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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낮은 언덕들
배수아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1년 12월
평점 :
저녁이 되면 하늘의 여신 ‘누트’는 태양을 삼킵니다. 삼킨다는 건 육신의 내부로 받아들인다는 거예요. 그러므로 태양은, 낮과 마찬가지로 밤에도 누트의 몸속을 관통하며 여행하는 셈이죠. …… 다음 날 아침이면, 자신이 밤새도록 휘저어 갔던 누트의 축축하고 따뜻한 아랫배를 떠나, 지상과 하늘의 틈바구니인 그녀의 음부에서 스윽 하고 빠져나오는 겁니다.
그녀의 소설들을 보면 시간의 연속성에 대한 언급이 많다. ‘나는 나의 문학이 분절된 목소리라는 전제에서 출발하였다’는 작가의 말을 본다. 그 수많은 분절된 목소리가 그녀의 소설 속에 담겨 있고 그 분절된 목소리들은 무한 반복되는 시간의 연속성 위에 기워진다.
낭송전문무대 배우인 경희는 이 소설의 중심에 서 있다. 그러나 소설을 읽다 보면 경희라는 인물에 점점 가까워지는 게 아니라 가까워졌다가 다시금 멀어지게 된다. 결국 너무 아련한 기억 속의 인물이 되어버린다. 도시를 여행 중인 경희와 그녀가 만나게 되는 여러 인물들은 의미심장하게 등장하기도 하고 그저 스쳐가기도 하고 엽서나 편지 속에서만 존재했다가 사라지기도 한다.
배수아의 소설을 읽는데 속도를 붙이려면 시간이 조금 필요하다. 작가의 독특한 문체는 독자가 책 속으로 빠져드는 데 시간을 필요로 하게 한다. 그러나 집중력을 발휘해서 천천히 꼭꼭 씹어서 문장을 읽다보면 어느 새 책장을 리드미컬하게 넘길 수 있게 된다. 그러나 한 순간도 집중력을 흩트리면 금방 문장을 놓치게 된다. 그녀의 세계에서 재미나게 노는 건 매번 쉽지는 않다. 그러나 쉽지 않기에, 그녀의 스타일을 알기에, 그것을 읽어 내는 게 재미있기에, 매번 그녀의 새 책이 나오면 꼭 읽어보게 된다.
그녀의 소설은 작가 자신과 긴밀하다. 어느 새부턴가 그녀의 소설을 읽다보면, 등장인물을 상상하다보면 그녀를 떠올리지 않고는 읽을 수가 없다. 독일을 드나들며 작업을 하는 자신이 늘 소설에 담겨 있다. 낭송전문무대 배우에 나는 자꾸만 작가의 모습을 투영시킨다.
그녀는 ‘올빼미의 없음’이라는 단편에서 어느 작가의 죽음을 슬퍼하며 ‘외르그 없음’ 이라는 문장을 쓴 적이 있다. 나는 그 표현이 인상적이어서 메모를 해놓았다. 그리고 이 책을 읽으며 다시 마주한다. ‘경희의 없음’을.
이야기의 시작부터 경희는 등장한다. 그리고 자세한 설명 없이 그녀의 행적대로 만나는 사람들이 등장하고 이야기하고 헤어지고 다시 움직이고 회고하고 낯선 이와 대화한다. 그녀는 앞으로 걸어가면서 자신의 과거 이야기를 모두 어딘가에 풀어놓고 그것을 번식시킨다. 그렇게 이야기를 증식시키는 존재인 경희가 결국에는 ‘없음’이란 단어와 나란히 있게 된다.
경희는 경희일까. 마리아는 누구일까.
‘어린 시절의 당신은 어쩌면, 매우 독특한 시간을 체험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생각입니다. 예를 들자면 자기 자신의 미래를 가까운, 그러나 낯선 타인처럼 느끼면서 함께 동거하는 거죠. 모든 부모는 미래의 옷을 입은 과거에 해당합니다.’
스타벅스에서 우연히 만난 사람과 대화하다 그에게 들은 말이다. 이곳에서, 낯선 도시에 가도 안정감을 느끼게 해 주는 이 스타벅스라는 간판 아래 서로 낯선 그들이 하는 말은 이 소설의 중심이다. 어쩌면 소설 속에서 가장 선명하게 스토리를 가지고 있는 부분이면서 동시에 경희라는 인물의 핵심에 다갈 수 있는, 그녀의 중요한 기억이기 때문이다.
경희는 경희가 아니고 누구나 마리아가 되고 그러나 동시에 경희는 길을 걷다가도 우연히 마주칠 수 있는 수많은 이름 중에 하나고 동시에 한국에 존재할 수 없는 개체 중 하나이며 마리아는 경희의 딸일 수도, 오래된 친구일 수도, 아니 경희 자신일 수도 있다.
간혹 번역된 문장처럼 어색한 문장들 혹은 낯선 단어들이 눈에 뜨이는 건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마저 배수아라는 작가의 문체처럼 되어버렸다. 그녀의 소설은 소설 한 권으로만 볼 수가 없다. 그녀의 작품은 하나로 떼어서 이야기 할 수가 없으며 결국엔 이 한 소설의 리뷰가 아니라 작가에 대한 리뷰가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