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왼손은 왕, 오른손은 왕의 필경사
한유주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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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다시 그녀의 책을 읽다가 악몽을 꾼다.

그녀의 문장은 나의 뇌를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는다. 동일한 단어는 반복되고, 그것이 동사든, 명사든 할 것 없이 내 눈을, 뇌세포를 속박한다. 그녀의 소설은 때로 자폐증 혹은 난독증, 그 자체 같기도 하다.

잠시라도 다른 생각을 했다가는 문장을 놓치고 만다. 나는 페이지를 다시 앞으로 넘겼다가 문장을 몇 번 반복해서 읽는다. 여전히 그녀의 소설은, 아니 문장들은 수수께끼 같고 암호 같지만 읽을수록 친숙해진다. 그래서 이제는 무엇을 보여줄 것인가. 라는 기대를 갖게 한다.

 

현실에서 모든 사건들은 우연적으로 일어난다. 허구에서 모든 사건들은 필연적으로 일어난다. 그러나 우연이든 필연이든 모든 사건들은 돌이킬 수 없다는 속성을 공통으로 나누어 갖는다.

단편소설집이지만 읽으면 하나의 큰 이야기가 된다. 서문 같은 첫 짧은 단편은 이 책의 제목처럼 자신이 해야 할 일과 처한 상황들을 알려준다. 글을 쓴다는 작가 자신의 속내는 마지막 단편인 ‘불가능한 동화’와 연결된다. 이 소설집은 그러므로 작가가 만들어낸 완벽한 구(球)이다. 그녀의 소설에 나왔던 노랫말처럼 앞으로, 앞으로, 자꾸 걸어 나가면... 자신의 소설 속에서 답을 찾게 된다.

이번 소설집에서는 뚜렷한 사건과 스토리를 가진 소설들이 등장한다. 특히 마지막 두 편의 연작 단편은 앞의 소설들을 읽음으로 해서 더욱 흥미롭게 읽을 수 있다. 앞의 소설에서 말한 문장들과 세계들을 지나가고 나서야 비로소 맞닥뜨릴 수 있는 작가 한유주의 세계인 것이다.

그녀는 ‘토마스 베른하르트에게’라는 문장을 소설의 첫 장에 썼다. 그녀의 소설은 그 작가의 작품 베끼기에서 시작된다. 더 잘 베낄 수 있지 않았을까. 라고 작가의 말에서 말했듯, 그녀의 이번 소설을 탄생하게 한 것은 그 작가의 공이 크다. 그녀는 철저하게 단편소설 여기저기에서 ‘희극입니까? 비극입니까?’를 언급한다. 그녀는 실제 소설 속에서 그 단편을 모티브로 베껴서 이야기를 써나가는 과정을 만들기도 한다. 그 과정은 그리고 이 소설집 전체를 아우르고 있다. 연작 단편 ‘인력입니까, 천력입니까’ 라는 제목에서도 분명히 나타나있다.

대재난이 일어난 후의 지구에서 살아남은 문영과 하령의 이야기는 그녀가 써낸 한 편의 동화 같다. 절반이 물에 잠긴 지구에서 살아가지만 역시 뚜렷한 사건은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소설을 쓰려는 하령은 주변의 인물들을 바라보고 바뀐 환경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러나 그 속에 작가의 고민들이 고스란히 들어 있다. 앞의 단편들을 디딤으로서 만들어낼 수 있는 세계, 그래서 이 ‘인력입니까 천력입니까’라는 단편과 ‘인력이거나 천력이거나’라는 단편은 어떤 단편보다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문득 생각한다. 나와 문영의 이야기를 소설로 쓸 수는 없을까. 그리고 문영의 아버지, 그리고 죽은 사람들이 등장하는 이야기를 쓸 수는 없을까. 모든 사람들은 이미 죽었거나 곧 죽게 될 것이므로, 누군가는 이르게 죽고 누군가는 느리게 죽듯이, 우연이 희극을 만들고 필연이 비극을 만드는 것이라면, 그 자체로, 희극이거나 비극이거나, 한 편 정도의 드라마는 쓸 수 있지 않을까, 문득, 생각했다.

기묘하지만 이 두 단편을 읽으며 나는 생생하게 그들의 모습을 그려낼 수 있었다. 그녀의 소설을 읽으면서는 드문 일이다. 커다란 달을 보며 배영하는 하령, 물갈퀴가 자라는 손, 매일매일이 일요일인 그 세계, 마치 영화 한 장면처럼 나는 그 모습에 매료되었다.

 

 

소설집 초반에 등장하는 ‘머리에 총을’ 이라는 단편은 단지 길을 걷고 있는 인물을 묘사했을 뿐인데 기억에 오래 남는다. 제목 그대로 머리에 총을 맞은 사내의 걸음이 눈앞에 어른거리게 된다. 이렇듯 이번 소설집에서는 그녀의 문장들은 나름 선명하게 장면들을 만들어 낸다. 문장에 대한 고민들이 흘러 넘쳐서 만들어낸 형상들이다. 그래서 그녀의 소설들은 사건들을 표현하기 위해 문장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문장을 쓰기 위해 사건들이 존재한다는 느낌이 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는 어구를 좋아하는데, 그 까닭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분에게 밝힐 수는 없다. 어쩌면 이유라고 할 만한 것이 없기 때문이기도 하고, 어쩌면 나를 드러내는 것이 부끄러워서, 어쩌면 드러낼 만한 나라는 실체가 없다는 사실이 부끄러워서, 그래, 그것이 부끄러워서인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말을 시작해야지. 그래,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담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어구를 좋아한다고 말한 사람을 일주일 안에 세 번째 만났다. 이건 우연인걸까.

읽기 위한 소설이 아닌 쓰기 위한 소설인 그녀의 소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계속 지켜보며 읽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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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는 동안
윤성희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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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들이 도처에 널려있지만 그건 결코 우울하지도 슬프지도 않다. 삶이란 원래 다 그런 것이 아닌가.

첫 단편부터 죽은 여고생들이 등장한다. 압정과 라디오 그리고 거울 등이 그들의 이름이다. 작가는 등장인물들에게 별명 붙여주는 걸 좋아한다. 별명이 아니라면 대부분 그녀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은 K. L. 김. 박. 등 이니셜들 뿐이다. 그건 네 번째 단편집과 한 편의 장편소설을 낸 작가가 가지는 고집 같다.

열 개의 단편들이 담겨있지만 읽다보면 한 편의 소설 같다. 여기도 저기도 죽음들과 우연들이 가득하고 실제 소설 속에서 각각의 등장인물들은 스치기도 한다. 다른 단편의 주인공들이 다른 단편에서는 한 장의 문장으로 등장하기도 한다.

수학여행을 가다가 사고로 죽은 여고생들, 자신의 집 지하실에서 죽은 노인, 자신의 장례식을 치른 친구들을 지켜보고 있는 삼촌 등 이번 소설에서 그녀의 주인공들은 대부분 이미 죽은 사람들이다. 그러나 그들이 슬퍼하냐고? 결코 아니다 그들은 영혼으로 떠돌다가 날아가는 법이나 물건을 움직일 수 있게 하는 방법을 알려고 고군분투한다. 다른 집의 소음들을 들으며 세상 돌아가는 것을 혼자 상상하며, 친구들의 어깨에 앉아 그들을 지켜보기도 한다. 작가 윤성희가 만들어 내는 인물들은, 그들이 사는 세상은, 늘 가볍다.

상처나 불행이나 슬픔들은 누구나 가지고 있다. 그녀 소설 속의 인물들은 아주 자잘한 슬픔들에서부터 감당할 수 없는 불행까지 고루고루 가지고 있다. 그러나 결코 좌절하거나 막장으로 치닫는 사람들은 없다. 모두들 그러려니 하고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세상은 늘 그런 거니까.

소매치기나 도둑질 등의 범죄도 저지른다. 가출하고 가족을 버리고, 버림받고, 그녀의 소설에도 그러한 사건들이 일어나지만 작가는 작가만의 방식으로 풀어간다. 유령이 된 여고생들이 고생을 하며 공중부양하는 법을 깨우치듯 그녀의 주인공들은 조금씩은 중력을 거부할 수 있는 능력을 배운 듯 가볍다.

‘우연’은 그녀의 소설을 이야기할 때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요소이다. 실제보다 더 치밀하게 짜여진 이야기가 소설이라고 하지만 그녀는 그것을 비웃듯 모든 것을 우연으로 만들어 버린다. 길에서 처음만난 사람들이지만 친절하게 캠코더를 보며 ‘할머니 안녕하세요,’를 말하게 만들고, 고속도로에서 우연히 만난 사람과 결혼하게 하고 남대문시장에서 25년 만에 가출한 언니를 만나게 된다. 그리고 모든 등장인물들은 해피엔딩이다. 해피엔딩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그녀의 소설을 읽으면 늘 간지럽게 따뜻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녀가 고집하는 ‘우연’과 많은 한 배를 탄 무리들의 이니셜들 - 그녀의 소설에는 대부분 무리진 인물들이 등장한다. 압정과 라디오와 거울과 같이, - 지금까지는 그런 것들이 그녀의 소설의 특색이었지만 이번에는 거기에 ‘죽음’이라는 단어를 덧붙여야겠다.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에 덧붙임. 그리고 간지럽게, 시크한 듯, 따뜻하게 위로하기.

하지만 언제까지 이러한 위로가 유효할지는 확신할 수 없다. 지겨워지지 않도록 조심해야할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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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계자들
김언수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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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절 연휴에 집에서 잠이 오지 않을 때 친구를 만나러 지하철을 타고 갈 때, 일찍 퇴근하고 집에 돌아와 침대에 누워서, 이 책을 읽었다. 처음으로 읽은 전자책이라 책의 내용만큼이나 느낌도 색달랐다.

소설은 주인공 래생이 애써 아무렇지 않게 살려는 것과 같이 무심하게 시작되고 무심하게도 슬픈 결말을 가지고 있다.

소설 속의 이름에 의미를 부여하지 않으려는 작가도 있지만 이 작가는 ‘이름’ 곧 호명된다는 것에 큰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 ‘來生’이라는 주인공의 이름이 책장을 다 덮고 나면 이 소설의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 같다.

작가가 이름들에 얼마나 신경 썼는지는 등장인물들의 이름 혹은 불리는 방식을 보면 알 수 있다. 주인공 이름만큼 이 소설에는 등장인물들의 이름이 모두 독특하다. 도서관 관장인 너구리 영감, 미토, 미사, 미나리 박, 추, 한자, 이발사, 독서대와 스탠드 등등 주변에서 늘 보는 단어지만 그것이 낯선 방법으로 불리고 있다. 이 소설도 마찬가지다. 한 줄로 요약해서 줄거리를 말한다면 살인 청부업자의 어둡고 슬픔 삶. 이 전부다. 호들갑스럴정도로 새로운 스토리는 아니다. 그러나 작가만의 방식대로 설계된 이 소설은 낯설게 읽힌다.

설계자라는 인물이 살인을 설계한다. 누굴 죽이고 어떤 식으로 죽일지 알려준다. 래생과 같은 킬러들은 그저 지시가 내려지는대로 사람을 죽인다. 이유는 없다. 돈을 받는다. 묻지 않는다. 궁금증조차 갖지 않는다. 사람들과 관계를 맺지 않는다. 가끔은 새로운 사람이 되어 잠적하며 잠시 가공의 인물로 살아간다. 가끔 소식이 없는 동료는 죽임을 당했다고 당연하게 믿는다. 불안한 생각이 들면 밤을 새어 온 집안에 있는 것들을 자르고 분해해서 무언가 없는지 찾아낸다. 결국, 화장실 변기에서 조그마한 폭탄을 발견한다.

가끔 재치있는 문장에 혼자 책을 읽다가 큰 소리로 웃는다. 동물에게 독서대라는 이름을 붙여 줄만큼 센스가 있는 작가 혹은 주인공은 슬프고 잔인한 어둠의 세계를 도서관에서 책을 분류하여 끊임없이 정리해나가듯이 차분하게 설계한다. 이 작가의 세계가 너무 어둡지도 슬프지도 신나지도 않아서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등장인물들의 이름이 독특하듯이 캐릭터 또한 분명해서 눈앞에서 그들이 살아 움직이는 듯하다. 그런 만큼 오래 기억할만하다.

작가의 말에서 작가는 소설을 쓸 동안 숲에 있었다고 했다. 그래서인지 소설의 시작은 숲.이다. 숲에서 혼자서 노트북을 켜 놓고 긴긴 밤을 혼자와의 싸움을 할 작가를 생각하니 주인공 래생의 첫 등장하는 장면이 어떻게 나왔는지 알 것 같다. 고독한 숲 속에서 작가도 누군가와 술을 마시고 감자를 먹는 상상을 오래오래 했을 것이다.

너무 순식간에 읽혀서 아쉽지만 잔잔하게 여운이 남는 소설.

독서대와 스탠드, 어쩌면 그것은 작가의 진짜 친구들이었을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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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설공주에게 죽음을 스토리콜렉터 2
넬레 노이하우스 지음, 김진아 옮김 / 북로드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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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죄소설의 시작은 대부분 인간의 욕망이다. 아니 소설이나 영화에서 주로 다루는 것이 그것이다. 인간의 욕망과 질투, 잃는 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나약함. 모든 소설에서 이러한 것을 다루겠지만 이 모든 요소들이 소용돌이치다가 곪아 터지게 되고, 때론 연쇄적으로 반응하여 걷잡을 수 없게 되는 것이 바로 범죄 소설이다.

시골의 작은 마을은 또한 얼마나 많이 미스터리한 공간으로 자주 등장하는지, 옆집에 누가 사는지조차 모르는 삭막한 도시보다 아버지의 아버지까지 모두 알고 있는 시골의 커뮤니티는 비밀이 더 많고 오랜 세월 동안 비밀을 공유했던 만큼 그것을 지키려는 데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이 책은 이미 너무 많이 읽혀서 내용을 말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2011년 내내 거의 베스트셀러를 차지했고 그것의 인기는 여전히 진행 중이다. ‘피아’라는 형사와 ‘보덴슈타인’이 등장하는 시리즈물 중에 하나인 이 책은 영화 시리즈나 드라마로도 충분히 제작될 만하다. 이미 그러한 작업들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 소설 속에는 많이 이야기들이 담겨져 있다. 십대들의 철없는 행동들과 그들만이 가지는 너무 순수해서 치명적인 시기와 질투, 돈과 권력, 명예, 사랑과 호기심, 외로움과 절망, 이 소설을 이끄는 단어들은 삶에 대한 총집합과 같다. 그래서 소설을 다 읽고 나면 거대한 소용돌이 속에 한참을 걷다가 나온 듯하다. 그리고 씁쓸해진다. 그러한 단어들이 이끄는대로 많은 캐릭터들이 치밀하게 움직이고 그것을 쫓는 재미는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씁쓸하거나 허무한 것은 이러한 소설들이 인간의 어두운 면들을 상기시켜주지만 그 이상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 소설 후에 번역된 다른 작가의 비슷한 분위기의 소설 ‘사라진 소녀들’을 읽었을 때(실제 이 책의 마케팅에서도 ‘백설공주에게 죽음을’의 책을 언급했다) 나는 미드 한 편을 본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사이코패스와 그러한 사건을 해결해가는 두 명의 형사. 그 책을 먼저 읽은 나는 ‘백설공주에게 죽음을’ 이 책을 읽으며 같은 작가 인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형사들의 캐릭터가 비슷했다. 아니면 이제 범죄소설과 형사들의 캐릭터들이 모두 비슷비슷해진 건지도 모르겠다. 범죄를 다루는 수많은 미드들은 크게 두 가지 차이만이 가지고 있다. 범죄를 해결하는 주인공 수사팀들의 독특한 캐릭터들과 범죄에 대한 접근 방법이 그것이다. 그 두 가지가 얼마나 재미있고 탄탄하냐에 따라 드라마의 성패가 갈린다고 할 수 있다. 개인적으로 그런 관점에서 봤을 때 이 소설에서 캐릭터들의 개성은 없다는 게 나의 판단이다. 범죄의 접근 방법 또한 새롭지 않다. 직감에 의존하는 ‘피아’와 그의 곁에서 항상 이성적으로 지원해주는 ‘보덴슈타인’ 이라는 캐릭터는 앞에서도 말했듯 다른 소설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캐릭터이다.

요즘에는 점점 스토리가 강한 소설들이 인기다. 그런 면에서 이 소설의 성공은 당연하다. 대부분은 손에서 이 책을 다 읽을 때까지 놓지 못할 것이다. 이렇게 탄탄한 스토리 전개는 바로 영화로 만들어져도 이상하지 않다. 구성이 잘 되어 있고 이야기가 재미있게 짜여 있다. 스토리는 중요하다. 그러나 나는 가끔 스토리의 재미만 쫓으면 뭔가 허무하다는 생각이 든다. 구성은 잘 되어 있지만 새로운 것이 없을 때가 많이 때문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범죄소설에서는 인간의 어두운 면을 끈질기게 관찰하여 끄집어내는 것과 치밀하게 짜여진 플롯만이 가장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니, 이 책은 쉽게 몰입해서 읽기에 아주 좋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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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낮은 언덕들
배수아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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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이 되면 하늘의 여신 ‘누트’는 태양을 삼킵니다. 삼킨다는 건 육신의 내부로 받아들인다는 거예요. 그러므로 태양은, 낮과 마찬가지로 밤에도 누트의 몸속을 관통하며 여행하는 셈이죠. …… 다음 날 아침이면, 자신이 밤새도록 휘저어 갔던 누트의 축축하고 따뜻한 아랫배를 떠나, 지상과 하늘의 틈바구니인 그녀의 음부에서 스윽 하고 빠져나오는 겁니다.

그녀의 소설들을 보면 시간의 연속성에 대한 언급이 많다. ‘나는 나의 문학이 분절된 목소리라는 전제에서 출발하였다’는 작가의 말을 본다. 그 수많은 분절된 목소리가 그녀의 소설 속에 담겨 있고 그 분절된 목소리들은 무한 반복되는 시간의 연속성 위에 기워진다.

낭송전문무대 배우인 경희는 이 소설의 중심에 서 있다. 그러나 소설을 읽다 보면 경희라는 인물에 점점 가까워지는 게 아니라 가까워졌다가 다시금 멀어지게 된다. 결국 너무 아련한 기억 속의 인물이 되어버린다. 도시를 여행 중인 경희와 그녀가 만나게 되는 여러 인물들은 의미심장하게 등장하기도 하고 그저 스쳐가기도 하고 엽서나 편지 속에서만 존재했다가 사라지기도 한다.

배수아의 소설을 읽는데 속도를 붙이려면 시간이 조금 필요하다. 작가의 독특한 문체는 독자가 책 속으로 빠져드는 데 시간을 필요로 하게 한다. 그러나 집중력을 발휘해서 천천히 꼭꼭 씹어서 문장을 읽다보면 어느 새 책장을 리드미컬하게 넘길 수 있게 된다. 그러나 한 순간도 집중력을 흩트리면 금방 문장을 놓치게 된다. 그녀의 세계에서 재미나게 노는 건 매번 쉽지는 않다. 그러나 쉽지 않기에, 그녀의 스타일을 알기에, 그것을 읽어 내는 게 재미있기에, 매번 그녀의 새 책이 나오면 꼭 읽어보게 된다.

그녀의 소설은 작가 자신과 긴밀하다. 어느 새부턴가 그녀의 소설을 읽다보면, 등장인물을 상상하다보면 그녀를 떠올리지 않고는 읽을 수가 없다. 독일을 드나들며 작업을 하는 자신이 늘 소설에 담겨 있다. 낭송전문무대 배우에 나는 자꾸만 작가의 모습을 투영시킨다.

그녀는 ‘올빼미의 없음’이라는 단편에서 어느 작가의 죽음을 슬퍼하며 ‘외르그 없음’ 이라는 문장을 쓴 적이 있다. 나는 그 표현이 인상적이어서 메모를 해놓았다. 그리고 이 책을 읽으며 다시 마주한다. ‘경희의 없음’을.

이야기의 시작부터 경희는 등장한다. 그리고 자세한 설명 없이 그녀의 행적대로 만나는 사람들이 등장하고 이야기하고 헤어지고 다시 움직이고 회고하고 낯선 이와 대화한다. 그녀는 앞으로 걸어가면서 자신의 과거 이야기를 모두 어딘가에 풀어놓고 그것을 번식시킨다. 그렇게 이야기를 증식시키는 존재인 경희가 결국에는 ‘없음’이란 단어와 나란히 있게 된다.

경희는 경희일까. 마리아는 누구일까.

‘어린 시절의 당신은 어쩌면, 매우 독특한 시간을 체험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생각입니다. 예를 들자면 자기 자신의 미래를 가까운, 그러나 낯선 타인처럼 느끼면서 함께 동거하는 거죠. 모든 부모는 미래의 옷을 입은 과거에 해당합니다.’

스타벅스에서 우연히 만난 사람과 대화하다 그에게 들은 말이다. 이곳에서, 낯선 도시에 가도 안정감을 느끼게 해 주는 이 스타벅스라는 간판 아래 서로 낯선 그들이 하는 말은 이 소설의 중심이다. 어쩌면 소설 속에서 가장 선명하게 스토리를 가지고 있는 부분이면서 동시에 경희라는 인물의 핵심에 다갈 수 있는, 그녀의 중요한 기억이기 때문이다.

경희는 경희가 아니고 누구나 마리아가 되고 그러나 동시에 경희는 길을 걷다가도 우연히 마주칠 수 있는 수많은 이름 중에 하나고 동시에 한국에 존재할 수 없는 개체 중 하나이며 마리아는 경희의 딸일 수도, 오래된 친구일 수도, 아니 경희 자신일 수도 있다.

간혹 번역된 문장처럼 어색한 문장들 혹은 낯선 단어들이 눈에 뜨이는 건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마저 배수아라는 작가의 문체처럼 되어버렸다. 그녀의 소설은 소설 한 권으로만 볼 수가 없다. 그녀의 작품은 하나로 떼어서 이야기 할 수가 없으며 결국엔 이 한 소설의 리뷰가 아니라 작가에 대한 리뷰가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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