사들이 나를 좋아할 리 없다. 문단에서 '왕따'이기 때문에 빽줄도 없다. 학계에서도 마찬가지다. (…) 지금 내 나이 60. 인생의 종반기, 아니 종반기의 문턱에 접어들었다. 더 비약적이고 기발한 '변태'를 '창조'해내고 나서 죽어야만 여한이 없을 터인데, 한국이라는 사회 여건이 그걸 허락하지 않으니 억울하고 안타까워서 미치고 환장할 지경이다.」- 본문 중에서

 

<미친 말의 수기>를 읽고 나서 그 어떤 말로 결론을 내릴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저 마광수라는 사람이 지닌 가슴 속 응어리를 잠시 들어본 셈이고 그 무게의 많고 적음을 가만히 헤아려 보았을 뿐이다. 옳고 그름을 논한다는 것은 하나의 형식에 얽혀 있음을 뜻하는 것일테다. 자신이 '한국적 상황'에서 새롭게 창조해낸 것은 바로 '성문학'에 대한 이론과 창작을 처음으로 시작했다는 것이라 말하는 마광수, 그의 사상과 작품세계가 궁금하다면 이 책을 읽어 보면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지 않을까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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